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두근두근 전생체험 (2)
“지금 어디에 있나요?”
한산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물음에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재이가 감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모르겠어요.”
“주변에 뭐가 보이나요?”
“…어두워요.”
“그 ‘사람’과 단둘이 있나요?”
한산의 질문에 재이가 다시 한번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뇨.”
“그럼 또 누가 있나요?”
“…….”
한산의 물음에 재이가 잠시 침묵했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그저 보이는 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한산의 말에 잠시 조용하던 재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들.”
“살아 있나요, 죽었나요?”
“…….”
가슴께 위에 얹혀 있던 재이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본 한산이 힐끗 모니터를 살폈다. 눈썹을 찌푸린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침묵 후 한산이 마음을 정한 듯 재이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재이가 한 박자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재이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가야 해.”
“어디로요?”
“끝을 내러.”
“무엇을 끝내죠?”
한산의 질문에 재이가 잠시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이 전쟁.”
지긋지긋해.
나직이 중얼거리는 재이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다소 말투가 건조하긴 해도 아이돌 특유의 생기발랄함이 느껴지던 평소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 진득한 피로가 켜켜이 쌓인 듯 느릿하고 무거운 그 말투에 한산의 얼굴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모니터를 다시 한번 확인한 한산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재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신의 권능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일어선 기사 ㄹ…….”
삐비비비---
갑자기 모니터의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안정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선 그래프가 크게 요동치는 것을 본 한산이 시작 전에 맞춰 뒀던 신호대로 재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단호한 목소리로 재이의 의식을 되돌렸다.
“한재이 씨, 일어날 시간입니다.”
그러자 깊이 잠들어 있던 것처럼 보이던 재이가 거짓말처럼 눈을 번쩍 떴다. 순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한산이 조용히 말했다.
“재이 씨, 잘 잤어요?”
“…형?”
‘형?’
한산이 새삼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재이를 자세히 살폈다. 잔뜩 겁먹은 얼굴로 혼란스러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흐릿한 것이 아무래도 제대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재이 씨, 지금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어… 그게…….”
다시 한번 이름을 강조해서 부르며 되묻자 눈을 굴려 주변을 살핀 녀석이 당황한 듯 목을 잔뜩 움츠리며 웅얼거리고는 눈을 꾹 감았다. 한산이 그런 재이의 모습과 모니터를 번갈아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이대로 잠깐 쉬어 가시죠. 편하게 주무셔도 됩니다.”
한산의 말에 약간 긴장이 풀어진 듯 어깨를 늘어뜨린 재이가 곧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와, 한재이. 푹 잤냐? 나도 그대로 좀 더 자고 오겠다고 할걸.”
“너무하시네요. 선배님. 걱정해 주시지는 못할망정.”
“걱정은 무슨. 핑곗김에 푹 주무시고 나오신 분을 뭐하러 걱정해.”
출연자 대기실.
다른 장소에서 멤버들의 체험이 계속되는 사이 먼저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 제작진과 함께 자신이 찍은 영상을 확인하고 있던 비제이가 마침 대기실로 돌아온 재이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말을 걸었다.
‘어쩌다 잠이 든 거지.’
처음엔 계획대로였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한산의 지시에 따라 카운트다운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거로 진짜 잠이 들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 방면 전문가라는 한산만큼이나 자신도 스스로의 수면을 컨트롤하는 데엔 나름 자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이 숙면 상태가 아님에도 전생이 보이는 것처럼 연기했을 때 한산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궁금하던 차였다. 눈치껏 넘어가 주면 땡큐고 안 넘어가 주면 수면 컨트롤이 안 듣는다는 핑계로 제작진에게 준비된 대본대로 가자고 요구하려던 참이었다.
그랬는데.
중간부터 기억이 흐릿했다. 한산의 능력이 저보다 뛰어났던 건지 그저 자고 싶었던 본능이 이성의 통제를 뛰어넘어 버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질문에 대답을 이어 가던 중 어느 순간부터인가 진짜로 곯아떨어진 듯했다.
‘대충 저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제작진이 틀어 준 자신의 촬영분을 확인하며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화면은 한산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을 이어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나 참, 진짜 정신없었나? 저기서 왜 형을 불러. 이건 편집해 달라고 해야겠다.’
마지막 부분을 보고 있던 재이가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옆에서 함께 지켜보고 있던 비제이가 입을 열었다.
“와, 한재이 연습 빡세게 해 왔구나? 이야… 마지막에 저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까지. 완벽하다 완벽해. 괜히 포스트 차상혁이 아니었네.”
“연습한 거 아닌데요.”
미간에 주름을 꾹 잡으며 대답하는 재이의 모습에 비제이가 선수끼리 왜 이러냐는 듯한 눈빛으로 빙글거리며 말했다.
“아니긴 뭘 아니야. 딱 봐도 컨셉 잡은 게 확실하게 보이는데. 박사님하고 문진할 때 미리 짜 둔 거야?”
길게 설명해 봐야 상황만 더 이상해질 것 같고 뭐,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라는 생각에 대답 대신 그저 웃고만 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비제이가 이어 말했다.
“근데 컨셉을 잡으려면 좀 다른 거로 하지. 이건 너무 노골적으로 노린 것 같잖아.”
“왜요?”
“우리 곡 홍보하러 나온 거랑 너무 제대로 겹치잖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전쟁 중인 영웅이라니. 이런 거 할 때는 좀 의외성이라던가 그런 게 있어야 되는 건데.”
아, 그게 또 그렇게 되나?
재이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아… 그래서 선배님은 전혀 다른 컨셉으로 준비해 오신 거예요?”
대화의 화살이 자신을 향하자 억울하다는 듯 비제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난 준비 같은 거 안 했다고. 진짜 순도 100% 기억에 없다니까?”
“어째서지. 완전 노리신 것 같던데. 대갓집 머슴이라니. 웃겨 죽는 줄 알았다고요.”
“노릴 거면 대갓집 정승을 노렸겠지 왜 하필 머슴이었겠냐고.”
“전 또 반전 매력 어필하려고 일부러 그러신 줄 알았죠.”
“지금도 우리 그룹 머슴이나 다름없는데 반전은 무슨.”
“아 그럼 일관성 어필인가.”
어휴, 너랑은 말을 섞지 말아야 한다는 걸 내가 깜박했다.
재이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리는 비제이에게 예의 바른 후배답게 단련된 비즈니스 스마일로 화답하고 있는 사이 촬영을 마친 안믿파의 두 명, 에이미와 인혁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어땠어요?”
“역시 전생 따위 없었어?”
재이와 비제이가 동시에 묻는 말에 에이미와 인혁의 표정이 애매하게 구겨졌다.
“차인혁 쟤는 수면 컨트롤이 아예 먹히질 않더라고.”
에이미가 툭 내뱉은 말에 비제이와 재이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하며 인혁을 쳐다보았다. 그게 가능하긴 하냐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인혁이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수면 컨트롤이 걸리는 단계를 너무 빨리 지나쳐서 유도 질문을 걸 수가 없는 상태였다고 하시던데요.”
“말하자면 후크를 걸어 보기도 전에 빠져나가 버린 것 같은, 뭐 그런 느낌?”
에이미가 옆에서 거들었다.
“와, 그래서요?”
“그래서는 뭘. 잠만 실컷 자다가 나왔지.”
재이의 질문에 에이미가 한심하다는 듯, 부럽다는 듯 인혁을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에이미 선배는요? 선배도 했어요?”
“아니.”
“왜요?
“잠이 안 오더라고.”
“헐.”
에이미의 간결한 대답에 비제이와 재이를 비롯하여 대기실에 모여 있던 스태프들에게서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나는 너무 자서 못 하고 하나는 너무 안 자서 못 하고?”
“괜히 안믿파가 아니네. 방어율 장난 아닌데요.”
어이없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한마디씩 하는 비제이와 재이의 말에 발끈한 에이미가 뭐라고 하려 입을 여는 순간 대기실 문 너머로 촬영 재개를 알리는 조연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쉴 틈을 안 주시네.”
“그만큼 잤으면 많이 쉬었지 뭐.”
인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린 말에 재이가 나무라듯 말했다.
“그러게 사람이 양심이 좀 있어 봐라.”
“다들 잠깐 기다려 봐, 여기서 그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신난 듯 재이에 이어 인혁을 타박하는 비제이의 말에 에이미가 세 사람을 훑어보며 팔짱을 낀 채 어이없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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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커뮤니티 PART.Y 팬 게시판
[전생체험 본 포션들 좀 들어와 봐라]
으아니 재재님 전생 용사인 거나 인혁이 수면 컨트롤 안 되는 거 넘 찰떡이자나 ㅋㅋ큐ㅠ 설정 아니어도 설정이어도 어느 쪽이건 넘 맛있는 것ㅋㅋㅋ 그러니까 그거 하는 김에 우리 애들 다 한 번씩 하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개인적으로 우리 은규 뭐 나올지 매우 궁금합니다 ㅋㅋㅇㅇㄹ
└ 재재님 전생 용사였던 거 ㄹㅇ설득력 쩔어 ㅋㅋㅋㅋ
└ ㅇㅇ어흑재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님 ㅋㅋㅋ
└ 전생 용사 현생 흑막ㅋㅋㅋ
└ 내가 좀 영감 있는 편인데 저거 보면서 좀 섬뜩하더라 진짜 뭐 있는 것 같은 느낌
└ 빨간 머리라 더 그랬던 듯 ㅇㅇ
└ [아리송의 집]이 심야방송이라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빨간 머리 재재님이 분위기 잡는 거 보고 우는 애기들 속출했을 듯ㄷㄷ
└ ㅇㄱㄹㅇ 재재님 잠들었을 때 목소리 느릿하게 늘어지는데 ㅎㄷㄷ 몬가… 몬가했음…
└ 차 리더 숙면 컨트롤 실패한 거에서 터진 거 나뿐임? 박사님이 부르는 데도 세상모르고 자는 거 넘ㅋㅋ 퐝당했을 박사님 심정=내심정
└ 거기에 에이미까지 쌍으로 ㅋㅋㅋ 안믿파 넘 강경한 거 아니냐고 ㅋㅋ
└ 하버드 출신 전문가도 뚫지 못한 그들의 신념ㅋㅋㅋ
└ 이렇게 된 거 진짜 우리 애들 다섯 명 다 해 주면 안 되나. 다른 애들 전생도 궁금해 ㅠㅠ
└ ㄴㄷ 이거 보고 싶다. 듣고 있냐 케이엠?
└ 재이야 형님한테 부탁 좀 잘 해 보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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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거의 다 왔다. 아, 여기구나?”
운전석 쪽에서 들려온 석관의 목소리에 재이는 들여다보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탄 차는 지금 도심 한복판, 새로 지어진 듯 깔끔한 느낌의 오피스 빌딩의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형도 들어가시게요?”
“어, 근데 난 가서 인사만 하고 숙소 돌아가 봐야 해. 오늘 환심이들 라디오 있는 날이라.”
“아 맞다. 오늘부터죠?”
“어. 그러니까 얼른 올라가자.”
석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재이의 둘째 형이자 본업 ‘뇌 과학자’라는 한산이 차렸다는 수면 클리닉에 와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돌아가려던 재이에게 한산은 따로 꼭 할 얘기가 있으니 시간 날 때 클리닉으로 찾아오라고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대로 무시할까도 고민해 봤으나 딱히 무시할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에 석관에게 부탁해 여기까지 온 참이었다.
“와 그럴듯하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실내의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추상화가 걸려 있어 클리닉이라고 하기보다는 어디 고급 호텔 같은 느낌의 인테리어에 재이가 감탄한 듯 내뱉었다.
“요새 불면증 때문에 수면 클리닉 찾는 사람들이 많다더니. 형님이 트렌드를 잘 읽으시는 것 같은데?”
뒤따라 들어온 석관 또한 세련된 내장에 감탄한 듯 한 바퀴 둘러본 뒤 재이에게 말했다.
“퍽이나요. 저번에 보니까 그냥 쌩 사기꾼 같던데요.”
“왜, 형님 덕분에 전생에 세상을 구한 영웅 타이틀을 얻게 됐는데, 감사해야지.”
“결국 짜고 친 거 아니냐고 엄청 까였잖아요.”
“그런 거야 뭐 요새 시청자들도 반쯤 짐작하고 보는 거 아니겠냐.”
석관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재이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묘하게 우리 형한테 호의적이시네요, 형.”
“묘하게 호감형이란 말이지, 너네 둘째 형님이.”
“거봐요, 이게 바로 전형적인 사기꾼 상이라는 증거라니까.”
“어휴 너도 참.”
석관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접수처를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가자 한가한 듯 푹신한 데스크 의자에 기대앉아 TV에서 흘러나오는 카히타마하키 관련 뉴스에 시선을 두고 있던 한산이 석관과 재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매니저님. 지난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재이 둘째 형인 한산이라고 합니다. 재이 녀석을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한산에게 재이 옆에 서 있던 석관이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재이가 워낙 똑 부러져서 제가 뭐 더 할 것도 없습니다. 저야말로 지난번엔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려서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와, 형 돈 많이 벌었나 봐요. 이런 곳에 클리닉이라니.”
손님도 없어 보이던데 대체 돈은 다 어디서 나셨대.
두 사람의 인사에는 흥미 없다는 듯 진료실 곳곳을 구경하던 재이가 중얼거린 말에 석관이 재이를 나무라듯 말했다.
“씁. 재이야, 말조심 좀. 아, 죄송합니다. 버릇이 되어 가지고.”
“아뇨. 괜찮습니다. 이렇게 매니저님이 재이 챙겨 주시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보니 오히려 더 안심이 되네요.”
“석관이 형, 오늘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두 사람의 주거니 받거니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찌푸린 채 쳐다보고 있던 재이가 석관을 향해 물었다.
“어휴 간다, 가. 이따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 테니까 그때까지 어디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
“네 형, 다녀오세요.”
순순하게 대답하는 재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석관이 한산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자 그 뒷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한산이 재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얘기 좀 나눠 볼까.”
“오… 무슨 얘기길래 그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죠?”
한산을 따라 진료실 한쪽에 위치한 소파 세트에 걸터앉으며 재이가 물었다. 그런 재이를 빤히 쳐다보던 한산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