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멸화조 (1) 시작
“비주얼이 생각보다 너무 잘빠질 것 같아서. 이러면 안 되는데.”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조연출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정 피디를 쳐다보았다.
“비주얼에 힘을 줄 생각은 없었는데. 이건 이렇게 되면 생각을 좀 다시 해 봐야겠는데.”
정 피디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조연출이 정 피디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마침 개인 촬영을 마치고 세트장을 나서며 다음 차례인 인혁과 가볍게 몇 마디 주고받고 있는 주연 한재이의 모습이 있었다.
‘확실히. 의상을 입혀 놔서 그런지 느낌이 또 전혀 다르네.’
조연출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몸에 꼭 맞도록 제작된 제복을 몸에 걸친 한재이는 내심 이번 작품 비주얼 갑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저 차인혁과 나란히 서도 꿇리지 않을 정도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제복이 원래 저렇게 잘 어울리는 타입이었나?
조연출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사이 정 피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김에 아예 대놓고 밀어 볼까.”
“저는 찬성이요. 화제 몰이 하기도 좋을 것 같잖아요.”
물론 이번에는 얼굴로 밀 작정이냐고 뚜껑 까 보기도 전에 얻어맞을 각오는 하셔야겠지만.
어차피 그 정도 맷집은 있잖습니까, 우리가.
조연출이 대답과 함께 씩 웃어 보이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정 피디가 마음을 굳힌 듯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 게다가 저렇게 모아 놓고 보니.”
정 피디가 하던 말을 멈추고 세트장 쪽에 모여있는 네 명의 배우들을 훑어보았다. 반사판에 둘러싸여 번쩍이는 조명 아래 카메라 감독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고 있는 차인혁과 한데 모여 인혁의 촬영을 구경하고 있는 한재이와 박현오, 그리고 황재민까지. 언뜻 보기에는 드라마 포스터 촬영이 아니라 무슨 아이돌 화보 촬영이라도 하는 듯 화려한 배우들의 면면을 새삼 확인한 정 피디가 말을 이었다.
“숨기려야 숨길 수도 없는 카드 같다, 어째.”
조연출이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193X년 경성
경성 제일 학교는 조선인도 내지인(일본인)과 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고등 교육 시설이었다. 그 속내야 어찌 됐건 내선일체의 이념 아래에 조선인에게도 내지인과 같은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는 방침 덕에 매년 전국 방방곡곡에서 머리 좋다는 조선인들이 입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대거 몰리는 학교이기도 했다.
조선인들 사이에서 매국노 학교라는 멸시와 조선인 학자의 요람이라는 숭앙을 동시에 받는 미묘한 위치의 학교에서는 조례가 한창이었다. 부쩍 키가 큰 학생 하나가 교단 위에서 긴 훈시를 늘어놓고 있는 일본인 교장을 힐끗 바라보고는 한숨과 함께 투덜거렸다.
“빨리 좀 끝낼 수 없나. 매번 똑같은 말인데 지루하군.”
교장의 훈시 내용은 항상 대동소이했다. 그대들은 앞으로 대일본 제국을 이끌어갈 동량이니 바깥의 불온한 움직임이나 감언이설에 미혹되는 일 없이 학업에 매진하여 천황 폐하와 제국의 번영을 위해 힘써 주길 바란다는, 그런 말들.
“자세 바로 하고 앞에 보는 게 좋을걸. 이번에도 또 벌점이면 진급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나.”
오춘삼 역의 박현오는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서서 시선은 정면에 고정한 채 나직이 속삭이는 허윤재 역의 황재민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까짓거 이번에도 또 이찌방(1등) 하면 될 것 아닌가.”
“자신만만하군.”
“믿을 건 이것밖에 없어서.”
오춘삼이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려 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것을 힐끔 흘겨본 허윤재가 말했다.
“그러려면 일단 저 리혁진이부터 눌러야 하지 않은가. 저번 시험 성적은 혁진이 너보다 앞섰던 거로 기억하는데.”
허윤재가 자신의 옆자리에 서 있던 리혁진 역의 차인혁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오춘삼이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건 그 전날…….”
- 後ろ、静かに。 (뒤쪽, 조용히 해.)
앞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오춘삼과 허윤재가 찔끔 고개를 움츠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 では戦時行動規範強化訓練の特別敎官として本校に着任してくださった大日本帝國陸軍士官學校の皆様を紹介する。(그럼, 전시 행동규범 강화훈련을 위한 특별 교관으로서 본교에 와 주신 대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의 여러분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교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특별 교관은 무슨. 그냥 대놓고 될성부른 사람은 군대로 끌고 가겠다는 말이 아닌가.”
“이것만큼은 내선일체가 확실하군.”
“핑계 김에 학교마다 군인도 배치해 감시·감독도 강화하겠다는 속셈이겠지.”
“후우. 그야말로 숨이 막히는 기분이군.”
“두 사람 모두 그쯤 하지. 어디서 누가 들을지 모르는데.”
오춘삼과 허윤재가 서로 속닥거리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던 리혁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자신들이 서 있는 뒤쪽 줄에는 조선인들뿐이라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 리혁진의 경고에 오춘삼과 허윤재가 겨우 입을 다물었다.
- …華組、源連殿 (화조, 미나모토 렌 님)
마지막으로 호명된 청년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가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호명된 이름에 조선인뿐 아니라 앞쪽에 선 내지인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 源って、あの源家の源? (미나모토면, 미나모토가家의 그 미나모토?)
- 三男が本土で留學中だとは聞いたけど、この際呼び戻したのか。(셋째 아들이 본토에서 유학 중이라더니, 이참에 불러들인 모양이지?)
- あれたしか上とは腹違いだよな。(위쪽하곤 배다른 형제 사이라던데.)
- なるほどな。それで華組担当ってことね。(그렇군. 그래서 화조 담당이라는 거로구만.)
일본인 학생들이 저들끼리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던 리혁진이 새삼 조금 전 오만한 표정으로 인사하던 사관생도를 바라보았다.
“반쪽은 조선인이라고.”
리혁진이 중얼거렸다.
.
.
.
“컷.”
정 피디의 목소리가 교정에 울렸다.
“…좋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조금 쉬고 실내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숨죽이며 정 피디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현장 여기저기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촬영을 바라보고 있던 스태프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사단’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닌 듯 호흡이 척척 맞아 돌아가는 현장의 분위기는 다행히도 긍정적이었다. 쉼 없이 진행된 촬영에도 지친 기색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제작진들의 얼굴에는 몇 번이나 말아먹은 전적이 있는 장르를 또다시 선택한 피디에 대한 불신감보다는 이번에야말로 설욕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고 피디님 초반부터 빡세게 잡으시네. 리테이크 하다가 숨넘어갈 뻔.”
박현오가 앓는 소리를 하며 한쪽에 마련되어 있던 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그 옆 테이블에 기대앉은 황재민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형이 그런 말씀 하시면 형보다 더 찍은 저희는 어떻겠나요.”
정 피디의 무한 디렉팅은 현장에서도 이어졌다. 조금이라도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으면 곧바로 컷을 외치는 정 피디의 스타일에 따라가다 보니, 이제 겨우 오전 촬영이 끝났을 뿐인데 이미 피로가 제법 올라왔다.
‘체력 하나는 자신 있는 직군의 사람들이 모여서도 이 정도라니.’
황재민의 옆에서 생수병의 물을 들이켜며 인혁이 내심 고개를 가로젓고 있는데 마침 이후의 촬영 스케줄을 알리러 왔던 조연출이 그런 그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정 피디님이 빡세게 군다는 건 그만큼 잘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휴우. 저 좀 자신감 꺾일 뻔했는데 그 말씀을 들으니 왠지 마음이 좀 놓입니다.”
조연출의 말에 박현오가 조금 안심했다는 듯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뻑뻑하게 굳은 어깨 근육을 풀며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근데 우리 조장님께서는 어디 가셨지?”
“재이 씨라면 피디님하고 다음 촬영 씬 확인 중이에요.”
“벌써요? 와 지치지도 않나? 아니 그것보다 혼자 가면 어떡해, 우리랑 같이 가야지.”
조장이 조원들도 안 챙기고. 안되겠구만.
투덜대는 입과는 달리 박현오는 재빨리 대본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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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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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기에서는 조금 더 세게 나가도 되나요?”
“어떤 정도로 할 건데?”
“음, 1부터 5까지라면 그중 한 4 정도?”
세 명이 실내 촬영이 진행될 곳에 도착해 보니 재이가 모니터 앞에 앉은 정 피디와 무언가를 상의 중이었다.
“여기서 너무 세게 밀면 자칫 렌이 너무 비호감으로 비칠 수 있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그럼 기본적인 톤은 2 정도로 잡고 여기랑 여기 정도만 4로 가면 어떨까요. 저도 피디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같은 톤으로만 가면 너무 밋밋해질 것 같아서요.”
“음…. 괜찮은데? 그럼 일단 이 부분은 재이 네 말대로 4 - 2 - 4로 강약을 주면서 가 보자, 할 수 있겠어?”
“그럼요.”
턱을 쓸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 피디가 재이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조점을 둘 부분을 짚어나갔다. 정 피디가 짚는 부분을 확인하며 재이가 자신의 대본에 메모하는 사이 나머지 세 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조장님, 너무하네. 우리만 놔두고 벌써 와서 촬영 준비 하고 있었던 거야?”
“아. 리허설 들어가기 전에 피디님께 확인받고 싶은 부분이 좀 있어서요. 아직 다음 촬영까지 시간 넉넉할 텐데 벌써 오셨어요?”
박현오의 말에 대본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재이가 시선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네가 벌써 촬영장 들어갔다는데 우리만 거기 더 앉아 있기는 좀 그렇잖아.”
인혁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오전 촬영은 너희랑 현오 형이 바빴지 나는 사실 별로 힘들 것도 없었으니까.”
“조장님 의욕이 넘치시는구나.”
박현오가 재이의 손에 들린 대본을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메모와 마킹의 흔적으로 빼곡한 대본은 저 무심한 듯 태연한 표정 아래에서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가를 대신 보여 주고 있었다.
“기왕 시간보다 일찍 들어왔으니 우리끼리 먼저 좀 맞춰 볼까?”
왠지 마음이 급해진 박현오가 입을 열자 드물게도 재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쉴 수 있을 때는 쉬어가는 게 좋아요. 아직 초반인데 괜히 오버페이스로 달리셨다가 탈 나면 큰일이잖아요.”
“그러는 본인은?”
박현오가 묻는 말에 재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특유의 그 쿨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저는 이게 원래 페이스라서.”
뭐지 지금 건 신종 어그로인가.
순간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몰라 대꾸하는 대신 제 주변을 돌아보던 박현오는 익숙하다는 듯 그 말을 흘려들으며 제 대본을 펼쳐 드는 인혁과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재이를 쳐다보고 있는 황재민을 발견하고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 * *
- 一、二、三……. (하나, 둘, 셋…….)
“ そこまで。最初からもう一度。” (거기까지. 처음부터 다시.)
- 一、二……. (하나, 둘…….)
“止まれ、最初から。” (멈춰. 처음부터 다시.)
책상을 모두 뒤로 밀어낸 화조(華組) 교실에서는 학생들의 팔 굽혀 펴기가 한창이었다. 교단에 의자를 놓고 앉은 미나모토 렌은 느긋하게 테이블에 놓인 차를 마시면서 학생들의 동작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핑계로 줄곧 ‘처음부터 다시’를 외치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아직 추운 날씨임에도 학생들의 얼굴에는 비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분을 참지 못한 오춘삼이 벌떡 일어나 렌을 향해 외쳤다.
“이것은 부당하오.”
갑작스러운 오춘삼의 돌발 행동에 학생들이 하나둘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자세를 풀고는 렌 쪽의 기색을 살폈다. 마치 오춘삼의 말 따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맛을 음미하듯 차를 마저 들이켠 렌이 여유로운 동작으로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는 작은 소리가 묘하게 크게 울려 퍼졌다. 스멀스멀 옥죄이듯 퍼져오는 왠지 모를 긴장감에 오춘삼이 목소리를 높였다.
“화조 이외의 구미(반)에서는 이런 것들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소. 이것이야말로 명백한 내선 차별…….”
“오 형.”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허윤재가 오춘삼을 다급히 말리려고 손을 뻗은 순간,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아 있던 렌이 스윽 몸을 일으켰다. 그저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인데,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에 교실 안의 모두가 숨죽인 채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본 교관의 훈련 방식에 의문이 있는가 보군.”
유창한 조선말이었다.
당연히 일본어밖에 할 줄 모르겠거니 하는 생각에 저 새파랗게 어린 교관이란 놈이 어떻게 나올지 떠볼 심산으로 대들었던 오춘삼을 비롯 교실 안의 학생들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전시 상황에서 병사의 체력은 생사를 가른다. 믿기지 않는 자는 도전해도 좋다.”
뚜벅뚜벅.
교단에서 내려온 렌이 학생들 사이를 가로질러 오춘삼의 앞에 다가가 멈춰 섰다. 자신보다 큰 키의 오춘삼을 올려다보면서도 마치 위에서 내리누르듯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눈빛의 렌이 오춘삼에게 말했다.
“내 옷자락의 끝을 잠시라도 움켜쥘 수 있다면 체력 훈련은 없었던 거로 해 주지.”
오춘삼의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