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58화 (158/224)

#158

멸화조 (5) 진전

“옳지, 그렇지. 잘한다, 치고, 빼고, 치고, 치고, 푹. 그렇지. 캬, 죽이네.”

모니터 주위에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흥이 오른 듯한 무술 감독 김용철의 감탄사가 연달아 터져 나오는 것을 바라보고 스태프 하나가 옆의 동료에게 수군거렸다.

“김 감독님이 저러시는 거 보니 엄청 마음에 드신 모양인데?”

“오늘 다찌마리 복잡하다고 새벽부터 들어오셔서 밑에 사람들 잡으시던데, 술술 풀리니 안 좋을 수가 있나. 나 같아도 한 배우 이뻐 보였을 듯.”

그의 시선을 따라 김 감독 쪽을 힐끗 쳐다본 제 옆의 동료가 그럴 만하다는 듯 대꾸하는 말에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하긴. 김 감독님 다찌마리가 좀 복잡해야지. 안 밀리고 가는 사람 없다고 들었는데, 저걸 해내네.”

“그치. 후반 일정 꼬이기 딱 좋은 날인데 덕분에 살았지 뭐.”

“처음에 얘기 들었을 때는 어디서 날아온 낙하산인가 했는데.”

“이런 낙하산이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그러게.”

어느 직장이건 일찍 퇴근시켜 주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예뻐 보이기 마련이었다. 액션씬이 들어가면 촬영이 지연되는 일이 일상인 현장에서 시원시원하게 오케이 사인을 받아내며 촬영 진도를 뽑아내고 있는 재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스태프들의 마음을 하나둘 사로잡고 있었다.

* * *

“……래도. …어쩌자고….”

“행여…… 라도 ……. ……되면…….”

연은 드문드문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깊게 가라앉아 있던 의식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치를 어쩌자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는 말인가. 리혁진이, 자네의 섣부른 행동 탓에 우리 모두가 위험해졌어.”

“오 형 말이 맞네. 이번엔 자네가 너무 성급했어.”

어딘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화조?’

리혁진의 이름이 들려온 것에 연은 그제야 연은 뿌옇게 흐렸던 의식이 차차 맑아짐을 느꼈다. 미나모토 다케오의 별채에 숨어들었다가 경비원들과 맞닥뜨렸던 것. 그중 둘을 죽이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셋을 피해 산속으로 도망쳤던 것.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을 뒤집기 위해 일부러 부상을 감수했던 것 등, 그간의 기억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비난 섞인 두 사람의 목소리에 이어 리혁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나직이 되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눈앞에서 피 흘리고 쓰러진 사람을 거기서 그냥 죽게 놔두고 왔어야 맞는다는 말인가?”

그의 물음에 두 사람이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 잠시의 정적을 깬 것은 오춘삼 쪽이었다.

“…알게 뭔가. 왜놈 따위.”

“반은 조선인이야.”

“본인에게 조선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과연 기꺼워할지 심히 의문이다만.”

리혁진의 반박에 이죽대는 오춘삼의 옆에서 허윤재가 새삼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조선인이고 내지인이고를 떠나서 외부인에게 위치가 노출되었으니 여기도 이제 쓸 수 없겠군.”

숲 아래 절벽 끝에 자리한 낡은 암자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할 일이 생길 때 쓰곤 하는 세 사람만의 비밀 장소였다. 가끔 도저히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제를 비난하는 대자보를 만들거나 할 때 유용하게 쓰이던 곳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실내를 둘러보고 중얼거린 허윤재의 말에 리혁진이 두 사람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사과했다.

“…미안하네.”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사람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데리고 오긴 했지만 두 사람의 말처럼 섣부른 판단이었다. 자칫하면 자신뿐 아니라 오춘삼과 허윤재에게도 불똥이 튈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 리혁진의 사과에 오춘삼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됐네. 이미 벌어진 일을 인제 와서 어쩌겠는가. …뭐, 자네 말마따나, 나였어도 그 상황에서 눈앞에서 피 뿜고 쓰러진 사람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을 것 같으니.”

오춘삼의 말에 딱딱하게 굳었던 리혁진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리혁진이 판단하기에 미나모토 렌은 모질긴 했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왜놈들이나 대놓고 왜놈 앞잡이 노릇을 하는 학교의 다른 선생들이나 교관들에 비하면 의외로 오히려 양반인 편이었다.

오춘삼을 비롯해 처음 그의 훈련 방식에 반항했던 학생들도 그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꽤 누그러졌다. 물론 그가 학생들 사이에서 힘 좀 쓴다는 오춘삼을 가볍게 메다꽂는 것을 직접 목격한 탓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들을 일부러 괴롭히려 하는 것이 아님을 안 것만으로도 그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리혁진을 잠시 바라본 허윤재가 오춘삼의 등 뒤 간이침대 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보다, 어쩌다가 저 지경까지 된 것일까?”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미나모토 렌이 창백한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꾹 감고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본 오춘삼이 짧게 내뱉었다.

“도박 빚이라도 있는지 알게 뭔가.”

그런 오춘삼을 어린아이 어르듯 타이르며 허윤재가 리혁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네. 혁진이, 그 죽은 자들이 누구인지는 알아보겠던가?”

허윤재의 물음에 리혁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셋 다 딱히 신분을 알아낼 수 있는 물건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이거 보게.”

“이건…….”

리혁진이 내민 손바닥 위에 있던 것은 작은 단추였다. 대충 닦은 핏자국에 군데군데 갈변하기는 했어도 단추에 음각된 문양을 읽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디서 본 듯 낯익은 그 문양에 고개를 갸웃하며 단추를 빤히 들여다보던 두 사람 중 허윤재가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이건 미나모토가의 문양이 아닌가.”

허윤재의 말에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혁진의 얼굴을 바라본 오춘삼이 중얼거렸다.

“빚 독촉이 아니라 집안싸움이었다는 말인가.”

아무리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이라지만 사용인이 고용주의 자식을 상대로 진검을 휘두르게 할 정도의 일이라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에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 있던 허윤재가 다시 입을 열고 역시 저만큼이나 생각이 많아 보이는 리혁진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시신들은 어찌했나?”

“일단 안 보이는 곳으로 옮겨 묻었네.”

짤막한 리혁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허윤재가 말을 이었다.

“혹여 따라붙은 자들이 있다면.”

“자네들이 올 때까지 줄곧 살폈으나 그런 움직임은 없어 보이긴 했는데.”

“…나머지는 저치가 깨고 나면 물어야겠군.”

오춘삼이 중얼거린 말에 여태껏 자는 줄 알고 있었던 인물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미나모토 다케오의 별채를 지키던 자들이다.”

“!!!”

세 사람이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연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것을 확인한 리혁진이 물었다.

“미나모토가의 별채는 가주 본인을 빼고는 아무도 함부로 들락이지 못한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곳에 있던 칼잡이들을 여기까지 끌고 오게 된 거요?”

그의 물음에 딱히 대답할 마음은 없는지 그다지 크지 않은 암자 안을 한 바퀴 돌아본 연이 다시 한번 세 사람의 시선을 마주 보며 물었다.

“…여기는 자네들의 은신처인가?”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주겠소.”

연의 물음에 오춘삼이 나직이 으르렁댔다.

“그 실력으로?”

“평소라면 힘들겠지만, 지금이라면 승산 있어 보이는데 말이오.”

오춘삼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연이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옆구리에 단단히 감아 둔 붕대 덕에 예상했던 것보다 움직임이 훨씬 수월했다. 보아하니 리혁진 저 녀석은 머리만큼이나 손끝도 여문 모양이었다. 자신이 몸을 일으키자 당장이라도 달려들듯 이쪽을 매섭게 노려보며 경계하는 세 사람을 하나하나 둘러본 연이 리혁진에게 시선을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구해 줘서 고맙다.”

담백한 한마디였다.

설마 그에게서 직접적인 감사의 인사를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던 듯 항상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리혁진의 얼굴이 당황과 놀라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역시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뜬 것도 모자라 입까지 반쯤 벌린 표정으로 연을 바라보던 오춘삼이 자신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피식 웃는 그의 모습에 얼굴을 콱 찌푸리며 말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구해 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을 정도로 파렴치한 인간처럼 보였다면 유감인걸.”

연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허윤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물쩍 넘어갈 생각 마시오. 어떻게 된 일인지 솔직하고 자세하게 털어놓을 생각이 없다면…….”

“없다면?”

“오 형이 말한 대로요. 평소라면 힘들겠지만, 우리 셋이 힘을 합친다면 당신 하나쯤 감당할 수 있겠지.”

평소 세 사람 중 가장 유한 성격으로 비치던 허윤재가 단호한 표정으로 잘라 말했다. 자신을 직시하는 그 눈빛이 진심임을 눈치챈 연이 깊게 한숨을 내 쉬었다.

“후우……. 어쩔 수 없군.”

마지못한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 * *

“아이고 삭신이야. 아니 우리 제작진은 홍보 예능을 물어 와도 이런 하드한 것만.”

“어쩌겠어요. 작품 성향 따라가는걸.”

박현오가 제작진들이 건넨 의상으로 갈아입으며 투덜거리자 이미 환복을 마치고 마이크 세팅을 받고 있던 황재민이 대꾸했다. 박현오와 황재민, 그리고 재이와 인혁은 ZTBC 예능 [나 잡아봐라] 에 출연하기 위해 촬영이 진행될 민속촌에 와 있었다.

모두의 우려와 기대 속에 방영된 첫 화는 시청률 7.8%로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적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첫 방영 전날까지 1% 폭망의 악몽을 꿨다는 정 피디는 그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 듯한 얼굴로 환하게 네 명의 배우들을 얼싸안았다.

일각에서는 배우들 얼굴 빨이라는 악평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제작진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젊고 잘생긴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는 점을 포인트로 잡고 적극적인 홍보 태세에 돌입했다. 덕분에 몰아치는 촬영 스케줄을 쥐어짜 내어 만든 틈새로 멸화조 4인의 홍보 예능 스케줄이 성사되었다.

“내가 기필코 다음 작품은 로코 간다 로코.”

“꼭 이런 말 하시는 분들이 다음에도 하드보일드 액션 찍더라.”

스탠바이 지점으로 이동하며 투덜대는 박현오의 혼잣말에 뒤따라 걷던 재이가 한마디 얹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인혁과 황재민이 차례차례 거들었다.

“로코 대본이 인제 와서 굳이 형한테까지 갈까 싶은데요.”

“음 제 생각에도 형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우신 듯.”

김용철 감독님이 다음 프로젝트 쿵푸파이터인데 아이돌보다 뮤배가 잡기 쉽지 않겠냐고 혼잣말하시는 거 들었는데 말이죠.

황재민의 중얼거림에 박현오가 섬뜩하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외쳤다.

“으아 아주 악담들을 해라 너희들.”

재이와 인혁의 독설 아닌 독설에는 그간 함께 촬영하며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던 박현오도 그나마 얌전하던 황재민이 어느새 둘 쪽에 편승한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어휴 어쩌다 파티 물이 든 건지, 우리 재민이.”

“형도 오세요. 들어보니 괜찮은데, 파티 물.”

“됐다, 나는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다. 독야청청할 거야.”

“이미 조장님의 충실한 오른팔이시면서.”

“아 그건 내가 아니고 오춘삼이지.”

그들의 티격태격에 주변에서 듣고 있던 스태프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 잡아봐라]는 호스트 팀과 게스트 팀이 나뉘어 벌이는 게임 형태의 예능이었다. 오늘 촬영에서는 호스트 팀이 순사, 멸화조 출연진들이 독립투사로 분장해 진행될 예정이었다.

독립투사들은 순사들의 눈을 피해 민속촌에 관광 온 관광객들에게 태극무늬가 그려진 목패를 나눠 주고 순사들이 그것들을 도로 빼앗는 사이, 게임 종료 시점까지 관광객들이 가져온 미니 태극 패의 개수에 비례하는 만큼 프로그램 말미에 드라마 홍보를 위한 시간을 할애한다는 플롯이었다.

- 그럼 이쯤에서 모셔 보겠습니다. 경성 제일 4인방 멸화조 여러분 어서 오세요!!

메인 엠씨의 호명과 함께 스태프들의 박수를 받으며 재이를 비롯한 네 명의 배우들이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와 나란히 섰다.

“이야, 얼굴로 나라를 구한다는 소문이던데. 소문이 사실이네. 아주 다들 번쩍번쩍 빛이 나는데?”

“아니 근데 요새 한창 바쁘신 분들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

“독립운동하러 왔는데요.”

호스트들의 수다에 재이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메인 MC가 재밌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을 받았다.

“이야, 재이 씨 훅 치고 들어오네. 좋아 이런 거, 아니 근데 아무리 컨셉이어도 복장 차이 너무 나는 거 아니냐고. 원래 순사 제복이 더 눈에 띄는 거 아니었어?”

“일제의 앞잡이 주제에 말이 많으십니다.”

재이 대신 인혁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자 호스트 중 하나가 어질어질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와 멸화조 분들 입담이 아주 매운 맛이네. 딱 내 취향인데 나도 이쪽 하면 안 되나?”

“저희 제복은 100% 수제라서. 여분이 없을 것 같은데요.”

황재민의 말에 아까부터 자신이 입은 순사복보다 더 좋아 보이는 멸화조의 홍보용 제복을 바라보고 있던 다른 한 명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와 그럼 그 옷 입으려면 일단 잡아서 뺏어야겠구나?”

“여보세요, 오늘 뺏어야 하는 건 그게 아니라고.”

와하하하-

메인 MC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말리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그리고 얼마 후.

“으아악, 살려 줘, 살려 줘어어어!!”

이연의 칼을 마주한 순사 하나가 들고 있던 태극 패 한 뭉치를 내던지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