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또 알은척하잖아, 미친놈이.
* * *
정민길과의 일을 끝내고 약속했던 장소에 다다르자 미리 도착해 있었던 듯 널찍한 바위에 앉아 있는 재이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태양이 바다를 잡아먹을 듯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재이의 뒷모습이 묘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엠케이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흠.”
“왔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재이가 말했다.
“잘했어?”
“날 뭐로 보고.”
엠케이의 대답에 재이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 빛을 그대로 받아 재이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엠케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그 옆에 저도 나란히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왠지 너랑 이러고 있으니까 내가 악당이 된 기분이야.”
“뒤통수쳤으니 정 선배님이나 최도훈 입장에서는 네가 악당 맞지 뭐.”
“그게 그렇게 되나.”
“다만 이쪽에서 먼저 안 쳤으면 지금쯤, 네 머리가 깨졌을 거란 것만 기억해.”
그러니까 이게 바로 선제적 방어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재이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있던 엠케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정 선배님이 네 말대로 조 의원 쪽 캠프에서 벗어나자마자 주사위 얘기 꺼내시는데 소름이 쫙 돋더라고.”
“그래도 거기서 깔끔하게 끝내 버렸으니 정 선배님도 할 말 없으셨겠네.”
“그건 그런데. 덕분에 잔뜩 독 오른 정 선배님하고 본 촬영 하느라 엄청 스릴넘쳤지.”
엠케이의 말에 재이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이와 사전에 의논한 대로 주사위 게임에서 묵찌빠로 종목 변경을 하는 데 성공한 엠케이는 그간 그룹에서 갈고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정민길을 압도적으로 이겨 버렸다.
뒤늦게 자신이 엠케이의 계략에 완전히 낚였음을 깨달은 정민길이 다시 주사위 게임으로 바꾸면 안 되냐고 제작진에게 매달렸지만 이미 승부는 끝난 상황.
결국,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점쳐졌던 최도훈은 최연소 참가자이자 이런 진흙탕 싸움과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으로 보였던 서계진의 손에 탈락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서계진이 천하의 최도훈을 어떻게 처리했는데?”
재이의 눈이 궁금하다는 듯 반짝였다.
“나중에 본방송 봐. 그걸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엠케이에 재이가 말했다. 아직도 최도훈의 등을 힘껏 밀 때의 그 감각이 손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해 꺼림칙했다.
“진짜로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죽상이야.”
“사람이 모두 너 같은 쇠심줄인 줄 아냐. 난 누구와는 다르게 감상적인 인간이라고.”
일단 좀 멘탈 회복 좀 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의 재이에게 그렇게 중얼거린 엠케이는 얼마간의 침묵 끝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도진이가 계진이에게 최도훈이 배신 때릴 가능성에 대해 미리 힌트를 준 상황이었다고 해도, 서계진이 과연 최도훈에게 진짜로 먼저 손을 쓸 수 있을까 솔직히 좀 고민이었거든. 그것 때문에 본 촬영 들어가기 전에 정 선배님이랑 배 피디님하고 의논도 많이 했고.”
재이는 엠케이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엠케이가 이어 말했다.
“근데. 잘 생각해 보니 서계진이 입장에서 보면 이런 무인도에 갑작스럽게 떨어지게 된 것부터가 이미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것 같더라고. 그나마 도진이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서계진은 벌써 진작에 미쳐 버렸을지도 몰라. 사실 이건 그냥 다 악몽이고 눈 감았다가 뜨면 푹신한 집 안 침대면 좋겠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을걸. 그러니까.”
엠케이가 무릎 위에 올려 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마 이것도 악몽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어쩐지 살짝 넋이 나간 것 같은 엠케이를 잠시 바라보던 재이가 고개를 돌려 이제 완전히 해가 떠 버린 바닷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처음이 어려운 거야. 두 번째는 쉬울걸.”
“넌 무슨 그런 섬뜩한 소리를 그렇게 태평하게 하냐.”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뭐.”
엠케이의 타박에 재이가 태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차피 다 함께 손에 손잡고 사이좋게 살아 돌아가는 해피엔딩은 물 건너간 것 같으니. 이젠 우리만이라도 무사히 살아 돌아갈 방도를 찾아봐야지.”
재이는 자신이 털어온 조영주 의원 캠프의 식량이 들어있는 배낭을 발로 툭툭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식량을 싹 다 빼앗겼으니 저쪽도 분열하기 시작할 거야. 아마 낙오자가 나오겠지.”
“와 대박, 이걸 진짜 다 털어 왔네. 송선 누나가 내 머리채 붙들고는 꼭꼭 숨겼으니 절대 못 찾을 거라고 호언장담하셨는데.”
엠케이가 배낭을 열어 보며 중얼거렸다.
간밤의 일을 떠올리니 그때 잡혔던 머리카락이 아직도 얼얼한 기분이었다.
“몰리는 상황에서 사람이 택할 곳들이란 사실 좀 뻔한 구석이 있거든.”
“…확실히 한재이랑 서도진이 닮은 구석이 있어. 둘 다 꼭 세상 다 살아 본 애늙은이처럼 군단 말이지.”
“그래, 너도 서계진이랑 닮은 구석이 있어. 말보다 행동이 앞선다는 거.”
재이는 그렇게 말하며 어느새 배낭 속에 들어 있던 비상식량 중 소시지를 꺼내 말도 없이 먼저 까먹고 있던 엠케이를 째려보았다. 엠케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제야 재이에게도 하나를 건넸다. 두 사람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 간밤의 전리품을 하나둘 까먹기 시작했다.
* * *
탈출 지점.
“드디어 찍네요.”
“그러게.”
“시뮬레이션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전개라 그런가, 지켜보는 저까지 두근두근하는데요.”
“그러게.”
“배 피디님 긴장하셨구나.”
“…그러게.”
배 피디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는 메인 작가 윤명주를 힐끔 쳐다보고는 무어라 변명하는 대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길게 펼쳐진 백사장 끝에 있는 낡은 선착장에 미리 가져다 둔 요트 한 대가 서 있었다. 저게 바로 이 무인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동시에 상금 30만 달러를 거머쥘 수 있는 기회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클라이맥스와 엔딩 촬영을 앞두고 여기까지 살아서 도착한 사람은 셋.
서도진, 서계진, 그리고 박송선.
이미 탈락한 최도훈, 조영주, 오인조보다 신체적 능력, 사회적 경험, 성격 등등 모든 면에서 상대적 열세라고 평가되었던 세 명의 생존에는 제작진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작 단계에서 돌렸던 시뮬레이션에서는 높은 확률로 게임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낙오하곤 했던 세 사람이었다. 그 셋이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결국 제작진이 캐스팅 단계에서 몰라봤던 출연자 개개인의 개성과 특성이 게임의 변수로 작용했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꽉 짜인 시놉시스대로 움직이는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출연자가 재량껏 스토리를 풀어 나가는 진행 방식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만큼 출연자들의 개성이 스토리에 의외성을 부과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볼만한 결과였다. 이제 엔딩만 제대로 뽑고 후속 작업 거치면 꽤 괜찮은 모양새가 나올 것 같다는 기대감에 배 피디는 벌써부터 손이 근질거렸다.
제작진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앉은 출연자 세 사람은 앞으로의 스토리를 어떤 식으로 이끌어 갈지를 의논하고 있었다. 배 피디와 스태프들은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출연자들이 내린 결론을 토대로 촬영 플로우와 구성, 카메라 동선 확인을 거쳐 마지막 파트에서 엔딩까지의 진행에 대한 컨펌을 낼 예정이었다.
“조 의원님과 오인조 형님을 물리치고 살아남은 게 송선 누나였다니.”
“선배님이 조-오-박 동맹 최후의 1인이라는 소식 들었을 때 진짜 배 피디님이 또 뻥치시는 거 아닌가 싶었다니까요. 대체 무슨 수를 어떻게 쓰신 거죠?”
재이와 엠케이는 가녀린 이미지의 모델 이다솜을 그대로 따다 놓은 것 같은 캐릭터인 박송선이 저 억센 조영주 의원과 현역 군인 오인조를 물리치고 혼자 남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에게 앞다투어 물었다. 이다솜이 웃으며 말했다.
“조 의원님하고 오 병장님, 원래 처음부터 사이 안 좋았는데 너희한테 식량 다 빼앗기고선 분을 이기지 못하시겠는지 기어코 서로 싸우시더라고.”
뭐. 덕분에 난 어부지리.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사뿐하게 말하며 생긋 웃는 얼굴에는 일말의 주저도 보이지 않았다.
재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강적인데.’
슬쩍 옆을 돌아본 재이는 사람 보는 눈은 없어도 눈치는 빠른 엠케이가 마찬가지로 이쪽을 힐끔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 일단 탈출까지 어떻게 끌고 갈지 정해야 할 것 같은데요. 솔직히 저희는 송선 누나랑 같이 가도 상관없는데. 어떠세요?”
엠케이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의 말을 들은 이다솜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난 원탑으로 끝내고 싶은데. 기왕이면 박송선 혼자 살아남는 거로. 시청자분들 보시기엔 그게 더 임팩트 있지 않겠어?”
와, 세게 나오시네.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엠케이 쪽을 바라보았다. 엠케이도 당황했는지 이쪽을 쳐다보는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임팩트로 따지면 최약체로 꼽히던 저희 셋이 뭉쳐서 탈출했다는 스토리만으로도 이미 충분할 것 같은데 굳이? 싶은데요?”
재이의 말에 그와 옆자리의 엠케이를 차례차례 살핀 이다솜이 웃으며 말했다.
“난 누구랑 뭐 나눠 먹는 건 딱 질색이라.”
밥그릇은 원래 나누는 거 아니야.
이다솜의 눈이 단호하게 빛났다.
“와 선배님 되게 멋지시다.”
엠케이가 순수하게 감탄했다는 듯 내뱉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근데 박송선이라는 캐릭터한테 그만큼의 개연성은 있는 건가요? 지금껏 직접 얽힌 적도 없는 어린 애들 둘을 죽여 가면서까지 상금을 독차지해야 하는.”
엠케이의 질문에 이다솜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첫째, 죽인다고는 안 했어. 그냥 박송선이 혼자 상금을 독차지하면 좋겠다는 말이었지. 그리고 둘째, 여기까지 와서 나이 카드 꺼내는 건 좀 반칙이라는 생각 안 해?”
수적 열세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말이지.
이다솜의 논리 정연한 반박에 엠케이가 되받아칠 만한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리고. 설마 박송선이 진짜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혼자 살아남은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다솜이 엠케이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 웃음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한기에 엠케이가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럼 이건 어떠세요.”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재이가 입을 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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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엔딩?”
배 피디가 되물었다.
재이를 비롯한 이다솜과 엠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각 캐릭터가 우승하는 엔딩을 서로 다른 버전으로 나누어서 찍고 그중에서 고르는 건 어떨까 싶어서요.”
아 물론 우선 이런 게 가능한지부터 여쭤봐야 할 것 같아서 오긴 했습니다만.
재이가 덧붙인 말을 들으며 배 피디는 생각에 잠겼다.
‘캐릭터별 엔딩이라.’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컷 수가 가장 많이 나오는 경우를 가정하에 스케줄을 짠 덕에 스토리가 개인전이 아닌 동맹 간의 단체전으로 흐른 지금, 촬영 일정 자체는 일단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엔딩을 세 패턴으로 나눠서 찍는다고 해도 전체적인 스케줄에 그렇게 큰 지장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다 본편에 채택되지 못한 버전들을 비하인드 컷으로 공개하면 그건 그것대로 홍보 효과가 있을 것도 같고.
‘괜찮은 생각인데.’
이미 반쯤 마음이 기운 배 피디는 조연출을 비롯한 다른 스태프들을 불러 모아 세부 사항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회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재이, 엠케이, 그리고 이다솜을 부른 배 피디가 입을 열었다.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찍으려면 못 찍을 것도 없지 않겠냐는 결론이 나오긴 했는데. 일단은 각자 생각한 플롯부터 좀 들어 봅시다.”
아, 그리고 그 전에.
배 피디가 말을 이었다.
“세 패턴으로 나눠 찍는다고는 해도 결국 그중 하나만이 본편에 포함될 것이라는 점도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배 피디의 말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이가 입을 열었다.
“피디님 회의하시는 동안 저희끼리 이야기를 조금 나눠 봤는데요. 세 명이 각자 다른 테마로 가는 건 어떤가 하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각자 다른 테마요?”
“네.”
“예를 들면?”
배 피디의 질문에 이다솜과 엠케이가 차례차례 자신이 생각했던 테마를 이야기했다.
“예를 들면, 선과 악, 그리고 그 중간 지점이라던가.”
“화해와 배신, 후회라던가.”
그런 두 사람에 이어 재이가 입을 열었다.
“사이다 맛이랑 고구마 맛, 그리고 병맛은 어때요?”
아 병맛이라는 표현은 좀 그런가. 그러면 뭐, 환타 맛?
재이의 중얼거림에 배 피디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마지막 맛은 대체 무슨 컨셉인거야.”
배 피디의 반응에 재이가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 * *
그로부터 몇 주 후.
랜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눈 떠 보니 무인도] 제작 발표회.
“이야 진짜 감개무량하다. 무인도에 똭 떨어졌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제발회라니.”
정민길이 리허설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무대 점검과 세팅이 이루어지고 있는 발표회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완성본은 아직이겠지?”
“아직일걸요. 며칠 전에 엠케이랑 연락했는데 그때 3회차 나레이션 녹음하러 간다고 하던데요.”
정민길의 물음에 병장 오인조 역을 맡았던 DJ 반디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누가 우승했는지만이라도 좀 알려 주지.”
“그거 저희도 진짜 몰라요. 선배.”
눈을 흘기며 자신에게 투덜거리는 정민길의 말에 박송선 역을 맡았던 이다솜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진짜야? 너네 짠 거 아니고?”
“진짜라니까요. 세 버전 중 뭐로 갈지는 편집 상황 봐서 피디 재량하에 판단하겠다고 배 피디님이 분명 못 박으셨다고요.”
“너희 기획사에서 또 로비 엄청 들어가는 거 아니냐.”
“배 피디님이 어디 로비로 먹혀들 인물이냐고요.”
아니 그리고 우리 기획사가 어디가 어떻다고 그렇게 슬쩍 깎아내리시는 거죠.
이다솜이 눈을 흘기자 정민길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하긴. 배 피디가 로비로 먹혀들 인간이었으면 무인도에서 날 그렇게 매몰차게 내쫓지도 않았겠지.”
정민길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엠케이 고 맹랑한 것의 술수에 놀아난 것이 억울해서 어차피 예능인데 ‘최도훈 예수설’ 같은 거 밀면서 캐릭터 부활시키면 안 되냐고 했다가 그대로 쾌속정에 태워 육지까지 보내 버리던 배 피디의 냉정한 얼굴이 떠오르자 정민길은 피식 웃었다.
‘아니 나도 얼마나 황당했으면 그랬겠냐고.’
정민길이 뒤늦은 자기변명을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주변이 웅성거리더니 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오, 저기 오시네. 우승 후보들.”
“저렇게 보니까 확실히 아이돌은 아이돌이네.”
정민길과 DJ 반디가 자신들이 모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재이와 엠케이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와, 파티다 파티. 이따 사인받아야지.”
“처음 봤을 때 받지 않고?”
“그땐 도찐개찐이었고. 지금 보니 아이돌 맞네.”
무인도 흙밭에서 땀투성이로 굴러다니던 모습과는 달리 오늘 제작 발표회를 위해 깔끔한 슈트 차림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세팅한 두 사람은 그야말로 잘나가는 아이돌의 오오라를 유감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다솜 씨 아이돌 좋아하는 줄 몰랐네.”
“원래 제가 잘생긴 사람들을 좀 좋아해요.”
“근데 왜 내 사인은 안 받아?”
“선배, 거울 드릴까요?”
이다솜의 차가운 한마디에 정민길이 얼굴을 구기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재이와 엠케이가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잘 지내다마다. 누구 덕분에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덕에 간만에 하루 이틀 스케줄도 없이 푹 쉬었지. 고마워 아주.”
엠케이와 자신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며 대답하는 정민길의 말에 재이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완전 멋지세요. 역시 정민길 선배님, 우리 프로그램 간판스타!”
“그 옆에 계신 분께 광탈당하지만 말이지.”
“선배님, 그거 스포. 스포.”
“아 그런가?”
자신의 추켜세움이 마음에 드는 듯 한쪽 입술을 씰룩이면서도 투덜대는 정민길에게 입단속을 시키는 엠케이를 쳐다보며 짧게 웃던 재이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지?’
자신을 따라붙는 시선에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살피던 재이는 이내 VIP석에 앉아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하아.”
자신을 향해 느긋하게 손까지 흔들어 보이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재이가 한숨을 쉬자 옆에 서 있던 엠케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재이는 그런 엠케이에게 슬쩍 턱짓으로 VIP석을 가리키며 나직이 말했다.
“또 알은척하잖아, 미친놈이.”
“헐.”
다른 투자사 직원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엠케이의 시선을 눈치챈 듯 둘을 향해 슬쩍 웃어 보인 그 사람은 삼화 엔터 곽연호 본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