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적재적소는 병법의 기본이지
왜 뭔데 뭐야? 반응 왜 이래?
윤새빛은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 나름 훈훈하게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에 물이라도 끼얹은 듯한 느낌이었다. 당황, 놀라움, 의문, 동정 등등 온갖 다양한 감정이 담긴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다른 인턴 두 명뿐이었다.
“후, 석관이 형, 나 요새 피곤한 것 같아요, 헛것이 들리네.”
“뭔가 방금 무시무시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엠케이와 이환이 차례차례 중얼거리는 옆에서 남궁찬이 입을 열었다.
“그으, 우리 인턴분께서는 어쩌다가 그런 휴웅한… 크흠. 후울륭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남궁찬이 묻는 말에 잠시 분산되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윤새빛은 힐끗 재이의 표정을 살폈다. 흥미롭다는 듯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입 끝이 희미하게 올라가 있는 것을 본 윤새빛이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한 듯 당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멋지잖습니까.”
회의실에 또다시 미묘한 정적이 깔렸지만, 이번에는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듯 윤새빛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선배님이 지닌 재능을 제가 감히 다 흉내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남들의 선입견을 보란 듯이 깨 버리고 대세 중의 대세로 거듭나고 계신 점 존경합니다.”
윤새빛의 말에 남궁찬이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와, 인턴분, 사회생활 좀 해 보셨나 봐요.”
그러자 나머지 멤버들도 한마디씩 보탰다.
“아부에서 짬이 느껴지는데.”
“자기소개 안 시켰으면 어쩔 뻔했어, 준비 많이 하셨네요.”
“프로그램 끝날 때까지 그 마음 변치 않으면 인정해 드립니다.”
“뭐지, 좀 전까지 별생각 없었는데 그 얘기 들으니까 갑자기 흥미진진해지네.”
그리고 그때까지 말없이 윤새빛과 다른 멤버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재이가 입을 열었다.
“힘들 텐데.”
윤새빛이 그런 재이를 마주 보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또 한 체력 하거든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다른 동네 한번 다녀오지 않는 이상 힘들 거라는 얘기였는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덧붙이며 싱긋 웃어 보이는 윤새빛을 바라보며 재이가 내심 중얼거렸다.
* * *
며칠 후.
케이엠 콘서트 합동 회의.
일 년에 한 번 소속사 가수들이 모두 참석하는 케이엠 콘서트의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준비하는 입장에서야 가뜩이나 바쁜 스케줄에 콘서트 준비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체력과 정신력을 갈아 넣어야 하는 날들의 시작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넘버뿐 아니라 다른 가수들과의 크로스오버로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팬들에게도 가수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장점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 탓에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없는 행사이기도 했다.
“안녕하십니까.”
멤버들은 합동 회의가 이루어질 대형 회의실로 들어서며 이미 와 있던 몇몇 직원들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오늘 회의는 VD실 윤효민 실장의 주재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윤효민이 들여다보고 있던 자료에서 눈을 떼고 인사를 건넸다.
“오, 대세돌 등장. 안녕들 하신가?”
윤효민의 장난스러운 인사에 인혁이 말했다.
“실장님 잘 지내셨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 라인업 잘 짜 주실 거라 믿습니다?”
“실장님을 뭐로 보고. 우리 첫 참가인데 완전 눈에 띄게 똭 박아 주시겠지.”
“역시 무한 믿음의 윤 실장님.”
“실장님만 믿습니다!”
인혁이 한마디 하자마자 질세라 모두가 돌아가며 하나둘 말을 얹는 멤버들을 둘러본 윤효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어휴 정신없어. 여전하구나, 너희는.”
그러다가 일행의 끄트머리에서 파티의 멤버들을 쭐레쭐레 쫓아 들어오고 있던 인턴 세 명을 발견하고는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인턴들도 같이 왔네? 배우는 건 좋은데 저런 건 닮지 마라. 어떻게 여섯 명이 모였는데 여섯 명이 모두 시끄러울 수가 있냐고.”
“누가 그랬더라, 그게 저희 팀 컬러 아니냐고 하던데요?”
“그래, 내 생각에 우리 회사에 그런 팀 컬러의 그룹은 너희 하나로 충분할 것 같아.”
남궁찬의 말에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리던 윤효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인턴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그래서, 누구야? 소문의 재라인.”
‘또야?’
눈을 빛내며 묻는 윤효민의 말에 일행의 가장 끝자락에 서 있던 윤새빛이 내심 중얼거렸다. 파티의 스케줄에 동행하기 시작한 최근 며칠 동안, 어디서 누구에게 들은 것인지 자신들과 마주치는 사람마다 재라인이 누구냐며 물어왔다.
파티 멤버들을 비롯한 인턴 두 녀석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며 윤새빛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자 윤효민이 흥미롭다는 듯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보기에는 재라인 아니고 혁라인이어야 할 것 같은데? 라인 제대로 탄 거 맞아?”
윤효민의 말에 파티 멤버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새빛 인턴님, 실장님 말씀 들었죠? 어때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환승하심은?”
“개인적으로는 저기나 거기나 비슷비슷하다고 봅니다. 기왕 갈아타려면 찬라인 정도는 돼야죠.”
“듣보 경보기가 울리는 소리에 출동했습니다. 찬라인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곳에 라인이라는 글자를 붙이시면 안 됩니다.”
“아 왜 나만 듣보 취급인데.”
이환에게 듣보 취급을 당한 남궁찬이 분하다는 듯 외치며 다른 멤버들과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질렸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윤효민이 윤새빛을 돌아보며 말했다.
“잘해 봐. 뼈까지 다 발라 먹을 기세로 파보면 얻는 것도 많을 거야.”
저 녀석, 분명 드러난 것보다도 숨기고 있는 주머니가 더 많은 녀석이라.
이환과 다른 멤버들이 남궁찬을 몰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간간이 추임새를 넣고 있는 재이를 힐끗 턱짓으로 가리키며 윤효민이 말했다. 빙글거리는 얼굴과 달리 웃음기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려는 듯 바라보는 그에게 윤새빛이 대답 대신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다.
.
.
.
“……잘못 생각한 걸지도.”
저걸 어떻게 해.
윤새빛은 눈앞의 상황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켐콘은 케이엠 소속 가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몇만 명 단위의 관객들 앞에서 보통 단콘보다 긴 러닝타임 동안 무대를 이끌어가야 하는 대규모 행사인 만큼 바쁜 스케줄을 쪼개고 맞춰 회의실에 얼굴을 비춘 선배 그룹들의 표정에서도 진지함이 묻어났다. 그야말로 시간이 돈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인지 회의가 시작되자 생방송이라도 진행되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에 단지 구경하고 있을 뿐인데도 가볍게 말아 쥔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
날짜와 장소, 컨셉과 참여 인원 등 행사 개요에 관한 확인이 끝나자 안건은 곧바로 무대에 올릴 퍼포먼스와 그 무대를 꾸밀 팀의 구성, 공연 순서에 대한 검토로 이어졌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진짜였다.
데뷔할 팀의 컨셉 회의에 당사자를 참여시키는 등, 최대한 당사자의 참여를 독려하는 케이엠의 전통대로 켐콘 또한 참여하는 그룹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어 있었다.
‘켐콘 컨셉 회의가 어지간한 막장 토론 저리 가라 한다더니.’
연습생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켐콘 컨셉 회의에서만큼은 선후배를 따지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의견을 자유롭게 낼 수 있다는 소문이었다. 물론 계급장 떼고 할 수 있는 건 치고받는 난타전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윤새빛이 보기에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네버로스가 7년 차, 크래쉬캣은 5년 차, 파티와 가장 데뷔가 가까운 블랙 포이즌도 이미 3년 차의 베테랑들이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데뷔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파티가 제 목소리를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선배들이 먹고 남은 혹은 선심 쓰고 나눠 준 몫을 주워 드는 게 고작이겠지. 그렇지만 모두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이 바닥 관례일 테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라고,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래도 이건 좀 아닌데요. 이런 식으로 들어가면 너무 붕 뜨지 않나요? 차라리 앞이나 뒤로 몰아서 넣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무대 순서로 핑계 댈 시간 있으면 그 틈에 연습을 더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룹별 무대의 순서가 이상하다며 이의를 제기한 재이의 말을 듣고 있든 크래쉬캣의 에이미가 팔짱을 낀 채 까칠하게 받아쳤다. 그런 에이미의 도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이가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그게. 지금 순서대로면 저희 곡 다음에 바로 크래쉬캣 선배님들 무대 들어가게 되잖아요? 근데 그렇게 되면 회장 분위기 팍 가라앉은 타이밍에 들어가셔야 될 거예요. 저희 이 곡 컨셉이 완전 세기말 레이드라 많이 어둡거든요. 선배님들 [Re-Bye Beach] 면 업템포 댄스곡인데, 지금 기획안대로 저희 뒤 순서로 들어가게 되면 너무 뜬금없이 뜰 것 같지 않나요?”
조목조목 설명하는 재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에이미가 황당하다는 듯 내뱉었다.
“뭐야, 너희가 붕 뜨는 게 아니라 우리가 뜬금없을 거란 얘기였어?”
“저희는 붕 뜰 이유가 없죠.”
태연한 표정으로 맞받아치는 재이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에이미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재밌네, 한재이. 좋아, 그럼 여긴 이렇게 배치를 바꾸면 어때?”
“그건 안 되지. 그렇게 하면 우리 쪽하고 파티가 겹쳐 버리잖아. 중간에 누구 하나 들어왔다가 나가는 게 좋지.”
에이미의 제안에 이번엔 네버로스의 비제이가 태클을 걸고 들어왔다. 그 뒤로 블랙 포이즌의 모니카까지 가세해 그야말로 소문대로 선후배를 따지지 않고 의견을 쏟아 내는 것을 구경하고 있던 윤새빛은 자신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음에 어이없음과 동시에 자신이 과연 같은 위치였다면 저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구심과 자괴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저기서 에이미 선배를 들이받네.”
“한재이 진짜, 내일 없이 사는 놈답다.”
“아까 잠깐 에이미 선배 눈에서 레이저 쏘아져 나오는 거 봤냐.”
“내가 다 쫄려서 목이 타던데 눈 하나 깜빡 안 하더라. 하여간에 쇠심줄.”
쟁쟁한 선배 그룹 멤버들을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물어뜯기 바빠 보이는 재이의 모습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 있는 다른 멤버들의 모습에 윤새빛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
의견을 내는데 인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닌 듯 선배 그룹 중에는 한 팀에서 두셋이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는 팀도 있었다. 윤새빛과 마찬가지 생각이었던 듯 인턴 중 한 명인 정이호가 살그머니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인혁에게 물었다.
“저기… 재이 선배님 혼자 하시게 둬도 되는 건가요?”
주위를 의식한 듯 한껏 조심스럽게 묻는 정이호의 질문에 인혁을 비롯한 파티의 멤버들이 그를 한 번 돌아보고는 제각기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가 끼면 오히려 싫어할걸, 거치적댄다고.”
“저거 봐, 우리 없어도 잘 물고 뜯고 하잖아.”
“원래 일이란 건 제일 잘할 것 같은 사람한테 맡겨야 돌아가는 법이야.”
“병법의 기본이지.”
마지막 인혁의 말에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창칼이 난무하는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인턴들은 마침 손뼉을 짝 마주치며 주의를 환기하는 윤효민 실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팀별 무대 순서에 대해선 대충 얘기가 정리된 것 같은데 어때?”
윤효민의 말에 크래쉬캣의 에이미가 특유의 시니컬한 말투로 대답했다.
“뭐. 이번엔 막내한테 선심 좀 쓰는 거로.”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네버로스의 비제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선심은 무슨. 자기네 팀 엔딩 쪽에 몰아주겠다는 소리에 좋아서 덥석 미끼 문 주제에. 내가 보기엔 너네는 한재이 쟤한테 말린 거라니까.”
“그러는 선배야말로 셔플유닛 하나 양보하겠다는 말에 덥석 미끼 문건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보기에 어차피 셔플유닛 뺀다고 해 봤자 선배 쪽도 파티 애들 끼지 않고는 가망 없다니까. 이게 네버로스 단콘도 아니고 상혁 선배도 없는데 인제 와서 자기들끼리 셔플하는 걸 누가 재밌어하겠냐고.”
아 우리 쪽이나 블포랑 섞는 건 별개니까 따로 떼고 생각하자고요.
에이미가 비제이 쪽을 홱 돌아보고 쏘아붙이는 말에 비제이가 발끈하려는 것이 보이자 재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모니카 선배님께서 제안하신 대로 각 팀 세 곡씩 섞는 대신 블럭으로 들어가기로 했고요. 저희가 첫 번째, 블랙 포이즌 선배님, 네버로스 선배님, 그리고 크래쉬캣 선배님 순으로 합의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윤효민이 놀랍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세한 큐시트는 준비 상황에 맞춰 마지막에 확정하는 관계로 오늘 회의의 목적은 그에 앞서 콘서트의 큰 흐름에 대한 각 팀의 동의를 얻는 것이었다.
러닝타임이 긴 탓에 어느 타이밍에 어떤 형태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관객 호응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만큼 매해 이 과정에서 가장 말이 길어지고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아 애를 먹고는 했다. 그게 이렇게 쉽게 끝났다고?
윤효민이 진짜 이게 끝이냐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재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좋은 무대 만들고 싶다는 데엔 이견들이 없으셔서.”
그건 뭐냐.
지금 나온 결론에 토 다는 사람은 좋은 무대 만들 생각이 없다는 거로 간주하겠다는 선전 포고 같은 거냐.
윤효민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선배 그룹들의 면면을 훑었다.
“뭐, 셔플유닛에선 양보 안 할 거니까.”
미련 넘치는 말투로 비제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간도 절약할 겸 말 나온 김에 그 건으로 바로 넘어갈까.”
윤효민이 시계를 흘끔 확인하고는 운을 떼자 재이가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아 잠깐만요. 시작하기 전에.”
저희는 선수 교체요.
재이가 회의실 한편에서 이쪽을 구경 중이던 파티 멤버 중 하나를 손짓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