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22화 (122/224)

#122

눈떠도 어흑재

부산스럽던 실내의 불이 꺼지고 새카만 어둠 속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듯 헐떡이는 누군가의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헉, 허억, 헉, 어디야! 여기 대체 어디냐고오!!!!”

그 절규와도 같은 외침과 함께 프로그램의 타이틀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눈 떠 보니 무인도]

회의실에서 면박을 받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쫓겨나듯 빌딩 밖으로 떠밀려 나온 부도 직전의 사업가 최도훈

긴장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또 떨어졌다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어깨를 늘어뜨리는 취준생 박송선

벌떼같이 달라붙어 카메라 플래쉬를 터뜨리며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을 헤치고 나가면서도 오만한 표정을 풀지 않는 4선 의원 조영주

힐끔 시선을 돌려 시계 속 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 컴퓨터 화면 속 게임에 집중하는 말년 병장 오인조

어깨를 잔뜩 굽힌 채 노트북만 들여다보고 있는 뿔테 안경의 서도진과 그 옆의 침대에 기대앉아 과자를 까먹으며 뭐라 뭐라 떠들어 대고 있는 서계진

등장인물 여섯의 일상이 짧게 스쳐 지나가고 다음 순간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위 동그마니 떠 있는 외딴 섬의 이곳저곳에 그들의 얼굴이 아이콘처럼 흩어져 표시되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수상한 목소리의 나레이션

- 본 게임에 참가하는 행운을 얻은 당신에게.

-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이곳은 무인도.

당신을 포함한 여섯 명의 참가자들은 5일간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5일째 되는 날, 지도에 표시된 탈출 지점까지 살아서 도착하신 분께는 이곳을 탈출하실 기회와 30만 달러의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 명심하십시오.

이곳에 있는 인간은 당신을 포함해 단 여섯 명.

탈출에 성공하면 30만 달러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레이션이 끝나고 여섯 명이 제각각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들이 이어졌다.

어떤 이는 거친 산길에 다 헐어 버린 명품 구두를 내려다보며 탄식했고 어떤 이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긴 한숨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며 어떤 이는 모든 사람을 제치고 홀로 상금 30만 달러를 차지하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 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모든 걱정 근심을 잊게 하는 태평한 두 소년의 웃음소리가 청명한 무인도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 아하하하, 도진아! 여기 진짜 물 맑다, 우와 안에까지 다 보여, 다 보여!

계곡에서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붙인 소년이 해맑게 웃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진지한 낯으로 물속을 노려보고 있던 다른 소년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이 펼쳐졌다. 조금 전의 외침에 기껏 한곳으로 몰아가고 있던 물고기들이 다 흩어진 것을 깨달은 소년이 저보다 작은 키의 소년을 쳐다보며 투덜거렸다.

- 서계진 이 멍청이, 시끄러워서 고기 다 도망가잖아!

- 아? 그런 거야?

- 몰라 너 때문에 다 망했어. 생선구이는 무슨. 그냥 라면이나 먹자.

- 와앙, 라면 쪼아!

- 귀척 떨면 밥 없다.

- 아, 미안.

고기잡이를 포기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라면을 먹는 모습 뒤로 펼쳐진 수풀 사이로 오렌지색 석양이 하나둘 내려앉았다. 두런두런 별 의미 없는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두 녀석의 목소리가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 사이로 섞여 들고 이따금 부는 바람에 나뭇잎이 팔랑이는 소리가 어우러져 마치 평화롭고 느긋한 캠핑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따뜻한 오렌지색 석양으로 물들었던 화면이 일순 암전하더니 사람들이 한곳에 뒤엉켜 난전을 벌이는 모습이 펼쳐졌다. 캄캄한 밤, 빛도 희미한 숲속에서 벌어진 난데없는 아수라장이었다.

- 으아! 머리!! 내 머리!!!

소년의 비명에도 머리카락을 단단히 움켜쥔 손길은 풀릴 줄을 몰랐다.

- 다… 비켜…, 먹을 거! 먹을 거 내놓으라… 니까!

한쪽 팔에는 군복 차림의 청년을 다른 쪽 다리에는 귀밑이 희끗희끗한 여성을 매단 커다란 체구의 남자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그들을 떨쳐 내려 몸부림치며 소리 질렀다. 그러자 그의 다리를 잡고 늘어지고 있던 중년 여성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 한 번 뺏기지 두 번 뺏길 줄 알고! 잘 만났어! 아주, 너 이 새끼 가만 안 둬!

- 으아아아, 이거 놔!! 놓으라고오오오!

- 끄아아아!!!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이리저리 서로 뒤엉켜 흙바닥을 구르고 있는 다섯 명을 비추던 카메라 앵글이 문득 저 뒤편 어둠에 휩싸인 숲 쪽을 향했다. 언뜻 무엇인가가 움직인 듯하던 어둠 속은 그대로 다시 고요한 정적에 빠져들었다.

여섯 명의 캐릭터가 화면을 채우고, 자막이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무인도에서 눈을 뜨게 된 여섯 명]

[5일간 살아남아 돌아가는 자에게는 상금 30만 달러의 보상이!]

[배신과 암투,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펼쳐지는 5일간의 서바이벌]

[끝까지 살아남아 상금 30만 달러를 거머쥐고 탈출에 성공하는 자, 과연 누가 될 것인가!]

화면이 암전하고 귓가에 누군가의 급박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 아, 안 돼!!!

비명과도 같은 처절한 절규를 끝으로 정적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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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랜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눈 떠 보니 무인도]의 제작 발표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두웠던 장내에 불이 켜지고 미리 스탠바이 하고 있던 사회자의 매끄러운 오프닝 멘트와 함께 제작 발표회가 시작되었다. 사회자의 멘트가 이어졌다.

“이야.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마무리였는데, 어떠셨나요? 그렇다면 우선 [눈 떠 보니 무인도] 줄여서 [눈떠도]를 만드신 분들과 그 주인공들을 모셔 볼까요.”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프로그램의 총책임자인 배형욱 피디와 메인 작가 윤명주를 필두로 출연자 여섯 명이 차례차례 단상에 올라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그럼 일단 프로그램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좀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배 피디님, 저 이거 솔직히 처음에 제목만 보고 요새 유행하는 자연 속 힐링 예능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전 트레일러 보니 웬 서스펜스 스릴러가 있더라고요? 어떻게 된 거죠?”

사회자의 유쾌한 멘트에 배 피디가 꾸벅 인사하고는 마이크를 들었다.

“말씀하신 대로 저희 프로그램은 힐링 예능이라기보단 쓰릴 예능이라는 말이 맞겠네요. 갑자기 무인도에 떨어져서 5일간 생존하면 30만 달러의 거금을 손에 쥘 기회를 얻었다면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서로 협력하고 의지하면서 다 같이 살아남아 상금을 나누는 쪽을 택할까요, 아니면 모두를 제치고 가장 먼저 탈출해 보상을 독차지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까요. 저희 프로그램을 끝까지 보신다면 그에 대한 답이 무언지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배 피디의 말에 사회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행을 이어갔다.

“인간의 민낯에 도전하는 예능이라. 뭔가 묵직한 기분이 드는데요. 특히 컨셉 예능이라는 부분이 저는 좀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직접 연기하신 출연자분께 좀 여쭤볼게요. 이종 격투기 선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은퇴 후 시작한 사업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고 부도 위기에 몰린 사업가 최도훈 역을 맡으신 우리 정민길 배우님, 어떠셨나요?”

사회자의 질문에 정민길이 마이크를 들고 대답했다.

“사실 처음엔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대사와 지문이 있는 드라마도 아니고 ‘정민길’로서 행동해도 되는 예능도 아니라고 하니까 이게 뭔가 싶었죠. 카메라에 불이 들어와 있으면 ‘정민길’이 아니고 ‘최도훈’으로서 행동해야 하니 처음엔 적응하느라 고생 좀 했죠. 진짜로 출발지점에서부터 탈출 지점까지 쭉 섬을 횡단하면서 촬영이 진행되다 보니 점점 쉴 때도 역할에 동화되어 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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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이는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 눈을 깜박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발표회장 객석을 둘러보았다. 공중파에서 쌓은 배 피디와 윤 작가의 이름값에 평소 예능에서 잘 볼 수 없었던 정민길, 금정애와 같은 연기파 배우들이 참여한 덕인지 취재진이 많이 모여 있었다. 슬쩍 옆을 쳐다보니 이런 자리에 자신보다도 익숙지 않을 엠케이가 살짝 긴장한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웃어 보이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부터는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질문이 있으신 분께서는 손을 들어 사인을 주시면 마이크를 드리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자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프로그램의 기획 단계 에피소드나 방향성 등을 묻는 질문들이 몇 가지 지나가자 본격적으로 출연진들에게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타 뉴스의 최성국입니다. 재이 씨 [불망동 탐정 사무소]의 주태온 역 인상 깊게 봤습니다. 이번에 맡으신 서도진은 주태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인데요. 차기작으로 드라마가 아닌 예능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부탁도 안 했는데 누가 청탁을 넣었더라고요.

속으로 중얼거린 재이는 VIP석을 힐끗하는 대신 태연한 얼굴로 마이크를 들고 입을 열었다.

“우선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기작으로 예능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눈떠도]가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 정민길 선배님께서도 말씀하셨듯 지문과 대사로 통제되는 드라마와는 달리 저 스스로 서도진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도진이는 저랑 닮은 구석도 많아서, 꼭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더라고요.”

재이의 대답에 다른 기자가 손을 들었다.

“올댓엔터의 김주환입니다. 인물 소개를 보면 재이 씨가 맡은 서도진은 ‘쌍둥이 형제 서계진을 제외한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내성적이고 우울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 중 어디가 본인과 닮았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너의 그 어디가 서도진과 닮았다는 거냐고 묻는 듯한 기자의 질문에도 재이는 흔들림 없이 여유롭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 이걸 제가 제 입으로 직접 말하자니 좀 부끄럽기도 한데 사실 진짜 한재이는 낯가림도 심하고 소심한 편이거든요. 데뷔 전에는 진짜 심했어요. 그래서 제가 데뷔했다는 거 시골에 계시는 저희 부모님은 아직도 안 믿으신다니까요. 하하.”

대답과 함께 재이가 짧게 웃자 옆에 앉아 있던 엠케이가 마이크를 들고 입을 열었다.

“맞아요. 예전에 제가 재이 씨랑 같이 재이 씨 부모님을 만나 뵌 적이 있는데 진짜 못 미더워하시더라고요. 어머니께서 저희 멤버들이랑 매니저 형한테 우리 애가 숫기 없고 마음도 약하니까 잘 부탁한다고 하시는데 솔직히 제가 아는 재이 씨 말씀 하시는 게 맞나 싶을 정도였죠. 근데 이번에 재이 씨가 도진이 역할 하는 거 보니까 ‘아 내성적인 한재이는 이런 느낌이구나!’라는 느낌은 들더라고요.”

“어떤 느낌이었죠?”

사회자가 이야기를 유도하자 엠케이가 이어 말했다.

“어… 솔직히 좀 무서웠어요. 하하.”

“하하하하, 무서웠다는데요, 재이씨?”

“어째서죠. 도진이는 낯을 좀 심하게 가릴 뿐인데요. 게다가 계진이한텐 안 그러잖아요.”

재이의 반박에 엠케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요. 도진이가 왜 계진이랑만 다니려고 하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다른 사람하고 얘기할 일 있으면 계진이한테 부탁하고 자기는 꼭 뒤로 빠지는 통에 계진이가 중간에서 매번 얼마나 바빴다고요. 아, 그러고 보니 이것도 재이 씨랑 도진이가 닮은 부분이긴 해요. 재이 씨도 저희 그룹에서 전면에 나서는 대신 뒤에서 멤버들을 조종하는 편이거든요.”

“아, 저 이거 알아요. 어흑재, 맞죠? 어흑재.”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박송선 역의 모델 이다솜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재이와 엠케이를 바라보며 끼어들었다.

“어흑재가 뭐야?”

“그러게? 어디 뭐 고갯길 이름인가?”

정민길과 금정애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서 오인조 역을 맡았던 DJ 반디가 말했다.

“어차피 흑막은 한재이, 줄여서 어흑재. 맞죠?”

그러자 그 별명이 여기서 왜 나오냐고 작게 중얼거리며 입을 삐죽이고 있는 재이를 대신해 엠케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 듯 말했다.

“맞아요. 맞아요. 와, 어흑재를 아시는 분이 이렇게나 많다니.”

그러자 지금껏 열심히 듣고 있던 정민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쩐지, 감당이 안 되더라니.”

“하하, 정민길 배우님의 멘트가 의미심장한데요. 재이 씨와 재이 씨가 맡은 서도진이 어떤 역할을 했을지 저도 궁금해지네요. 그럼 다음 질문받아 볼까요.”

사회자가 인터뷰를 이어갔다.

“스타 뉴스 백채영입니다. 재이 씨, 이번 랜플릭스 예능 출연이 본격적인 해외 진출의 신호탄이라는 얘기가 있던데요. 그걸 위해 다른 기획사로의 이적을 검토 중이라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인가요?”

…이건 또 무슨 신종 개소리야.

재이는 이번에야말로 참지 못하고 VIP석을 바라보았다. 곽연호 본부장이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은 채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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