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도와줄게 친구야
교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엄마를 발견하고 우다다 뛰어간 아이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한 사람.
주변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쏠리는 이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특유의 그 무심한 얼굴을 한 채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은 분명 아까 안경원에서 헤어진 한재이가 맞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외출하기 전, 평범함을 연기해 보겠다며 일부러 골라 입던 흰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한쪽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한재이 꼴 무엇?”
엠케이는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주변을 쓱 훑던 재이의 시선이 곧장 자신을 향했기 때문이었다.
“아하하. 와, 왔어? 근데 네 꼴이 그게 뭐야, 어디서 넘어지기라도 했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애써 침착한 척 웃으며 재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이쪽을 노려보던 재이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어, 오다가 잠깐. 얘 때문에.”
“뭔데? 진짜 구른 거야? 피디님, 정수 형, 한재이 팔꿈치 까진 것 같은데요?”
재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엠케이가 카메라 너머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매니저와 피디에게 말했다. 상처를 살피고 지저분해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자리를 옮기기로 한 재이가 그때까지 자신이 품 안에 안고 있던 것을 엠케이에게 건넸다.
“으와아, 너무 귀엽잖아!”
- 냐아…….
재이가 건넨 것은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끼 고양이였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낯선 이의 시선에 경계 섞인 울음소리를 내는 녀석을 바라보며 엠케이가 저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고양이는 엠케이의 품이 낯선지 불편하게 애옹거리고 있었다.
“잠깐 얌전히 있어. 금방 올게.”
당장이라도 엠케이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듯 버둥대던 녀석이 재이의 목소리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 움직임을 멈췄다. 대신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본 재이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영리하네.”
팔꿈치의 상처를 치료하고 스타일리스트가 가져다준 새 의상으로 갈아입느라 재이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새끼 고양이는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불안한 듯 애옹거렸다. 잠시 후, 말끔한 모습으로 이쪽으로 걸어오는 재이의 기척을 감지하자마자 새끼 고양이는 엠케이의 품속에서 뛰쳐나와 재이에게로 뛰어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엠케이가 아쉬운 듯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재이에게 물었다.
“아니 대체 걔는 갑자기 어디서 데려온 거야?”
“재재님이 구해줬어요! 이렇게! 이렇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재이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어린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엠케이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온몸으로 조금 전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재재님이랑 학교로 오고 있었는데요. 꽃 이름 다 불러 주고 놀이터에서 시소도 타고요. 전에 있던 시소는 쿵 하면 엉덩이 아야 했는데 지금은 쿵 해도 아야 안 하는 시소인데요. 근데요 해준이랑 타면 꼭 엉덩이 쿵 하고 내려요. 그래서 시소보다 그네가 더 좋은데요, 왜냐하면 그네는…….”
“새림아, 냐냐 의사 선생님께 데려다줘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맥락도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는 아이의 말을 능숙하게 끊으며 아이의 엄마가 물었다.
“아 맞다! 재재님, 냐냐 의사성생님한테 데려다주자요.”
빨리 동물 병원으로 가자고 재촉하는 아이의 말에 재이가 웃으며 말했다.
“음, 재재님은 여기서 이 아저씨들하고 얘기할 게 있어서 지금은 곤란한데. 새림이가 나 대신 좀 데려가 줄래, 그럼?”
“응! 응!”
흥분해서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아이에게 새끼 고양이를 건네주려던 재이는 의외의 난관에 부딪혔다.
냐- 냐아-
“…응?”
조금 전까지 재이의 품에 얌전하게 안겨 있던 녀석이 발톱을 바짝 세워 옷깃을 붙잡고는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딜 어떻게 봐도 명확한 의사 표현에 주변 사람들이 잠시 멈칫하고 있는 사이 새림이가 말했다.
“그래쩌어? 냐냐누운 재재님이라앙 가치 이꼬 시퍼쩌어?”
자기도 안 쓰는 혀 짧은 발음으로 새끼 고양이에게 말을 건넨 새림이가 재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재재님, 냐냐는 재재님이랑 있고 싶대.”
…어, 그런 것 같긴 한데.
재이가 망설이는 사이 새림이가 이어 말했다.
“재재님이 의사성생님한테 데려가요.”
아니 말이 왜 그렇게 돼.
당황한 재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어느새 가까이서 두 사람을 찍고 있던 카메라맨이 놓치지 않고 렌즈에 담았다.
“어 근데 재재님이…….”
“제가 근처 동물 병원 수배해 놓을게요.”
눈치 빠른 조연출이 손을 번쩍 들며 외치자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신호로 주변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약속.”
“어? 어어.”
“약소옥, 도자앙, 복사아. 됐다!”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아이에게 제대로 대꾸도 못 한 채 아이가 하자는 대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고 있는 재이의 모습이 신기한 듯 옆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엠케이가 끼어들었다.
“와, 벌써 한재이 말고 재재님 모드인거야? 내가 아는 한재이는 이럴 리가 없는ㄷ…….”
“너는 끝나고 나 좀 보자.”
아이를 보던 것과는 180도 다른 눈빛으로 뒤를 돌아본 재이가 짧게 내뱉었다. 그 차가운 한마디에 엠케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 내가 지금 태평하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엠케이는 이쪽을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던 송호칠과 박여울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아, 저기. 송호칠 선배님이랑 박여울 선배님.”
“요, 한재이 씨 안녕? 아니다. 여기선 재재님이라고 해야 하나? 나 알지? 송호칠이야. 여기서는 부캐로 밀고 있으니까 앞으로는 피그맨이라고 불러줘.”
송호칠이 프로그램에서 쓰고 있는 자신의 부캐를 소개하며 이어 말했다.
“어때? 나도 재재님만큼 클 수 있을까?”
다짜고짜 뭐라는 거야, 이 사람.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하던 재이가 황당함에 눈썹을 살짝 찌푸리는 사이 송호칠의 옆에 있던 박여울이 뒤따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재이씨. 박여울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안녕하세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들.”
두 사람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재이가 엠케이를 슬쩍 돌아보았다.
설마 나보고 지금 이 사람들하고 같이 뭘 하라는 건 아니겠지?
자신을 바라보는 재이의 눈빛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엠케이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젠장, 석관이 형, 이 배신자. 차인혁 스케줄에 붙어야 한다고 정수 형이랑만 다녀오라고 했을 때 죽어도 싫다고 뻗댔어야 하는 건데.’
드디어 염원하던 드라마 오디션에 붙어 첫 촬영을 시작한 차인혁을 챙기기 위해 그쪽으로 붙은 김석관이 정말 미안하다며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고 재이가 의외로 너한테 무르니까 별일 없을 거라고 하던 것을 떠올리며 엠케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요, 형. 쟤는 나한테 무른 게 아니라 우리 아빠 재력에 무른 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엠케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카메라 너머 제작진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참, 이제 한재이 도착했으니 저는 퇴근해도 되죠?!”
“잠깐만요, 엠케이 씨.”
등 뒤에서 들려온 재이의 서늘한 목소리에 스태프들에게 대충 인사를 건네며 촬영장에서 몸을 빼내려던 엠케이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믿지도 않는 세상의 온갖 신들에게 싹싹 빌며 그를 돌아보자 재이가 태연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오늘 오프라 스케줄 없잖아요?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촬영 끝날 때까지 응원 좀 해주고 가지 그래요?”
먼저 돌아가면 가만 안 둔다는 말을 우아하게 돌려 한 재이가 엠케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차가운 눈빛에 어깨를 움찔한 엠케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재이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래서, 몰래카메라는 왜 하신 거예요?”
어딘지 좌중을 압도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 재이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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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 워밍업도 하고 서로 얼굴도 익힐 겸 마련한 자리인 거죠. 근데 모니터로 보고 있자니 함정인 거 금방 눈치채는 것 같던데. 역시 순발력이 남다르네요. 아이돌이라서 그런가?”
KBC 조학진 피디는 친근하게 웃으며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자신이 새로 맡게 된 [도와줄게 친구야]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겉으로는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워 보였지만 시청률 추이는 언제부턴가 줄곧 하락세였다. 내부에서는 동 시간대 1위 타이틀도 다음 주쯤이면 타사 쪽에 빼앗길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개편 시즌을 맞아 자신이 새로 연출을 맡게 된 것도 하락세인 프로그램에 새 바람을 넣어 주길 기대하는 윗선의 바람이 작용한 결과였다.
조학진이 보기에 시청률 하락을 잡기 위해서는 연출을 바꾸는 것보다 캐스팅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메인 진행을 맡고 있는 송호칠의 경우 스태프들이나 게스트 출연자들에게 종종 무례한 코멘트를 던지곤 해서 골치를 썩였다. 요새는 거기에 성적 부진이 주는 초조함이 배가된 탓인지 적절치 못한 개그로 제작진들조차 편집점을 못 찾을 정도로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아이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에 진행자 멘트가 지저분하다는 평이 돌기 시작하자 안 그래도 지지부진하던 시청률은 더욱 빠르게 곤두박질쳤다. 제작진으로서는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시청률이 더 하락한다면 송호칠의 하차가 아니라 프로그램의 존폐를 논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CP까지 동원되어 매달린 끝에 성공한 한재이 a.k.a. 재재님의 섭외는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뽀통령을 제치고 떠오른 아이들의 새로운 우상이자 열성적인 팬덤을 구축하며 승승장구 중인 대세 아이돌. 거기에 얼마 전 차상혁의 입대 전 마지막 작품이라는 입소문을 타고 히트친 ZTBC [불탐정]에 이어 최근에 랜플릭스 마니아층을 사로잡은 [눈떠도]까지. 요새 잘나가는 연예인을 꼽으라고 하면 한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이 바로 저 눈앞의 한재이 녀석이었다.
그러니 조학진 피디에게 한재이, 즉 재재님이란 한정된 시간 안에 단물 쓴 물 안 나올 때까지 최대한 쪽쪽 빨아먹어야 할 보약 같은 존재였다. 조학진 피디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옆에 있던 송호칠이 먼저 물었다.
“근데 거기서 여기 오는데 뭐 그렇게 오래 걸렸어? 난 또 오는 김에 부산 대구 찍고 오는 줄 알았잖아.”
그 말투에서 상대를 타박하는 기색이 묻어남을 눈치채고 조학진 피디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호칠 씨, 우리 복덩이한테 그게 무슨…….’
조학진이 한마디 하려는데 그것보다 먼저 송호칠의 옆에 서 있던 박여울이 허리에 손을 얹고 외쳤다.
“피그맨! 재재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에요?”
“와 뭐야, 재재님 오셨다고 난 이제 나가리인 거야?”
“그럼 천하의 재재님이랑 듣보 피그맨을 같이 취급해서야 되겠습니까?”
“와, 진짜. 두고 봐라. 나도 쟤 만큼 뜰 테니까. 나중에 아쉬운 소리 해도 짤없을 줄 알아, 진짜.”
투덜거리는 송호칠의 말을 못 들은 척 흘려 넘긴 박여울이 재이를 향해 한껏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재재님. 새림이랑 같이 오시는 길은 어떠셨어요? 저희가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걸린 걸 보니 엄청 재미있으셨나 봐요?”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라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이쪽을 향해 묻는 박여울의 친근한 태도에 재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새림이가 예쁜 거 보여 준대서 따라다니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덕분에 얘랑도 만나고 재밌었죠, 뭐.”
대답과 함께 재이는 제 품에서 이제 아예 잠들어 있는 새끼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서 촬영 끝내고 동물 병원 들렀다가 풀어 줘야지.’
재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엠케이가 끼어들었다.
“으와, 너무 귀여워. 석관이 형한테 우리 숙소에서 고양이 키워도 되냐고 물어보자! 고양이는 그렇게 손이 많이 가지도 않는다며? 아니 손이 많이 가면 또 어때? 집사가 여섯이나 되는데! 게다가 로드 형들하고 석관이 형까지 보태면 얘 하나 못 기르게…….”
낯선 사람들의 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이의 품에서 잠들어 버린 새끼 고양이를 신기한 듯 이리저리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이던 엠케이가 재이와 시선이 맞자 갑자기 화들짝 놀라 말꼬리를 흐렸다.
“아앗, 어, 그. 음, 그래, 네가 주운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해. 난 조용히 있을게.”
그제야 조용해진 엠케이를 힐끗 돌아본 재이가 조학진 피디와 송호칠, 박여울을 차례로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저희가 뭘 하면 되는데요?”
눈빛 하나로 엠케이를 제압한 재이를 감탄스럽다는 듯 쳐다보던 조학진 피디가 태블릿을 꺼내 들며 말했다.
“이게 이번에 재재님이 도와주실 친구의 영상이에요.”
피디가 내민 영상 속에는 똘똘해 보이는 아이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있었다.
- 선유 노래 잘해요. 선유 노래 들을래요?
아이의 눈동자가 화면 너머의 재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린 두 눈동자 속에 얽힌 감정을 읽은 재이가 불편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 아, 제발.’
이래서 애들하고는 얽히고 싶지 않다고.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