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엠케이 이 배신자
“…대체 이건.”
재이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완벽하게 당해 버렸다.
이건 두말할 여지 없이 자신의 실책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지?’
재이는 재빨리 기억을 되짚었다.
아직 데뷔 1년 차의 신인 그룹이었지만 뜰 놈은 뜨고 될 놈은 된다는 말마따나 파티의 인기는 가파르게 상승 중이었다. 코어 팬을 꽉 잡고 순조롭게 덩치를 불려 나가고 있는 팬덤도 그랬지만, 예능이나 드라마와 같은 연예계의 일반적인 영역에서도 멤버들은 꽤 괜찮은 활약을 보여 주고 있었다.
덕분에 업계에서는 차상혁 이후로 뜸했던 올라운더, 아이돌 팬덤과 일반 대중의 인기를 동시에 공략할 수 있는 신인돌이 나온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인이 상승세를 탔다는 말은 곧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의미였다.
음악방송, 라디오, 잡지 촬영, 예능, 인터뷰와 같은 방송 스케줄에 안무 연습, 각종 트레이닝, 체력 관리, 자체 콘텐츠, 거기에 틈틈이 SNS를 이용한 팬서비스까지. 자는 시간, 이동 시간을 넣지 않아도 이미 꽉 차고도 남는 일정이었다.
거기에 멤버들이 모두 모여야 하는 그룹 스케줄과 개개인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개인별 스케줄로 세분된 레이어를 더하면 하루, 일주일, 한 달의 개념이 아닌, 그저 분 단위로 쪼개진 시간축 위를 쉼 없이 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파티로서의 스케줄에 [눈떠도]의 홍보 활동이 제대로 겹쳤던 며칠 전까지는 그야말로 베개에 뒤통수를 댈 시간도 없이 바빴다. 겨우 한숨 돌리게 된 어제, 석관이 재이와 엠케이에게 말했다.
- 내일은 스케줄 다 빼놨으니 오래간만에 좀 푹 쉬도록 해.
- 와, 이게 웬일이래? 진짜요? 우리만? 다른 애들한테 욕먹는 거 아니예요?
엠케이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 말에 석관이 대답했다.
- 다른 애들은 너희 [눈떠도] 촬영 들어간 사이에 틈틈이 쉬었으니까. 거꾸로 이렇게 해야 공평하지.
- 와, 갓석관님! 팀장님 멋찌다! 최고다! 난 내일 하루 종일 잘 거야. 진짜 잠만 잘 거야.
- 그럼 그냥 지금부터 쭉 자.
만세를 부르다 못해 숙소 바닥을 굴러다니며 좋아하는 엠케이를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흘겨보며 재이가 말했다.
- 어쨌거나 하루밖에 못 빼 줘서 미안하네. 이번 활동 끝낸 후에는 좀 길게 잡아 줄게.
- 아뇨, 어차피 쉬어도 할 일도 없는데 이렇게 그냥 틈틈이 넣어 주시는 게 오히려 저는 편해요.
- 어휴 한재이 저 독한 자식. 형, 저는 나중에 꼭 몰아서 많이 길게 넣어 주세요! 전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게 꿈이라고요!
엠케이가 당찬 포부를 밝히고 있는데 타이밍 좋게 재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정민길에게서 온 문자였다.
[눈떠도 홍보도 다 끝나고. 우리 도진이 계진이 못 봐서 서운한데 혹시 심심하면 나랑 금쌤 연극하는 거 보러 오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문자,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는데.’
재이는 생각을 곱씹었다.
그땐 뜻밖에 얻은 휴일에 저도 모르게 기분이 들떠 그냥 넘겼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자로 잰 듯한 타이밍이었다.
‘그때 더 의심해야 했는데.’
재이가 생각을 이어 갔다.
석관이 돌아가고, 다른 녀석들은 라디오다 오디션이다 뭐다 해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숙소에서 엠케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 야, 우리 아예 정 선배님 연극 보고 잠깐 바깥 구경하고 들어올까, 내일?
- 잔다며?
- 다녀와서 자지 뭐.
- 수상한데.
- 뭐가?
- 잠을 이길 정도로 정 선배님의 연극이 보고 싶은 건 아닐 것 같은데.
- 뭐래. [눈떠도]에서 해 보니까 연기도 재밌을 것 같더라고. 연극 볼 기회도 흔치 않은데 이참에 다녀올까 하고.
잠시 머뭇머뭇하던 엠케이가 이어 말했다.
- 에이, 그래. 솔직히 연극은 반쯤 핑계고, 나가서 바깥 공기 좀 쐬고 오고 싶어서 그런다. 거리 돌아다녀 본 게 언제적 얘긴지 모르겠다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고. 이렇게 매니저 형들이 등 떠미는 대로 스케줄, 다음 스케줄, 또 다음 스케줄 막 이러면서 살다 보니까 내가 진짜 살아는 있는 건지 의심이 든다니까. 아무 생각 없이 거리 좀 쏘다니고 오면 나을 것 같은데.
엠케이에게 저렇게 감상적인 면이 있었던가. 하긴. 촬영 때도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 거 알면서도 최도훈을 절벽에서 밀어 버린 것 가지고 엄청 충격받은 표정이었지, 그러고 보니.
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하루 종일 숙소에만 처박혀 있으려니 벌써 지루해지려던 참이었다.
‘엠케이 이것도 애초에 한통속이었던 거구만.’
감상적인 엠케이라니.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조합이었는데.
그놈의 [눈떠도] 촬영에서 도찐개찐으로 하도 붙어 다녔더니 서계진이라면 끔찍이도 아끼는 서도진의 멘탈이 아직 눌어붙어 있었나 보다고 재이는 뒤늦게 후회했다.
‘그러면, 정수 형도 몰랐던 걸까.’
재이가 계속해서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 우선 석관이 형과 엠케이가 자신을 오늘 이 자리에 꼬여 내기 위해 한통속으로 일을 벌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마침 정 선배님의 연극이라는 그럴싸한 미끼까지 있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겠지. 그러면, 저 신출내기 매니저도 한통속이었을까.
- 석관이 형한테 얘기했지?
- 물론이지. 정수 형 붙여 주신대.
오전 공연인 정민길의 연극을 보고 새내기 매니저를 적당히 구슬려 거리 구경을 좀 하고 돌아오기로 엠케이와 계획을 짜고 아침 일찍 숙소로 자신들을 데리러 온 신입 매니저 홍정수를 슬슬 구스르기 시작했다.
- 무대만 다 보고 곧장 돌아오는 거다?
목적지인 공연장으로 차를 출발시키며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쳐다보며 말하는 홍정수에게 재이가 대꾸했다.
- 어, 이상하네?
- 그러게.
- …뭐가?
재이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엠케이가 맞장구치는 것을 본 홍정수가 경계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 석관이 형이 간만에 오프니까 잘 놀고 오라고 했는데요.
- 사고 치지 말고 사람들 눈에 띄지만 않게 해달라고.
두 녀석의 말에 홍정수의 얼굴이 일순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 표정은 들어온 지 2개월밖에 안 된 일반인이 일부러 냈다고는 보기 힘든 거였어. 그러니 적어도 그때까지 정수 형은 상황을 모르고 투입된 게 분명해.’
재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세운 계략인지 치밀했다. 앞뒤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뒤섞어 놓은 것이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함정치고는 정석적이었지만 그만큼 깔끔했다.
‘거기서 정수 형이 안 된다고 강하게 나왔다면 얘기가 좀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시용 기간도 끝나지 않은 신입 매니저가 거기서 자기주장대로 세게 나오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 그래서 밖에서 뭘 하고 싶은 건데.
홍정수가 한 발자국 물러난 듯한 말을 내뱉은 것에 재이와 엠케이가 신난다는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앞다투어 말했다.
- 옷 구경이요! 저 옷 좀 사고 싶은데.
- 그건 안 돼. 사람 몰리면 대책 없어진다. 가게에서 사진이라도 잘못 찍히면 큰일 나.
- 와 단호박. 처음에 석관이 형 봤을 때보다 더해.
- 크게 되실 분이야, 정수 형.
엠케이의 말을 홍정수가 딱 잘라 거절하자 두 사람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홍정수가 이번엔 재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 넌 뭐가 하고 싶은데?
홍정수의 물음에 재이가 대답했다.
- 저는 안경 가게요. 이번에 어비스 레이드 때문에 컬러 렌즈를 많이 껴서 그런가? 가끔 눈이 좀 침침하더라고요.
‘이때 엠케이 얼굴을 확인했어야 하는 건데.’
재이는 뒤늦게 후회했다.
어비스 레이드 탓인지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작업하는 시간이 길어진 탓인지 시력이 떨어졌다는 느낌을 받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안경을 낄 만큼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냥저냥 버티고 있었는데 [눈떠도] 촬영을 계기로 생각이 점차 바뀌게 되었다.
처음 서도진이 안경잡이 컨셉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만 해도 챙기기 귀찮겠다는 생각밖에 안 했던 안경이 직접 써 보니 의외로 괜찮았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잠시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이목을 끌거나 분위기를 환기할 타이밍을 만들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제작진이 서도진 용으로 맞춰 주었던 안경이 마지막 회 촬영에서 부서지는 일만 없었어도 그걸 그대로 썼을 텐데. 박송선과의 드잡이질에서 안경알 한쪽이 바닥에 부딪쳐 박살이 나는 바람에 안 그래도 아쉬웠던 참이었다.
‘쉬는 날에 한 번 나가서 안경을 하나 맞출까 한다는 말을 엠케이에게 흘린 것이 [눈떠도] 촬영이 끝날 때쯤이었으니까……. 장소 섭외하고 함정 파기에는 충분했겠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재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연극을 보고 대기실에서 정민길과 금정애에게 잠깐 인사를 건네고 나온 일행은 홍정수의 밀착 마크를 받으며 엠케이가 원하는 대로 요새 핫하다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수상한 낌새는 없었다.
자신들을 알아본 듯 지나가는 몇몇 행인들이 흘끔거리긴 했지만 요새 분위기가 그렇듯 오프날 쉬러 나온 것 같아 보이는 연예인들에게 다짜고짜 다가와 알은척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물론 같이 다니는 홍정수의 덩치가 남다른 탓도 없지 않아 있었겠지만.
상황이 묘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홍정수가 찾아 뒀다는 근처의 안경원에 발을 들여놓고 난 뒤였다. 인제 와서 돌이켜 보면 홍정수가 알아 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보고 받은 석관이 그 안경원으로 데리고 가라고 지시를 했던 것이리라.
어쨌거나 안경테를 고르고, 재차 시력을 측정하고, 마침 도수에 맞는 렌즈가 있으니 곧바로 제작해 줄 수 있다며 좀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었다.
평일 오후. 홍정수가 일부러 번잡한 번화가를 피해 찾아냈다는 동네 상가 한 구석의 작은 안경 가게는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손님도 없이 한산했다. 안경사가 작업하는 사이 무료해진 엠케이가 먼저 차로 돌아가 잠이라도 자고 있겠다고 말을 꺼냈다.
마음 같아선 자신도 함께 돌아가서 자고 싶었지만, 안경이 완성되면 써 보고 확인도 해야 하니 그럴 수도 없었던지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엠케이가 사라지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홍정수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일단 결제부터 하겠다고 하더니 카드를 긁자마자 급한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떴다.
뭔가 이상한데? 라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타이밍 좋게 나타난 안경사가 새 안경을 건네주었다.
안경사에게 안경을 건네받아 쓰고 시야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홍정수가 돌아오지 않자 뒤늦게 재이의 머리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이건 분명 뭔가 이상했다.
눈앞에서 인자하게 웃고 있는 저 안경사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에게 물어봤자 별로 영양가 있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재이는 힐끔 가게 구석의 낡은 CCTV를 쳐다보았다. 저 카메라 너머에 있는 것이 보안업체가 아닌 정체 모를 방송사 제작진과 가증스러운 엠케이, 그리고 곰 같은 홍정수라는 데에 아까 먹은 치즈 샌드위치를 걸 자신이 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가 시작된 듯했다.
‘일단 돈도 없고. 핸드폰… 도 없네.’
자신의 현재 상황을 점검하던 재이는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차에 돌아가겠다던 엠케이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배터리 충전을 부탁한 것은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이었다.
엠케이 이 배신자.
‘아니야. 분명 그 상황에서 내가 먼저 말을 안 꺼냈으면 어떻게 해서든 핸드폰을 빼앗아 갔겠지.’
그래도 자신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그 괘씸한 배신자의 수고를 덜어 줬다는 생각에 재이는 눈썹을 와락 찌푸렸다. 어서 가 보지 않고 왜 거기 서 있냐는 듯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노부부에게 어색하게 인사하고 안경원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한산한 동네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으와아아아앙. 으어아아앙.”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한 명이 우두커니 서서 울고 있었다.
“…대체 이건.”
재이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하고많은 프로그램 중에 또 애들이랑 엮이냐고.
재재님이 뽀통령을 능가하는 인기를 구사하는 중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재이는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어려웠다. 그냥 아이들도 어려운데 우는 아이라니. 재이는 같이 울고 싶어지는 것을 꾹 참으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왜 울고 있어? 길 잃었니?”
무릎을 굽히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조심스럽게 묻자 우는 게 연기가 아니었던 듯 진짜 눈물을 그렁그렁 담은 얼굴로 아이가 재이를 바라보았다.
“심… 심부르음… 히끅. 힘부름…….”
…아니 대체 누가 아직 학교도 안 간 애한테 혼자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시켜.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새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