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엘릭서급 포션의 등장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장기 투숙 중인 호텔 수영장에서 아침 운동을 하고 나온 곽연호는 부하 직원의 전화를 받고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촘촘히 던져 놓은 그물에 이제 고기가 낚여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인데 이게 지금 갑자기 무슨 일이란 말인가.
- 랜플릭스 쪽에서 새 투자처를 찾았다는 소문입니다. 게다가 어디서 이야기가 샌 건지 원래 저희 쪽과 협력해서 투자 철회를 하기로 했던 두 곳에 대해 랜플릭스 쪽에서 먼저 계약 해지를 요구했답니다. 예상 수익 보전해 주는 대가로 즉시 계약 철회하고 향후 투자사 선정에서 배제하겠다고 연락한 모양이라 그쪽에서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본부장님, 아무래도 직접 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뭐가, 어째?
곽연호는 핸드폰을 쥔 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대체 어디서 투자처를 찾았지?
자금줄은 미리 틀어막아 둔 터였다. 자신들이 빠지는 것뿐 아니라 적당한 덩치의 두 곳에 로비해서 자신들과 시차를 두고 같이 발을 빼기로 미리 말을 맞춰 둔 상황이었다. 정보가 새 나갈까 봐 일부러 본사에서 데려온 최측근들만을 데리고 진행해 온 안건이었는데.
제1 투자자인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두 곳이 연달아 빠진다면 아무리 재무 기반이 안정적인 케이엠이라고 해도 비는 부분을 자력으로 메꿀 수 없다는 것쯤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제작 발표회까지 마친 작품을 그대로 묻을 수도 없는 랜플릭스로서는 적자를 떠안고 프로모션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고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사달의 원인 제공자나 다름없는 그 녀석에게 여러 사람의 원망이 쏠릴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쯤 되면 알아서 숙이고 들어올 줄 알았는데.
곽연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 사무실로 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
Prrrr Prrrr
걸음을 옮기려던 곽연호는 손안에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닫고 액정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
화면에 뜬 발신인 이름을 확인한 곽연호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예. 회장님.”
통화 버튼을 누르고 짧게 대답하자마자 귓가에 울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곽연호의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 *
“진짜 엠케이 너 무슨 뉴욕 만수르쯤 되는 거 아니냐?”
달리는 차 안.
남궁찬이 문득 엠케이를 돌아보고 말했다.
“뭐래.”
얼굴을 찌푸리는 엠케이의 옆에서 이환이 끼어들었다.
“맞네! 뉴욕 만수르. 엠케이네 아저씨가 랜플릭스 몇 번 다녀오신 뒤로 그 양아치 놈들 완전 깨갱 했잖아.”
“레알. 천하의 삼화를 돈으로 누를 수 있는 재력이라니. 엠케이 앞으로도 우리 친하게 지내자.”
이환의 말에 은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엠케이를 쳐다보았다.
“그런 거 아니거든. 우리 아빠가 무슨 석유왕도 아니고. 랜플릭스 사장님하고 우리 대표님하고 뭔가 또 하신 모양이지.”
엠케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긴 남궁찬이 말했다.
“아냐, 돈빨이야.”
“맞아, 돈빨일 거야.”
“그래, 돈빨이어야 해.”
그러자 다른 녀석들이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씩 보탰다. 몰이에 신이 난 이환이 외쳤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 야식은 우리 뉴욕 만수르가 쏘자.”
“와, 나는 간만에 족발 먹고 싶어.”
“응, 안 돼. 남궁찬 너는 닭가슴살.”
“차인혁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아.”
투닥거리는 멤버들을 한 번 훑어본 재이가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린 채 생각에 잠겼다.
‘아저씨 재력이 어디까지인지는 몰라도 수완 하나는 끝내주시는 게 맞는 것 같네. 저 집요한 곽연호가 단박에 꼬리 내리고 입 다물게 만드시다니.’
재이는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골리앗의 시행착오 - 흔들리는 삼화 엔터의 행방은?] 이라는 헤드라인의 기획 기사로 시선을 옮겼다. 기사에서는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야심 차게 국내 진출을 선언했던 삼화 엔터가 소속 연예인의 불상사와 경영진의 계속되는 판단 미스로 자체적인 재정비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기사는 국내 기업 풍토를 무시한 채 밀어붙이던 경영 방식을 실패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고 있었다.
‘기자님이 예리하시네.’
재이는 항상 여유롭고 자신만만해 보이던 곽연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니야. 그런 인간하고는 앞으로 평생 상종하지 않고 살 수 있으면 그게 복이지.’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읽고 있던 윈도우를 닫고 PART.Y 팬 게시판을 열었다.
“…응?”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게시판 글들을 쭉 훑던 재이의 시선이 유독 댓글이 많이 달린 글의 제목에 가 멎었다.
[조공계의 끝판왕이 나타났다는 게 사실이야?]
야 나 지금 되게 어처구니없는 소리 들었는데. 이번에 애들 차 바뀐 거, 그거 케이엠에서 업그레이드해 준 게 아니고 팬이 조공한 거라면서? 그것도 팬덤 아니고 혼자라던데 스케일 무엇???
└ 이거 직원피셜ㅇㅇ 내가 알기로 케이엠 차, 카 리스로 돌리는데 최고 그레이드가 리더네 형이 군대 가기 전에 타던 거거든. 근데 이번에 우리 애들 바뀐 차가 그거랑 동급에 최신형임 ㅇㅇ게다가 카 리스 아니고 그냥 우리 애들 전용으로 신차 뽑아 준 거라더라.
└ ㅎㄷㄷ 재력 무엇? 중동의 석유왕이라도 입덕한 건가 혹시?
└ 석유왕ㅋㅋㅋ오일포션이냐곸ㅋㅋ
└ 아 왠지 느끼할 것 같ㅋㅋ
└ 진짜면 조공계 끝판왕 맞네 ㅎㅎ 미안하다. 얘들아, 내가 줄 건 사랑밖에 없다. 내 사랑을 받아라!
└ 저런 거 그냥 받아도 되는 거임? 나중에 말 나오는 거 아니야?
└ 설마 진짜 개인이 줬겠어? 어디 회사가 붙은 거 아님?
└ 듣기로는 멤버 중 하나가 플래티넘 수저라던데?
└ 누구? 일단 차인혁이랑 한재이랑 남궁찬이는 아니니까 나머지 셋 중의 하나인가?
└ 역시 이환! 고급지게 생겼을 때부터 알아봤다. 내가
└ ㅋㅋㅋㅋ김칫국 오지고욬ㅋ 그럼 난 은규 민다! 피아노 신동 은규 사실 금수저 인증 아니냐!
└ 이건 아님. 내가 초딩때 심은규랑 같은 피아노 학원 다녀서 아는데 얘네 그런 집 아님ㅋ
└ 닉네임이 영릭서라던데? 영원한 엘릭서라고.
└ 본인이세요? ㅎㄷㄷ 애들 차도 좋지만, 숙소도 좀 바꿔 주세요. 기왕이면 우리 집 옆집으로
└ ^^ㅗ
└ 본인 등장! 저 치킨 한 마리만ㅋ
└ 니가 시켜 먹어
└ 저는 아아메 깊티콘ㅋㅋ
└ 아아메???
└ 누구 팬이세요?
└ 맞춰 봐ㅎ
└ 아니 여기 카더라가 왜일케 당당해? 이거 신고감 아님?
└ ㅇㅇ원글부터 댓글까지 싹 다 총체적 난국;;
└ 추측성 분란글 자제 좀;; 떡밥 던진다고 다 물지 좀 말고 병먹금 좀 하자 제발
.
.
.
“…엠케이야, 아버지 인터넷 좀 그만하시라고 해라.”
댓글들을 확인하던 재이가 엠케이를 향해 말했다.
“요새 겨우 좀 한가해지셨을 텐데 좀 즐기시게 둬.”
“K-커뮤에 완벽 적응 하신 듯.”
“어차피 또 얼마 안 가 삭제당하실걸.”
이미 그 글을 확인한 듯 남궁찬과 이환, 은규가 차례차례 한마디씩 내뱉었다. 그런 그들의 말에 재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저 자본주의의 노예들 같으니.”
팬 게시판에 올라온 것처럼 멤버들은 엠케이 아버지가 새로 뽑아 준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예전에 타던 차도 여섯 명이 타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크기이긴 했지만 역시 동급 최고 그레이드의 풀 옵션 신차는 승차감부터가 달랐다. 등 뒤에서 돌아가는 마사지 기계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있던 은규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숙소 바꿔 주신다는 걸 말리고 대신 받은 것치고는 소박하지 않냐.”
“그러게. 에이 그때 그냥 넙죽 받아 버릴 것을 왜 사양 같은 걸 해서.”
“사양하는 대신 더 좋은 거 받았잖아.”
투덜거리는 이환의 말에 인혁이 대꾸하며 차창 밖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지금 팬들을 깜짝 놀래켜 주기 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위해 도심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영화관이 위치한 건물 외벽에는 지금 상영 중인 영화들의 포스터와 함께 재이와 엠케이가 출연한 랜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눈 떠 보니 무인도]의 프리미엄 팬 시사회 포스터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전편 공개를 하루 앞둔 시점에서 파티의 팬들만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이벤트였다.
총 6부에 달하는 시리즈 전편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릴레이 상영하는 형식의 이벤트인 만큼 상영은 이미 아침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미리 랜플릭스로부터 방영본을 건네받아 스케줄을 뛰는 틈틈이 5부까지 보고 온 파티 멤버들은 잠시 후 극장 안에서 5부의 상영이 끝나면 객석에 깜짝 등장해 팬들과 함께 마지막 화를 감상할 예정이었다.
이벤트를 제안한 것은 심진우 팀장이었다.
아들이 생활하는 곳을 둘러보고는 숙소를 옮겨 주겠다며 혹시 부담되면 다른 소속 연예인들도 다 옮겨 주면 되지 않냐고 급발진하는 폭주 기관차에 심진우는 차분한 어조로 숙소는 연차에 따라 배정하는 데다 회사의 부동산 투자와도 얽혀 있어서 문제가 복잡하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 대신 [눈떠도] 홍보도 하면서 파티 멤버들이 팬들과 교감할 수 있는 이벤트를 여는 것은 어떠냐며 엘릭서급 포션의 뻐렁치는 팬심을 진정시킬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은 심진우의 노련함 덕에 파티와 포션은 랜플릭스의 파격적인 대우라는 평을 들으며 런칭 하루 전 전편 관람의 특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저씨 미국 안 가 보셔도 되는 거냐 근데?”
은규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묻는 말에 엠케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몰라? 원래도 누나한테 거의 다 넘겨서 아빠 맨날 놀러 다녔거든. 지금도 아마 누나 혼자 덤터기 쓰고 있을걸.”
엠케이의 말에 멤버들이 감탄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내뱉었다.
“이야 부럽다, 덕질에 몰두하는 은퇴 라이프.”
“그러게. 역시 제대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려면 아저씨만큼은 성공해야.”
“이환 너도 한 세 번째 인생쯤엔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재이의 말에 이환이 눈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한재이, 진짜 남의 꿈에 초 치지 좀 말라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왁자지껄 티격태격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영화관 아래 주차장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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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상영하는 건 그래서 누구 엔딩이야?”
관계자 출입구를 통해 영화관 뒤편 대기실로 들어와 의상과 메이크업을 다시 체크하며 진행요원이 부르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멤버들 중 남궁찬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누구겠니.”
“이야, 내가 살다 보니 한재이가 누구한테 밀리는 걸 다 보네.”
재이의 짧은 대답에 이환이 감탄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 이환에게 재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애초에 내 버전은 본편 용은 아니었으니까.”
“아, 그건 인정.”
재이의 말에 엠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길래? 그러니까 더 궁금하네.”
“궁금하면 나중에 너도 디렉터스 컷 사라.”
은규의 말을 단칼에 쳐내며 재이가 대답했다.
“와, 나한테까지 영업을 거나. 우리 사이에 너무하는 거 아님?”
“비즈니스는 깔끔해야지. 질척거리면 재미없어.”
대신 사인해 줄게.
특별히 엠케이랑 내가 둘 다 해 주지.
와~ 은혜로운 멤버특전.
쿨한 표정으로 영혼 없이 덧붙여 말하는 재이를 쳐다보고 있던 이환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어휴 저 화상.”
- 파티 여러분, 스탠바이 해 주세요.
멤버들이 이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때마침 진행 요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깜짝 파티를 하러 가 볼까.”
인혁의 말과 함께 멤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상영관 객석
“와, 벌써 한 화 남았다고?”
“하루가 순삭이네.”
“이거 어디가 예능이야, 그냥 드라마라고 해도 믿겠는데?”
“그러게. 진짜 상황극만으로 만든 거 맞냐고.”
“도계진이 너무 귀여운 거 아님? 장르 분명 서바이벌 서스펜스인데 얘네 둘이 투닥거리면 자꾸 힐링 되잖아.”
“그러게. 완벽한 단짠단짠.”
“근데 진짜 계곡 캠핑 씬 너무 짧은 거 아니냐 인간적으로.”
“내 말이. 그거 하나로 시즌 1은 그냥 만들겠던데.”
“랜플릭스가 돈 버는 법을 모르네.”
주변에서 팬들이 수군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김은지는 시사회장에 들어올 때 받은 도진계진 형제의 프로그램 포스터 개인 컷과 촬영 현장의 온오프 사진으로 구성된 사진 패키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땀 때문에 자꾸 흘러내리는 안경이 거슬렸는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살짝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도진이의 사진을 넋 놓고 들여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문득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한재이 씨 팬이신가요?”
목소리가 들린 옆자리를 돌아보니 귀밑머리가 하얗게 물들기 시작한 아저씨 한 분이 살짝 웃어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