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한재이의 황금 제비
“응? 뭐야 댄디노랑 둘이 벌써 아는 사이야?”
“아, 네. 뭐.”
비제이가 묻는 말에 재이가 슬쩍 김도연, 아니 이제 댄디노라고 불러야 하나. 장세은 팀장 옆에서 어색하게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걸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하지?
재이의 눈빛을 읽은 김도연, 댄디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카이저에서 나올 때 재이 도움을 좀 받았거든요.”
덤덤한 댄디노의 말에 비제이가 놀라 재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헐. 그럼 그것 때문에 삼화에서 너한테 앙심 품었다는 게 사실이었나 봐?”
“아뇨 제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그냥 대표님한테 말씀드렸을 뿐인데요.”
재이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에이미가 말했다.
“신인이 남의 집 집안일에 신경 쓸 여유도 있고. 대단해.”
“선배님이 저였어도 아마 똑같이 행동하셨을걸요.”
“올려치는 건지 후려치는 건지 모르겠네.”
말과는 달리 피식 웃은 에이미가 댄디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래서, 한재이가 구해 준 제비가 보은하려고 온 거야? 실력 좋던데. 어쩜 한재이는 제비를 구해도 저런 황금 제비로 구하는 거지?”
에이미의 말에 댄디노가 어색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에이미가 한숨을 쉬며 한탄하듯 내뱉었다.
“괜찮은 작곡가 한 명하고 안면 트나 싶었더니 재라인이었냐고.”
“저 녀석이 1년 만에 제 라인 구축할 동안 난 대체 뭐한 거지?”
비제이가 옆에서 머리를 쥐어 싸매는 시늉과 함께 투덜거리는 말에 에이미가 짧게 대답했다.
“인생 헛산 거지.”
“에이미 너도 남 말할 처지가 아닌 것 같지 않아?”
“괜찮아, 어차피 나랑은 필드 안 겹치니까.”
“팀장님, 블포 안 불러도 됩니까? 댄디노, 여성 래퍼 하나 필요하지 않아? 모니카 랩 엄청 잘 치는데.”
“선배 1절만 하죠.”
에이미와 비제이의 주거니 받거니를 듣고 있던 장세은이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인혁이는 나중에 올 거고. 모일 사람 다 모였으니 일단 시작해 볼까.”
장세은의 말에 세 사람이 자세를 바로 했다.
* * *
- 에이미, 마지막에 또 플랫됐어. 한재이한테 끌려가지 말라니까.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가죠.”
에이미는 유리 벽 너머 컨트롤 데스크에서 들려오는 장세은 팀장의 날카로운 지적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꾸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스텝 업] 때 멘토링 파트에서 차상혁이 초대한 깜짝게스트로 출연했던 보컬리스트 이우연이 한재이의 보컬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소리에도 ‘상혁 선배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자신이었다. 확실히 시원시원하게 뻗어 올라가는 고음이 매력적인 보이스이긴 했지만, 곡을 이끌어 가는 센스나 기교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요새 대중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다이아몬드 원석이니, 대기만성형 인재니, 말만 좋지 그들이 완성됐을 때까지 대중이 그들을 기억하고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했다. 결국, 에이미가 보기에 재이의 보컬이란 이미 연습생 때 개화했어야 할, 때를 못 맞춘 꽃과 다름없었다.
그랬는데.
- 에이미 잠깐 쉬고, 재이 파트 남은 거 먼저 갑시다.
장세은의 지시에 레코딩 부스에서 밖으로 나온 에이미가 녹음실 한쪽에 비치된 소파에 앉아 있던 비제이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곡이 다시 시작되고 재이의 솔로 파트가 흘러나오자 리듬을 타고 있던 비제이가 무의식중에 감탄사를 내뱉고는 슬쩍 이쪽의 눈치를 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알아, 내 눈치 볼 것 없어.”
에이미가 퉁명스럽게 내뱉자 조금 안심한 듯 비제이가 어깨에 힘을 풀며 짧게 대꾸했다.
“알면 됐고.”
그런 그를 힐끔 흘겨보고는 에이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언제 저렇게 늘었지?”
“이우연 선배님이 괜히 괴물 취급 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냥 띄우는 말인 줄 알았더니.”
“천하의 에이미가 통수 맞은 얼굴을 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사진 찍어 둬야겠다.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드는 비제이를 사납게 노려봐 준 에이미가 다시 한번 레코딩 부스 쪽을 바라보았다. 부스 안에는 빠른 비트에도 거침없이 리듬을 타며 찍어 낸 듯한 음정으로 후렴구를 열창 중인 재이가 있었다.
“아주 음을 갖고 노네, 놀아.”
“대체 연습을 얼마나 한 거야?”
비제이와 에이미가 신기한 생물을 구경하듯 녹음 중인 재이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스튜디오 문이 열리며 차인혁이 들어왔다.
“오, 차인혁 마침 잘 왔다. 이리 좀 와 봐.”
“너희 지난주에 곡 받은 거 맞아? 팀장님이 너희만 일찍 주신 거 아니야?”
메이크업도 제대로 지우지 못한 채 촬영장에서 곧바로 뛰어온 듯 평소보다 더 뚜렷한 외모를 빛내며 들어오던 인혁이 두 사람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한재이 저게 레코딩 시작하자마자 에이미 기를 팍 꺾어 놔 가지고. 이거 봐라, 애 시들시들한 거.”
에이미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내뱉는 비제이의 말에 인혁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두 번 시들했다가는 살인 나겠는데요.’
인혁의 감상대로 당장이라도 눈앞의 상대를 베어 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비제이를 노려보던 에이미가 인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나 간만에 자존심 상했다고. 기껏 장 팀장님하고 같이 작업하는가 했더니 못한다고 쫓아내시잖아. 어휴 자존심 상해.”
에이미가 분하다는 듯 발치의 테이블 다리를 툭툭 걷어차며 투덜댔다. 인혁은 고개를 돌려 한창 녹음 중인 레코딩 부스를 쳐다보았다. 스피커를 통해 재이 특유의 시원하게 터지는 고음이 빠른 비트의 일렉트릭 사운드와 섞여 귓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속이 시원하긴 하네.”
“선배가 저거 따라가면서 화음 넣어야 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해 봐요. 속이 시원한가.”
“아이고 누가 우리 에이미 기를 이렇게 팍 죽여 놨어, 저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을. 어휴 이 꾸깃꾸깃해진 것 좀 봐라.”
“선배도 궁금하면 노래로 쟤랑 맞장 떠 보던가.”
“됐네요. 난 인혁이랑 사이좋게 래핑할 거니까.”
비제이가 재밌다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인혁을 바라보았다. 동의를 구하는 그 눈빛에 인혁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 사이, 그 순간의 공백을 예리하게 캐치한 에이미가 눈을 빛내며 웃었다.
“…얘들 애초에 이럴 작정으로 왔구나?”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비제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말에 에이미가 인혁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이좋게는 개뿔. 처음부터 씹어 먹을 생각으로 왔다고, 얘들.”
에이미가 팔짱을 낀 채 소파 등받이에 털썩 등을 기대며 이어 말했다.
“박 터지게 한번 싸워 보자 이거지?”
에이미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비제이가 설마 진짜냐는 얼굴로 인혁을 돌아보았다.
- 멘토들이랑 맞짱 떠 보라고 회사에서 친절하게 판까지 벌여 줬는데 이걸 그냥 넘어가라고?
셔플 유닛의 멤버가 정해지고 난 뒤 재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린 인혁이 에이미의 말에 대답 대신 씩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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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케이엠 사옥 내 연습실.
파티 멤버들은 켐콘에서 각자 들어갈 셔플 유닛과 개인 및 그룹 무대, 그리고 각 무대에서 부르게 될 곡 리스트를 다 함께 확인하고 있었다. 기존 곡들에 이어 가이드 보컬이 부른 오리지널 곡을 들은 엠케이가 입을 열었다.
“와. 곡 퀄 쩐다. 이걸 셔플 유닛에 준다고? 이 정도면 당일 콘서트에서 화력 좀 기대할 수 있는 거 아니냐?”
“오리셔플 당첨이라고 애도해 줬더니. 이 정도면 대놓고 밀어주는 거잖아.”
남궁찬의 말에 이환이 핀잔을 주며 끼어들었다.
“멍청아, 애초에 오리셔플이 밀어주는 자리인데 뭔소리래. 야, 한재이. 거기 서브 보컬 필요하지 않을까? 사비 부분 힘 좀 주려면 보컬 둘로는 힘들 것 같지 않냐.”
“이환 너는 네 유닛이나 챙기세요. 네버로스 선배 셋에 너 하나면, 딱 뼈도 못 추릴 각이구만.”
엠케이의 말에 이환이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근데 이거 심각하게 윤효민 실장님이 한재이랑 나 잘못 섞으신 거 아니냐고. 멘토-멘티 재결합이면 에이미 선배 멘티였던 내가 들어가야지 왜 한재이가 끼냐고.”
“이환 솔직해져라. 너 그냥 네버로스 선배님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는 거잖아.”
“아 왜 이래. 나 자신 있다고. 완전히 묻힐 자신.”
이환의 대답에 멤버들이 와르르 웃으며 그럴 줄 알았다느니, 미리 애도를 표한다느니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런 멤버들을 바라보던 재이가 입을 열었다.
“야 근데, 진지하게.”
모두의 시선이 재이에게로 쏠렸다.
“다 씹어 먹어 버릴 기세로 덤벼야 할걸.”
재이의 말에 연습실에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또, 또 저렇게 섬뜩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또.”
“아 뭐야, 심정지 오는 줄 알았네. 뭘 씹어 먹어 뭘.”
“순간 나만 오싹했냐고. 진짜 한재이 방심하면 안 된다니까.”
“저 봐라, 인턴분들 싹 굳었잖아. 아니에요, 저희 그런 사람들 아니에요.”
멤버들이 한마디씩 돌아가며 던지는 사이 인혁이 툭 내뱉었다.
“난 한재이 말에 한 표.”
“뭐야, 차인혁 너까지?”
은규의 어이없다는 말투에 그를 한 번 쳐다본 인혁이 다른 멤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신들 차려. 선배들이 오냐오냐해 주니까 진짜 이게 화기애애한 소꿉장난 같냐. 선배들한테 밀리는 순간 오만소리 다 나올 텐데. 이 악물고 덤벼야 우리가 분량 챙겨도 그나마 ‘봐 줄 만하네’ 하고 넘어가 주실 분들이 공연장 빼곡히 채우고 계신다고 생각해 봐.”
인혁의 말에 어느새 진지해진 얼굴로 엠케이가 말을 이었다.
“하긴. 잘해야 본전이긴 하겠네.”
다른 멤버들이 그제야 다들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밀리는 순간 헬게 오픈 인정.”
“그러게. 어정쩡하면 바로 말 나오긴 하겠네.”
“아 뭐지 갑자기 압박감 세게 밀려드는데?”
그런 멤버들을 훑어보며 재이가 말했다.
“어때, 이제 좀 제대로 덤벼 볼 마음들이 생겼어?”
그 눈이 호승심으로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본 멤버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은 곧이어 마치 작당 모의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셔플 유닛과 후보곡 라인업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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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한재이야 그렇다 쳐도 차인혁 너까지 맹견 스타일인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나오기야?”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중얼거리는 비제이의 목소리에 인혁은 상념에서 깨어나 대답했다.
“맹견이라뇨. 후배 된 입장에서 하늘 같은 선배님들한테 폐를 끼칠 수 없으니 필사적인 것뿐인데요.”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인혁이 얄밉다는 듯 에이미가 힐끔 쳐다보고는 투덜거렸다.
“두 번 필사적이었다간 아주 뼈도 못 추리고 잡아먹히겠네.”
인혁이 뭐라 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사이 녹음이 끝났는지 재이가 부스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벌써 다 끝난 거야?”
“예, 곧바로 에이미 선배님 파트 이어 가자고 하시던데요. 오래 쉬면 목 잠긴다고 바짝 땡겨서 가자고요.”
“누가 장 팀장님 아니랄까 봐, 엄청 쪼이시네.”
에이미가 투덜대며 일어나 재이와 교대로 레코딩 부스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던 인혁이 그제야 컨트롤 데스크에서 장세은 팀장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인물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저 사람…….”
“아. 한재이의 황금 제비?”
비제이의 말에 인혁이 재이를 돌아보았다.
“하하하……. 그, 이번 곡이 김도연이 쓴 거래.”
비제이의 말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자신에게 대답하는 재이의 말에 인혁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대표님이 굳이 껄끄러움 무릅쓰고 다시 품으시더라니. 난 또 다른 루트로 데뷔라도 하려나 했더니. 아예 노선을 바꾼 모양이야?”
“이 정도 퀄 뽑을 능력이면, 애초에 이쪽에 재능이 더 있었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니냐?”
“하긴. 댄디노의 노자가 놀랄 노자였나보다.”
“후. 차인혁 너는 어디 가서 애드립 같은 거 치지 마라, 진짜.”
재이와 인혁의 대화를 듣고 있던 비제이가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무대 컨셉 나왔나? 녹음 끝나면 바로 안무 연습 들어간다고 들었는데.”
“아, 저 여기 들어오기 직전에 잠깐 윤효민 실장님 만나서 들었어요.”
대표님 컨펌 단계라고 하시던데.
고개를 가로젓는 재이 옆에서 인혁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래? 그래서 컨셉 뭐라디?”
“뭐라셔?”
눈을 빛내며 묻는 두 사람을 둘러본 인혁이 말했다.
“곡 타이틀하고 비슷하게 갈 거라고 하시던데?”
“곡 타이틀?”
세 사람의 눈길이 테이블 위에 놓인 악보에 가 멎었다.
- Saviours: 구원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