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17화 (117/224)

#117

빌런을 만나도 주사위만 잘 던지면

최도훈 쪽 촬영 팀.

- 도계진 형제, 앞으로 10분쯤 후에 최도훈과 합류합니다.

“라져, 각오하고 오라고 하세요.”

배형욱 피디가 들려온 무전에 답하며 최도훈 역할의 정민길을 바라보았다. 프로그램 내 최도훈의 포지션은, 말하자면 …그래, 빌런에 가까웠다.

[눈 떠 보니 무인도]는 제작진이 제시한 세계관 속에서 자신이 맡은 캐릭터가 되어 상황을 자율적으로 이끌어 가는 컨셉 예능. 말하자면 실사판 RPG 게임에 가까운 형식이었다.

세계관과 캐릭터의 개연성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의 진행은 출연자의 자율이 최대한 보장되었다. 배 피디와 작가들을 비롯한 제작진들은 최대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게임을 기록하고 있었다.

사이좋은 형제로서 파트너의 관계를 선택한 쌍둥이들과 달리 최도훈과 조영주는 경쟁자로서의 포지션을 선택했다.

혹시 모를 사고와 부상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출연진들의 이해가 상충하는 장면에서는 주사위를 굴려 승패를 미리 정한 다음 필요하다면 리허설을 거쳐 본 촬영을 진행하도록 사전에 이미 협의가 되어 있었다.

첫 주사위 던지기의 승자는 최도훈 역의 정민길이었다. 그리고 그가 낸 아이디어는 조영주 역할의 금정애가 분통을 터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

.

.

최도훈과 조영주. 두 사람의 출발 지점인 숲의 한복판에 쓰러져 있던 조영주보다 먼저 눈을 뜬 최도훈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재빨리 조영주를 결박하고 그녀 몫의 비상식량을 강탈했다.

욕심 같아서는 스타터 팩을 통째로 다 가져가고 싶었지만, 비상식량 외에도 백패킹 텐트, 침낭, 구급함 등 생존에 필요한 물품이 제법 알뜰하게 들어차 있는 배낭은 혼자서 두 개를 동시에 짊어지고 다니기엔 너무 무거웠다.

- 착한 일을 했으니 복도 받아야지. 30만 달러 정도면 딱 좋겠는데?

최도훈은 식량을 뺀 나머지를 조영주의 손이 아슬아슬 닿을 만한 곳에 던져 두며 그렇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조영주의 악에 받친 저주가 쏟아져 나왔지만 언제 다시 볼지, 아니 다시 볼 수는 있을지 모르는 인간의 저주 따위, 무섭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

.

.

조영주 역할의 금정애가 나무에 묶인 한쪽 손목을 풀기 위해 끙차끙차 애쓰던 모습을 떠올리며 배 피디는 과연 이 이미 완성된 빌런 최도훈을 상대로 도진, 계진 형제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더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이쪽으로 오는 게 그 쌍둥이 녀석들이라는 거죠?”

더운 날씨에 땀에 젖은 이마를 훔치며 묻는 최도훈, 아니 정민길의 말에 배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길과 배 피디를 포함한 제작진은 쌍둥이들이 이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소식에 최도훈이 그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산 너머에 있는 호수에 가기 위한 최단 루트는 이 오르막길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상 최도훈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도진과 계진 형제가 이쪽으로 향하는 것을 이미 파악한 반면,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두 형제는 이곳에 최도훈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터. 생각을 정리한 정민길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작과 동시에 우리 프로그램 얼굴마담 녀석들을 광탈시켜 버리면 안 되겠죠? 그러니 첫 만남은 아까 우리 조 의원님하고 했던 것처럼 가볍게 몸 풀고 지나가는 정도로 잡으면 어떨까 싶은데.”

정민길이 그 말과 함께 장난스럽게 고개를 좌우로 뚜둑 꺾어 보이는 것을 보며 배 피디가 물었다.

“저쪽은 둘이고 최도훈은 혼자인데 최도훈이 거꾸로 당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나요?”

“최도훈이 인생 좀 망가지긴 했어도 왕년에 리그 최강자 소리 듣던 몸인데요. 게다가 저도 최도훈이 캐릭터 만든다고 따로 격투기 개인 레슨도 받았단 말이죠. 고딩 두 명을 상대로 기도 못 펴서야 설정 구멍이라는 소리 듣지 않겠어요? 이래 봬도 나름 우승 후보인데.”

정민길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최도훈은 어쩔 생각인데요?”

“이 오르막길, 외길이니까 옆쪽에 매복해 있다가 덮쳐서 스타터 팩에 든 비상식량 좀 빼앗고 넘어갈까 싶은데. 아, 사이즈 맞으면 신발도 좀 기부받고 말이죠.”

‘실패한’이라는 수식어가 붙긴 해도 일단 사업가 설정인 최도훈은 지금 양복 차림이었다. 겉옷과 넥타이는 이미 벗어 던지고 와이셔츠는 팔뚝까지 소매를 걷어 올렸다지만 문제는 신발이었다. 불편한 정장 구두 차림으로 무인도의 거친 야산을 오르려니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정민길은 두 쌍둥이 중 한쪽이라도 자신과 비슷한 사이즈의 신발을 신고 있기를 기대하며 웃었다.

대략적인 그림을 떠올려 본 배 피디가 작가들을 돌아보았다. 전체적인 스토리의 흐름과 각 팀의 진행 상황을 확인한 작가들이 오케이 사인을 내는 것을 확인한 배 피디가 정민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리그 최강자 타이틀에 빛나는 최도훈이 꼬맹이들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 한번 볼까요.”

* * *

촬영 중을 의미하는 빨간 불이 점멸하는 메인 카메라가 고집스럽고 오만해 보이는 최도훈의 얼굴을 클로즈업 했다.

화면 속 최도훈이 중얼거렸다.

“…왜 안 와?”

오르막길의 중턱, 아래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서 수풀에 몸을 가린 채 도진이와 계진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최도훈은 눈썹을 팍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석양을 그대로 받으며 한동안 같은 자세로 쭈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분명 두 놈이 이쪽으로 올라오는 걸 봤는데. 그새 낌새를 눈치채기라도 한 건가, 혹시?”

그렇다면 이거 꽤 강적이잖아.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최도훈이 키득거렸다. 탐욕스럽게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인적없는 오르막길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안 오겠다면 하는 수 없지. 이 몸이 직접 찾아가 보는 수밖에.”

최도훈이 혼잣말과 함께 옆에 내려놓았던 스타터 팩을 등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퇴 후에도 꾸준히 관리해 여전히 탄탄한 근육으로 꽉 짜인 몸매가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났다.

“발 크기가 맞는 녀석이 있어야 할 텐데.”

최도훈은 이미 흙투성이로 엉망이 된 자신의 명품 가죽구두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낯선 곳에서 눈 뜨기 전, 최도훈은 거래처와의 미팅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던 참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더 이상의 신용 거래는 불가하다며 곧 만기가 돌아오는 대금이나 제대로 갚아 달라고 요구하는 거래처 사장의 뻣뻣한 얼굴에 주먹을 휘두르고 뛰쳐나온 참이었다.

어디서 돈이나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

주머니 속에서 이미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린 로또 용지를 꾹 움켜쥔 것이 최도훈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30만 달러.”

사람 죽으라는 법은 없다더니.

최도훈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누가 무슨 의도로 이 일을 꾸몄건 5일 만에 30만 달러를 손에 쥘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 돈만 있다면 일단 급한 곳부터 틀어막고 어떻게든 부도가 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아까 그 의원님한테 차용증이라도 받아 놓을 걸 그랬나.”

최도훈은 조금 전 헤어진, 아니 정확히는 나무에 손 한쪽을 묶어 두고 온 4선 의원 조영주의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다 빼앗지 않은 것만도 어디야. 이 정도면 내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지. 그럼.”

최도훈은 자화자찬의 말을 중얼거리며 조 의원 몫의 비상식량까지 들어 있어 무거운 배낭을 고쳐 맸다. 그렇다고 어디서 누구와 맞닥뜨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따로 두고 움직일 수도 없는 일.

설상가상으로 얇고 딱딱한 가죽 구두로 산길을 오가느라 시달린 발이 시큰거렸다. 최도훈은 지금 자신이 쫓아가는 두 사람을 붙잡게 되면 우선 신발부터 빼앗아 주겠다고 중얼거리며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한편, 도진과 계진은 오르막을 올라 산 너머 호숫가로 향하려던 것에서 산을 끼고 우회해 계곡으로 빠지는 쪽으로 경로를 바꾼 참이었다.

“헉, 헉. 야,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

“조금만 더 가자. 이 지도가 맞는다면 곧 계곡이 나올 거야. 거기라면 오늘 하루 야영하기는 나쁘지 않을 거고.”

자신의 뒤에서 제 몫의 묵직한 스타터 팩을 짊어진 채 걷고 있던 계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묻는 말에 도진이 타이르듯 대답했다. 그 말에 계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아, 언제는 산 너머 호숫가까지 가는 게 물 구하는 최단 루트라면서.”

“거긴 왠지 느낌이 좋질 않아서.”

도진의 대답에 계진이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느낌이 어떻게 좋질 않은데?”

“내 인간 레이더 알지?. 거기 분명 사람 있다.”

그 말을 들은 계진이 썩은 눈으로 도진을 흘겨보고는 말했다.

“대체 인간 혐오가 얼마나 심하면 여기서 그게 가능하냐.”

“어쨌거나 이쪽이 오히려 좋을 수도 있어. 호숫가라면 우리 말고도 베이스캠프로 노리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거 말인데, 사람들을 굳이 피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잖아. 다 같이 잘 있다가 다 같이 탈출해도 되는 거 아님?”

계진의 순진한 말에 도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서계진 진짜 순진하네. 꽁으로 30만 달러가 손에 들어오게 생겼는데, 너 같으면 남하고 나눠 먹고 싶겠냐?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 제치고 혼자 탈출할 궁리에 머리 빠개지고 있을걸, 다들.”

그게 인간의 본성이야.

도진이 중얼거리는 말에 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하여간에 이 비관론자. 어째서 꼭 그렇게 다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냐고. 어차피 다들 여기서 나가야 할 텐데, 힘을 모으는 편이 더 편하고 쉽게 있다가 갈 수 있잖아.”

“사실, 그 모든 게 뻥이고 5일이 지나도 표시 지점에 배가 안 나타날 가능성도 생각해 둬야 한다고 봐, 나는.”

도진이 내뱉은 말에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계진이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 지금 소름 돋았는데. 그런 거야?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그럼 우리는 평생 여기 갇혀 살아야 하는 거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응? 나 집에 가고 싶어 도진아. 네 방 침대에서 에어컨 틀고 뒹굴뒹굴하고 싶다고.”

계진이 울상이 되어 중얼거리는 말에 도진이 어이없다는 듯 내뱉었다.

“어째서 네 방 놔두고 내 방이냐고.”

“네 방까지는 엄마가 안 들어오잖아.”

안 들어오시는 게 아니라 항상 잠가 두니 못 들어오시는 거겠지.

도진은 제멋대로인 계진을 한 번 노려보고는 말했다.

“아무튼,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단 말이지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일단 이 5일 동안은 남들 눈에 안 띄도록 잘 숨어 다니다가 탈출 지점으로 가는 것만 생각하자고.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도진의 말에 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이거.”

계진이 도진에게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살짝 녹기 시작해 끈적한 사탕이었다.

“이런 거 가방에 안 들어 있었는데?”

“내 주머니 속에 있던 거지롱. 핸드폰이고 지갑이고 다 털어 간 주제에 이건 남겨 두고. 메시지인지 뭔지 알 수 없지 않냐, 진짜.”

제 몫의 사탕을 까먹으며 계진이 말했다.

“너도 먹어. 이럴 때일수록 당 충전이 중요하다고 하더라.”

“근데 이거 왜 이렇게 끈적한 거야.”

“아까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주머니 속에 있었으니까? 아 별걸 다 따지네. 먹어 그냥, 단짠은 그냥 진리라고.”

자신의 대답에 도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계진이 버럭 소리쳤다. 그의 성화에 못 이겨 끈적거리는 사탕 껍질을 벗겨 입 안에 물고 다시 걷기 시작하던 중, 이번엔 도진이 우뚝 멈춰 섰다.

“야 대체 얼마나 더 가야……. 왜?”

“쉿.”

“왜, 뭐, 왜??”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

잠시 귀를 기울이던 도진이 나직이 내뱉은 말에 계진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

.

.

“으앗차, 아이고. 잠깐, 죄송. 다시 한번 갈게요. 도진아, 계진아 미안.”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선배님!”

정민길은 재빨리 사과하며 다시 한번 표시된 지점으로 돌아갔다. 배 피디의 큐사인과 함께 눈앞의 계진에게 다시 한번 달려들며 정민길은 생각했다.

‘이게 아닌데.’

도진, 계진 형제를 뒤에서 급습해 스타터 팩을 갈취하고 그걸 볼모로 신발도 뜯어낸다는 최도훈의 원대한 계획은 ‘싸움 전 주사위 던지기’ 규칙에서 정민길이 4, 재이가 6이 나오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승패의 결과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은 누군가가 자신들을 따라오고 있음을 눈치챈 도진이 갑자기 뛰어들어 자신들의 스타터 팩을 낚아채려고 한 최도훈을 밀어내고 그가 나뒹구는 틈에 계진과 함께 줄행랑을 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최도훈은 개울 쪽으로 넘어지면서 그나마 입고 있던 양복과 신발이 모두 물에 젖을 예정이었다. 아무리 땀을 많이 흘린 상태라고는 해도 차가운 개울물에 입수해야 하는 상황이 달가운 것은 아닌지라 자꾸 몸이 움츠러드는 탓에 정민길은 아까부터 계속 NG를 내고 있었다.

젠장 빌어먹을 주사위!

허구라고는 해도 상금 30만 달러가 달린 서바이벌 게임을 진행하는데 그깟 육면체 하나에 의지해야 한다니. 어처구니없기는 해도 진짜 싸울 수도 없는 이상 규칙은 규칙이었다.

배 피디의 큐 사인과 함께 다시 한번 메인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최도훈이 눈앞의 계진을 향해 달려들며 소리를 질렀다.

“이야아아아-어, 어어어어?”

계진의 스타터 팩을 잡아채려는 순간, 갑자기 틈새로 파고든 도진이 최도훈의 힘을 자연스럽게 옆으로 흘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전 테이크와는 달리 지금은 아예 다리까지 걸어 버리는 바람에 최도훈이 무게 중심을 잃고 비틀대다 그대로 개울가로 넘어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첨벙-

“어흐으으-”

더운 날씨와는 달리 골이 울릴 정도로 차가운 개울물에 흠뻑 젖은 최도훈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도진과 계진은 그런 그를 흘끔 한 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컷”

배 피디의 사인과 함께 메인 카메라의 불이 꺼졌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여기 수건이요!”

최도훈의 시야 밖까지 한달음에 내달려 사라졌던 녀석들이 어느샌가 뛰어 돌아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정민길을 잡아 일으키며 스태프에게 건네받은 수건을 머리와 어깨에 걸쳐 주었다.

“병 주고 약 주고 아주 제대로구나, 너희들.”

정민길이 얄밉다는 듯 투덜거리며 내뱉은 말에 도진이와 계진이, 아니 재이와 엠케이가 차례차례 대꾸했다.

“어쩌겠어요. 원래 정의는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을요.”

“한재이 저게 절대 정의롭진 않지만, 저 녀석을 주사위로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게 맞아요.”

이건 거의 팩트라고요.

정민길로서는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엠케이가 손을 뻗어 그가 물가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것을 거들었다.

“그래도. 최도훈이 개울에 빠지는 장면은 저희가 아니라 배 피디님이 넣자고 하신 거 기억하시죠, 선배님?”

재이가 덧붙인 말에 정민길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금 전 촬영한 씬을 확인하는 데 여념이 없는 배 피디를 흘겨보고는 말했다.

“그러게. 근데 애초에 너희들이 예정대로 오르막길로 올라왔더라면 내가 이 꼴이 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대체 마지막 순간에 방향 바꾼 건 누구 생각이었던 거야?”

정민길의 물음에 엠케이가 재이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한재이요. 서도진이 인간 혐오 레이더가 있다면 쟤는 그냥 온몸이 레이더거든요.”

“대체 내가 거기 숨어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아, 장 피디님이 알려 주셨나?”

정민길이 쌍둥이 형제와 함께 움직인 신입 피디를 떠올리며 묻는 말에 재이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라서요. 허구한 날 형들하고 뒷산에서 전쟁놀이했는데, 대부분 거기들 숨어 있다가 덮치더라고요.”

재이의 말에 엠케이가 ‘또, 또, 저거 약 파는 것 좀 보게, 저거.’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것이 보였다. 정민길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내 계획이 겨우 코흘리개 꼬맹이들 전쟁놀이에서나 나올 법한 수준이었다는 소리네?”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요.”

재이가 난처하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리는 것을 본 정민길이 표정을 풀고 웃어 보이며 이어 말했다.

“뭐 덕분에 장면이 더 잘 살았을 것 같은 확신은 든다만.”

“아, 그리고 아까 촬영할 때 사전 상의 없이 갑자기 발을 걸어서 죄송했습니다.”

“발을 걸어? 아아… 아까, 개울 쪽으로 넘어질 때?”

이미 까먹고 있던 일을 되짚으며 깍듯하게 먼저 사과해 오는 재이의 태도에 완전히 마음이 풀어진 정민길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니, 뭘. 덕분에 NG 더 안 내고 넘어갔으니 됐지. 갑자기 입수 씬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몸이 따라 주질 않아서.”

나이가 들었나. 영 예전같지가 않다니까.

정민길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하자 재이가 한시름 놓았다는 듯 표정을 풀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최도훈과는 다른 인물이 맞네요.”

“내가 최도훈이었으면 도찐개찐 너희 둘 다 지금쯤 가만 안 뒀지.”

“괜찮아요, 저희 이미 저 멀리 도망갔으니까요.”

엠케이가 끼어들며 말했다.

“최도훈은 아마 오늘은 더 못 쫓아갈 거다. 발도 아프고, 몸도 젖었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하루 묵어가려고.”

“와, 꿀 정보 감사합니다! 아, 근데 설마 이래 놓고 새벽쯤에 또 따라오셔서 저희 뒤통수치려고 하시는 건 아니죠?”

“설마. 난 이래 봬도 신의 있는 스포츠 선수 출신이라고.”

엠케이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정민길이 가슴을 탕탕 두드려 보이며 말했다. 그런 정민길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이가 중얼거렸다

“지금은 급전 필요한 부도 직전의 사업가라는 게 문제지만요.”

“하하, 그렇게 말하니 할 말 없네. 뭐, 아주 가능성 없는 얘긴 아니니, 그건 알아서들 판단하라고.”

세 사람이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있던 제작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라고요? 벌써 죽었다고?”

배 피디의 목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