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배신의 대가
- 선유 노래 잘해요. 선유 노래 들을래요?
아이의 눈동자가 화면 너머의 재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린 두 눈동자 속에 얽힌 감정을 읽은 재이가 불편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런 눈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던 아이를 한 명 기억하고 있었다. 화면 속 선유의 까만 눈동자와는 전혀 다른 색깔의 눈을 가진 아이였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비슷했다.
상대를 향한 순수한 믿음과 기대, 그리고 설렘으로 가득 찬 눈동자.
‘…아, 제발.’
앞으로 만나게 될 선유가 자신이 기억하는 그 아이보다는 대하기 쉬운 상대이길 바라며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저쪽 동네에서 있었던 일이다.
교단과 황실은 기본적으로 서로 사이가 나빴으나 3년에 한 번 추수철에 행해지는 감사제 기간만큼은 신께서 인간에게 내린 은총 아래 대동단결했다. 물론, 잘나신 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인 만큼 겉으로 보기에나 대동단결이지 물밑 싸움은 한층 더 더럽기 그지없었지만.
어쨌거나 리온은 그날, 황실에서 주최하는 감사제 전야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간만에 황궁에 들어와 있던 참이었다. 대륙 제일의 위상을 자랑하는 황제의 거처가 있는 곳답게 황궁은 언제와도 매번 새롭게 느껴질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했다.
덕분에 여기저기서 자신을 발견하고 들러붙는 사람들을 피해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던 리온은 백전불패, 대륙 제일의 용사라는 칭호가 부끄럽게도 만찬 회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후우, 그래서 여기가 대체 어디야.”
리온은 한숨과 함께 너무 잘 손질해 놓은 탓에 온통 거기가 거기처럼 보이는 정원 한복판에 멈춰 서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도 제대로 잘못 든 모양이었다. 세 걸음 가면 한 번씩 마주치던 근위병들조차 어느샌가 마주치지 않게 된 것이 어딘지는 몰라도 제대로 깊숙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이런 데서 발각되면 혹시 황궁 출입 금지 같은 거 먹여 주지 않을까.”
칼로 찔러도 칼이 부러지지 저는 흠집 하나 날 것 같지 않은, 강철 같은 인상의 근위기사단장을 떠올린 리온이 중얼거렸다. 그건 그것대로 좋을지 모른다고 중얼거리며 내키는 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리온은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흑. 흐윽.”
쿨쩍 패앵.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뒤돌아 힘껏 달리는 거다, 리온.’
리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두운 밤 황궁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라니.
어느 쪽으로 통수를 굴려 봐도 귀찮은 일이 벌어질 조짐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 조건 값에 리온은 조용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의 뜻이란 때때로 알 수가 없는 법.
마음만 먹으면 수백의 단련된 병사들 사이도 들키지 않고 누빌 수 있는 능력의 리온이었지만 그날따라 운은 그의 편이 아닌 듯했다.
바스락.
불세출의 영웅이 뒷걸음질 치다가 얼결에 낸 기척에 방금 전까지 들려오던 훌쩍임 대신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후웅-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검이 기세 좋게 파고들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 공격을 옆으로 흘려 보낸 리온은 재빨리 간격을 널찍이 벌렸다. 자신의 위협이 먹히지 않았음에 당황한 듯 상대가 순간 멈칫한 틈을 타 리온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신의 영광이 언제나 함께하시길. 리온입니다, 황태자 전하.”
손이 귀한 황실에 어린아이라고는 황태자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황궁 내에서 이렇게 날카로운 기세로 순식간에 수상한 기척을 잡아내는 실력의 기사를 곁에 둘 만한 이도 만찬 회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황태자가 유일했다. 리온의 목소리에 호위기사의 등 뒤로 금빛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못 본 새 많이 크셨네. 전에 봤을 땐 완전 쪼만한 아가였는데.’
3년 만에 본 황태자는 이제 제법 의젓한 태가 났다.
‘그나저나 아픈 게 아니었나?’
황가의 사람들이 입장하고 황제가 만찬의 시작을 알릴 때까지 비어 있던 황태자의 자리를 두고 호사가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던 것을 떠올린 리온이 눈앞의 아이를 새삼 훑어보았다. 리온의 정체를 확인하고 뒤로 물러선 호위기사가 아이의 뒤편에서 이쪽을 향해 짧게 목례를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눈물을 닦아 낸 흔적이 역력한 눈가 빼고는 멀쩡해 보이는 황태자의 모습에 일단 안도한 리온에게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세리엘 경? 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리온으로 충분합니다, 전하.”
“리온 경.”
말을 돌리면 될 줄 알았더니 대답을 듣겠다는 듯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에 리온이 할 수 없이 솔직히 털어놓았다.
“…길을 헤맸습니다. 근데 전하께서는 어쩐 일로.”
“그냥.”
만찬 회장에도 안 보이더니 왜 여기서 혼자 훌쩍이고 있었느냐를 줄여 묻는 리온의 말에 황태자가 입을 꾹 다물고는 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아이의 금빛 정수리를 잠시 내려다보던 리온이 입을 열었다.
“아랫것들이 찾겠습니다. 들어가시죠.”
“안 찾을걸. 다들 만찬에 갔잖아.”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웅얼거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한껏 풀이 죽은 듯 보여 조금 신경이 쓰였다.
아주 조금.
“그럼 저 나가는 길 좀 알려 주십시오. 대체 복잡해서 알 수가 없습니다.”
리온의 말에 아이가 그제야 고개를 홱 들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리온 경 같은 영웅도 길을 잃어?”
“저도 인간인걸요. 게다가 이 황궁은 너무 넓고 복잡합니다, 전하.”
그러니 여기 사시는 전하가 저 좀 도와주십시오.
리온이 한껏 불쌍한 척 중얼거리자 아이는 금세 기운을 되찾은 듯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저쪽에 별궁으로 통하는 지름길이 있어. 따라와.”
“과연 영민하십니다, 전하.”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는 길을 리온과 나란히 걷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나도 리온 경처럼 살고 싶어.”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전하께서는 대륙의 태양이 되셔야지요.”
힐끔, 한 걸음 뒤에서 자신들의 뒤를 묵묵히 따라오고 있는 호위기사를 쳐다본 리온이 판에 박힌 대답을 하자 황태자가 투덜대듯 말했다.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거 싫어. 나도 감사제 만찬 가고 싶었다고. 리온 경처럼 드래곤도 잡고 나쁜 마법사도 혼내 주고, 사람들도 구해 주면서 살고 싶다고.”
아이의 말에 리온이 내심 중얼거렸다.
‘또 혼이 나신 모양이네.’
황가의 엄격한 훈육법은 정평이 나 있었다. 아마도 황태자의 학업을 확인하고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황제가 마지막에 마음을 바꾼 모양이었다.
감사제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감사제 전야 만찬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새삼 다시 떠오른 듯 시무룩해진 황태자의 시선이 하얀 조약돌이 빼곡히 깔린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아… 안 돼. 이런 분위기 딱 질색이라고.’
리온은 내심 혀를 찼다.
풀 죽은 아이를 달래는 방법 따위 평생 칼이나 쥐고 몬스터나 썰어 온 자신이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떻게 좀 해 보라는 듯 뒤를 따라오고 있는 호위기사에게 연신 눈짓해 봤지만, 그도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어째 그나 저나 도긴개긴인 듯했다.
어쩌다 길은 잘 못 들어서. 내 팔자야.
리온은 내심 한숨을 푹 내쉬며 황태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금 더 크면 원하는 대로 이루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이야?”
“신의 가호를 받는 자로서 맹세하지요.”
‘아님 말고요. 신의 이름으로 맹세컨대 전하께서는 하실 수 있다고 믿지만 전하네 아버지께서 변덕을 부리시면 어떻게 될지, 거기까진 저도 아직 모르겠네요.’
자신을 올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 보며 리온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신까지 들먹이며 대답해 주자 그제서야 황태자의 눈빛이 다시 생기를 머금고 반짝이는 것에 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대륙의 태양이 되실 분이신걸요.”
“그럼, 다음번에 만나면 나도 밖에 데리고 가 줘.”
…예? 거기서 갑자기 말이 왜 그렇게 되죠?
리온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에 황태자가 눈썹을 모아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어서 말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검술 연습도 빼먹지 않을 테니까. 다음번에 만났을 땐 리온 경이 나도 데리고 나가 달라고.”
부황께서도 리온 경의 부탁이라면 들어주시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황태자가 리온을 바라보았다.
이 험한 황궁 속에서도 용케 아직 세상의 풍파에 마모되지 않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가 기대와 설렘을 가득 담은 채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속에 얽힌 감정을 읽은 리온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친.
정신 차려 리온 드 세리엘.
제 손으로 혹을 얹을 셈이냐고.
내적 절규와는 상관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의 뜻을 표하는 리온의 몸짓에 황태자가 기쁨의 환성을 내지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
.
.
“그래도 뭐, 설마 그때만큼 망하기야 하겠냐고.”
제 아버지를 닮았는지 끈질기기 짝이 없는 황태자의 부탁에 코가 꿰여 감사제가 돌아올 때마다 그를 데리고 잠행 아닌 잠행을 나서야 했던 리온의 과거를 떠올리던 재이가 혼자 중얼거렸다.
“뭐?”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에 엠케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그것보다 다 했어?”
“어, 아니. 아직.”
“그럼 계속해, 딴짓하지 말고.”
재이의 말에 펜을 쥐고 숙소 거실 바닥에 앉아 테이블에 쌓인 DVD 박스에 사인 중이던 엠케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좀만 쉬고…….”
“쉴 새가 어딨어, 내일까지 넘기기로 했잖아.”
“독한 놈.”
“누구 때문에 숨 돌릴 틈도 없이 그대로 예능 한 편 들어가게 생겼는데, 그나마 정상 참작 해 줘서 그 정도인 줄 알아.”
“그래, 그래. 잘못했다니까. 다신 안 그럴게. 두 번 했다간 파산하겠다고.”
매니저의 꾐에 넘어가 동고동락 중인 멤버를 몰래카메라의 제물로 넘긴 벌로 엠케이는 이번에 새로 발매될 예정인 [눈 떠 보니 무인도] DVD 박스 한정판 300세트를 자비로 구매해 자필 사인과 함께 팬들에게 증정하기로 했다.
[도와줄게 친구야]의 출연자 상견례를 겸한 몰래카메라 촬영이 끝나자마자 재이는 매니저 홍정수에게 며칠 뒤로 다가온 정식 발매일만을 기다리고 있던 DVD 세트 중 300개를 수배해 곧장 숙소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재이의 첫 제안은 100세트였으나 벌이 너무 과한 거 아니냐고 나 혼자 했냐고 석관이 형도 같이 했다며 엠케이가 끊임없이 투덜댄 탓에 그때마다 50세트씩 불어난 결과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소파에 앉아 자신을 감시하듯 쳐다보고 있는 저 독재자의 입에서 언제 또 50세트 추가 콜이 터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엠케이는 재빨리 하던 작업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녀왔-다아-.”
오프 아닌 오프였던 재이와 엠케이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오늘도 각자 스케줄이 있던 차였다. 게임 마니아라는 취미를 살려 케이블의 게임방송에 게스트 출연 중인 남궁찬과 라디오 스케줄이 있던 환심이들이 비슷한 시간에 마쳤는지 함께 현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거 봐 저거! 내가 그랬잖아. 엠케이 저거 거하게 실패할 거라고!”
“야, 남궁찬, 야.”
“아흐, 이 멍충이 입 좀 다물어 봐, 제발.”
숙소 거실에서 테이블에 DVD박스로 산을 만들어 놓고 사인에 열중하고 있는 엠케이와 소파에 앉아 그런 엠케이를 감시하듯 쳐다보고 있는 재이를 발견한 남궁찬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이 나서 떠들어 댄 말에 이환과 은규가 다급히 그의 팔을 잡아끌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활은 시위를 떠났고 남궁찬이 내뱉은 말은 고스란히 재이의 귀로 들어간 뒤였다.
“…뭐야, 너희들.”
알고 있었어?
나직이 내뱉는 재이의 목소리에 주변의 온도가 한층 내려앉은 듯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이환이 다급하게 변명을 내뱉었다.
“나랑 심은규는 아니야! 아까 스케줄 마치고 차 탔는데 남궁찬이 그러잖아. 오늘 엠케이가 한재이 몰래카메라 걸었다는데 성공했을 것 같냐고 실패했을 것 같냐고!”
“그, 그래. 맞아 맞아! 우린 그때야 알았다고. 어떤 멍청한 자식이 한재이를 상대로 몰카를 걸어? 죽으려고. 우린 당연히 실패에 걸었지! 그럼, 그럼!”
저희들만 살겠다고 자신을 제물로 던져 주고 선을 그어 버린 이환과 은규를 벙찐 얼굴로 쳐다보고 있던 남궁찬이 뒤늦게 돌아가는 상황을 깨닫고 재이를 돌아보며 황급히 말했다.
“나도! 나도 몰랐어! 방송 들어갔다가 나왔더니 엠케이한테 문자 와 있길래 그거 보고 알았을 뿐이라고! 진짜야!! 그리고 당연히 나도 대실패에 걸었지! 우리 아까 차 타고 오면서 그랬다니까, 엠케이 저게 무인도에서 뭐 잘못 주워 먹고 온 게 분명하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한재이 상대로 몰카라니 제정신이냐고, 막! 그치? 이환! 심은규, 말해 봐!”
남궁찬의 말에 이환과 은규가 고개가 떨어져라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재이의 시선이 세 사람을 한 명 한 명 훑는 동안 숙소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적막에 휩싸였다.
“뭐.”
재이가 입을 열었다.
“동료의 등에 칼을 꽂는 배신자가 앞으로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도 싫지만.”
배신자 아니라고요…….
조그맣게 웅얼거리던 엠케이는 ‘너 때문에 우리까지 이게 무슨 꼴이냐’는 비난 섞인 눈초리로 자신을 노려보는 남궁찬, 이환, 은규의 매서운 시선에 목을 움츠리고 다시 DVD 박스의 산으로 고개를 묻었다. 그런 그를 힐끗 흘겨본 재이가 예의 그 무심한 톤으로 이어 말했다.
“앞으로 혹시라도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이번처럼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것만 기억해 두고. 초범이건 재범이건 주범이건 방조자건 상관없이.”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춘 재이가 네 사람의 눈을 차례차례 들여다보며 말했다.
“무관용 원칙을 적용한다.”
알겠지?
재이의 말에 네 명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방조범들, 씻고 나오면 여기 와서 깜짝 메시지라도 몇 개 좀 적어보던가.”
재이가 던진 말에 세 녀석이 돌아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가 왜?”
“방조 아니라니까.”
“한재이 양민 탄압 클래스 실화냐고…….”
“뭔데, 팬 서비스 하는 게 싫다는 건 아니지 설마?”
투덜대던 녀석들이 재이의 말에 입술을 꾹 깨물고는 이 사달을 낸 원인 제공자 주범 엠케이를 흘겨보았다.
그때였다.
- 냐아아.
“응? 이게 무슨 소리야?”
“바깥에 고양이라도 지나가나?”
“고양이한테 날개 달렸냐?”
“아, 쏘리.”
남궁찬과 이환, 은규가 소리가 난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어!?”
“와! 이게 뭐야!”
“으와, 귀여워!!”
세 명은 그제야 재이의 품에 안겨 있는 새끼 고양이를 발견하고 몰려들었다.
“저리.”
새끼 고양이를 만지려 손을 뻗은 남궁찬의 손등을 찰싹 때리며 재이가 입을 열었다.
“꺼져.”
그 옆에서 막 고개를 들이밀던 이환의 뺨을 팔꿈치로 밀어내고,
“드러운 것들.”
가까이 다가오던 은규를 한 발로 밀어내며 외쳤다.
“먼저 씻고 좀 오라고, 더러운 손으로 만질 생각 따위 하지 말고!”
재이의 철통 경비에 순식간에 거실 바닥으로 나뒹군 세 녀석이 우당탕 앞다퉈 욕실로 뛰어갔다.
“야 이환 반칙이야, 너 오늘 아침에 먼저 씻었잖아. 이번엔 내가 먼저 씻을 차례라고!”
“꺼져,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임자야!”
“잘들 싸우고, 그럼 난 먼저!”
“으악, 야 남궁찬 저 비겁한 자식!”
세 사람의 부산스러운 외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사인에 열중하던 엠케이가 문득 재이를 돌아보고 물었다.
“석관이 형은 어쩔 건데? 아까도 말했지만 사실 난 억울하다고. 그 상황에서 내가 못 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거잖아. 주범을 따지면 내가 아니라 석관이 형이라니까.”
“엠케이.”
자신을 부르는 재이의 말에 엠케이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세우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같이 지옥 불을 걸어 줄 동료를 갈구하는 그 눈빛을 잠시 바라보던 재이가 말했다.
“네 할 일이나 잘해.”
석관이 형 신경 쓸 겨를 있는 거 보니 50세트 더해도 되겠는데?
재이가 중얼거리는 말에 엠케이가 화들짝 놀라 다시 사인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런 엠케이를 잠시 바라보던 재이가 새끼 고양이를 살살 쓰다듬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석관이 형이 아니라, 그 뒤를 잡아야지.’
새끼 고양이가 기분 좋은 듯 갸르릉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