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56화 (156/224)

#156

멸화조 (3) 태동

* * *

어머니가 요양차 머무는 별장에서 사달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늦은 오후의 일이었다. 박승도가 보내온 하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가 막내 도련님께 전하라고 한 말을 다급히 쏟아냈다.

- 작은 마님께서 불령선인들을 돕고 계셨다는 걸 가주께서 아시고 즉결 중이시라고. 어서 빨리 별장으로 오시랍니다.

누가 들을까 귓가에 대고 최대한 나직이 속삭인 하인의 말을 듣자마자 렌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우선 아버지를 말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

기별을 받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 도착한 별장의 내원으로 뛰어든 렌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을 들이켜며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양손이 뒤로 묶인 채 숨이 끊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로 눈에 익은 옷을 걸친 시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가 즐겨 입던 푸른 드레스.

여기저기 찢기고 터져 핏물로 얼룩진 그 드레스는 분명 어머니의 것이었다.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는 시신 아래로는 붉은 피 웅덩이가 피어올라 있었다. 렌의 시선이 그 시신 앞에 서 있는 사내에게로 가 멎었다.

피와 살점이 진득하게 묻어 떨어지는 일본도를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건네주며 무심한 표정으로 다른 하인이 건네는 물수건에 피 묻은 손을 닦고 있는 것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미나모토가의 가주 미나모토 다케오였다.

조금 전 제 손으로 아내를 죽인 남자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냉정한 눈초리가 요란하게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 들어온 렌을 위아래로 훑었다.

“お父様、どうして。” (아버지, 어째서…….)

자신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시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웅얼거리며 묻는 아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짧게 혀를 찬 가주가 차갑게 내뱉었다.

“お前が気にすることではない。”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야.)

짧은 한마디와 함께 가주가 주변에 부복한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그 눈짓의 뜻을 읽은 하인들이 재빨리 시신들을 실어 나르고 주변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얻어터져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주검들이 짐짝처럼 실려 나가고 마지막으로 하인 하나가 가주의 발치에 쓰러져 있던 어머니의 시신에 손을 대려는 것을 본 렌이 본능처럼 달려들며 외쳤다.

“触るな、やめろ!” (만지지 마, 그만둬!)

시신을 끌어안은 채 주위를 둘러싼 하인들을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번 혀를 찬 가주가 그를 내려다보며 내뱉듯이 말했다.

“それは病気で死んだ。分かったらもう戻りなさい。” (그건 병으로 죽었다. 알았으면 이제 돌아가.)

상대의 대답은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 가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끌어안은 어머니의 시신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주검보다도 싸늘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렌은 이를 악물었다.

.

.

.

“컷.”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멀어져가는 가주의 등을 노려보는 렌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고 있는 카메라 너머로 정 피디가 컷 사인을 외쳤다. 묵직한 씬 하나가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에 숨죽인 채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스태프들이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재이 씨, 수고했어요.”

재이는 자신이 안고 있던 어머니 역의 배우가 이쪽을 올려다보며 곤란하다는 듯 웃어 보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제야 자신이 아직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몰입하면 그럴 수 있죠.”

황급히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풀며 자신이 일어나는 것을 돕는 재이에게 어머니 역의 배우가 친절한 얼굴로 다독이며 대꾸했다.

“이것 좀 마셔라.”

“아, 감사합니다.”

어느샌가 차가운 생수병을 들고 다가온 황민석이 재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준비 잘해 왔다더니 진짜였네.”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선생님.”

황민석의 말에 재이가 짧게 웃으며 그와 함께 조금 전까지 촬영한 컷을 확인하고 있는 정 피디에게로 다가갔다. 정 피디의 옆에 먼저 와 있던 아버지 미나모토 다케오 역의 배우 민영환이 재이와 황민석을 반기며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선배님 오셨어요. 아들, 왔냐.”

“아버지. 수고하셨습니다.”

유창한 일본어만큼이나 유창한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는 재일 교포 출신 배우 민영환에게 재이가 맞장구치며 꾸벅 인사하자 그가 부르르 몸을 떠는 시늉을 하며 대꾸했다.

“아까 촬영 때 등이 따끔따끔하던데 저거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싶던 참이라고.”

민영환이 턱짓한 곳에는 마침 정 피디가 띄워 놓은 클로즈업 영상이 모니터에 비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카메라 너머를 노려보고 있는 렌의 얼굴에 민영환이 새삼 다시 모골이 송연하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어휴. 편하게 죽을 팔자 아니라는 거 알고 사인하긴 했는데 그래도 이 정도일 줄 몰랐다고.”

민영환이 너스레와 함께 말을 건네자 정 피디가 화면에서 눈을 떼고 배우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민 선생님께서 제대로 렌의 감정을 끌어내 주신 덕분이죠.”

정 피디의 말에 재이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아요. 사실 어떤 식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 마지막까지 고민 많이 했는데 슛 들어가고 민 선생님 마주 보니까 자연스럽게 렌의 감정이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더라고요.”

“왜 그게 내 얼굴 직접 보니 정말 죽이고 싶더라는 뜻으로 들리지.”

재이의 말에 민영환이 섬뜩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하하하하.”

“나만 못 웃어, 나만.”

황민석이 재치 있게 끼어들어 한마디 던지자 주변에서 와르르 웃음이 터지는 가운데 민영환이 혼자 투덜거렸다.

“민 선생님 남은 컷 들어갈까요? 재이 씨는 분장 고치자마자 다시 합류할 거지?”

웃음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정 피디가 배우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자 민영환이 감탄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와 재촉하는 거 봐. 피디님 제대로 삘 받으셨구나.”

“눈치채셨습니까. 저 지금 빨리 찍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리니 어서 준비들 하시죠.”

정 피디의 태연한 대꾸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민영환이 못 말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기 우리 AD님 한숨 쉬시는 거 보이네. 정사단이 대단들 하긴 하다. 이 급발진을 다 받아 주니.”

“제가 그래서 우리 스태프들 많이 사랑하죠. 네, 그러니 어서 스탠바이 좀 부탁합니다.”

“아이고 네네.”

정 피디의 재촉에 못 이겨 걸음을 옮기려던 민영환이 황민석과 나란히 서 있던 재이를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아들, 다음 씬에서는 너무 힘주지 마. 나 장 보러 슈퍼에도 못 가게 만들지 말고.”

벌써부터 시청자들에게 욕먹을 생각을 하니 속이 더부룩하다고.

엄살을 피우며 중얼거리는 민영환에게 재이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며 대답했다.

“원한 조금 더 쌓고 나서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버지.”

“아이고 섬뜩해라, 그냥 얼른 퇴장하든가 해야지 원.”

피디님도 들었죠? 나 생명 수당 따로 챙겨 주셔야 한다니까, 진짜로.

민영환이 정 피디에게 너스레를 떠는 것을 귓가로 흘려들으며 재이는 곧 이어질 다음 촬영 준비를 위해 황민석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 * *

다음 씬은 어머니가 쓰던 방 안에서 렌과 박승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불시에 별장으로 내려온 가주는 가문의 명예에 흠이 가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변명조차 듣지 않은 채 후처라고는 해도 십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해 온 아내의 목숨을 직접 거두고, 그녀가 부리던 하인 셋,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던 신원이 불분명한 인물 셋을 턱짓 하나로 황천길로 보내 버렸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별장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올라타고 곧바로 다시 경성으로 돌아갔다. 별장 뒤로 난 작은 문을 통해 사람의 주검이 일곱이나 실려 나갔음에도 신고하는 사람도, 신고를 받고 달려온 사람도 없었다.

그 흔한 조등(弔燈)조차 내걸지 않은 별장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갑작스레 주인을 잃어버린 방 소파에 앉아 멍하니 어두운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렌.

박승도는 가주의 사람들이 모두 물러나고 자신과 렌 두 사람만 남은 것을 확인한 뒤, 그에게 어머니가 몰래 남긴 유서를 전한다. 그리고 유서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렌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리허설을 마치고, 소파에 기대 앉아 정 피디의 슛 사인을 기다리며 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떨지 상상해 보라니.’

…상상이 안 가는데.

이 장면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정 피디가 해 준 말을 떠올려본 재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들에게는 직관적으로 와닿을지도 모를 치환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을 어떻게 잃을 수가 있겠는가.

닮은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리온과 진짜 한재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공통점이 바로 부모의 부재였다. 건물 입구에 버려져 있던 리온을 거둔 것이 교단의 사제님이었다면 집 앞에 버려진 한재이를 거둔 것은 과수원집의 식구들이었다.

덕분에 애석하게도 두 사람 몫의 기억을 모두 합쳐 봐도 아버지의 손에 어머니를 잃은 렌이 느꼈을 충격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의 애정이 모이질 않았다.

그나마 모두 공평하게 신의 자식들이던 교단에서 유년기를 보낸 리온은 그 신의 사랑이라도 실컷 받았으니 누군가 하나만 남의 자식이었던 과수원집에서 자라야 했던 진짜 한재이보다는 사정이 좀 나은 편이긴 했다.

‘아무래도 저 해석으로는 와닿질 않으니.’

정 피디의 조언보다 확실히 더 와닿을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소중한 존재를 갑자기 잃었을 때 느낄 만한 상실감이라 이거지. 재이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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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범도 알고 있었어?”

“…….”

낯익은 필체가 가득한 편지를 움켜쥔 채 렌이 조용히 묻는 말에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던 박승도가 대답 대신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머니는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계셨던 거로군. 어쩌면 아버지… 가주와의 결혼을 결심하셨을 때부터 이날만을 기다리고 계셨을지도 모르겠군.”

일이 이렇게 될 줄,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며칠 전 자신을 몰래 불러내 유서와 함께 그동안 비밀리에 모아 온 재산을 당신의 유일한 자식 앞으로 맡기셨다는 박승도의 설명에 렌이 중얼거렸다.

유서는 렌이 모르는 어머니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저 외모가 곱상한 어머니가 우연히 아버지의 눈에 띄어 결혼하고 자신을 낳았다고 알고 있던 렌은 어머니에게 사실 따로 약혼자가 있었고 아버지의 방해로 결국 그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미나모토가의 후처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항상 아버지에게 순종적이던 어머니가 속으로는 누구보다 그를 증오하고 있었다는 것도, 겉으로는 제국의 신민임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사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투쟁을 벌이는 조선인들을 비밀리에 돕고 있었다는 것도 유서를 읽고서야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한참 침묵에 잠겨있던 렌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나를 왜 낳았지?”

“…….”

투정도 원망도 아닌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한 렌의 질문에 박승도가 대꾸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는 자의 씨앗이면, 어떻게든 떨어뜨리려 했을 텐데. 어째서?”

렌이 줄곧 허공을 응시하던 눈을 돌려 박승도를 바라보았다.

허언은 용서치 않겠다는 듯 날카롭게 번뜩이는 그 눈빛과 시선이 마주친 박승도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한동안 그렇게 렌을 마주 보고 있던 박승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련님은 미나모토가의 핏줄이 아니십니다.”

박승도가 어렵게 내뱉은 말에 렌은 의외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침착한 표정으로 짧게 물었다.

“가주도 아는가?”

“심증 정도는.”

박승도의 대답에 렌이 깊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며 소파 등받이로 깊게 몸을 묻었다.

- 이것은 어미의 해방이고 기쁨이니 너는 슬퍼하지도 노여워하지도 말고 다만 치열하게 너의 생을 걷거라.

나는 나의 삶을 걷다 미련 없이 가는 것이니, 너는 내게 개의치 말고 너의 삶을 걸으라니. 당신의 행복을 망친 원수는 나를 낳는 것으로 갚았으니 더 이상의 복수도 애도도 필요 없으시다 이건가.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죽음을 목도하고 핏줄의 뿌리를 알게 된 나는 어쩌라는 말인가. 당신의 유언처럼 그렇게 모두 다 덮어 두고 모르는 척 살아가란 말인가.

“기가 차는군.”

렌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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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TBC 특집극 [멸화조] 제작 발표회

제작 발표회 용으로 편집된 5분짜리 하이라이트 영상 속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의 출생에 얽힌 진실을 목도한 렌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암전한 화면 속에 한 줄의 글귀가 떠올랐다.

[다만 치열하게 너의 생을 걷거라.]

그 뒤로 빠르게 지나가는 화면 속에서 검은 무복과 복면으로 정체를 숨긴 렌이 가주와 검을 겨누고 있는 장면, 경성 제일 학교의 오춘삼, 리혁진, 허윤재와 렌이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장면, 조선인 삼인방이 왁자지껄 웃고 떠들고 있는 사이, 그들의 한 발자국 뒤에 선 렌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희미하게 따라 웃고 있는 장면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리혁진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 하나 물어도 되겠소?

경성 제일 학교의 교정.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선 리혁진이 미나모토 렌, 자신들에게는 이제 이연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해진 인물을 바라보며 물었다.

- 굳이 위험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불신을 지우지 못한 듯 상대를 빤히 바라보며 묻는 리혁진의 시선이 아직 오지 않은 봄을 예견한 듯 새순을 틔울 준비를 하는 늙은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던 이연의 뒷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대답 대신 그를 바라보며 빙긋 웃는 이연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면서 하이라이트 영상은 끝이 났다.

회장에 조명이 다시 들어오고 진행 요원의 사인을 받은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화려한 꽃처럼 치열하게 살다 간 젊은 독립투사들의 숨겨진 이야기, ZTBC 특집극 [멸화조]의 제작 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정 피디와 백 작가를 필두로 재이, 인혁, 황재민, 박현오의 네 명이 차례차례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석을 가득 메운 기자들의 카메라에서 일제히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사회자의 소개를 받은 정용재 피디가 기획 의도와 제작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송 작가를 비롯한 네 명의 출연진이 각자 짧은 자기소개를 마치자 곧바로 기자 인터뷰의 순서가 돌아왔다.

질문하기 위해 기자들이 앞다투어 손을 드는 가운데 가장 먼저 손을 든 기자에게 마이크가 돌아갔다.

“시사엔터의 김주일 기자입니다.”

도전적인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한 기자의 말에 무대 위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같은 기자석에 앉아 있던 기자들의 시선까지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드라마 오디션이 끝나자마자 정용재 피디의 역량과 출연 배우들의 자질을 의심하는 저격성 기사를 쓴 그 기자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릴 것을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기자가 입을 열었다.

“주연을 맡으신 한재이 씨에게 질문드립니다. 이 드라마는 우리 민족의 어둡고 무거웠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아픔과 한이 서려 있는 시간 축을 가벼운 판타지로 소비하려는 풍토에 거부감은 없으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날것 그대로의 비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기자의 질문에 회장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비교적 맷집 있는 편인 정 피디마저 당황해 잠시 할 말을 잃고 얼어붙어 있는 사이 마이크를 들고 있던 재이가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질문이시네요, 김주일 기자님.”

걱정스러운 마음에 재이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본 박현오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기자를 바라보며 씩 웃고 있는 재이의 눈빛이 마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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