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48화 (148/224)

#148

이환의 빅픽쳐

“하필이면 시대극을?”

박승해 피디의 제안에 대해 들은 멤버들의 반응은 석관의 그것과 별다른 바 없었다. 정용재 피디와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배경은 그 두 키워드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의 시청률이 이미 보장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었지만 그 이외의 모든 면이 불안 요소였다.

“그거 어렵지 않나?”

엠케이에 이어 은규가 고개를 갸웃하자 이환과 남궁찬이 가세했다.

“뭔가… 그 피디님 혹시 그거 아니냐? 일단 약속은 했으니 주긴 하겠는데 받아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내 알 바 아님, 뭐 이런?”

“에이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그냥 좋은 건수 주시려다 보니 받을 사람 생각은 상대적으로 덜 하신 거겠지.”

결국,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엠케이가 타박하는 소리에 또다시 자기들끼리 왁자지껄 떠드느라 정신없어진 주변을 바라보던 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석관과 멤버들의 반응도 이해는 갔다. 굳이 욕먹을 리스크를 안고 시대극을 들어가느니 다른 작품을 찾아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스펙트럼을 넓힐 기회잖아.’

겸업으로 하는 배우 업이라고는 해도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제자리걸음을 할 생각은 없었다. 특히 아이돌이라는 특수 배경과 아직 미성년인 나이까지 고려하면 사실 지금 당장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역할의 풀이란 상당히 좁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기회 있을 때 치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재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가운데 옆에서 듣고 있던 인혁이 이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쩔 건데?”

“당연한 걸 뭘 물어봐?”

재이의 대답에 인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짧게 물었다.

“자신은 있고?”

“그것도 당연한 얘기고.”

“그래.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인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것을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엠케이가 물었다.

“언제부터 시작하는데?”

“지금 주요 배역 캐스팅 중이라니까, 연말 지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시작할 듯?”

“오디션도 본대?”

“아마 그럴걸.”

재이의 대답에 남궁찬이 엠케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엠케이 도전하게?”

“오 노, 배우 업은 내 갈 길이 아닌 듯.”

“아 왜, 서계진 캐릭터 좋았는데. 탈출 신에서 그 필사적인 도지나아아아아-!!!”

“아악 남궁찬 죽어! 죽어!”

[눈떠도]에서 컨셉 예능을 한 이후 멤버들은 기회만 되면 계진이의 대사를 가지고 엠케이를 놀려 댔다.

“아니 한재이는 놔두고 왜 맨날 나만 물어뜯냐고!”

기어코 남궁찬을 쫓아가 헤드록을 걸고도 분이 안 풀린 듯 엠케이가 투덜대자 옆에서 팔짱 끼고 구경 중이던 이환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너 같으면 쟤를 걸고넘어지고 싶겠냐고.”

대답과 함께 이환이 턱짓으로 회의실 한쪽 의자에 기대앉아 멤버들의 하는 양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재이 쪽을 가리켰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긴 엠케이가 납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것을 보고 은규가 조용히 말을 얹었다.

“게다가 쟤 걸고넘어져 봤자 기대한 반응도 안 나올 텐데 뭐.”

“그치. 도지나아아악!!! 해 봤자 ‘시끄러워.’ 한마디면 끝나 버릴걸.”

조금 전 엠케이의 공격에 회의실 테이블에 엎어져 있던 남궁찬이 일어나며 한마디 거들자 이환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와 지금 거 좋은데? 그거 개인기로 밀어라, 남궁찬.”

“진짜?”

남궁찬이 반색하며 되묻는 것을 본 이환이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거 해라, 남궁찬. 진짜 한재이면 몰라도 너라면 맘 놓고 갈굴 수 있을 것 같아, 좋아.”

“오, 드디어 우리가 남궁찬의 쓰임새를 발견한 거야?”

“놀랍다, 남궁찬이 도도님 발닦개 말고도 쓰일 곳이 있었을 줄이야.”

“아니 분명 엠케이 몰이로 시작했는데 왜 내가 몰리고 있냐고.”

“인생 서바이벌. 방심한 놈이 잘못이지.”

투덜대는 남궁찬에게 이환이 이죽대며 대꾸하는 사이 석관과 기획팀의 심진우 팀장이 함께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연말 스케줄 나왔다.”

석관의 말에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회의실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 * *

ZTBC 연기대상 시상식 당일.

인혁과 재이는 시상식이 이루어지는 공개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조용한 차 안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린 인혁은 옆자리에 앉은 재이가 몸을 뒤로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별일이네.’

잠이 얕은 재이는 평소 이동 중인 차 안에서는 거의 자는 법이 없었다. 잠깐 눈을 감고 있다가도 누가 저를 쳐다보기라도 하면 귀신같이 그 기척을 눈치채고는 금방 반짝 눈을 뜨고 상대를 마주 보곤 해서 멤버들 사이에서는 식스 센스라도 있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런 재이가 자신이 쳐다보는 데에도 미동 없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인혁은 자주 볼 수 없는 광경에 신기함과 동시에 왠지 불안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피곤한가? 하긴 뭐, 그럴 만도 하지.’

연말 시간이 순삭일 거라던 석관의 경고처럼 파티의 연말 스케줄은 어지간한 인혁으로서도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살인적이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행사들에 새벽부터 새벽까지 그야말로 분 단위로 스케줄이 몰아쳤다. 거기에 자신과 재이는 연기와 관련한 일정도 따로 챙겨야 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눈 붙일 틈조차 없는 매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천하의 한재이가 지쳐 떨어져 나가는 것도 이해는 갔다.

‘요새 나름 공부도 시작한 것 같던데.’

결국, 자신의 바람대로 정용재 피디의 차기작으로 거론되고 있는 시대극에 출연이 확정된 재이는 그날부터 곧바로 배경 조사에 들어갔다. 평소라면 핸드폰을 들고 있었을 손에 느슨하게 놓인 것도 관련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었다. 겉으론 내색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무서운 속도로, 치열하게 쌓아 올리고 있는 녀석이었다. 인혁은 문득 치솟아 오르는 경쟁심에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도착이야, 내릴 준비들 해. 어? 재이 아직도 자는 거야?”

운전석 너머로 매니저 홍정수가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곧 있으면 레드카펫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홍정수가 앞차의 움직임에 따라 속도를 줄이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룸미러 너머 인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 되겠다, 인혁아. 재이 좀 깨워 봐라.”

“네. 한재이, 다 왔대. 일어나.”

툭툭.

인혁이 재이의 팔꿈치를 가볍게 두드리며 조용히 말했다.

“…….”

여전히 말없이 잠들어 있는 재이에 인혁이 얼굴을 굳히고는 어깨를 쥐고 살짝 흔들면서 말했다.

“한재이, 일어나.”

“음….”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천천히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재이에 내심 안도한 인혁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무슨 잠을 그렇게 정신없이 자냐?”

“후. 뭐야 벌써 도착했어?”

재이가 꽉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에 몇 마디 더 타박하려던 인혁이 하려던 말을 삼키고는 대신 물었다.

“어디 안 좋아?”

인혁의 물음에 그제야 그를 돌아본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니? 멀쩡한데.”

그런 재이의 얼굴을 잠시 유심히 살펴보던 인혁이 시선을 돌리며 툭 내뱉었다.

“뒷머리. 뻗쳤어.”

“으악, 진짜네. 실장님, 저 이것 좀 빨리 어떻게 안 될까요.”

기껏 샵에서 공들여 세팅한 머리가 뻗친 것을 확인한 재이가 뒷좌석에 함께 타고 있던 스타일리스트를 돌아보며 외치는 것을 곁눈으로 흘기며 인혁은 내심 가볍게 중얼거렸다.

‘한재이도 인간은 인간이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도 있고.’

리더라는 중간 관리직에 있다 보니 좋건 싫건 멤버들의 컨디션을 살피는 것이 하나의 습관처럼 자리 잡은 인혁이었다. 입으로는 세상의 오만 가지 병과 부상은 혼자 다 끌어안고 사는 듯 엄살이 심한 남궁찬부터 웬만한 부상으로는 입도 뻥끗하지 않는 한재이까지, 컨디션 관리에 있어서 파티 멤버들은 모두 제각각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멤버들 사이에서 일견 항상 무모해 보이는 한재이가 사실 누구보다 철저하게 컨디션 관리를 하고 있다는 것도 인혁은 잘 알고 있었다. 켐콘이 끝난 다음 날 모두가 숙소에 뻗어 있던 그때조차 루틴을 놓을 수 없다며 운동을 하고 온 독종이었다. 그렇기에 지금같이 라이브 이벤트를 앞두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한재이를 보는 것은 매우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수 형, 석관이 형 언제 오신대요?”

“좀 이따가 준비되는 대로 합류하기로 했는데 왜?”

“어. 재이 말씀 좀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뭐? 왜? 재이 많이 안 좋아?”

스타일리스트와 몇 마디 주고받느라 자신과 정수의 대화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듯한 재이 쪽을 힐끔 바라본 인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혹시 모르니까. 형이 미리 좀 전해 주세요.”

“그래, 알았다.”

정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들을 부드럽게 꺾었다. 차가 메인 행사장 쪽으로 진입하자 도로 양옆에서 기다렸다는 듯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왔다. 자신들보다 먼저 도착한 스타들이 화려하게 깔린 레드카펫을 밟고 올라 잠시 포즈를 취하고는 천천히 공개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와, 많이들 오셨네.”

“그러게.”

“근데 왜 하필 나는 너랑 입장이냐고.”

겨우 뻗친 머리를 고치고 한숨 돌린 듯 재이가 새삼 옆자리의 인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투덜거렸다.

“뭐래, 나라고 너랑 입장하고 싶었겠냐고.”

“너무한다. 아무리 우리가 조연이래도 시청률에 일조했는데 이렇게 찬밥 신세라니.”

인혁과 재이가 티격태격하고 있는 것을 룸미러 너머로 지켜보고 있던 정수가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뭐야. 너희 베커 상 노리는 거 아니었어?”

그 소리에 정색한 재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정수 형 이상하네. 어떻게 저렇게 섬뜩한 소리를 웃으면서 하실 수가 있지?”

“괜히 별명이 포스트 김석관이겠냐고.”

“농담이 섬뜩한 게 석 라인 특징인가 보네.”

“그거야말로 섬뜩한걸.”

인혁과 재이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레드카펫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

“준비됐어?”

“물론이지.”

조금 전까지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마주 보고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있던 정수가 밖에서 대기 중인 스태프에게 사인을 보냈다. 문이 열리고 눈부시게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의 섬광을 헤치고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 * *

인터넷 포털사이트 포토뉴스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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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잘 들어간 모양인데요?”

달리는 밴 안에서 자신의 고정석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엠케이가 하나둘 뜨기 시작한 인터넷 기사들을 눈으로 훑고는 고개를 들어 올려 룸미러 너머 운전 중인 매니저 윤병수와 그 옆 조수석에 앉은 석관을 향해 말했다.

“그러게, 지금 정수한테도 연락 왔다. 이제 우리만 시간 맞춰 합류하면 되겠어.”

석관이 뒷좌석에 탄 엠케이와 이환, 은규, 그리고 남궁찬을 차례대로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아 나 벌써 긴장되는 듯.”

“심은규 청심환 챙겨 먹었냐?”

“어어어? 어… 어제 리허설 할 때는 분명 먹었는데.”

“오늘도 아까 숙소 나오기 전에 먹는 거 내가 봤음.”

엠케이가 묻는 말에 긴장한 탓인지 기억을 더듬고 있는 은규 대신 이환이 대답했다. 멤버들의 대화를 조수석 너머로 듣고 있던 석관이 조금 전 매니저 홍정수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 팀장님, 재이 컨디션이 별로인 것 같습니다.

- 뭐? 어떤데?

- 음…. 그게. 인혁이가 일단 팀장님께 말씀드려 놓으라고.

잠시 뜸을 들인 홍정수가 상황을 설명하고는 이어 말했다.

- 근데 그게 제가 보기엔 푹 자고 일어나서 오히려 개운해 보이던데요.

자신 없게 덧붙이던 홍정수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석관은 생각에 잠겼다. 말인즉 자신이 보기엔 별 이상 없어 보였지만 인혁이 보고하라고 등 떠밀어서 일단 보고한다는 내용이었다. 일견 연예인의 말에 휘둘리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태도였지만 석관은 이해했다.

이제 겨우 수습 딱지를 뗀 홍정수로서는 자신의 의견만큼이나 데뷔 전부터 함께 생활해 오면서 멤버에 대한 이해도가 자신과는 천지 차이인 차 리더의 견해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홍정수의 말대로, 석관은 전화로만 전해 들은 재이의 컨디션이 어느 쪽으로도 판단 가능한 상황일 그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박사님 클리닉에 다니기 시작한 게 효과가 있는 건지도.’

[아리송의 집]에서의 재회를 계기로 한산에게서 수면의 질이 남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진단을 받은 재이는 수면 습관 개선을 위해 정기적으로 한산의 수면 클리닉에 다니기 시작했다. 요새 불면증이야 일반 대중에게도 드문 증세가 아니었기에 재이의 클리닉 통원 사실은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석관으로서도 조금 전 홍정수를 통해 들은 재이의 상태가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더더욱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평소 재이의 습관대로 보면 적신호가 분명했지만, 또 어떻게 보면 남들처럼 쪽잠을 자기 시작한 것은 청신호라고 여겨지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나중에 따로 박사님한테 물어봐야겠다.’

석관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그들이 탄 차는 ZTBC 공개홀 후문 관계자용 출입구 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정문 쪽에 설치된 레드카펫과 포토월에 이목이 쏠린 탓인지 후문 쪽은 비교적 한산했다.

“한재이랑 차인혁이 놀라야 할 텐데.”

“이미 눈치챘을 것 같은데.”

“카메라 앞이니 최소한 놀라는 리액션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남궁찬의 말에 멤버들이 한마디씩 보태는 사이 누군가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드디어 센터…….”

멤버들의 시선이 이환에게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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