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51화 (151/224)

#151

더 안 봐도 될 것 같은데

“휘유. 삼인 삼색인데?”

오디션장 안쪽으로 차례차례 걸어 들어오는 황재민, 차인혁, 그리고 박현오를 보고 있던 조연출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말마따나 세 사람은 외모부터 분위기까지 겹치는 구석 없이 전혀 다른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경력자들이라 그런가? 이미지 메이킹이 잘 되어 있네.”

정 피디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스태프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재이는 오디션장 가운데에 나란히 선 세 사람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황재민은 특유의 그 화려한 백금발 대신 짙은 브라운으로 머리카락 색을 바꾸어 차분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외모를 대충 입은 옷으로 무마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차인혁의 옆에는 습관인 듯 턱을 살짝 추켜세운 포즈로 눈을 빛내며 심사 위원들의 면면을 훑어보고 있는 박현오가 서 있었다. 그들을 하나하나 살피던 정 피디가 입을 열었다.

“재민 씨가 허윤재, 인혁 씨가 리혁진, 현오 씨가 오춘삼 맞죠?”

“예.”

“네.”

“네. 맞습니다.”

미리 제출받은 희망 배역을 확인하며 묻는 정 피디의 말에 세 사람이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잘 알려지신 분들이니 자기소개 같은 건 따로 더 필요 없을 것 같고, 곧바로 들어가죠. 최 피디 1분 후에 지문 부탁합니다.”

정 피디가 조연출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 피디의 말을 들은 재민이 대본은 다시 볼 필요 없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이미지 트레이닝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인혁은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꺼내 들고 다시 확인에 들어갔고 그의 옆에 선 박현오는 무대에 익숙한 배우답게 목소리와 얼굴 근육을 풀며 가볍게 스트레칭했다.

씬 42.

이번 오디션에서 지정 연기 재료로 미리 발췌, 배부된 장면들 중 씬 42는 경성 제일 학교에 재학 중인 허윤재, 리혁진, 그리고 오춘삼이 자신들을 가르치러 온다는 사관생도의 소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주인공 이연과 함께 극을 이끌어 갈 주요 인물 세 사람의 성격을 시청자들이 한꺼번에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씬 중의 하나였다.

‘아무래도 저 조합이 마음에 드신 모양인데.’

재이는 옆자리의 정 피디와 눈앞의 세 사람을 번갈아 살피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디션이 시작된 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니 정 피디가 굳이 배역별이 아닌 전체 오디션으로 진행을 고집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주연을 받쳐 줄 조연급들이 서로 엮이는 분량이 많은 만큼, 이런 식으로 참가자들을 섞어 놓았을 때 괜찮은 그림이 나올 수 있을지 확인하면서 추려 나가겠다는 의도인 듯했다.

서로 간의 케미도 개개인의 실력도 기대에 한참 못 미쳐 엉망이던 앞 팀에 비하면 지금 눈앞의 이 셋은 이미 그럭저럭 괜찮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씬 42. 교실로 뛰어든 오춘삼이 청소 중이던 허윤재와 리혁진에게 조금 전 들은 소문에 관해 이야기한다.”

시계만 확인하고 있던 조연출이 정 피디가 말한 1분이 지나자마자 곧장 지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조연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현오가 입을 열었다.

“이봐들! 그거 들었어? 이번에 온다는 게 그 ‘미나모토’ 가의 도련님이라더군!”

박현오의 목소리가 오디션장에 시원스럽게 울려 퍼졌다. 단 한 줄에 불과한 대사였지만 스태프들의 이목을 휘어잡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잘나가는 뮤지컬 배우라더니 발성, 호흡, 딕션. 어느 하나 흠잡을 곳 없이 그야말로 완벽했다. 반도인(한국인)으로서 경성 제일 학교에 입학한 수재 중의 수재이면서 동시에 꽉 찬 머리와는 달리 깃털같이 가벼운 성격의 소유자인 오춘삼을 단 한 줄의 대사로 최대한 보여 주고 있었다.

‘괜찮은데?’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테이블 쪽으로 당겨 앉았다.

“시끄럽고. 이리 와서 걸레나 좀 들고 저거나 좀 닦으시오. 청소하는 내내 어딜 갔다가 인제야 온 게요.”

차분한 목소리의 황재민이 허윤재의 대사를 읊었다. 훗날 멸화조에서 이연의 참모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인 만큼 오춘삼이 물고 온 소식에도 동하지 않는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역시 12년 연기 내공이 어디 간 건 아닌지 능숙한 대사 처리였다. 시끌벅적했던 오춘삼의 첫 대사에 비해 차분하고 조용한 어조로 표현해야 하는 만큼 밀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저 정도면 그마저도 허윤재의 캐릭터와 잘 부합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인혁의 순서가 되었다.

“‘미나모토’가家 도련님이라면 그 반쪽짜리 말인가?”

차갑고 나직한 리혁진의 목소리에 스태프들 사이에서 짧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재이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 위에 올리고 있던 손을 꾹 말아 쥐며 속으로 외쳤다.

‘좋아 차인혁. 잘했어.’

자식 장기자랑을 보는 부모 마음이 이런 것일까.

황재민과 박현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인혁의 연기 경력에 별 기대 없이 바라보고 있던 스태프들 사이에서 괜찮다는 듯한 반응이 들려오자 내심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멤버들과 숙소에서 [사랑 님]을 보면서 열심히 잔소리를 해 댄 보람이 있었다.

재이가 잠시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정 피디가 입을 열었다.

“그만. 그룹 지정 연기는 거기까지 보죠. 이번엔 한 분씩 따로 좀 보겠습니다. 씬 44, 53, 67. 재이 씨 부탁해요.”

“네, 피디님.”

정 피디의 말에 재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 사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개별 지정극은 오춘삼 역의 박현오부터 시작되었다.

씬 44.

미나모토가家의 반쪽짜리 도련님으로서 서출 망나니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며 삐딱선을 타던 미나모토 렌, 즉 이연이 처음 만난 경성 제일 학교 학생 오춘삼을 몰아세우는 장면이었다. 상대방을 노려보며 서 있는 가운데 오춘삼과 이연,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미, 미안.”

“다시.”

“미안하오.”

“다시.”

“…대체 무슨 답을 원하는 거요?”

퉁명스러운 오춘삼의 어조에 그를 마주 보고 서 있던 이연이 미간을 콱 찌푸리며 상대방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단순한 움직임이었음에도 그동안 차오른 긴장감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주변의 공기가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그 기백에 오춘삼 역의 박현오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스태프 중 하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박력 무엇.”

이연이 오춘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상관에게 말할 때는 존댓말을 써라. 다시.”

짧게 내뱉고는 어디 다시 해보라는 듯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선 이연을 한참 노려보던 오춘삼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죄송… 합니다.”

“존칭 다시.”

“죄송… 합니다, 미나모토 도노.”

“존칭 다시.”

“…죄송합니다. 미나모토 사마.”

그제야 이연이 만족했다는 듯 씩 웃었다.

“그만. 거기까지 보죠.”

정 피디의 컷 사인이 나자 숨을 참고 있었던 듯 여기저기서 긴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야, 맛깔나네.”

“내가 봐도 한 대 패 주고 싶다.”

“저 정도면 초반 어그로는 문제없겠는데.”

사실 도박에 가까운 한 수였지만 덕분에 주연에 대한 불신감은 많이 걷어 낸 듯 재이의 연기를 보고 만족스럽게 수군대는 스태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 피디는 피어오르는 웃음을 감추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역시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은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쪽 구석에서 줄곧 오디션을 영상에 담고 있는 카메라 감독 쪽을 살피니 자신과 눈이 맞은 감독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연급으로 들어가기엔 기가 센 편인 박현오를 상대로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는데. 이번 작품의 주연 배우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센 녀석인 듯했다.

‘그래 그 정도 기백은 있어야지.’

정 피디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공 이연은 일본의 명문가인 미나모토가家의 셋째 아들로, 한국인 후처에게서 난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자란 인물이었다. 자신의 출생을 둘러싼 비밀을 캐내고 진짜 ‘이연’으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부잣집 서출이 보여 줄 수 있는 망나니짓을 다 보여 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극의 초반부에서 각성 전의 이연, 즉 미나모토 렌이 경성 제일 학교에 군사 생도 교관으로 부임하면서 허윤재, 리혁진, 오춘삼 등과 인연을 맺게 되고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점차 성장해 나갈 예정이었다. 앞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고생길로 인도할 것을 생각하면 저 정도 카리스마는 있어야 맞았다.

정 피디의 컷 사인이 나자마자 들고 온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박현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어후 기 빨려 죽는 줄.”

“수고하셨습니다.”

옆자리에 있던 황재민이 딱하다는 듯, 남 일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작게 인사를 건넸다.

“한재이 씨 혹시 군대 다녀왔어요? 아무리 대본대로였다지만 사람 닦아세우는 솜씨가 보통 아닌데?”

박현오가 황재민과 인혁, 그리고 재이를 차례차례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 그냥 다녀오기만 했을까.’

저쪽 동네에서의 기억을 잠시 떠올린 재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저 이제 겨우 고등학교 졸업장 받는데요.”

“믿을 수가 없네 진짜. 나 잠깐 군대 다시 온 줄 알았잖아.”

아까 본 사람들 왠지 해쓱해 보인다 싶더니 이거였구만.

박현오의 중얼거림에 스태프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곧바로 씬 67 이어 가겠습니다.”

정 피디의 사인을 받은 조연출의 안내에 오디션장 한쪽에 앉아 제 차례를 기다리던 인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선배님 말씀 뭔지 알 것 같아요. 재이 씨 군대 다녀온 게 맞는 듯.”

황재민이 제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재민 씨 멀쩡해 보이더니만, 엄살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어휴 말도 마요. 정 피디님이 컷 사인 안 주셨으면 다음 대사 치기 전에 울 뻔했다고.”

재민의 너스레에 그제야 긴장이 풀어진 스태프들이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뜨렸다. 황재민과 바톤 터치로 재이와 마주 보고 선 인혁은 익숙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박현오에 이어 황재민까지 넉다운 시켜 버린 맹수 한 마리가 여전히 굶주린 듯 눈을 빛내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 왜, 뭐, 왜?

자신과 눈이 마주친 재이가 눈을 찌푸리며 입 모양을 만들어 보이는 것을 보고 인혁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분명 나보다 뒤에서 시작했는데 어느샌가 앞서서 뛰고 있단 말이지.’

앞서 두 사람을 상대해 연기하던 모습은 [불탐정] 현장에서 잠깐 봤던 그것에서 또 한 단계 나아가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라고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니, 이제 얼마간은 좁혀졌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격차는 인제 보니 오히려 더 벌어진 듯싶기도 했다. 갑자기 초조함이 밀려드는 느낌에 인혁은 잠시 천천히 심호흡했다.

‘서두를 필요 없어. 난 나만의 페이스로 가면 되는 거야.’

“준비됐어?”

심호흡을 끝내고 정면을 보니 이쪽을 보고 있던 재이가 짧게 물어 왔다.

“어.”

그리고 오디션이 다시 시작되었다.

“씬 67. 일본 제국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거리에서 시비가 붙었던 일행은 학교로 돌아오자 이번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교실 청소를 도맡아 해야 하는 처지. 인적이 드문 중정에서 혼자 분을 삭이고 있던 리혁진에게 미나모토 렌이 다가간다.”

조연출의 지문 설명이 끝나자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리혁진이 짧게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놈들.”

무덤덤한 표정과는 달리 조용한 분노가 이글이글 느껴지는 듯한 한마디였다. 심사 위원석에서 인혁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던 송 작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차인혁도 나쁘지 않은데? 얼굴만 잘생겼지 연기는 그저 그럴 줄 알았더니. 감정 싣는 폼이 제법이네.’

두 사람 이상이 랠리로 주고받는 대화가 아니라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쏟아 내는 말에 감정을 실어야 하는 독백의 경우 과하면 오글거리고 부족하면 밋밋하기 십상이었다. 특히 배경 세트도 소품도 존재하지 않는 오디션 현장에서 독백으로 감정을 전달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조금 전 인혁의 짧은 독백은 송 작가의 선입견을 흔들 만큼 썩 괜찮은 것이었다.

“어느 쪽 말인가? 일제 놈들? 아니면 조선 놈들?”

냉소적인 목소리가 리혁진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가 놀라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을 한 ‘미나모토가家의 반편이’ 렌이 서 있었다.

“…….”

리혁진이 대답 대신 자신을 가만히 노려보고서 있는 것을 본 렌이 가소롭다는 듯 픽 웃고는 입을 열었다.

“낯짝이 두껍다는 생각 안 드나? 이쪽에 빌붙어서 팔자 펴고 싶긴 한데 ‘같은’ 조선인에게 미움받고 싶지는 않다니. 이쪽 단물도 저쪽 여물도 둘 다 먹고 싶다는 거잖아.”

“알 바 아니잖소.”

리혁진이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렌이 눈썹을 치켜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후. 이놈이고 저놈이고 근본 없는 것들이라 그런가 가르쳐 줘도 금방 또 까먹고 덤벼드는군. 존대와 존칭. 잊었나?”

“그 근본 없는 피가 그쪽한테도 반이나 흐른다던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오?”

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이죽거리며 리혁진이 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에게 닿고 한참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 주변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함에 빠져들자 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거야말로 네놈 알 바가 아니지. 이쪽저쪽에 붙어먹는 박쥐 새끼 주제에 건방지구나.”

“여기저기 붙어먹는 박쥐 새끼나 근본 없는 피가 반이나 섞인 반편이나. 그게 그거 아니오?”

이글거리는 눈으로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리혁진의 말에 렌이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시작될 것 같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으로 주변의 공기가 팽팽하게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만, 여기까지 보죠.”

정 피디의 사인이 떨어졌다. 서로를 노려보던 인혁과 재이는 그 상태 그대로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을 뺐다.

“와, 조금만 늦었어도 주먹 날아갈 뻔. 정 피디님이 차인혁 살리셨네요.”

“하하하, 그랬던 거야?”

조금 전 당장이라도 리혁진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쥐어 올릴 태세로 노려보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느긋한 재이의 목소리에 정 피디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후 저는 숨도 못 쉬고 봤잖아요. 휴우우.”

“나도. 나 여기 손에 땀 난 거 봐.”

“난 언제 뛰어들어서 뜯어말려야 되나 엉덩이 들썩이고 있었다니까?”

스태프들이 하나둘 한숨과 함께 투덜거렸다. 정 피디가 그런 스태프들을 휘 둘러보고는 세 사람과 그 옆에 선 재이를 눈에 담았다.

“재이 씨, 조금만 더 옆으로 가서 서 볼래요?”

“네? 이렇게요?”

황재민, 차인혁, 박현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재이가 걸음을 옮겨 그들과 살짝 비켜난 곳에 멈춰 섰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연출과 몇 마디 나눈 정 피디가 입을 열었다.

“오디션은 이걸로 끝내도록 하죠. 수고하셨습니다. 재이 씨도 수고했어요.”

좋았다 나빴다, 합격이다, 떨어졌다. 일언반구도 없는 축객령에 세 사람이 고개를 갸웃하며 밖으로 나가고 재이가 심사 위원석으로 돌아오자 정 피디가 조연출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지.”

“뭐가요?”

“나 이제 더 안 봐도 되겠는데.”

“하아.”

정 피디의 스타일을 잘 아는 조연출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옆에 앉아 있던 송 작가가 조심스럽게 정 피디에게 말했다.

“저기 피디님, 아무리 그래도 제 의견도 좀 들어 주셔야…….”

“그럼 그럼. 그래서, 송 작가 생각은 어떤데?”

정 피디가 송 작가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잠시 머뭇머뭇하던 송 작가가 입을 열었다.

“으음. 사실 좀 더 뻗대고 싶었는데. 솔직히 이건 저도 피디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더 안 봐도 될 것 같아요, 오디션.”

송 작가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인 말에 정 피디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조연출이 서류들을 정리하며 다른 스태프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주변이 파장 분위기로 변하는 것을 보며 재이가 중얼거렸다.

“아니 이게 원래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렇게 정해도 되는 건가?”

재이의 혼잣말이 들렸던 듯 정 피디가 이쪽을 돌아보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미 욕이란 욕은 다 듣고 있는데 거기에 오디션이 날림이었다는 거 하나 더 추가된다고 죽지 않거든.”

“아니 그게…….”

당신들은 안 죽을지 몰라도 우리는 죽을 수도 있잖아요.

재이는 입 밖으로 내려던 말을 삼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정 피디는 즉흥적인 면은 있어도 대책 없는 타입은 아니었다. 재이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챈 듯 빙글 웃은 정 피디가 이어 말했다.

“재이 씨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겠는데. 기다려 봐. 이런 건 어그로 좀 꼬였을 때 터뜨려 줘야 시원한 맛이 있는 거거든.”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하는 정 피디에 재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며칠 후.

‘피디님, 뭐가 됐든 터뜨리려면 롸잇나우, 지금 이 순간인 것 같은데요.’

습관처럼 포털사이트 연예 뉴스란을 펼쳐본 재이는 정 피디가 한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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