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더니
“심… 심부르음… 히끅. 힘부름…….”
아무리 한적한 동네 길거리라고 해도 길한복판에서 혼자 서서 울고 있는 어린이에게 아직 애가 있을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자신이 다가가 말을 거는데도 아무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다니.
재이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자신들을 보고도 못 본 척 그대로 거리를 지나는 사람이나 저기 저쪽에서 가판대에 놓인 물건들을 정리하는 척하면서 연신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는 슈퍼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재이는 이것이 모두 사전에 협의된 상황임을 확신했다.
“어허어어엉…….”
잠시 한눈을 판 틈에 다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한 아이를 쳐다본 재이가 짧게 한숨을 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 잡혀 있던 스케줄 중에 아이와 관련된 게 있었던가.
파티의 기획을 담당하는 심진우나 스케줄 전반을 책임지는 김석관이나 당사자에게 사전에 상의 없이 일을 넣는 타입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분명 어딘가에서 언질이 있었을 터였다.
‘…아. 그게 이렇게 들어오나?’
재이는 한 가지 떠오른 가능성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추측이 맞다면 KBC에서 하는 예능일 가능성이 컸다. 예전에 석관이 지나가는 말로 그쪽 제작진에서 재재님 한번 모시고 싶다고 엄청 컨택이 오는데 아무래도 언제 한번 시간 비워서 출연해야 될 것 같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근데 그때 어비스 레이드 뛸 때라 이미지 상충된다고 결국 뒤로 미뤄지지 않았던가.’
그걸 이렇게 들이민다고? 오프라며? 하루만 줘서 미안하다더니.
…전에 한 말은 취소야. 바쁜 거 끝나면 나도 길게 쉬게 해 달라고 해야지.
재이는 속으로 오늘 아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오프를 만끽하길 바란다고 인사하던 김석관을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일단 이 아이가 단서를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은데.’
문제는 지금 뭔갈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주변을 훑어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사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 따위 몰랐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 사람의 관심을 이쪽으로 끌어야 한다는 것.
자고로 어떤 일이든 어그로가 중요한 법이었다.
“와, 저것 좀 봐!!”
재이가 놀랍다는 듯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자 열심히 울고 있던 아이가 재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이가 아이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저기 저거 보여? 지렁이!”
재이가 가리킨 곳에는 어젯밤 내린 비에 홀려 외출했다가 돌아갈 타이밍을 놓친 듯 화단 끄트머리에서 헤매고 있는 지렁이 한 마리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중인가 봐.”
어느새 지렁이 가까이에 다가가 자신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쪼그려 앉은 아이에게 재이가 말했다. 그 말에 아이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외쳤다.
“근데 지렁이가 안 움직여요, 재재님!”
재이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와,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았어?”
“그냥 보면 아는데.”
“안경 쓰고 있는데도?”
“아빠도 안경 쓰는데.”
대답과 함께 아직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을 팍 찡그리는 것이 대충 우리 아빠도 안경 썼다 벗었다 하는데 그래도 다 알아본다, 지금 어리다고 무시하냐, 뭐 그런 의미인 듯했다. 재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아빠도 안경 쓰시는구나. 근데 넌 이름이 뭐야?”
“새림이요.”
“그래, 새림아. 그럼 우리 우선 얘부터 살려 줄까?”
“네!”
언제 울었냐는 듯 씩씩하게 대답한 아이가 근데 그래서 뭐 하면 되냐는 듯한 눈빛으로 재이를 올려다보았다. 재이는 두리번거리다가 또다시 자신과 눈이 마주친 슈퍼 아주머니에게 빙긋 웃어 보이고는 뛰어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 나? 아하하, 그래요. 네. 안녕하세요.”
“저기 혹시 물 한 컵만 얻을 수 있을까요? 수돗물이어도 괜찮은데.”
“응? 뭐하게?”
아주머니의 물음에 재이가 씩 웃으며 어깨 너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기대에 찬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어린아이와 그 발치의 지렁이 한 마리를 쳐다본 아주머니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게 안쪽에서 물을 받아다 주셨다.
“감사합니다!”
재이는 물컵을 받아 아이에게 쥐여 주며 말했다.
“자 그럼 새림이가 얘를 도와줘.”
“응!”
아이가 신나서 어깨를 들썩였다. 조심조심 물을 한 컵 부어 주고 그대로 다시 둘이 쪼그리고 앉아서 얼마간 구경하고 있자 지렁이가 꿈틀대며 흙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움직인다!”
“다행이다.”
“와 우리가 살렸어. 우리가 살렸어!”
“잘했네. 그럼 이거 아주머니한테 돌려 드리고 올래?”
“네!”
아이가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뛰어서 물컵을 돌려 드리고 그사이 흙 속으로 사라진 지렁이를 찾아 화단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재이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근데 새림아.”
“응?”
“심부름 뭐였는데?”
“응? 아!”
새림이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어깨에 메고 있던 크로스백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이거.”
아이가 내민 것은 한눈에 봐도 수상해 보이는 편지 봉투였다.
‘그럼 그렇지.’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아이를 향해 말했다.
“이게 뭔데?”
“몰라요. 엄마가 재재님 만나면 주랬어. 근데 기다렸는데도 재재님이 안 오잖아.”
덥고 다리 아프고 무서운데.
아이가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재이가 자신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새림이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재재님이 늦었구나. 그래도.”
다음 말이 궁금해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재이가 말을 이었다.
“덕분에 지렁이는 구했잖아?”
“응!”
아이가 따라 웃었다.
좋아. 이걸로 분위기는 잡았고.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새림에게서 건네받은 봉투를 열어보았다.
- 새림이와 함께 XX 초등학교로 오세요 -
…어, 근데 거기가 어디죠.
재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주변을 힐끗 돌아보자 자신이 새림이와 지렁이 구출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아주 노골적으로 수상해 보이는 가방을 이쪽으로 들이밀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배달원 복장의 사람과 역시 그 안에 뭐가 들었을지 너무 뻔해 보이는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촬영 중이라 이거네.’
재이는 내심 중얼거리고는 아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새림아, XX 초등학교가 어딨는지 알아?”
“응! 알아!”
“재재님 거기로 가야 되는데, 새림이가 좀 도와줄 수 있어?”
“응! 엄마가 재재님 만나면 같이 거기로 오라고 했어!”
아 그래.
넌 다 알고 있었구나. 그럼 처음부터 얘기 좀 해 주지.
‘하긴, 애들이 다 그렇지.’라고, 누가 들었으면 ‘너님도 아직 애인데요.’라는 소리를 들었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재이가 새림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새림이가 재재님 좀 데려다줄래?”
“좋아!”
아이가 작은 손으로 재이의 손을 맞잡으며 명랑하게 대답했다.
* * *
“재재님! 저기, 저기 냐냐! 쟤랑 쟤랑! 보여?”
“어? 어어. 보여.”
“진짜 보여?”
“어, 보여. 갈색.”
“아닌데? 노랑인데? 저거 봐, 저거 봐.”
“으응.”
“보고 있어? 저기, 저기야.”
“아아… 그래, 저 담 위랑 저기 지붕 위에 있다.”
“응, 저기 위에랑 저기 위에.”
영혼 없는 리액션은 그냥 넘기지 않는 아이의 끊임없는 질문에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대답하면서 재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새림아, 그래서 XX 초등학교가 어디라고?’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 지 체감상 반나절은 된 것 같은데 이놈의 초등학교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두 사람은 아직도 동네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새림이에게 물었지만 ‘이게 맞는 길’이라는 단호한 대답만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우선 화단이 예쁘게 정리된 집 앞에서 유치원에서 배웠다며 꽃 이름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새림이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는 그 옆 놀이터에서 놀이기구 하나하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뒤 모래 터에서 두꺼비집을 하나씩 완성했다.
그 뒤로 장난감이 잔뜩 들어차 있는 문구점 쇼케이스 앞에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올해 추석과 크리스마스, 새해와 내년 어린이날까지 이미 꽉 차 있는 새림이의 ‘받고 싶은 선물 리스트’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자전거를 탄 미니 인형과 킥보드를 탄 미니 인형은 같은 미니 인형이어도 같은 미니 인형이 아니라는 새림이의 설명에는 어지간한 맷집의 재이조차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조금 잘 걷는다 싶더니 길고양이를 따라 샛길로 빠진 듯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막다른 길이었다.
“새림아, 근데 학교는…….”
“어? 재재님! 재재님!!!”
새림이에게 그래서 학교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고 물으려던 재이는 아이의 다급한 손짓에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의 끝에는 어떻게 올라간 것인지 어른 키보다 높은 나무에 올라간 새끼 고양이가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재이는 슈퍼에서부터 슬슬 자신들을 쫓아오고 있는 수상한 배달원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도 당황한 듯 새끼 고양이 쪽을 보고 있는 것이 예정되었던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요즘 세상에 아무리 말 못 하는 동물이라도 방송에서 저런 식으로 썼다가는 욕먹기 딱 좋지.’
게다가 저렇게 아직 새끼인 녀석을.
재이는 다시 나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끼 고양이는 나무 위로 올라간 것까진 좋은데 내려올 수가 없어서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모양이었다.
아무리 고양이라도 저 높이에서 맨바닥으로 떨어지면 무사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게다가 딱 보기에도 다 컸다고 보기엔 너무 작아 보이는 녀석이 제대로 된 착지 스킬을 익히고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119를 부르는 게 나을지ㄷ…….
“어엇!!!”
“꺄악!!!!!!”
구조대를 부르는 게 좋겠다고 생각 중이던 재이는, 순간 새끼 고양이가 발을 헛디디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새림이와 배달원이 비명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재이가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나무 아래로 뛰어들어 빠르게 떨어져 내리던 녀석을 품 안으로 받으며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뒤늦게 뛰어온 새림이가 그새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물었다.
“재재님! 괜찮아요? 냐냐 괜찮아?”
“아. 괜찮아.”
재이가 제 품에 안긴 새끼 고양이를 내밀어 보이며 웃었다.
“와아. 이쁘다.”
확실히 예쁘긴 예쁘게 생겼네.
재이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품이 낯설지도 않은지 얌전히 안겨 있는 것이 원래 누가 키우던 고양이인 것은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그럼 이제 갈까?”
“안 돼! 재재님 안 돼!”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려는데 갑자기 큰소리로 외치며 재이를 막았다.
“왜?”
“의사 선생님께 가야지.”
“누가? 나 괜찮은데, 새림아.”
“재재님 말고. 냐냐.”
음, 새림아? 나 지금 좀 상처 받았다?
재이는 당연히 자신을 걱정해 주는 줄 알았던 아이의 눈이 제 품에 안겨 있는 새끼 고양이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새림아, 얘는 두고 가자. 엄마가 찾으러 오면 어떡해.”
“나무에서 울고 있는데도 엄마 안 왔잖아요.”
똑똑하네.
“다른 사람이 키우던 아이인데 잠깐 산책 나온 걸 수도 있어.”
“애기는 혼자 안 다녀요. 다섯 살은 넘어야 혼자 다닌다고요.”
나처럼요.
새림이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우리 새림이가 다섯 살이었구나.
“그렇다고 해도 무턱대고 얘를 데리고 갈 수는…….”
“커다란 강아지가 물어가면 어떡해요.”
새림이가 울상을 지었다.
아. 안 돼. 어떻게 달래 놓은 건데.
또 울려고 하잖아.
“여기 커다란 새야도 살아요. 까맣고 커다란 새야요.”
까마귀 얘기구나.
말하면서 점점 겁이 났는지 아이의 얼굴에 본격적으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안 돼. 여기서 울기 시작하면 오늘 안에 학교에 못 갈지도 몰라.’
생각을 정리한 재이가 다급하게 말했다.
“오케이. 알았어. 그럼 일단 학교까지는 같이 가자. 학교에서 새림이가 엄마 만나면 의사 선생님께 데려다 달라고 하는 거야. 어때?”
재이의 말에 당장이라도 울 것으로 보이던 아이가 방긋 웃었다.
“좋아요!”
“그럼 얼른 학교에 가자.”
“네!”
“얼른 와요, 재재님. 빨리 가요! 이쪽이야!”
‘아까랑은 태도가 전혀 다르잖니, 새림아.’
이미 멀찍이 뛰다가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재촉하는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불편할까 봐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새끼 고양이는 재이의 품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얌전히 안겨 있을 뿐 별 반응이 없었다.
진짜 집고양이인 거 아닌가.
아무래도 이따가 돌아와서 몰래 놔줘야겠다.
재이는 내심 중얼거리며 새림이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XX 초등학교.
“정수 형, 혹시 물 가진 거 있으세요?”
“응? 아, 여기.”
초조한 표정의 엠케이가 근처에 있던 매니저 홍정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가 건네는 생수병을 들고 그대로 들이켜는 엠케이를 카메라가 제대로 찍고 있는 것을 확인한 피디가 엠케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불안하신가 봐요?”
피디의 물음에 엠케이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여기서 같이 기다려야 하는 거였으면 안 한다고 했을 거예요.”
엠케이의 대답에 피디가 웃으며 되물었다.
“재이 씨가 그렇게 무서워요?”
“피디님도 피디님이라고 너무 마음 놓고 계시지 마세요. 수틀리면 어디까지 들이박을지 모르는 녀석이라고요.”
진지한 얼굴로 피디에게 충고하는 엠케이의 말을 듣고 있던 누군가가 끼어들며 말했다.
“아이한테는 다정하지만 멤버들한텐 가차 없는 캐릭터라니. 이야, 한재이 씨 캐릭터 탐나네.”
“진심이세요?”
엠케이가 어이없다는 듯 이번 프로그램에서 재이와 팀을 이루어 움직이게 될 출연진 중 하나인 개그맨 송호칠을 돌아보며 물었다.
재이를 상대로 몰래카메라를 시도한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운 프로그램은 KBC의 육아 예능 [도와줄게 친구야] 였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서 직접 모집한 사연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원하는 일을 해낼 수 있도록 출연자들이 도와준다는 컨셉의 예능으로 ‘육아’라는 시청률 불패 키워드에 힘입어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고수하고 있는 KBC의 주력 예능 중 하나였다.
재재님이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하자 끈질기게 출연요청을 해 오던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지난번 유치원 예능 때 경험한 바로 유독 체력과 정신력 소모가 큰 것이 육아 예능이었다.
그동안 앨범 활동이다 뭐다 해서 줄곧 고사해 왔는데 결국 더 이상은 피해 다니기가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나마 장기 출연이 아니라 에피소드 하나로 타협을 봤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KBC의 주력 예능답게 저 의심 많은 한재이를 속이려 그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부터 안경점 주변의 거리를 미리 통제하고 노련한 엑스트라를 배치하는 등 몰래카메라에도 제법 심혈을 기울인 티가 났다.
그러나 재이를 맞이하기 위해 학교에 모인 촬영팀과 합류한 엠케이가 바라본 내부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무엇보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는 메인 출연자 송호칠이 별로였다. 엠케이와 인사를 나누며 대놓고 자신은 아이도 없고 아이돌은 걸그룹밖에 관심 없다면서도 재재님의 네임 밸류는 탐난다고 노골적으로 내뱉는 그 말투부터 이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송호칠은 모니터 너머로 재이가 우는 아이를 재치 있게 달래 학교쪽으로 향하면서도 자꾸 샛길로 새는 아이를 재촉하지 않고 그저 아이를 따라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대체 왜 빨리빨리 오지 않냐고 연신 투덜대고 있었다. 그나마 옆에서 그 성질을 받아주고 있는 또 다른 출연자이자 그의 후배 박여울이 좀 제대로 된 사람 같아 보일 뿐이었다.
아 진짜, 하필 해도 왜 이런 사람하고.
엠케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더니.
애초에 한재이가 속아 넘어가는 모습 따위 궁금해하지 말았어야 했어. 이럴 줄 알았다면 몰래카메라에 협조해 달라는 오퍼 따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수락하지 않았을 텐데.
‘한재이가 날 죽일 거야. 한 번 말고 여러 번 죽이겠다고 할 듯.’
괜찮아. 그래도 갈 땐 석관이 형도 같이 갈 테니 저승길이 외롭지는 않을 듯.
…조용히 중얼거려 봤지만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교문 쪽이 소란스러워지며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아-!!!”
낯선 사람들 틈에서 엄마를 찾았는지 우다다 뛰어가는 어린아이의 뒤로 모두가 기다리고 있던 한재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재이 그 꼴 무엇?”
엠케이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