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멸화조 (2) 변화
‘아앗, 너무 가까운데!’
박현오는 눈앞의 상대에게 손을 뻗다가 뒤늦게 아차 싶은 생각에 내심 비명을 질렀다.
촬영은 렌의 훈련이 부당하다며 항의한 오춘삼과 그런 그에게 자신의 옷자락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훈련 방식을 바꾸겠다고 선언한 렌이 대결을 벌이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재이와 미리 맞춰 본 대로 움직임을 풀어 나가던 박현오는 무심결에 계획했던 타이밍보다 한 박자 먼저 팔을 내뻗고는 순간 당황했다.
대본대로라면 오춘삼은 여기서 렌의 옷자락을 잡는 데에 성공하지 못해야 했다. 그러나 한 박자 이른 타이밍에 팔을 휘두른 탓에 미리 짜 두었던 대로 헛손질을 하기에는 간격이 부족했다.
‘이대로면 꼼짝없이 NG 각인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멱살이라도 제대로 잡아 올려서 NG 영상 클립에 올려 달라고라도 해야겠다.
짧은 순간 생각의 정리를 마친 박현오가 재이의 군복을 움켜쥐려 손아귀를 벌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박현오는 자신의 손이 상대의 멱살 대신 허공을 움켜쥔 것을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간격을 넓히며 몸을 뺄 줄 알았던 재이가 순식간에 품 안쪽으로 파고들더니 붕 하고 시야가 회전하면서 교실 천장이 보였다.
부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제작진이 바닥에 깔아 놓은 매트리스에 ‘팡-’하고 등이 닿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나서야 박현오는 지금 자신이 깔끔한 엎어치기 한판에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당한 표정 그대로 위쪽을 쳐다보니 자신을 잡아 일으켜 세워 줄 생각 따위 없는 듯 그대로 그 자리에 태연하게 서 있는 재이의 비스듬한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사람을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메다꽂았으면 우선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
부아가 치밀어 올라 뭐라고 화를 내려던 박현오는 순간 아직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정 피디의 컷 사인이 아직이었다.
…그렇다는 건.
“아이고 아야… 어이구… 사람 죽네… 사람 죽어…….”
박현오가 재빨리 바닥을 뒹굴며 소리를 높였다.
움직이느라 잡혔던 제복의 주름을 툭툭 털어 내듯 쳐 내고 있던 재이가 그 소리에 바닥에 뒹굴고 있는 박현오를 힐끗 내려다봤다.
‘…와, 씨. 뭔 눈빛이 저래.’
박현오는 과장되게 외쳐 대던 말도 순간 잊은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서릿발처럼 매서운 눈빛에 저도 모르게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컷.”
드디어 정 피디의 컷 사인이 울렸다.
“휴우.”
일어나는 대신 그대로 뒤통수를 매트리스 위에 대고 대자로 뻗어 누워 교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얼굴 하나가 불쑥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미나모토 렌의 차가운 눈빛 대신, 시선 가득 미안함을 담은 재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 괜찮으세요?”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이자 잽싸게 다가와 부축하며 묻는 재이에게 박현오가 말했다.
“아이고야, 죽는 줄 알았다. 거기서 그렇게 메다꽂을 줄은 몰랐지.”
“죄송해요. 간격이 딱 알맞아서 그만. 형이 엎어치기 정도는 괜찮다고 하셨던 게 갑자기 떠올라서.”
그래.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리허설에서 애드리브의 범주를 상의해 온 재이에게 호언장담했던 스스로를 떠올리며 박현오가 애매하게 웃었다.
‘눈앞의 고수도 몰라보고 멱살 잡을 생각을 했다니 나도 참. 한참 멀었네.’
속으로 중얼거린 박현오가 자신에게 사과하는 재이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괜찮아. 밑에 매트리스 다 있었는데 뭐. 그나저나 다시 가자고 하시려나?”
박현오가 대답과 함께 여전히 모니터를 확인하고 있는 정 피디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게요. 아무래도 아까 그건 애드리브였으니 어떨지 모르겠는데요.”
재이가 자신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그의 걱정과는 달리 모니터를 유심히 살피며 조금 전 찍은 컷을 확인한 정 피디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까다로운 정 피디에게서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촬영장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휴우. 다시 가자고 하실까 봐 조마조마했네.”
“수고하셨습니다, 형.”
“너도. 어쨌거나 이걸로 정 피디님 분량은 어찌어찌 넘어갔으니 나머지 촬영은 좀 수월하길 빌어야지.”
이 이후의 씬부터는 촬영팀이 둘로 나뉠 예정이었다.
정 피디와 함께 A팀이 스탠바이 하고 있는 또 다른 촬영 현장으로 이동할 예정인 재이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이곳에 남아 촬영을 총괄할 박 피디의 B팀과 촬영을 이어 가기로 되어 있었다. 박현오의 말에 두 사람에게 다가온 황재민과 인혁이 끼어들었다.
“소문에는 박 피디님이 정 피디님보다 더하다고 하시던데.”
“정 피디님보다 더 꼼꼼하게 챙기셔서 별명이 청출어박이라고.”
“오, 제발.”
두 사람의 말에 박현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응? 밥은 먹고 가는 거 아니었어?”
“중간에 잠깐 회사 들러야 해서 거기서 먹으려고요.”
재이와 박현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인혁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저도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와, 너희 설마 이 틈에도 스케줄 들어가 있는 거야? 엄청 빡빡한데?”
황재민이 부러운 듯 중얼거리는 말에 인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아니면 대체 뭐냐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황재민과 박현오를 둘러본 인혁이 짧게 대답했다.
“숙제 검사 좀 할 게 있어서.”
* * *
재이와 인혁이 케이엠 본사 회의실에 도착하자 그곳에서는 먼저 도착해 있던 파티 멤버들이 마침 홍보팀에서 가지고 온 [멸화조] 포스터와 캐릭터별 스틸컷을 구경하고 있었다. 낡은 교실 안, 제복을 갖춰 입은 네 명이 재이를 중심으로 앉거나 서서 포즈를 잡고 있는 단체 컷을 본 남궁찬이 놀랐다는 듯 말했다.
“와, 나 순간 한재이랑 차인혁이 우리 버리고 다른 그룹으로 옮긴 건가 하고 심장 철렁했잖아.”
“나도. 새로 데뷔한 동종 업계 종사자이신 줄.”
그 말에 엠케이가 맞장구치는 것을 시작으로 멤버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근데 진짜 좀 CG 같지 않냐. 어떻게 한재이가 차인혁보다 잘생겨 보일 수가 있지?”
“제복 빨 제대로 받았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냥 평범한데 얘 혼자 때깔이 다르잖아.”
“여기서도 센터라니. 한재이 진짜 전생에 나라 구했냐. 온갖 곳에서 센터는 제가 혼자 다 차지하고.”
“이걸 보면서 그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다니. 역시 센터병자 이환.”
이환의 투덜거림에 은규가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 VD실 윤효민 실장과 장세은 AR 1팀 팀장, 기획 5팀 심진우를 비롯한 직원들이 하나둘 회의실로 들어왔다.
“와 이거 포스터 나왔구나. 비주얼 좋은데? 홍보팀에서 뿌릴 맛 난다고 하더니 그럴 만하네.”
윤효민이 포스터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인혁이만 잘생긴 줄 알았더니 이렇게 보니 재이도 만만치 않은데?”
“제가 제복 빨 세우는 건 또 자신 있어서.”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우는 거냐, 나도 좀 같이 알자.”
장세은 팀장의 말에 재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자 옆에서 남궁찬이 끼어들었다.
“한재이쯤은 돼야 제복 빨도 세워 볼 만하지 남궁찬 너는 일단 다시 생기고 와야 될 것 같은데.”
“어째서지. 나도 데뷔하기 전에는 신사동 얼짱 알바로 날렸던 몸인데.”
“방금 그 말로 신사동 분들이 외모에 관대하시다는 게 증명됐네.”
엠케이의 말을 시작으로 너에게는 남다른 피지컬과 남다른 게으름이 있지 않으냐는 둥, 요새는 좀 못생긴 것도 개성으로 밀면 괜찮다는 둥 찬몰이에 여념 없는 멤버들을 보고 있던 심진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재이를 돌아보고 말했다.
“맞다, 재이야. 나중에 김 팀장님이 따로 얘기하시긴 하겠지만, 픽처스 코리아에서 네 스케줄 좀 빼 달라고 연락 왔다. 영어판 성우진은 지난번 컨펌 난 대로 진행될 것 같은데 우리나라 쪽이 좀 난항이라고 네 의견도 듣고 싶다는데.”
재재님의 용사 이야기를 애니메이션화 하기 위한 작업은 착실히 진행 중이었다. 제작을 맡은 [픽처스]와는 정기적인 미팅을 통해 진척 상황을 확인하고 있던 차였다. 픽처스 본사가 아닌 픽처스 코리아에서 따로 연락이 왔다는 말에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심진우에게 물었다.
“뭐가 잘 안 된대요?”
성우분들 라인업 정하는 데 제가 말 얹을 게 뭐가 있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하는 재이에게 심진우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제작진 내부에서 의견이 갈렸는데 좀처럼 답이 안 나온다나 봐. 왠지 너 부른 다음 원작자가 이쪽이랬다, 하고 면피용으로 쓰려는 느낌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이참에 아예 진행 상황 포함해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어때?”
심진우의 말에 재이가 생각에 잠겼다.
성우 쪽이야 자신의 영역 밖의 일이니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만, 손 놓고 있다가 배가 산으로 간 뒤에야 알게 되는 것보다야 심진우 말마따나 확인할 수 있을 때 확인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언제 와 달래요?”
“성우진이 문제면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시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드라마 촬영 끝나는 대로 스케줄 빼 놓을까 하고 있는 중이야. 작업이야 뭐 이제 막 포스트 프로덕션 들어간 상태라니까 일단 그동안 내가 본사 쪽에 한번 들어가서 전체적인 상황부터 확인해 놓고, 거기서 너한테까지 물어야 할 부분 있으면 연결하는 식으로 갈까 싶은데. 어때?”
“그렇게 해 주시면 좋죠. 그동안 정례 회의에서 얘기 나왔던 것들 이참에 싹 다 확인 한번 해 주고 오시면 개운할 것 같긴 하네요.”
재이가 심진우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엠케이가 외쳤다.
“본격 한재이 사장님이 심진우 팀장님 굴리는 모먼트!”
그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궁찬과 이환이 주거니 받거니 떠들어 댔다.
“심 팀장, 직접 들어가서 상황 파악해서 보고해!”
“사장님, 이번 달 월급부터 주고 말씀하시죠!”
그런 세 사람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은규가 재이에게 물었다.
“근데 벌써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간 거야? 엄청난 속도 아니냐?”
“애초에 클레인 씨 크루 단독 제작이라 가능했지 원래라면 3~4년은 쉽게 걸린다더라. 아무래도 프로세스 자체가 픽처스 오리지널 작품들만큼 까다롭지는 않은 모양이야.”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에 덧붙인 재이의 중얼거림에 은규가 말했다.
“아무리 라인이 달라도 퀄이 안 좋았으면 진척도 느렸겠지. 난 왠지 느낌 좋은 것 같은데.”
“라고 플래그의 대가 심은규 선생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심은규가 플래그 꽂은 거면 믿을 수 있지.”
“대박 나도 우리랑 같이 아이돌 하는 거다, 한재이?”
은규의 말에 앞다투어 한마디씩 얹는 멤버들을 바라보던 재이가 심진우와 윤효민, 그리고 장세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그래서, 얘네 숙제는 잘했나요?”
재이의 물음에 장세은과 윤효민이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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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각자 스케줄 다니니까 기분 되게 이상하다.”
회의실로 배달된 도시락을 먹으며 진행된 차기 앨범 컨셉과 데모곡에 대한 피드백이 끝나고, 각자 돌아갈 채비를 하던 멤버들은 문득 중얼거린 은규의 말에 새삼 감회가 새롭다는 듯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시상식 시즌이 끝나면서 공식 스케줄을 마무리한 파티는 최근 멤버들의 개인 스케줄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창때에 비하면 비교적 여유로운 스케줄이었지만 대신 이렇게 멤버 전원이 모이는 기회는 줄어든 것이 사실이었다.
데뷔한 후로 하루의 마지막은 숙소 거실에 모두 모여 그룹 혹은 멤버 누군가의 방송 출연분을 모니터링 하는 것이 그동안의 암묵적 룰이었지만 그마저도 스케줄이 허락하지 않는 멤버들이 생겨나면서 여섯 명이 모두 모이는 날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모두가 내심 느끼고 있던 것을 입 밖으로 끄집어낸 은규의 말에 여섯 명이 각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만 해도 조금 전 끝난 회의에서 서로 얼굴을 맞댄 멤버들은 다시 제각각 흩어질 예정이었다. 은규와 이환은 라디오 스케줄, 엠케이는 윤효민을 비롯한 VD실 직원들과 차기 앨범의 비주얼라이징 전략 회의가 잡혀 있었다. 남궁찬은 꾸준히 출연해 온 온라인 게임 해설 방송 녹화, 그리고 재이와 인혁은 드라마 [멸화조]의 A팀, B팀 촬영이 각각 예정되어 있었다.
“…맨날 여섯이서 낑겨 앉아서 복작복작 다니다가 따로 다니려니까.”
어느새 조용해진 회의실 안에 나직하게 울려 퍼진 은규의 말에 재이가 불쑥 내뱉었다.
“쾌적하더라.”
그러자 조금 감상에 젖은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던 멤버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인혁이 이어 말했다.
“조용하고.”
그러자 엠케이와 남궁찬, 그리고 이환이 한마디씩 보탰다.
“여유롭고.”
“쫌 성공한 기분.”
“짜릿하지.”
멤버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 * *
[멸화조] A팀 촬영 현장.
재이가 도착했을 때는 황민석을 비롯한 다른 출연진들의 촬영이 이미 한차례 끝난 다음이었다. 의상을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손본 뒤 곧바로 촬영 현장으로 향하자 다음 씬의 준비를 위해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재이는 촬영장 한쪽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황민석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 도련님. 준비는 잘해 왔어?”
“네.”
준비는 잘해 왔는데 긴장된다는 둥,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둥 대답이 길어지기 쉬운 질문에 긴말 대신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는 재이의 모습을 보며 황민석이 눈을 빛냈다.
“그래? 그럼 이따 기대할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재미있다는 듯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는 황민석의 시선에도 흔들림 없이 재이는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펼쳐 들고는 잠시 후 촬영이 시작될 오늘의 내용을 확인했다.
“미나모토 렌에서 이연으로 이어지는 순간, 이라.”
재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