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45화 (145/224)

#145

두근두근 전생체험 (1)

길막리 과수원집에는 아들만 다섯이었다.

힘세고 덩치 좋고 책임감 있고 듬직한, 자신의 형제들뿐 아니라 동네를 주름잡는 동네 대장 스타일의 맏이 한다이. 형제들의 공부 머리는 혼자 갖고 태어난 듯 어려서부터 머리 하나는 비상하게 좋은 둘째 한산, 덩치는 큰형 다이만큼 단단하지만 복잡한 걸 싫어하는 돌격대장 스타일의 한태이, 자기주장 강한 형제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던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한재이, 그리고 부모님과 형들의 방임 속에 자유분방을 넘어서 길막리 공인 망나니로 진화한 막내 한준까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탓에 고등학교 진학을 계기로 나가 살게 된 둘째 한산이 그대로 집으로의 발길을 끊어 버렸을 당시, 재이와 한준은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꼬꼬마였다.

‘그러고 보면 소심한 한재이 녀석이 가출을 결심한 건 저 양반 영향도 크긴 했을 듯.’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재이가 기억하는 한, 한산은 부모님에게 크게 반항한 적도, 형제들과 크게 마찰을 빚은 적도 없었다. 그저 때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어느 날 홀연히 집으로의 발길을 끊어 버렸을 뿐이었다.

‘작은 형은 애저녁에 알았던 거야. 부모님이 자기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걸.’

부모님은 남에게서 둘째가 똑똑하다는 칭찬을 들으면 기꺼워하셨지만 그뿐이었다. 자식을 위한 더 큰 꿈, 더 넓은 세상을 상상하기에는 그분들의 매일이 너무 빠듯했다. 전교 1등을 해도 도내 1등을 해도 농사철이면 어김없이 하루 종일 땡볕에서 일손을 도와야 하는 집안이었다. ‘크면 뭐가 되고 싶니’라고 아무도 묻지 않는 집안. 한산이 느꼈을 감정을 재이는 이해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를 통해 연락이라도 되던 둘째 형이 졸업과 동시에 그마저도 끊어 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 ‘저래도 되는구나.’라고 순수하게 감탄했던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 후 아버지가 명절 때마다 ‘괘씸한 놈, 호적에서 파 버려야겠다.’라는 레퍼토리를 반복하실 동안 본인은 어찌어찌 미국에까지 건너가 천재 의사 소리를 듣는 위치에까지 다다른 모양이었다.

‘아니면 희대의 사기꾼이 된 것이거나.’

어쨌거나 아버지 아시면 난리 나겠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재이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산의 시선을 보고도 모르는 척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둘 다 집하고 연도 끊은 마당에 여기서 반가운 척 인사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재이가 시선을 돌리고도 한산의 시선이 재이에게 머무는 것을 본 아리송이 말을 이었다.

“한 박사님은 줄곧 미국에서 생활하시느라 모르셨을 수도 있지만, 오늘 박사님께 전생체험을 의뢰할 이분들이 우리나라에선 요새 가장 핫한 분들입니다. ‘나를 배신할 너를 구하러’ 와 준 구원자들, 비제이 씨, 에이미 씨, 인혁 씨, 그리고 재이 씨.”

아리송의 소개에 비제이가 능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와, 아리송 씨가 전문가를 불렀다고 하셔서 음침한 괴짜 박사님이라도 모신 줄 알았더니. 완전 훈남이시라 깜짝 놀랐잖아요.”

“공중 부양 하면서 들어오셔서 다짜고짜 도를 아시느냐고 하실 줄 알았더니.”

“모르는 도도 알고 싶어질 것 같은 느낌인데요.”

비제이에 이어 에이미와 인혁이 맞장구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오늘 이렇게 유명하신 분들을 직접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조금 전 대기실에서 라이브 하시는 거 보면서 엄청 감탄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영혼의 에너지가 너무 눈부셔서 앞이 제대로 안 보일 지경이었거든요.”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 내는 한산에게 아리송이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와, 박사님. 영혼 에너지도 눈에 보이시는 건가요?”

“아뇨, 지금 건 그냥 아부였습니다.”

“아하하하, 위트가 넘치시네요.”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어졌다고 판단한 아리송이 진행을 계속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누구부터 하실래요? 아, 우리 구원자 여러분 중에 믿파와 안믿파, 어떻게 나뉘었죠? 믿파이신 분?”

아리송의 말에 비제이와 재이가 손을 들었다.

“와, 두 분이 믿파예요? 비제이 씨도 놀랍지만, 재이 씨가 믿파라고? 운명이니 영혼이니 일절 안 믿을 것 같이 생겼는데?”

“저 완전 잘 믿는데요? 운명 윤회 팔자 전생 뭐 그런 거. 오늘 전생체험에서 제 전생이 뭔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두근거려서 어제 잠도 잘 못 잤는데.”

‘정확히는 어디까지 어떻게 까는 게 효과적일지 생각하느라 못 잤다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리송의 말에 재이가 대답과 함께 내심 중얼거리는 사이 비제이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저는요? 저도 믿파로는 안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왜 그냥 넘어가는데요?”

“비제이 씨는 어딜 어떻게 봐도 샤머니즘 신봉자로 보여요. 막 징크스 챙기고 지갑에 부적 넣고 다니고, 아침마다 오늘의 운세 확인하고, 맞죠?”

“어, 어떻게 아셨지?”

아리송의 말에 비제이가 당황해서 중얼거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인혁이 끼어들었다.

“아까 촬영장 들어올 때도 왼발 먼저 들여놓았다고 오늘은 일진 사나울 것 같다면서 걱정하시던데요.”

“아하하, 그것 봐요. 내가 딱 감이 왔다니까.”

인혁의 재치 있는 말에 아리송을 비롯한 출연자들과 제작진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 그럼 본격적인 전생체험, 시작해 볼까요. 박사님, 오늘 어떤 식으로 진행될 예정입니까.”

아리송이 한산을 돌아보며 묻자 그가 출연진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대답했다.

“잠시 후 별실로 이동하셔서 간단한 문진을 받으신 뒤 편하게 누워 제 지시에 따라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시면 됩니다.”

“어……. 듣기엔 굉장히 간단한데 정말 이걸로 전생을 알 수 있나요?”

아리송의 질문에 한산이 이어 말했다.

“전생의 기억을 자극하는 것은 인간의 뇌 활동 중 가장 깊은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격차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잘 따라오시는 분과 그렇지 않은 분이 나뉠 수밖에 없지요.”

“결과는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른다는 말씀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그의 설명에 아리송이 다시 한번 물었다.

“흥미롭네요. 혹시 부작용 같은 건 없나요?”

“수면 컨트롤은 이미 정신 의학이나 심리 치료, 가정 의학 쪽에서 다방면으로 쓰이고 있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요새는 불면증 치료를 위해서도 많이 쓰이고 있죠.

오늘 시연할 방법은 명상의 가장 깊은 단계에 다다른 상태에서 피실험자가 무의식의 영역에 넣어 두었던 기억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도록 시술자인 제가 옆에서 적절한 자극을 주는 방식입니다.

뇌파 측정기를 이용한 심층적 모니터링을 통해 과도한 스트레스 상황이라 판단될 경우 시술자가 개입해 피실험자를 의식의 세계로 끌어 올리게 됩니다.

수면 요법 중 가장 간단하고 기초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결과 또한 개인차가 심한 편이긴 합니다만 딱히 부작용이랄 게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지요. 이 방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은 피실험자께서 주무시고 일어났는데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가 대부분이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아, 가끔 너무 숙면을 취하신 나머지 실험 도중 코를 골거나 이를 가시는 분들이 계시긴 합니다만.

한산이 설명과 함께 웃으며 덧붙인 말에 긴장한 채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출연진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아왔다.

“그럼 누구부터 시작해 볼까요.”

아리송의 말에 네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 * *

“한 박사님이 재이 씨 친형이라고?”

수면 요법의 촬영 준비를 위해 잠시 쉬어 가는 사이, 오 피디는 눈앞의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출연자의 레퍼런스 체크야 당연히 하는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경력 사항의 진위 여부와 범죄경력 유무 체크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가족 관계까지 세밀하게 따져 보는 일은 드물었다.

무엇보다 둘 다 평균 이상이라는 점만 뺀다면 전혀 다른 외모의 두 사람을 놓고 가족 관계를 유추해 내기란 쉽지 않았다. 성씨가 겹치는 거야 드문 일도 아니니 오 피디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일 수밖에 없었다.

“맞긴 한데 못 본 지 십 년도 넘은 것 같은데요.”

“그러게요. 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땐 코찔찔이 울보였는데.”

재이의 말에 맞장구치며 한산이 감개무량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앞의 동생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오늘 나온다는 아이돌 중 한재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동명이인이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참이었다.

맨날 형제들의 등쌀에 치여 울고 다니던 넷째가 요새 제일 잘나가는 아이돌이라니. 타오르는 듯 붉게 염색한 머리나 트렌디한 의상은 낯설었지만 고집스러운 눈매에 주변에 관심 없어 보이는 저 얼굴은 분명 낯이 익었다.

자신의 인생에서는 이제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을 것이라 여겼던 ‘가족’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역시 자연의 섭리와 운명의 굴레는 오묘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거 공개해도 되나요?”

잠시 말이 없는 한산과 그 옆의 재이를 번갈아 바라보던 오 피디가 재이 옆에 서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석관에게 물었다.

“딱히 숨길 이유도 없긴 합니다만, 여기서 공개하는 건 프로그램 취지하고는 다른 말이 나오기 쉬울 것 같은데. 그냥 가볍게 넘어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분명 유명인의 혈육 끼워팔기라는 말이 나올 거라는 석관의 말에 오 피디가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라고는 해도 하도 오랜만에 보는 거라. 아마 석관이 형이 저에 대해 더 많이 알걸요.”

무덤덤한 말투로 내뱉는 재이의 모습에 그를 바라보고 있던 한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 이거 뭔가 복잡한 가정사의 냄새가 나는데. 이건 이것대로 맛있을 것 같긴 한데 우리 프로그램 컨셉하고는 안 맞긴 하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오 피디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 부분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넘기도록 하죠. 이쪽으로 관심이 너무 쏠리는 건 저희도 원하던 부분이 아니니 일단 원안대로 가는 거로 하겠습니다.”

석관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피디님.”

“대신 만일을 위해서 두 분 따로 이야기 나누는 장면은 따 놓도록 할게요. 여론 봐서 비하인드로 풀던가 할 수 있게.”

“네, 뭐 그 정도야.”

두 형제와 석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오 피디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다.

* * *

간단한 문진을 거쳐 수면 요법에 필요한 뇌파 탐지기의 패치를 머리에 붙여 주던 한산이 침대에 누워 제 손길에 몸을 맡긴 채 가볍게 눈을 감고 있는 재이에게 물었다.

“잘 있었나 보네?”

“뭐. 그럭저럭.”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시냐?”

“아마도요.”

무덤덤한 재이의 대답에 한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누구 본받아서 박차고 나왔거든요.”

“아.”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러나 알 만하다는 듯 짧게 반응한 한산이 그대로 입을 다물자 이번엔 재이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전생체험이니 뭐니 이거 다 진짜예요?”

“그럼 가짜겠니.”

“딱 봐도 사기꾼 삘인데.”

재이가 중얼거리는 말에 한산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형한테 그게 할 소리냐.”

“누구시더라?”

“…어릴 땐 더 귀여웠던 것 같은데.”

“애기는 다 귀엽게 보인다잖아요.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이라던가.”

형도 인간은 인간이었구나. 아버지가 하도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셔서 진짜 그런 줄 알았지.

가차 없는 재이의 혼잣말에 한산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3, 2, 1,--

슛 사인이 들어가자 조금 전의 시니컬한 표정과는 또 다른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며 재이가 말했다.

“저 혹시 코 골기라도 하면 곧바로 깨워 주셔야 해요?”

“뭐?”

“전생이 뭐건 간에 현생이 중요한 거잖아요. 코 고는 장면 방송에 나가기라도 하면 현생에 심각하게 지장 생기니까, 바로 깨워 달라고요.”

“직업의식이 엄청 투철하네요. 재이 ‘씨’.”

“그만큼 지금의 저를 사랑하는 거죠, 제가.”

재이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한산이 손을 뻗어 조명의 빛을 줄였다. 어둑해진 방 안, 나직이 카운트다운하는 한산의 목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침대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재이의 모습을 훑었다.

…4, 3, 2, 1.

뇌파 측정기의 모니터를 확인한 한산이 잠시 후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무엇이 보이나요?”

어두운 실내에 적막이 잠시 내리깔리고 이윽고 재이가 입을 열었다.

“…죽은 사람.”

평소보다 느릿하고 어딘지 낯선 그 말투에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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