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47화 (147/224)

#147

두근두근 전생체험 (3)

* * *

전날 밤.

한산은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복잡한 그래프와 숫자들 속에서 유독 특이값을 보이고 있는 한 사람의 데이터를 한참 들여다보던 한산은 무거운 한숨과 함께 의자 등받이로 기대앉으며 미간에 깊게 패인 골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한재이.

호적상의 친동생.

아 그날 들어 보니 둘 다 호적에서 파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이건 어쩌면 이제 틀린 말일지도.

어릴 적 형제들 사이에서 위아래로 치여서 제대로 기도 못 펴는 것 같던 울보 녀석이 못 본 사이에 요새 가장 핫하다는 인기 연예인이 되어 있었다. 용케 부모님이 허락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잠시, 누군가를 본받아 집을 나와 버렸다고 하며 도전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눈동자는 기억 속의 녀석과 닮은 듯 사뭇 다른 듯한 느낌이었다.

“맹랑해졌어. 수작을 걸 줄도 알고.”

그것도 촬영용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실험 중에.

한산은 화면을 응시한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가 이상을 눈치챈 것은 재이의 수면 컨트롤이 시작되고 본격적인 질문과 답변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모니터의 그래프는 분명 정상적인 곡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그 범주가 일반적인 평균값을 살짝 비껴간 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 정도 수치면 처음부터 작정하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고 봐야겠지.’

그 상태를 본인의 의지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사실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한산은 화면에 표시된 재이의 뇌파 기록을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여기는 분명 의식이 있는 상태였어. 의도한 대로의 대답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지. 그렇지만.’

일정한 곡선을 유지하던 그래프가 어느 지점을 계기로 푹 꺾여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분명 UCSS(미확인접점 수면 구간)이 맞는데.’

한산은 연구용으로 받아 온 방송국 촬영본을 찾아 영상을 재생했다. 다른 쪽 모니터에서 괴로운 듯 잔뜩 찡그린 얼굴의 재이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 가야 해.

- 어디로요?

- 끝을 내러.

- 무엇을 끝내죠?

- 이 전쟁.

지긋지긋해.

한산은 재이가 혼잣말을 내뱉는 장면에서 영상을 정지시키고는 동일한 시점의 뇌파 그래프를 확인했다. 그래프는 재이가 확실하게 UCSS(미확인접점 수면 구간), 통칭 전생 구간에 진입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초반 비수면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대답하던 것들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과연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까.

생각에 잠겼던 한산은 다시 영상을 재생시켜 닥터 스톱이 들어가기 마지막 구간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 신의 권능으로…….

- 구원…….

- 기사…….

이름을 입에 담기 직전 뇌파가 요동치며 모니터가 경고음을 내는 장면까지 살펴본 한산이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한번 의자의 등받이로 깊게 몸을 묻었다.

“후우…….”

전생 구간에서 피실험자가 전생에서의 자아를 자각하는 순간 뇌의 스트레스 역치가 급작스럽게 증가하는 것은 드문 현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이의 경우처럼 자신이 나서서 닥터 스톱을 걸어야 할 정도로 뇌파의 파동이 급작스러운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드물었다.

게다가.

“진짜 이상했던 건 여기서부터란 말이지.”

한산이 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 재이 씨, 잘 잤어요?

- …형?

재이의 목소리가 들려온 타이밍에 영상을 멈춘 한산이 뇌파 기록을 확인했다. 그래프는 재이가 여전히 수면 상태, 그것도 전생 구간에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통계치로 보면 이 구간에서의 의식은 이미 단절된 영혼의 기억이어야 하는데.’

한산이 미간의 주름을 깊게 잡은 채 생각에 빠졌다.

‘분명히 내 얼굴을 알아봤단 말이지.’

전생 구간에 진입한 피실험자가 현생의 기억을 떠올린 경우는 이제껏 발견된 바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밝혀진 ‘인간의 뇌에 저장된 전생에 관한 정보’란 어디까지나 극히 제한적인 수면 구간에서만 활성화되는 매우 한정적인 것이었다. 애초에 비수면 상태에서 활성화되는 사물 인지능력과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산의 눈앞에 놓인 데이터는 전생의 한재이가 현생의 친형을 인지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세상을 구한 기사와 현생의 한재이가 공존하는 전생이라니.”

‘세상을 구한 기사’를 기억하는 듯하던 의식 상태의 한재이와 현생의 친형을 ‘알아본’ 비의식 상태의 한재이. 그렇다면 지금의 한재이는 대체 어느 쪽이지?

의자 팔걸이에 한 손을 괸 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한산이 씨익 입 끝을 말아 올려 웃었다.

“…재밌잖아.”

어려운 문제를 푸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었다. 학회의 등쌀에 못 이겨 잠시 쉬는 셈치고 들어온 고국에서 이런 재미있는 케이스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

“일단 우리 피실험자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그래도 우리가 가깝다면 가깝다고 할 수도 있는 사이라 다행이야.

한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들고 그동안 한 번도 자신 쪽에서 먼저 걸어 본 적은 없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 *

“…너, 누구야?”

소파에 앉자마자 이쪽을 빤히 쳐다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한산의 말에 재이는 놀란 속내를 들키지 않도록 평소의 무심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꾸했다.

“기억 상실 컨셉은 유행 한참 지났는데. 오랜만에 귀국하신 게 맞긴 한가 봐요.”

“묻는 말에 대답해 봐.”

상대방의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미동도 없이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재차 물어오는 한산에게 재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한재이요. 길막리 오형제 중 넷째 한재이. 뭐, 부모님 성함하고 생년월일부터 쭉 다 읊어 볼까요?”

“그래, 한재이.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형제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느라 눈물 콧물 마를 새 없던 과수원집 넷째.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이돌이 되겠다고 올라와서도 여전히 연습생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느라 별명이 ‘퇴출 1호’이던 그 한재이 말이야.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몰라보게 달라졌단 말이지. 아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자신을 주시한 채 조용히 내뱉는 한산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재이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물었다.

“한준이 녀석이랑 통화하셨어요?”

“걔 말도 들은 건 맞는데. 다이 형도 비슷한 말을 하던데.”

물론 한쪽은 매우 부정적이고 한쪽은 매우 긍정적이었지만, 결국 결론은 같은 소리였단 말이지.

한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 다시 한번 재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은테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동자가 빈틈없이 이쪽을 훑고 있었다.

“형, 저 이래 봬도 나름 바쁜 스케줄 쪼개서 온 거거든요. 이런 식으로 빙빙 돌려 말하는 거 딱 질색인데.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죠? 대체 뭐가 알고 싶으신 건데요?”

재이의 말에 한산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대답했다.

“네 정체. 대체 뭐냐고.”

“말했잖아요. 한재이라고. 그거 말고 달리 무슨 대답을 원하시는 건데요? 뭐 외계인이라고라도 해야 됐는 거예요?”

답답하다는 듯 살짝 언성을 높이는 재이를 바라보고 있던 한산이 입을 열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일어선 기사, 는 어때?”

“……!”

한숨과 함께 소파 등받이로 몸을 푹 기대고 있던 재이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 한산이 눈을 빛내며 그런 재이의 반응을 살피고 있는 사이 재이가 입을 열었다.

“뭐 좀 더 알아내셨어요?”

“…뭐?”

“그거 제 전생 얘기잖아요. 뭐 좀 더 알아내신 게 있냐고요.”

이번에는 재이가 한산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예 까고 들어가겠다는 건가 보네? 좋아,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허세인지 한번 볼까.’

한산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짐짓 놀란 듯이 재이에게 물었다.

“혹시 너 전생을 기억하는 거야? 언제부터. 어디까지 기억하는데?”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 안 나는데. 드문드문 꿈에 나와요.”

“어떤 꿈인데?”

“싸우는 꿈. 용도 나오고 마법도 나오고. 무슨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런 세계요.”

태연하게 대답하는 재이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산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거. 정말 꿈에서 본 거 맞아?”

한산의 나직한 목소리에 줄곧 변함없던 재이의 표정이 일순 작게 흔들렸다.

“그게 무슨…….”

“이거 좀 봐 볼래?”

한산은 재이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테이블 위에 미리 준비해 뒀던 노트북에서 영상을 재생시켰다.

- 잘 잤어요, 재이 씨?

-…형?

잠에서 막 깨어나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의 재이가 한산을 올려다보며 짧게 대답하고 있었다.

“…이게 어때서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화면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며 묻는 재이에게 한산이 물었다.

“기억나?”

“네?”

“이 부분, 기억나냐고.”

영상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묻는 한산의 말에 기억을 되짚는 듯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재이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안 나요.”

“그렇겠지.”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 이 부분은 기억이 안 나는 게 맞다고.”

이때 아직 잠든 상태였거든, 너.

한산의 말에 재이가 눈을 찌푸렸다. 천재라더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따라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저기,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좀 쉽게 설명해 주실래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계신 건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가는데요.”

너무 신경을 쓴 탓인지 머리 한쪽이 쿡쿡 쑤시듯 아파지는 느낌에 한껏 눈을 찌푸린 재이가 한산을 향해 투덜거렸다. 그런 재이의 모습을 잠시 살핀 한산이 화면 한쪽에 표시된 뇌파 그래프를 손으로 짚으며 설명했다.

“여기, 이 구간을 소위 전생 구간이라고 부르는데. 사람이 자면서 이 구간에 도달하면 전생의 기억을 끌어낼 수 있다고 알려져 있거든. 근데 잘 봐. 이게 네 뇌파 데이터고.”

데이터를 짚어 준 한산이 영상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이게 그날 실제로 촬영했던 영상.”

재이는 한산이 짚어 준 대로 데이터와 영상의 시점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현생의 저는 잠든 상태에서 전생의 제가 깨어났는데 걔가 형을 알아보더라는 말씀이네요?”

“쉽게 말하자면 그런 거지.”

“…말이 안 되는데요?”

“원래 세상은 말이 안 되는 일들로 가득한걸.”

어딘지 유쾌해 보이는 한산의 짧은 대답에 재이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난 궁금한 거야. 현재의 한재이는 전생의 기사를 기억하고, 전생의 한재이는 현재의 나를 기억하는 이 상황은 대체 뭘까 하고.”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산의 시선을 마주 보며 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전생이냐 현생이냐는 둘째치고. 지금까지는 그저 ‘내’가 ‘한재이’에게 섞여 든 줄 알았더니.’

그럼 원래의 온전한 ‘한재이’가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었다는 소리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머리에 누군가가 송곳으로 찔러 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윽…….”

“재이야?”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리자 깜짝 놀란 한산이 일어나 다가오는 것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당황한 한산의 얼굴이 비스듬히 기우는 것과 동시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

.

.

-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뭐?

- 나가고 싶지 않아.

- 왜?

- 네가 있으니까.

- …‘네 몸’이잖아.

- 이제 ‘네 몸’이기도 하지.

.

.

.

“정신이 들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본 재이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음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네. 저 물 좀 주세요.”

재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하자 미리 준비해 뒀던 물컵에 물을 따라 내밀며 한산이 물었다.

“좀 어때?”

“…괜찮아요.”

시원한 물을 들이켜니 어딘지 멍하던 정신이 확 깨어나는 기분에 재이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쪽이야?”

“…형 집요하시네요.”

“천재들의 특징이지.”

“대부분은 환자 걱정부터 하지 않나요?”

“넌 아직 내 환자가 아니잖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내뱉는 한산의 대답에 재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좀 재수 없는 거 본인도 아시죠?”

“응, 그래서 어느 쪽?”

재이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대답을 재촉하는 한산을 잠시 노려보던 재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찐’ 재이는 나서기 싫대요.”

“그사이에 소통을 했다고? 두 자아가?”

그거 정말 놀랍군.

대체 그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당장이라도 묶어 놓고 뇌를 파헤쳐 보고 싶다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집어삼킬 듯 뚫어지라 쳐다보는 한산에게 재이가 거꾸로 물었다.

“원래 과학자가 이렇게 뭘 잘 믿어요? 연구의 기본은 의심 아니냐고요.”

“내가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다는 주의라서.”

재이의 말을 끊어 낸 한산이 그때까지 빙글거리던 표정을 바꾸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이렇게 정신을 잃거나 했던 적 있니?”

“아뇨. 처음인데요.”

“몸에 이상이 있다고 느꼈던 적은? 피곤하다거나, 코피가 난다거나, 시야가 안 좋다거나.”

“딱히. 왜요?”

재이의 물음에 한산이 대답했다.

“좀 더 자세히 지켜봐야 알 것 같지만. 지금 네 상태를 최대한 말이 되게 설명해 보자면 수면 상태에서 활성화되어야 할 뇌파 구간이 의식 상태에서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되어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거든. 반대쪽으로도 마찬가지고. 말하자면 깨어 있는 동안 꺼져 있어야 할 스위치와 자는 동안 꺼져 있어야 할 스위치에 모두 다 불이 들어와 있는 상태라고 할까.”

간단하게 말하면 뇌에 과부하가 걸리기 쉬운 상황이라는 뜻이지.

“전 잠도 잘 자고 딱히 이상한 곳도 없는데요?”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표면상으로는 그렇지. 그치만 방금 전 상황처럼 조금만 깊게 건드려도 뇌가 이상 상태라고 판단하고 셧다운을 하게 만들 정도로 한계에 와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거야, 아마.”

“그럼 그 한계를 넘어서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건 아직 모르지.”

“헐. 이만큼 말해 놓고 정작 중요한 걸 모른다고 하면 어떡해요.”

“‘아직’이라고 했잖아. 이제 찾아봐야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한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재이는 더 이상 묻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 * *

“어땠어? 좋은 시간 가졌니?”

“아주 유익했죠.”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다 나오고. 역시 박사님이 보통 인물이 아니시긴 한 모양이다.”

“대체 제가 어떻길래. 아니 그것보다 학위만 믿고 올려치기 너무 심하신 거 아닌가요.”

재이의 말에 석관이 ‘네가 어떤 녀석인지 정말 몰라서 묻냐’는 표정으로 힐끗 재이를 바라보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다른 녀석들도 시간 나면 한 번씩 데리고 와야겠어. 아예 앞으로 너 여기 올 때마다 한 명씩 같이 데리고 올까.”

“어휴 형, 그럼 정신 사나워서 진료고 뭐고 없을 것 같은데요.”

재이의 말에 그 상황을 상상해 보기라도 하듯 잠시 말을 멈춘 석관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건 그래. 그래도 아는 분께 이렇게 제대로 진찰받을 기회가 흔한 건 아니니까.”

“따로 가는 거로 하죠. 어차피 걔들 가 봐야 산이 형 연구 재료로나 쓰일걸.”

“인혁이 같은 타입이면 연구 재료로도 못 쓰이는 거 아니냐, 혹시.”

“정곡을 찌르시네요, 형.”

은근히 뼈 때리는 데 재주 있으시다니까.

재이가 중얼거리는 말에 석관이 뿌듯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한산과의 이야기는 결국 재이가 정기적으로 클리닉을 찾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오늘처럼 일부러 자극하지만 않는다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스위치가 모두 켜진’ 상태가 지속되면 장기적으로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당분간은 클리닉에 와서 수면 유도를 통해 몇 시간만이라도 강제로 의식을 모두 셧다운 시키고 쉬게 하는 수밖에 없다는 한산의 말을 떠올리며 재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 맞다, 너 클리닉 가 있는 동안 박 피디님한테서 연락 왔었다.”

“박 피디님이요?”

“어, 인혁이 드라마의 그 박승해 피디님.”

“와, 정말로 연락 주셨네? 뭐라고 하셨는데요?”

박승해 피디는 인혁이 출연한 ZTBC 미니시리즈 [사랑 임, 퇴근은 언제 하나요]의 연출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촬영 현장에서 갑작스러운 카메오 출연을 흔쾌히 수락해 준 재이에게 따로 고마움을 표하겠다고 했던 것을 진짜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재이를 힐끔 쳐다본 석관이 대답했다.

“어, 그게. 좀 미묘한데.”

“뭐가 미묘한데요?”

곧바로 얘기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석관의 태도에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드라마 배역 제안을 하시더라고.”

“드라마요? 박 피디님 거?”

“아니. 정용재 피디님.”

“정용재 피디님이요? 그분 사극 전문이시잖아요.”

저 사극 들어가요, 혹시?

재이가 눈을 빛내며 묻는 말에 석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음. 사극까진 아니고.”

“아니면 아닌 거지, 까지는 아닌 건 또 뭔데요.”

답답하다는 듯 되묻는 재이에게 석관이 이어 말했다.

“강점기 때 이야기래.”

헐, 일제 강점기?

뜻밖이라는 듯 생각에 잠겨있는 재이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본 석관이 말했다.

“정용재 피디님 네임 밸류도 있고 소재가 그렇다 보니 편성하고 투자처 확보는 이미 해 둔 상태라나 봐. 오퍼를 받았다고는 해도 꼭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너희 연말 스케줄도 있고 신곡 작업도 있고, 스케줄은 안 그래도 꽤 빡빡한 상황이니 일단 회사에서 신중히 생각해 보고…….”

“해 보고 싶은데요, 그거.”

“뭐?”

“해 보고 싶다고요.”

재이가 석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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