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53화 (153/224)

#153

이러면 안 되는데

첫 대본 리딩,

거기에 기자들까지 배석한 공개 리딩은 젊은 배우들은 물론이고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인 중견 배우들도 어려워하는 현장이었다. 특히 녀석의 경우 첫 주연작이니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남들보다 배는 더 클 터인데. 힐끔 옆을 돌아본 황민석은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입술을 꾹 깨물어 참았다. 진짜 졸린다는 듯 하품까지 한 번 해 보이고는 대사를 이어가는 재이의 얼굴에서는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태평스러웠다.

“지금 딱 좋은 꿈 꾸고 있던 참인데 집사 때문에 다 깼잖아. 어쩔 거야.”

투덜대는 폼이 자연스러워 주변의 몇몇 스태프들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오늘 저녁에 총독부에서 주최하는 만찬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서 준비하셔야죠, 이러다 늦으시겠습니다.”

황민석의 대사가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재이가 받아쳤다.

“하루 이틀이냐고. 그런 데는 제시간에 가는 게 실례인 거야. 집사는 예의를 모르는군.”

‘타이밍 좋고.’

황민석은 자신의 대사에 찰지게 따라붙는 재이의 반응에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평범해 보일 수 있는 장면이지만 이 장면 하나에 도련님 렌과 집사 박승도의 허물없는 관계, 두 사람의 성격, 그리고 그들이 몸담고 있는 미나모토가의 분위기까지, 시청자들에게 전달해야 할 정보가 꽉 들어차 있었다.

자칫 지루한 대화로 여겨질 수 있는 장면을 살리는 것은 대화의 완급 조절. 그러나 빠르게 치고 들어갈 곳과 느슨하게 풀어 줄 곳을 짚어 적절히 조절하는 것은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서, 혹은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줄다리기하듯 상대 배우의 반응을 살피며 받아치는 감각과 순발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황민석이 보기에 이 어린 녀석은 줄다리기에 꽤 소질이 있는 듯했다.

슬슬 흥이 오른 황민석이 저도 원해서 하는 바가 아니라는 듯 삐딱한 어투로 툭 내뱉었다.

“오늘 지각하면 가만 안 두시겠다고.”

“아버지는 아닐 거고. 누가. 첫째 형이?”

“…예.”

“냅둬. 어차피 술에 절어서 내가 온지 안 온지 확인도 못할 텐데. 괜히 하는 말에 휘둘리지 좀 말라고.”

“그래도.”

“시끄럽고 난 좀 더 잘 거니까, 나가 봐.”

분명 첫 리딩인데 마치 미리 맞춰 본 듯 착착 감기는 대사의 랠리에 정 피디가 마음에 든다는 듯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자신의 말을 중간에 싹둑 잘라 내고 그대로 축객령을 내리는 도련놈의 태도에 박승도가 슬슬 한계에 다다른 듯 잠시 침묵했다. 곧이어 ‘좋게 말할 때 말 좀 들어라.’라는 박승도의 속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황민석의 묵직한 목소리가 끄트머리 기자석까지 울려 퍼졌다.

“도련님.”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재이의 한마디.

조금 전 황민석의 나직한 목소리에도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위에서 콱 찍어누르듯 선득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말투에 주변이 저절로 조용해졌다.

“…네, 그럼.”

황민석의 마지못한 대답이 울려 퍼지고 얼마간의 침묵 끝에 재이가 마지막 대사를 읊었다.

“후. 피곤하군.”

재이의 독백이 조용한 실내에 울렸다. 조금 전 집사에게 생고집을 피우던 철부지 도련님과는 사뭇 다른 공허한 그 한마디에 널찍한 리딩 현장이 고요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일단 여기서 끊어 갈까요.”

정 피디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듯 몇몇 스태프들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배우들은 곧이어 돌아올 자신의 차례를 떠올리며 애써 긴장을 가라앉히는 모습이었고 기자들은 카메라로 배우들의 면면을 담거나 그 자리에서 초고를 작성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 피디가 황민석과 재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두 분 저 몰래 미리 대본 연습 하고 오신 거 아닙니까? 뭐 이렇게 찰떡이지?”

그 첫마디에 정 피디의 스타일을 잘 아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의외라는 듯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사람 좋게 웃는 모습만 보여 왔던 정 피디는 디렉팅에서만큼은 가차 없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대사 처리가 극의 완성도와 직결되는 사극을 오랫동안 맡아 온 덕에 귀가 예민한 데다 자신이 원하는 연출 방향이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드는 퀄리티의 연기가 나오지 않으면 경력 있는 배우도 체면 세워 주지 않고 몰아붙이곤 했다. 그런 그가 첫 리딩 첫 씬 첫 테이크에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에 그와 오래 함께 일해 온 제작진들은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듯 황민석, 그리고 재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과거 몇 작품을 함께 하면서 직접 겪어 본 덕에 정 피디의 스타일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황민석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안심했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정 피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당장 찍고 싶어서 이거 손이 근질근질하는데요. 좋습니다. 촬영에서도 이대로만 부탁드립니다. 재이 씨도.”

정 피디의 부름에 그를 쳐다보고 있던 재이가 새삼 자세를 바로 하며 시선을 마주쳐 왔다.

“마지막 대사에서 감정의 낙폭을 최대한 크게 잡은 거 아주 좋았어요. 사실 오늘 이거 디렉팅 하려고 했는데 할 틈을 안 주니 이렇게라도 짚고 넘어가야지.”

정 피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소리에 여기저기서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출발이 아주 좋네요. 그럼 이 기세를 몰아서 쭉쭉 진도 빼 볼까요.”

곧바로 리딩이 재개되었다.

.

.

.

“조장님, 나도 그 비결 좀 알자, 응?”

대본 리딩이 끝난 후, 주조연 배우들은 따로 포스터 촬영 일정이 잡혀 있었다. 잠시 휴식을 가진 뒤 집합 시간에 맞춰 포스터 촬영이 진행될 스튜디오로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박현오가 재이를 발견하고는 다짜고짜 다가와 물었다.

“네? 그게 무슨.”

“나 아까 리딩 때 완전 자존심 구겼잖아. 우리 비결 좀 공유하자고.”

“아….”

재이는 그제야 무슨 소린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첫 씬의 피드백에서 보여 준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주·조연 인물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두 번째 씬 이후로 정 피디는 소문 그대로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세 마디를 넘기지 못하고 끊고 들어오는 세세한 디렉팅에 목표로 했던 분량의 리딩이 모두 끝났을 때쯤엔 배우고 스태프고 할 것 없이 모두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지금껏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뮤지컬 배우 박현오에 대한 정 피디의 디렉팅은 어지간한 재이도 혀를 내둘렀을 만큼 혹독했다.

“진짜, 내가 무대에서 대사 까먹었을 때도 이렇게까지 당황해 본 적이 없는데. 나중에는 그냥 리딩이고 나발이고 다 내던지고 도망가 버리고 싶은 거 참느라 혼났다고.”

박현오가 투덜거리는 소리에 재이가 입을 열었다.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던데. 피디님 디렉팅에 곧바로 느낌 바꿔서 대사 치시는 거 보고 저 소름 돋았잖아요.”

다시 떠올리니 또 소름 돋는 느낌이라고 중얼거리며 재이가 자신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리딩 현장에서 박현오가 보여 준 모습은 재이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인상적이었다. 재이가 정 피디의 머릿속을 미리 읽기라도 한 듯 그가 원하는 느낌의 맞춤 연기를 선보인 반면, 박현오의 경우 연기하는 배우보다 디렉팅 하는 피디의 말수가 더 많게 느껴질 정도로 세세한 디렉팅의 압박이 몰아쳤다. 그리고 그 폭풍 같은 디렉팅에 당황하거나 무너지는 대신 박현오는 그때마다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대사를 던져 가며 정 피디가 원하는 선을 찾아 자신의 연기를 조율해 나갔다.

무대 출신의 배우가 겪는 어려움을 무대 출신의 배우만이 발휘할 수 있는 순발력으로 정면 돌파해 나가는 모습에 재이도 감탄했을 정도였다.

“사람 듣기 좋은 말도 할 줄 알고. 조장님 사회생활 잘하는 타입이구나, 그치?”

박현오가 재이를 한 번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재이 옆에 선 인혁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속에 능구렁이가 들어앉은 것 같은 느낌이긴 하죠, 좀.”

“뭐라는 거야, 사회생활 잘할 것 같다는 칭찬에 왜 능구렁이를 갖다 붙이냐고.”

“그걸 곧이곧대로 듣다니 너답지 않잖아, 한재이. 포기해, 이미 들켰어.”

“시끄럽다 차인혁.”

인혁의 대답에 발끈한 재이가 받아치고 이내 서로 투닥거리기 시작한 두 사람을 재밌다는 듯 박현오가 지켜보고 있는 사이 마침 촬영장으로 들어오던 재민이 그런 인혁과 재이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또 싸우냐.”

재민의 한 마디에 인혁과 재이가 동시에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싸우기는.”

“대화하는 중이지.”

그 모습에 박현오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재민을 바라보고 말했다.

“얘네 평소에도 이렇게 시끄러워?”

“그나마 쟤들이 쟤네 그룹 중에선 제일 얌전한 편일걸요.”

“와… 보고 싶은데 안 보고 싶다.”

재민의 말에 박현오가 중얼거렸다.

촬영은 개인 컷과 단체 컷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대가 먹고산다더니.’

준비되어 있던 의상으로 갈아입고 메이크업까지 마친 후 촬영장으로 돌아온 박현오는 주변을 둘러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예정된 망작이라느니, 조기 종영을 향해 달리는 기차라느니 온갖 조롱은 다 받고 있길래 마냥 열악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현장은 박현오가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윤택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이번 작품 말아먹으면 당분간은 진짜로 손 떼시겠다고 하더니. 정말 모두 끌어모아 쏟아부으셨나 보네.’

당장 자신이 몸에 걸치고 있는 의상만 해도 이번 작품을 위해 미술팀이 따로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도맡아 만든 수제품이었다. 실존했던 디자인에 실루엣과 색감, 재질 등을 트렌드에 맞춰 세심하게 조정한 덕에 고풍스러운 맛이 나면서도 동시에 세련된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장인급인데. 판타지 사극은 대충 만든다더니 완전 헛소문이었잖아.”

박현오는 한쪽에서 카메라 감독과 세부 사항을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이는 정 피디의 모습을 힐끔 쳐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의 목소리가 스튜디오 안에 울렸다. 스태프의 싸인에 인혁과 이야기를 나누며 대기 중이던 재이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와오. 우리 조장님 분위기 죽이네.”

박현오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일반 병사의 복장인 자신과는 달리 재이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장교들이 입는 제복이었다. 견장과 흉장까지 달려 있어 화려해 보이는 걸 보니 미나모토 렌으로서의 촬영이 먼저인 듯했다. 세트 중앙에 서서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카메라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딱 건방진 부잣집 도련님 같은 느낌이었다.

“와… 내 의상에 돈 좀 들였겠구나 하고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저거 보니 렌사마는 넘사벽이네.”

“부잣집 아들내미 설정이잖아요.”

준비를 마치고 다가온 재민이 말했다.

“에이. 나도 그냥 이연 역으로 오디션 보게 해 달라고 우겨 볼 걸 그랬나.”

“어…….”

“와 거기서는 예의로라도 ‘이연 역도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 재민아.”

“아니 그게.”

그건 좀 아니죠. 형은 너무 대놓고 자신만만하잖아요.

황재민은 박현오의 타박에 빠져나갈 구멍을 잦아 열심히 눈을 굴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주연으로 한재이가 낙점받은 상황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도 오디션에서 잘만 하면 뒤집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행복회로를 돌려본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디션에서 자신을 비롯해 박현오와 차인혁을 그야말로 하나하나 격파해 버리는 한재이의 모습은 이미 너무 이연 그 자체였다.

“…저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연이면 정 피디님도 납득하실듯 한데요.”

촬영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고 있던 황재민이 박현오를 향해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시선의 끝에서는 흉장을 움켜쥔 채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재이의 모습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여유롭고 앳되어 보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당장에라도 카메라를 향해 달려들 듯 이글거리는 눈빛은 보고 있는 이쪽이 섬뜩할 정도로 독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어휴. 역시 안 되겠다. 보고만 있어도 기가 빨리는 기분이야.”

박현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의 대답에 황재민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그냥 쟤가 하게 놔두자.

두 사람이 묘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사이 한편에서는 정 피디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선배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그의 눈치를 살피던 조연출이 조심조심 물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조연출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정 피디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이걸 가지고 고민하게 될 거라고는 솔직히 생각 못 했는데 말이야.”

뭔데 그렇게 밑밥을 까십니까. 살 떨리게.

제발 자신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야 하는 문제는 아니길 바라며 조연출이 정 피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비주얼이 생각보다 너무 잘빠질 것 같아서. 이러면 안 되는데.”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조연출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정 피디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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