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18화 (118/224)

#118

복마전의 냄새

“죽다니, 누가 벌써 죽었어?”

정민길이 얼굴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겨우 도입부 끝나 가는 마당에 벌써 탈락자가 나왔다고? 게다가 사망 루트라니.

“누구 얘기예요?”

제작진들에게 다가간 세 사람 중 재이가 물었다. 한 손에 무전기를 들고 앞에는 지도와 모니터를 펼쳐 놓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있던 배 피디가 출연진 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영주 의원이요.”

배 피디의 말에 재이와 엠케이의 시선이 동시에 정민길을 향했다.

“나 아니야, 최도훈은 분명히 조영주 의원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고. 그야 혹시 몰라서 한쪽 손목을 나무에 묶긴 했지만, 그 옆에 친절하게 스타터 팩도 놓고 왔으니 가방 뒤져서 맥가이버 나이프 찾았으면 혼자서도 충분히 빠져나오셨을 거라고.

아이고 그 양반 어찌나 찰지게 욕을 해 대시는지 뒤통수가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니까. 나중에 제작진들 저거 편집하려면 고생 꽤 하겠다 싶었을 정도였다고.”

정민길이 두 손을 휘저어 가며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에 재이와 엠케이가 그와 함께 움직였던 배 피디와 제작진들의 얼굴을 훑었다.

조영주 캐릭터의 사망 소식에 그들 또한 의외라는 얼굴들을 하는 것을 꼼꼼히 확인한 재이와 엠케이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엠케이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중얼거렸다.

“정 선배님 말씀이 사실이라면 조 의원은 충분히 자력으로 탈출 가능했다는 건데, 어째서 광탈 하신 거지?”

“피디님, 저희 빼고 나머지 사람들 현재 위치 알려 주실 수 있어요?”

재이가 배 피디에게 물었다.

캐릭터들의 동선 공개는 담당 피디의 재량이었다. 그러나 재이의 물음에 배 피디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재이와 엠케이, 그리고 정민길을 차례차례 돌아보며 대답했다.

“사실 이야기 전개상 쌍둥이들과 최도훈은 아직 조영주 의원이 죽었다는 소식을 모르고 있어야 맞죠. 그러니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여러분에게는 중요한 정보를 충분히 미리 알려 드린 셈입니다. 이따가 본 촬영 들어가서는 그 점 염두에 두시고 스토리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배 피디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이어 말했다.

“그래서 오인조 씨와 박송선 씨의 자세한 위치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들과는 도보 1시간 권역 바깥쪽에 있다는 정도만 알려 드릴게요.”

‘그렇게 따지면 조 의원이 죽었다는 건 스스로 정보 유출을 하셨다는 말이 되는데요, 피디님.’

선심 쓰듯 이야기하는 배 피디의 얼굴을 바라보며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오인조 짓일 가능성이 크겠네.”

배 피디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정민길이 중얼거렸다. 오인조의 직업은 군인이었다.

“시작하자마자 사람부터 죽이다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군인으로서의 직업적 사명감 어디로 간 거죠?”

“무인도에서 사람 하나 죽어 봤자 누구 짓인지 모를 가능성이 크다는 계산이었다거나.”

엠케이의 말에 정민길이 대꾸하자, 재이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다 죽이고 혼자 탈출해서 30만 달러를 독식하는 게 사실 제일 남는 장사긴 하죠.”

그 말에 정민길과 엠케이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재이를 쳐다보고는 한마디씩 했다.

“……피디님, 서도진 설정 중에 사이코패스도 있었어요?”

“그보다 이거 무인도에서 자연인 생활 찍는 힐링물인 줄 알았더니 생사 넘나드는 배틀로얄식 서바이벌이었냐고. 나 아무래도 계약 사기 당한 것 같은데.”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재이가 배 피디를 쳐다보며 물었다.

“박송선 누나는 그럼 오인조 형이랑 함께 있나요?”

오인조와 함께 게임을 시작했을 취업 준비생 박송선의 현재 위치를 묻는 재이에게 배 피디가 대답했다.

“아마도요.”

배 피디의 뉘앙스가 묘한 것을 감지한 재이가 말했다.

“어, 피디님 지금 말씀 뭔가 싸한데요.”

“그러게. 저건 뭐 숨기고 계신 표정이다. 저거 봐, 작가님들 다 시선 돌리고 계시잖아. 뭔가 있네.”

엠케이가 배 피디와 함께 있던 제작진들의 면면을 둘러보며 맞장구쳤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정민길이 배신이라고 중얼거리는 말에 배 피디가 미안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조영주 의원이 예상보다 일찍 탈락하는 바람에 전체적으로 난이도를 조정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극의 긴장감과 리얼리티를 고려하면 제공해 드릴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을 수 있으니 그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씀은 곧 알아서 걸러 듣고 눈치껏 행동해라 뭐 그런 말씀이시네요?”

배 피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엠케이가 말했다. 재이가 옆에서 거들었다.

“정보라고만 했지, 진실이냐, 거짓이냐, 그게 어느 시점에서 한 이야기냐 등등 중요한 부분은 다 빠져 있으니 자칫 잘못 판단하면 이거 그대로 골로 가겠는데요?”

엠케이와 재이의 말에 두 녀석의 얼굴을 번갈아 돌아보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민길이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거참. 어려서들 그런가, 머리가 팽팽 잘도 돌아가네.”

“이전투구가 습관이라.”

재이의 짧은 대답에 정민길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동맹이라도 맺을 걸 그랬나.”

“앗, 그러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

“안 돼.”

은근슬쩍 이쪽을 떠보는 정민길의 말에 홀랑 넘어간 엠케이가 입을 연 순간 재이가 그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아 왜.”

“와, 서도진이, 이거 경계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재이가 재빨리 제지했음에도 이미 정신적 동맹은 맺어진 듯 엠케이와 정민길이 동시에 반발했다.

“인간 불신이 서도진 코어 컨셉이라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뭐 그게 아니어도 누구보다 상금이 필요하실 것 같아 보이는 최도훈 사장님을 어떻게 믿고 같이 가겠느냐고요.”

저 멍청한 서계진이나 엠케이 빼고 말이죠.

재이가 중얼거린 말에 엠케이가 억울하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나도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다고. 이건 그거지. 비즈니스적 관계. 전략적 제휴!”

“틈만 나면 뼈까지 싹 다 먹어 치울 생각으로 다가오는 상대에게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다니. 손모가지째로 물어뜯길 일 있냐고.”

엠케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늘하게 치고 들어오는 재이의 타박에 정민길이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와 비유 살벌한 거 봐라. 시니컬한 건 서도진이 컨셉이야, 아니면 본인 성격이야?”

“둘 다예요. 묘하게 닮았다니까요. 서도진이랑 한재이.”

아닌가, 서도진의 캐릭터 해석을 한재이가 해서 그런 건가.

정민길에게 대답한 엠케이가 서도진과 한재이에 대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한 명제로 고민하는 사이, 재이는 이제 완전히 수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춘 태양의 잔재가 아른거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힐끔 제작진 쪽을 살피니 오인조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메인 작가 윤명주와 연락이 닿았는지 즉석에서 회의를 진행 중인 배 피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슬슬 이쯤에서 일단 다시 흩어질까요.”

“진짜 나랑 손잡을 생각 없는 거야?”

정민길이 묻는 말에 재이가 대답했다.

“오늘 밤 최도훈 사장님이 저희 캠프를 습격하지 않는다면 생각해 볼게요.”

“와 이렇게 자연스럽게 조건을 걸다니. 두 눈 멀쩡히 뜨고 당했네.”

“원래 거래는 신의가 생명인 법이라잖아요. 신의가 뭔지부터 좀 보여 주세요, 최도훈 사장님.”

“빈틈없네. 이것도 설정이야, 아님 성격이야?”

“둘 다요.”

“그럴 줄 알았다.”

일행이 다시 나누어지기 전에 인사 좀 하고 오겠다며 배 피디와 작가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녀온 엠케이가 재이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역시 아까 배 피디님 말씀은 이쪽을 흔들어 놓으려는 블러핑이었던 듯.”

정민길이 다른 스태프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엠케이가 재이에게만 들리도록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재이가 말했다.

“그렇다면 조영주 의원이 죽었다는 것 자체가 진행의 난도를 높이기 위한 날조였을 수도 있겠네.”

“……역시 어흑재.”

“그러면 결국 우린 나머지 셋이 어떤 포지션으로 어디에 흩어져 있는지 전혀 정보가 없는 거네. 최도훈을 조금 딜레이시킨 것 빼곤 딱히 소득이랄 게 없었다고 봐야 하나?”

“아니, 근데 그게 그렇지만도 않은 게.”

재이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은 엠케이가 슬쩍 웃으며 이어 말했다.

“아까 인사하는 척 작가님들하고 피디님들 모여 계신 곳 돌아보고 다니다가 슬쩍 봤는데 조영주 의원의 위치 표시, 움직이는 중이더라고.”

엠케이의 말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박에 눈치챈 재이가 희미하게 따라 웃으며 물었다.

“이쪽으로 오고 있겠네?”

“그렇지. 누군가한테 이를 갈면서.”

“그럼 우린 얼른 빠져 주자.”

“그게 예의일 듯.”

엠케이와 재이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개울물에 축축하게 젖어서 잠시 벗어두었던 가죽 구두를 다시 신어야 한다는 사실에 온갖 불평을 쏟아내고 있는 정민길, 아니 최도훈을 딱하다는 눈빛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 * *

눈치 빠른 서도진의 반격으로 개울에 나자빠진 최도훈의 추가 촬영을 위해 정민길이 그 자리에 남고 그곳에서 출발해 한동안 묵묵히 걸음을 옮긴 재이와 엠케이는 드디어 무사히 목적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쪽으로 제법 힘차게 흐르는 계곡이 자리 잡은 야트막한 평지는 고즈넉하게 가라앉는 밤의 어둠에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사망이네 추적이네 하며 내뱉었던 말들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럼 저희 식사하고 야영 준비하는 장면까지 하면 오늘 촬영은 끝인가요?”

“네. 취침 시간 동안엔 카메라맨이 직접 찍는 대신 야영지 주변에 고정 캠을 몇 대 설치할 겁니다. 저쪽에 저희 머물 텐트를 칠 예정이니까, 혹시 밤사이 뭔가 비상사태라도 생기면 저희 쪽에서도 곧바로 대처 가능할 겁니다.”

재이의 물음에 담당 피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그들은 본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담당 피디, 작가와 함께 스토리의 진행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중이었다.

“밥! 드디어 밥이다아아!!”

밥이라는 소리에 태평한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며 좋아하는 엠케이를 한 번 흘겨본 재이가 담당 피디를 향해 물었다.

“지금 저희 주변에는 아직 아무도 없죠?”

“반경 한 시간 거리 내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말인즉 일단 한 시간의 식사시간은 보장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이 틈에 후딱 시작할까요?”

.

.

.

메인 카메라에 녹화 중임을 표시하는 빨간 불이 들어왔다.

“으아아, 좋은 냄새.”

스타터 팩에 들어 있던 버너와 간단한 취사도구를 이용해 라면을 끓이고 있던 쌍둥이 중 계진이가 못 참겠다는 듯 침을 꿀꺽 삼키며 외쳤다. 최도훈의 기습에서 벗어나 뛰듯이 도망쳐 오느라 둘 다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아름다운 경관의 계곡 근처에 자리 잡고 앉아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라면 그릇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그냥 어디 가볍게 캠핑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밥도 먹고 싶다.”

“김치도 필요해.”

“난 이거 하나 갖고 안 될 것 같은데.”

“나중에 후회하기 싫으면 참아라.”

두 형제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가운데 계진이가 투덜거렸다.

“달랑 라면이랑 즉석요리 몇 봉지가 전부라니. 상금 30만 달러에서 조금 떼서라도 먹는 거에 투자해 줄 것이지.”

“그나마도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 안 그랬으면 너랑 나랑 지금 사냥이랍시고 새라도 잡으러 다녔어야 했을지도 몰라.”

도진이의 말에 계진이가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으으, 그걸 잡아서 어쩌라고.”

소름 끼친다는 듯 중얼거리는 계진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진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말을 이었다.

“어쩌긴 어째, 먹으려고 잡은 거니 우선 털을…….”

“으아아 그만, 그만해애애애! 넌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내가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뭘 한다고 생각해?”

“아 잠깐만 스탑, 스탑. 이게 내가 너랑 형제라서 넘어가지 너 어디서 누구한테 이런 말 함부로 했다가는 위험하게 미쳤다는 소리 들으니까 어디 가서 함부로…….”

“내가 너 아니면 누구랑 얘길 한다고.”

“어, 그것도 그렇네.”

건성으로 대꾸하며 보글보글 끓는 라면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도진이 버너의 불을 끄며 말했다.

“이제 먹어도 될 듯.”

“오오오!!!!”

“어휴…….”

조금 전 세상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후다닥 달려들어 행복한 표정으로 라면 사리를 드링킹하고 있는 계진을 쳐다보며 도진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 근데 나 진짜 이거 하나로 안 될 것 같은데.”

“그럼 뭐 새라도 잡아 보든가.”

“제발 서도진. 그 드립 치지 마, 재미없어.”

계진과 투닥거리고 있자니 생존이고 탈출이고 그저 한없이 평화로운 저녁인 것만 같은 느낌에 도진은 희미하게 웃었다.

* * *

그날 밤.

본 촬영이 끝나고 재이와 엠케이, 그리고 제작진 모두가 잠자리에 든 야심한 시각.

“……음?”

도진의 일인용 텐트에서 잠을 자고 있던 재이는 문득 든 위화감에 눈을 떴다. 텐트 밖으로 나오니 싸늘한 밤공기에 남아 있던 잠기운이 확 달아나며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제작진 쪽 텐트를 돌아보니 오늘 하루 고단했던 것은 자신들만이 아니었던지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 빼고는 이쪽과 마찬가지로 고요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재이는 자신을 잠에서 깨운 위화감이 든 방향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곳은 그러나 아직 어둠에 싸여 있을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손님이 오시는 모양인데.’

어쩔까.

잠시 고민하던 재이가 그 자리에 선 채 숨을 골랐다. 밤바람이 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와 계곡에서 쉴 새 없이 흐르는 세찬 물소리에 재이의 인기척이 어느 순간 완전히 묻혀 버렸다.

기척과 발소리를 완벽하게 지운 재이가 다음 순간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촬영용으로 고정해 둔 카메라 몇 대가 그런 재이의 움직임을 소리 없이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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