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26화 (126/224)

#126

저도 제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한재이 씨 팬이신가요?”

목소리가 들린 옆자리를 돌아보니 귀밑머리가 하얗게 물들기 시작한 아저씨 한 분이 자신을 보며 살짝 웃어 보이고 있었다. 김은지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해 보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 저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정정당당하게 티켓팅 성공해서 들어왔습니다, 저도.”

그렇게 말하니까 더 수상하잖아요, 아저씨.

혹시 팬인 척 잠입 취재하러 들어온 기레기인 거 아니야, 이 사람?

정장 상의 안쪽 포켓에서 티켓 반권을 꺼내어 흔들어 보인 아저씨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의 김은지에게 물었다.

“혹시. 한재이 씨 팬이면 그거, 저랑 바꾸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예상치 못했던 그의 말에 김은지가 얼결에 아저씨의 시선이 멎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자신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엠케이와 극 중 서계진의 사진들에 멈춰 있었다.

…어, 지금 이거 설마.

대답 대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김은지의 태도에 당황한 아저씨가 낭패라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웃어 보이고는 말했다.

“어? 이렇게 하는 거라던데. 이상하네. 으음, 혹시 기분 상하셨다면 미안합니다.”

“…아, 아뇨. 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색한 표정으로 사과하는 그 모습에 뒤늦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김은지는 새삼 옆자리의 아저씨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팬 이벤트에 잠입한 기레기라고 하기엔 연배가 너무 높지 않나? 굳이 저런 나이대의 분이 직접 뛸 필요는 없을 텐데. 아니면 다른 업계 쪽 관계자이신가? 아니 근데 관계자가 사진 맞교환 같은 걸 하자고 할 리가 없잖아? 만일 그렇다면 역할에 대한 몰입이 너무 과하신 거 아니야?

김은지가 내심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 있는 사이 그녀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한결 안심한 표정으로 그가 다시 한번 물어왔다.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가진 한재이 씨 사진을 드리는 대신 갖고 계신 엠케이 사진을 받으면 안 될까요.”

나이 지긋하신 분께서 정중한 존대와 함께 자식뻘 되는 자신에게 눈을 빛내며 조심스럽게 물어 오시는 것이 뭐랄까, 실례되지만 조금 귀여워 보이는 느낌에 김은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해요.”

대답과 함께 엠케이의 사진을 추려서 건네주자 그것을 받아들고는 활짝 웃는 모습이 왠지 친근해 보여 이번엔 김은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엠케이 좋아하시나 봐요?”

“예? 아. 네. 어린 친구가 부모와 떨어져 혼자 와서 열심히 하는 게 기특해 보여서 말입니다.”

와, 엠케이가 미국 출신인 것도 아시나 봐. 찐 팬이시네. 하긴 그 티켓 경쟁을 뚫고 이벤트까지 오셨으니. 확실히 보통은 아니시겠네.

왠지 흐뭇해지는 마음에 김은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쵸. 엠케이가 마냥 해맑아 보여도 엄청 뚝심 있는 타입이잖아요. 멤버들이 맨날 나와서 그러거든요. 엠케이 진짜 크게 될 녀석이라고. 안무뿐만 아니라 무대 연출까지 착실히 자기 영역 넓혀 가는 것도 되게 기특하고. 아, 파티 데뷔곡 안무도 엠케이 아이디어였던 거 알고 계셨나요?”

“오 그런가요?”

“네. 그 대련 안무 엄청 반응 좋았죠. 처음에 그걸로 입덕한 사람들 엄청 많았거든요. 그리고 이번 어비스 무대도 엠케이 아이디어였대요. 완전 아이디어 박스라니까요, 엠케이.”

김은지가 엠케이를 칭찬하는 것을 눈을 빛내며 듣고 있던 그가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한재이 씨 팬인 줄 알았는데 엠케이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네요?”

“이 정도는 다들 알고 있는걸요. 그리고 제가 재이로 입덕하긴 했어도 파티 애들 다 좋아하거든요. 빼놓을 멤이 없잖아요 사실.”

김은지의 말에 아저씨 팬이 동의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빠질 줄은 몰랐는데. 진짜 인생 모르는 일이더라고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김은지에게 아저씨 팬이 고개를 끄덕이며 왠지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긴, 저보다 현타 세게 오시긴 하겠어요.

김은지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아저씨 팬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은지가 그렇게 일방적인 친근감을 쌓고 있는 사이 마지막 회 상영이 곧 시작되니 자리에 앉아 달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벌써 마지막 회네요.”

아쉬움과 기대감이 뒤섞인 듯한 어투로 아저씨 팬이 중얼거리는 말에 김은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거 꼭 대박 났으면 좋겠어요.”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확신에 찬 그 대답을 듣고 있자니 왠지 든든한 기분에 김은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은데요.”

“하하, 그런가요.”

그 웃는 얼굴이 왠지 친근한 느낌에 김은지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실내의 조명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으레 그렇듯 상영이 시작되기 전 광고가 흘러나오던 스크린 속 영상이 갑자기 툭 꺼지며 순식간에 암전한 장내 한쪽 출입구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췄다.

“어?”

“뭐야?”

“뭔데? 뭔데?”

와아아아아———!!!!!

출입구의 문이 열리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에 가까운 환호를 내질렀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한 것은 각자 한 손에 팝콘 한 손에 음료수를 든 파티 멤버 여섯 명이었다.

“으아아아악!!! 이게 무슨 일이야!!!!!”

예상치 못했던 멤버들의 등장에 놀란 김은지가 소리를 지르며 엉덩이를 들썩이자 옆자리의 아저씨 팬이 놀라 움찔했다. 그러나 김은지에게는 그런 그의 반응을 살필 만한 여유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여섯 명의 멤버들이 자신의 앞을 가로지르는 통로 건너편 맨 뒷줄에 자리를 잡고 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로 앞쪽을 모두 비워 둔 것이 이벤트 인원을 줄이기 위한 주최 측의 꼼수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제 보니 멤버들의 서프라이즈 등장을 위해 일부러 비워 둔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 비워 둔 좌석들을 바라보며 수군대던 다른 팬들과 마찬가지로 케이엠이 기획은 잘하는데 자금이 딸리는 모양이라고 속으로 투덜댔던 스스로를 반성하던 김은지는 마침 자리를 잡고 앉으려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는 재이와 눈이 맞은 듯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

‘오 마이 갓, 한재이랑 눈 맞았어!’

자신을 쳐다보는 최애의 눈빛에 김은지가 본능에 가까운 포효를 하고 있는 사이 재이가 옆자리의 엠케이에게 뭐라고 속삭이는 듯하더니 이번엔 엠케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멤버들도 하나둘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런 멤버들의 시선에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김은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왜 다들 돌아보는 건데?! 내가 너무 괴성을 질렀나?’

그러나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본 인혁의 눈길이 묘하게 자신에게서 비껴가 옆자리를 향하는 것을 느끼고는 곧바로 납득했다.

아, 아저씨 팬.

‘엄마, 오늘 나 자릿발 제대로 선 듯. 옆자리 아저씨 덕분에 계 탔어요.’

아 근데 이 아저씨 애들이 다 너무 노골적으로 돌아봐서 혹시 당황하신 거 아닌가. 뒤늦게 든 생각에 옆자리를 힐끔 쳐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멤버들이 힐끔거리며 돌아본 탓에 본의 아니게 자신을 비롯한 주변 팬들의 주목을 받게 된 이 상황이 불편하셨는지 아저씨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시선은 흔들림 없이 엠케이의 뒤통수에 고정되어 있는 아저씨의 옆얼굴에서 지울 수 없는 진한 팬심을 느낀 김은지는 여전히 환호와 함성으로 들끓고 있는 실내 분위기를 틈타 냅다 외쳤다.

“엠케이!! 네 아빠 팬 오셨다!!! 여기 좀 봐 줘!!!”

기분 탓인지 옆자리 아저씨가 움찔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빠 팬 아니고 삼촌 팬이라고 할 걸 그랬나. 죄송.

뭐가 재밌는지 멤버들이 와르르 웃더니 다 같이 뒤를 돌아보고 아저씨 팬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쁜 것들.

역시 리액션 부자들이야.

김은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환호를 질렀다.

.

.

.

“여러분 많이 놀라셨죠?”

각자의 자리에 팝콘과 음료수를 놓고 객석 쪽을 향해 선 멤버들이 진행 요원이 건네준 마이크를 들고 팬들에게 인사했다. 예상치 못했던 완전체의 등장에 장내는 이미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인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포션 여러분이 다 같이 모여서 [눈떠도]를 보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희도 함께 보고 싶어서 달려왔습니다. 어떠세요? 좋으세요?”

그걸 말이라고 묻니. 좋아죽겠다으아!!

다른 팬들과 함께 김은지 또한 환호와 함께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아 근데 뭔가 이렇게 팬 여러분이 많이 모이신 곳에서 같이 본다고 생각하니까 되게 떨리고 긴장되네요.”

부끄러운 듯 어색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엠케이의 말에 객석 여기저기서 응원과 함께 환성이 터져 나왔다.

“와 엠케이 씨, 아까 대기실에서는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시더니”

“그러게요, 저희 앞에서는 막 이게 드라마였으면 난리 났다고 배우판 찢을 뻔했다고 하시더니.”

이환이 마이크를 들고 자연히 몰이를 시작하자 남궁찬이 엠케이를 돌아보며 맞장구쳤다.

“하하하, 남궁찬 씨 웃자고 한 농담을 진담으로 받기 있습니까.”

“저희가 어디 농담 주고받을 사이입니까. 저희 진지하게 비즈니스 하는 사이잖아요.“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남궁찬을 어이없이 쳐다보는 엠케이 옆에 선 재이가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보시느라 엄청 힘드셨을 것 같은데, 여러분 괜찮으세요?”

재이의 물음에 대부분의 관객들이 얌전하게 ‘네에-’하고 소리치는 가운데 군데군데서 허리가 아프다, 어깨가 결린다, 하는 장난스러운 외침이 추임새처럼 섞여 들었다. 그런 팬들의 반응을 바라보고 있던 재이가 이어서 말했다.

“자 그럼 고개 한 번 돌려 주시고, 손목이랑 어깨도 쭉 펴서 그렇죠. 그렇게 풀어 주시고. 아, 혹시 옆에 자리 서로 아시는 분이면 손을 요렇게 만들어서 등 쪽 목하고 어깨 만나는 지점을 이렇게 조물…….”

“으아아악!”

재이가 시범을 보이기 위해 한 손으로는 마이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옆에 선 엠케이의 목 뒤쪽 긴장으로 잔뜩 굳은 근육에 손을 대고 주무르자 엠케이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놀라라, 누가 보면 재이 씨가 엠케이 씨 잡는 줄 알겠어요.”

“엠케이 씨 얼굴 보니까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은데요.”

“으악 아파 아으 오오. 거기 어. 거기 어허 시원하다. 아악, 그만, 그만해요, 재이 씨이이으어어허 아아 거기 그렇지 조금만 더 으허어…….”

은규와 이환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로 엠케이가 비명인지 감탄인지 모를 말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고 있는 멤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인혁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재이 씨 그만 해요. 이러다가 우리 엔딩 보기도 전에 엠케이 씨가 먼저 끝나겠어.”

“그러게요. 이건 이것대로 박진감 넘쳤지만, 우리 이제 마지막 회 봐야죠!”

남궁찬이 눈치 빠르게 인혁을 거들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 은규와 이환이 한마디씩 보탰다.

“그쵸그쵸! 5화에서 우리 계진이가 도진이 형도 없이 혼자 최도훈이랑 맞짱 뜨게 생겼던데. 과연 서계진은 이대로 광탈할 것인가! 아니면 무사히 살아남아 도진이와 합류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 승자는? 30만 달러를 손에 쥐는 것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그리고 서로 눈빛을 교환한 재이와 엠케이가 입을 모아 외쳤다.

“[눈 떠 보니 무인도] 마지막 화,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 * *

가파른 산길을 뛰고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스크린에 펼쳐졌다.

- 헉헉. 허억. 아이고 죽겠다. 이쯤 왔으면 이제 됐겠지. 여기서 잠깐만 쉬어 가자.

- 도진이가 기다릴 텐데요. 조금만 더 가면 합류 지점인데 좀만 더 가시죠.

무릎에 손을 얹고 상체를 굽힌 채 숨을 고르는 최도훈의 등 뒤에서 계진이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했다.

- 아. 뭐가 그렇게 급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다냐.

굽혔던 상체를 일으키며 계진이 서 있는 쪽을 돌아보는 최도훈의 눈빛이 음험하게 번뜩였다. 계진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 너무하는 거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요 며칠 너희 대신 짐도 다 짊어지고 시키는 대로 움직인 사람한테. 이쯤 되면 동료 취급 정도는 해 줘도 되잖아?

계진에게 한 발 다가가며 최도훈이 씩 웃었다.

조금 전 조영주, 오인조, 박송선 동맹과의 난전 탓에 흙과 땀투성이로 엉망인 얼굴로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웃고 있는 최도훈은 더할 나위 없이 위험해 보였다. 계진이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자신을 노려보는 계진의 눈빛에 공포가 일렁이는 것을 눈치챈 최도훈이 씩 웃었다.

성큼,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오는 최도훈을 피해 계진이 뛰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농구며 축구며 하여간에 공부 빼고 몸으로 하는 운동이라면 모두 다 자신 있는 계진이었다.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빠져나가 산비탈을 뛰어오르기 시작하는 계진을 최도훈이 아슬아슬하게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구둣발로 오르막길을 뛰자니 아슬아슬 잡힐 것 같은 계진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술래잡기를 하듯 계진의 뒤를 쫓아 뛰던 최도훈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버럭 소리쳤다.

- 이 쥐새끼 같은 놈!

이놈의 신발만 아니었어도, 저 쥐새끼 같은 애송이 따위 금방 따라잡는 건데!

그리고 마침내 하늘이 그런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앞서 뛰던 계진이 일순 휘청하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최도훈이 희열에 가득 찬 눈을 번뜩이며 계진의 옷자락을 움켜쥐려 손을 뻗었다.

- 어엇!!!

그러나 그 순간.

계진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틀며 망설임 없이 최도훈의 등을 힘껏 밀었다. 최도훈은 그제야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적막이 내려앉은 비탈에 홀로 선 계진이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멎은 곳에는 흙투성이의 고급 구두 한 짝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무표정한 계진의 얼굴 위로 몇 시간 전, 최도훈의 눈을 피해 머리를 맞대고 속닥이고 있던 도진과 계진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 지도대로라면 이 비탈길을 올라가면 절벽일 거야. 거기까지 죽을힘을 다해 뛰어가서 그대로 밀어 버려.

도진이 꾸깃꾸깃해진 지도의 한쪽 지점을 가리키며 빠른 말투로 속삭였다.

- 최도훈이 진짜 날 죽이려고 할까.

- 그럼 네 눈엔 저 새끼가 하하 호호하면서 우리랑 상금 30만 달러를 나눠 먹을 것처럼 보이냐.

- 상금은 그냥 다 가져가시라고 하면 되잖아.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듯 중얼거리는 계진을 잠깐 바라보던 도진이 퉁명스레 내뱉었다.

- 그럼 뭐 마음대로 해. 어차피 너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니까 나 죽는 꼴 보고 싶으면 네 맘대로 하던가.

- 뭐래. 나 죽는 게 왜 꼭 확정인 것처럼 얘기하는데.

- 잘 들어. 최도훈 저 사람, 너랑 나랑 떨어지면 그 기회 절대로 놓칠 사람 아니야. 너 먼저 손 쓰면 나는 쉽게 해치울 수 있다는 것도 눈치 까고 있을 거라고. 웬만하면 나도 너랑 저 새끼랑만 보내고 싶진 않은데.

도진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보고 있던 계진이 말했다.

- 알았어. 알았어. 일단 수상한 낌새가 보인다 싶으면 네 말대로 할게.

계진의 말에 도진이 조금 안심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했다.

- 최도훈한테 지도가 없는 게 천만다행이지. 아무튼, 이대로만 하면 아마 괜찮을 거야.

말을 마친 도진이 계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서계진.

……. 나만 두고 가지 마.

계진이 그런 도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끊임없이 절벽에 부딪쳐 사라지는 사나운 파도 소리만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 가운데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한 아침 햇살이 소년의 얼굴을 비췄다. 항상 천진하게 빛나던 계진의 눈동자가 채 가시지 않은 어둠에 물든 듯 까맣게 번뜩였다.

장면이 바뀌고 미리 기다리고 있던 도진과 합류한 계진은 그제야 다시 원래의 계진으로 돌아온 듯, 도진이 무사히 탈취한 식량을 제멋대로 꺼내 먹다가 도진에게 타박을 들어가며 탈출 지점까지의 행보를 계속했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탈출 지점.

- 저기 보여!? 저기 배! 저거네 저거!

길게 펼쳐진 백사장의 끝.

작열하는 태양 아래 일렁이는 아지랑이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분명 한 척의 요트였다. 조금 전까지 목이 마르다 다리가 아프다 축 늘어져서 징징대고 있던 계진이 물 만난 고기처럼 펄쩍펄쩍 뛰며 소리쳤다.

- 서계진, 진정해. 진정.

도진이 뛰쳐나가려는 계진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 아 왜?

- 잊었어? 저쪽 팀. 얼마나 살아 있을지 모른다고.

도진의 나직한 목소리에 계진이 덜컥, 몸을 굳혔다.

두 사람이 숨죽인 채 주변의 기척에 귀를 곤두세웠다. 한참 그렇게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두 사람은 느껴지는 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빨리 가자. 누가 오기 전에 얼른 타고 뭍에서 멀어지는 거야.

도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래사장을 달리는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스크린 가득 울려 퍼졌다. 그리고 드디어 눈앞에 들어온 하얀 요트 한 척.

먼저 올라탄 계진이 도진을 돌아본 순간 도진의 등 뒤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 도진아!!!

계진의 절박한 목소리가 영화관 가득 울려 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