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50화 (150/224)

#150

빛 좋은 개살구로 맛 좋은 살구 만들기

인혁의 드라마에 카메오로 출연하게 된 것을 계기로 박승해 피디가 소개해 준 것은 ZTBC에서 준비하고 있는 12부작 특집극의 주연 포지션이었다. 연출을 맡은 정용재 피디는 일명 ‘정사단’이라 불리는 자신만의 제작팀과 주조연 배우 라인업을 가지고 있는 거물급 인사였다.

박승해 피디의 소개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가 별도의 오디션 없이 자신의 작품을 이끌어 갈 인물로 재이를 지목해 오퍼를 낸 상황 자체는 이제 막 첫 조연작을 끝낸 초짜 배우로서는 믿을 수 없는 경사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문제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용재 피디는 한때 다큐멘터리급의 빡빡한 고증을 살린 정통 사극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사극계의 황제로 군림한 인물이었다. 사극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그가 손댄 작품이면 믿고 본다는 뜻에서 ‘믿보 정용재’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고증의 틀을 깨고 자유롭게 사유하고 싶다는 이유로 판타지 사극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황제’에서 ‘회전문’으로 대체되었다. 정통 사극으로 유입된 팬들이 판타지 사극을 보고 떠나기를 반복한다는 의미였다.

정용재 피디의 신작이 판타지 사극이라는 소문이 돌면 다른 방송사 편성 담당이 발 뻗고 잔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간 판타지 사극의 성적은 예외 없이 처참했다.

결국, 이번에도 ‘믿거’ 턴에 해당하는 판타지 사극을 구상 중이던 정용재 피디가 주연 배우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본 박승해가 재이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이 이 모든 일의 시초였다. 빛 좋은 개살구로 양쪽에 생색이나 내 보려던 박승해 피디는 재이의 몇 안 되는 출연작을 하루만에 검토하고 오퍼를 낸 정 피디나 그걸 덜컥 받아 버린 재이에 오히려 당황했다는 후문이었다.

내심 캐스팅 난항으로 편성이 엎어지길 기대하며 사태를 관망하던 ZTBC는 정용재 피디가 물어온 한재이라는 월척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간의 실적을 생각하면 작품의 흥망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었지만 한재이라는 화제성 갑의 인물이 합류하는 것은 그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불식시킬 수 있는 호재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재이는 신인상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빛 좋은 개살구를 맛 좋은 살구로 만들기 위한 작전에 뛰어들게 되었다.

- 오늘 ‘멸화조’ 확정 지을 거니까 시간 나면 보러 와요.

재이가 정용재 피디의 급작스러운 연락을 받게 된 것은 아침나절의 일이었다.

오늘 주요 배역 오디션이 있으니 시간 나면 참석하라는 짧은 메시지는 ‘시간 나면’이라는 조건이 붙는 권유였지만 어쩐지 ‘시간 내서’ 참석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대본만 챙겨 들고 간편한 차림으로 정용재 피디가 알려 준 장소로 향하자 아직 대기실 입장 전이었던 듯 복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오디션 참가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스태프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그 광경을 눈으로 훑던 재이는 낯익은 인물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재이의 시선이 멎은 곳에는 지금쯤 숙소에서 남궁찬과 교대로 도도님 깔개 노릇이나 하고 있어야 할 인혁이 있었다.

“재이 씨?”

뒤따라오던 재이가 멈춰 선 것에 스태프가 고개를 갸웃하며 뒤돌아보았다. 오디션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긴가민가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스태프의 목소리에 ‘한재이 맞네’라며 수군대는 것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에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던 인혁과 시선이 맞았다.

‘너 거기서 뭐하냐.’

재이의 눈빛을 읽은 것인지 인혁이 손에 쥐고 있던 대본을 흔들어 보였다. 오디션용으로 배부된 대본은 재이의 것보다 얄팍했지만 이미 끝부분이 하늘하늘 흔들리는 것이 한두 번 들여다본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가시죠.”

자신을 기다리는 스태프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곤 다시 그를 따라 걸으며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째, 피디님이 왜 부르신 건지 알 것 같은 기분인데.’

그리고 재이의 예감대로 오디션장에 들어서자 심사 위원석에 앉아 있던 정용재 피디가 안으로 들어서는 재이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재이 씨, 어서 와. 갑자기 불러서 미안했어. 스케줄 안 맞을 것 같아서 굳이 요청 안 했는데 오늘 참가자 명단 확정된 거 받아 보니까 역시 재이 씨가 같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정 피디가 참가자 명단 사본을 재이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인혁 외에도 눈에 띄는 몇몇 익숙한 이름들을 확인한 재이가 정 피디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가 입을 열었다.

“리스트 보니 재이 씨가 이미 같이 일해 본 사람들도 있는 것 같고, 이참에 합이 어떤지 직접 확인하고 뽑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이번 드라마에서 특히 중요한 게 이 인물들과 재이 씨의 합이니까.

정 피디가 덧붙인 말에 다른 스태프 중 몇몇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ZTBC 특집 드라마 [멸화조]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시대극이었다. 1930년대 일본의 대륙 침공이 본격화되었을 무렵 활약한 가상의 조직 [멸화조]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었다. 재이가 오퍼를 수락한 것은 그 멸화조의 핵심 인물이자 드라마의 주인공 ‘이연’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이연의 동료가 될 배역을 뽑는 자리인 만큼 지원자의 연령대도 재이와 비슷하게 십 대 후반 ~ 이십 대 초반으로 비교적 젊은 편이었다.

“왠지 어깨가 무거운데요.”

“하하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고.”

“네.”

재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자신을 주연으로 낙점한 정 피디가 정점으로 군림하는 ‘정사단’이 제작하는 작품이라고는 해도 제대로 된 오디션 없이 주연을 따낸 참이었다. 이번 오디션은 조연 배우들을 발탁하는 자리임과 동시에 스태프들에게 자신이 주연임을 납득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터였다.

‘정 피디님, 과연 노련하시네.’

갑작스럽게 결정된 주연 배우에 대한 스태프들의 반감을 최대한 낮추면서 동시에 조연 캐스팅에 일조할 기회라니. 성적이 안 나올 게 뻔히 보이는 데도 방송국이 편성을 내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수완가다운 한 수였다.

‘판을 깔아 주셨으니 제대로 보여 드려야겠지?’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조금 전에 들어간 거 한재이 맞지?”

“맞을걸.”

오디션장 한쪽에 마련된 대기실로 자리를 옮긴 인혁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던 것을 멈추고 신경을 집중했다. 자신의 뒤쪽에 앉은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빨간 머리 아니라서 몰라볼 뻔.”

“이제 곧 작품 시작하니까 바꿨겠지.”

“좋겠다, 누군 빽 있어서 작품 하나 하고는 곧바로 주연에 꽂히는데, 누군 뼈 빠지게 오디션이나 보러 다녀야 되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아이돌이나 할걸. 괜히 배우 판다고 이게 무슨 고생이야.”

‘어딜 가나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은 많은가 보네.’

인혁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내심 혀를 차고는 다시 손에 들고 있는 대본에 정신을 집중했다. 한재이를 보고 배우기로 한 이상 그 녀석이 어떤 식으로 성장하고 있는지 직접 볼 기회가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마침 조연급으로 또래 배우들을 많이 뽑는다는 것을 듣고 망설임 없이 오디션에 응모했다. 아이돌, 그것도 같은 그룹 소속이라는 것이 걸리긴 했지만, 최종 판단은 어차피 제작진의 몫이었다. 자신이 지레 걱정하고 시도하기도 전에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여, 오랜만이야?”

“음?”

인혁은 앞에서 들려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앞에는 RS6의 리더 황재민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와, 여기서 다 만나네.”

인혁이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나이로는 재민이 위였지만 아역 활동으로 학업이 늦어진 탓에 학년으로는 같은 두 사람은 이미 서로 말을 트기로 합의를 본 상황이었다. 정작 인혁을 비롯한 파티 멤버들과 같은 나이인 RS6의 이화빈은 황재민을 형이라고 부르는 탓에 파티 놈들 때문에 족보가 꼬인다며 불만스러워했지만, 그거야 인혁이 알 바 아니었다. 자신들을 알아본 주위의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이 느껴졌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로 인혁이 재민에게 물었다.

“오디션 보러 온 거야?”

그 말에 재민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한번 해 볼까 하고.”

“하필이면?”

아역 시절 천재 소리 듣던 황재민과 오디션장에서 맞닥뜨리다니. 의외의 곳에서 아는 얼굴을 보게 되어 반가운 것과는 별개로 경쟁 상대가 늘어난 것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경계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는 인혁에게 재민이 중얼거렸다.

“여기가 맛집이라는 소문 듣고 왔는데.”

“누가 그런 헛소문을.”

인혁의 말에 재민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사정 다 알고 온 마당에 웬 헛소리냐는 듯 짜게 식은 표정으로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인혁에게 재민이 말을 이었다.

“진짠데. 한재이가 주연이라며. 신인급 조연 많이 뽑는다는 소리 듣고 온 거야. 아마 나 같은 생각으로 온 사람들 여기 많을걸. 별 볼 일 없는 연기 초짜가 인맥으로 주연 자리 꿰찼다는 소문 듣고 빈집 털러 온 ‘자칭’ 실력자들.”

재민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인혁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경력 12년의 베테랑이 신인인 척은. 아, 그럼 나도 여기선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하는구나.”

“그 12년 중에 제대로 연기한 건 반쯤밖에 안 되고 그마저도 어릴 때라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선배는 무슨.”

그냥 부르던 대로 불러.

재민이 인혁의 말을 받아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욕심 같아선 연기는 좀 더 나중에 제대로 다시 하고 싶었는데. 근데 생각해 보니 어차피 우리 앨범 끝나서 쉬고 있는 타이밍이기도 하고 결국 나중에 다시 할 거면 지금 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싶기도 하고.”

옆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치고 올라가는 누구들 보고 있자니 내가 지금 우아하게 찬밥 더운밥 따질 땐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재민이 중얼거린 말에 인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진짜 본인 말대로 다른 사람들처럼 빈집을 털러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재민과 RS6가 나름 답답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은 건너건너 들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뷔 직전 멤버가 이탈하면서 시작부터 삐거덕댄 RS6였지만 다행히 추가적인 멤버 이탈 없이 이번 앨범 활동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만 자신들이 야심 차게 투자했던 그룹이 기대했던 것만큼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에 태영 기획 쪽은 당초의 전투적인 투자 태세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성장 속도에 따른 투자로 전략을 선회했다. 덕분에 차기 앨범까지 졸지에 텀이 생겨 버린 RS6 멤버들은 당분간 좋게 말하면 개인 스케줄, 나쁘게 말하면 각자도생을 위한 시간을 갖는 중이었다.

벌컥.

“하아…….”

“후우…….”

“젠장.”

두 사람이 각자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오디션장 안쪽의 문이 열리고 오디션을 보러 들어갔던 세 명이 차례로 밖으로 나왔다. 배역의 특성상 세 명을 한 팀으로 묶어서 진행되고 있는 오디션에서 조금 전 나온 세 명은 하나같이 모두 표정이 좋질 않았다. 아무래도 안쪽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와 안에 분위기 살벌한가 봐.”

“저 사람은 얼굴이 아주 하얗게 질렸네.”

“뭐 물어보더냐고 물어볼까?”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도 무시한 채 묵묵히 짐을 챙긴 세 사람이 그대로 돌아가 버리자 대기실의 분위기는 더더욱 긴장으로 팽팽하게 차올랐다.

“안에 한재이도 있다며?”

“어. 원래 오늘 스케줄 없다고 들었는데 온 걸 보니 중간에 불려 나온 듯.”

조금 전 자신을 발견하고 드물게도 얼빠진 표정을 짓던 재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답한 인혁에게 재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는 건 한재이랑의 합이 중요하단 얘기네.”

“역시 경력 12년 차는 눈치부터 다르군.”

“그 경력 운운 한 번만 더 하면 나랑 말 섞기 싫다는 소리로 듣는다?”

재민이 인혁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치며 투덜거렸다.

그때였다. 오디션장 문이 열리며 다음 순서를 호명하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황재민, 차인혁, 박현오 씨 들어오세요.

인혁은 스태프의 호명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마침 대기실 반대편 쪽에서 일어서고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는 인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박현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인혁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던 황재민이 박현오를 알아보고는 중얼거렸다.

“헐, 박현오 씨?”

“아는 사람?”

“박현오 씨를 몰라?

“누군데?”

어이없다는 듯 자신을 돌아보는 재민에게 인혁이 눈을 찌푸리며 되묻자 재민이 짧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요새 핫한 뮤지컬 배우잖아. 드라마도 하려나 보네.”

아 근데 다 좋은데 왜 하필 같이 불려 들어가냐고.

재민이 투덜거리는 소리에 인혁이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전직 아역 배우, 현직 뮤지컬 배우와 나란히 오디션을 보게 생겼다니. 나도 참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인혁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오디션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다음은…….”

한편 오디션장 안에서는 스태프들이 다음에 들어올 지원자들에 대한 자료를 공유하고 있었다.

“재이 씨네 그룹에서 한 명, 다른 아이돌 그룹에서 한 명, 뮤지컬 배우가 한 명. 이 팀은 다들 경력자네.”

“황재민이면 그 [어서 와요. 천사들]의 짱재민이? 요새 안 보이더니 여기서 보네?”

“연기 그만두고 아이돌로 데뷔했잖아.”

“아 그럼 그만둔 게 아니라 잠깐 쉰 거였나 봐?”

“박현오는 왜 여길 왔지?”

“그러게. 지금 저 상승세면 골라갈 수 있을 텐데 굳이…, 싶은데?”

재이는 스태프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눈앞에 놓인 세 사람의 프로필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프로필에서조차 쓸데없이 잘생긴 차인혁의 사진을 넘기자 RS6에서의 이미지보다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부분을 강조해 찍은 듯한 황재민의 사진이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은 도전적인 눈빛이 돋보이는 박현오의 사진이었다.

황재민이야 겪어 봐서 안다지만 박현오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자신만만해 보이는 눈빛과 화려한 경력이 사진 속의 인물이 범상치 않을 것을 예고하는 듯했다. 재이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팀의 오디션이 예선전이었다면 이번 팀은 본선은 건너뛰고 갑작스레 맞닥뜨린 최종 결승전 같은 느낌이었다.

‘으… 당 떨어진다.’

재이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주머니를 뒤져 사탕을 까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정 피디가 그런 재이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재이 씨, 이번에도 아까처럼 똑같이 부탁해.”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자 정 피디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조금 전에 아주 좋았으니까, 아는 사람들 왔다고 살살 하지 말고 똑같이 해 달라고.”

앞 팀의 지정 연기 테스트 때 상대역을 맡았던 재이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던 듯, 정 피디가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어… 아까 나름 살살한 거였는데요.”

정 피디의 표정을 확인한 재이가 곤란하다는 듯 대답하자 정 피디를 비롯한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한마디씩 건넸다.

“뭐? 하하하.”

“이야, 재이 씨 무서운 사람이구나?”

“와, 나 좀 전에 재이 씨 하는 거 보고 솔직히 좀 쫄았었는데 그게 살살한 거였다고? 진짜?”

이번 작품이 입봉이라는 송백은 작가가 감탄했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정용재 피디가 고르고 방송국이 재가한 주연이라고 해도 자신이 직접 보고 고른 상대가 아닌 탓에 걱정이 앞섰던 참이었다. 이번에 입봉하는 처지만 아니었더라도 조금 더 목소리를 내 보고 싶은 아쉬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재이가 오디션 참가자들을 상대로 보여 준 연기를 본 송 작가는 자신의 걱정이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중이었다.

‘이젠 망해도 주연 탓은 못 하겠네.’

아무리 판타지 사극에서 믿거 소리를 듣는 정 피디라고 해도 사람 보는 안목 하나는 진국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망삘이라는 선입견을 걷어 내고 보란 듯이 성공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인 듯 재이를 보는 스태프들의 눈빛이 오디션 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런데. 그게 살살한 거라고, 진짜?’

송 작가가 힐끔 정 피디의 옆자리에 앉은 재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쪽 볼이 볼록 튀어나오도록 사탕을 물고 우물거리고 있는 모습에서는 조금 전 보았던 박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보고 싶은데.’

송 작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어서 빨리 쉬는 시간이 지나가고 오디션이 재개되어 한재이의 ‘이연’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벽시계의 시간을 재차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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