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멸화조 (7) 전조
“와 눈빛 봐라, 칼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진심 꼭지 돈 자의 눈빛.”
“근데 왜 저기서 왜 이연 아니고 한재이가 보이는 것 같지?”
“이 기시감이 뭔가 했더니 그거였냐고.”
파티의 숙소 안. 간만에 여섯 명이 모두 모여 [멸화조] 본방을 시청하고 있었다. 이연이 자신의 허락 없이 화조의 학생에게 손을 댄 사토를 노려보며 칼을 휘두르는 마지막 장면이 지나가고 광고가 시작되자 숨죽인 채 화면을 주시하고 있던 멤버들이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하나둘 입을 열었다.
남궁찬은 이제 제법 묵직해진 도도님 을 배 위에 얹은 채 바닥에 길게 드러누워 있었고 이환은 여전히 자신에게 낯을 가리는 도도님 의 환심을 사보려고 그 옆에서 얼쩡거리는 중이었다. 은규가 커피 테이블에 작업 중이던 노트북을 올려놓은 채 거실 바닥에 앉아 다음 화 예고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사이,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냉큼 안마 의자 를 차지하고 앉은 엠케이가 스위치를 켜고는 덜덜거리는 목소리로 소파에 앉은 재이와 인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 그. 시청률. 공약 같은. 거. 는. 뭐. 없냐?”
엠케이가 묻는 말에 다른 멤버들도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슬슬 얘기 나올 때 된 것 같은데.”
“원랜 제작 발표회 때 나왔어야 하는 얘기 아니야?”
남궁찬의 말에 이어 이환이 되묻자 은규가 중얼거렸다.
“그때 그 시사 엔터 에서 초치는 바람에 KBC 자극하지 말자고 어영부영 넘어간 거 아니었어?”
그 말에 남궁찬이 재밌다는 듯 받아쳤다.
“근데 그 KBC는 지금 죽 쑤고 있고요?”
“그래도 그때 재이가 받아 버리지 않고 잘 넘기는 거 보고 그래도 많이 컸네 싶었는데 말이지.”
“아냐, 따로 묻어 버렸는지도 몰라. 그 기자분 요새도 기사 쓰시나 좀 확인해 봐라 .”
감개무량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은규와 그 옆에서 이죽대고 있는 이환을 흘겨보며 재이가 중얼거렸다.
“대체 너희는 날 뭐로 보길래.”
그러자 이제 그런 재이의 혼잣말에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남궁찬이 인혁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서 공약 뭐 걸 건대 ?”
“글쎄, 아직 협의 중이라.”
인혁이 말을 흐리자 남궁찬과 이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뭐길래 그러지.”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은규가 알겠다는 듯 외쳤다.
“아, 나 뭔지 알 것 같음.”
“오, 뭔데 뭔데 .”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멤버들의 기대 어린 시선에 급소심해진 은규가 살짝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가수 셋에 뮤배 하나니까… 노래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콜록.”
은규의 말이 끝나자 마침 생수병을 들어 물을 마시고 있던 인혁이 사레 걸린 듯 기침을 터뜨렸다. 인혁의 반응에 은규를 제외한 나머지 셋의 시선이 짜기라도 한 듯 재이를 향했다. 그리고 재이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을 확인한 셋이 이번에는 은규를 쳐다보며 한마디씩 했다.
“하, 심은규 진짜.”
“왜, 내가 뭐.”
남궁찬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는 것에 은규의 어깨가 움찔하며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또 다른 적성에 눈뜨나, 샴은규.”
“파. 티 공. 식. 샤먼 심. 은규.”
“샴은규 진짜 이 정도면 은퇴하고 청계천 다리 밑에서 제2의 인생 시작 가능.”
엠케이와 이환까지 남궁찬에게 가세해 자신에게 한마디씩 던지는 것을 듣고 있던 은규가 재이와 인혁을 돌아보며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야?”
그냥 찍어 본 건데.
중얼거리는 은규의 말에 재이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짧게 내뱉었다.
“샴은규 영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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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뉴스] ZTBC 특집극 [멸화조] 시청률 쾌속 약진…… 이연이 독립투사로 각성하는 장면, 순간 시청률 11.2% 껑충
[노컷 엔터] 경성 제일 멸화조, 심상치 않은 성장세…… 자체 최고 시청률 매화 경신 중
[데일리 엔터] ZTBC 특집극 [멸화조] 시청률 이색 공약 …… 2.3% 상승 때마다 OST 인물별 커버 곡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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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처음 뵙겠습니다. 이우연이라고 합니다?”
“하하, 선배님 농담도 참. 잘 지내셨죠?”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와 있던 이우연이 삐딱하게 건넨 인사말에 재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이우연.
일명 무적의 보컬리스트.
데뷔 서바이벌 [스텝 업]에서 심사 위원 으로 출연한 차상혁의 멘토링을 받았을 때 차상혁의 소개로 만나게 된 후 재이의 보컬 트레이너를 자처하고 나서서 자신의 바쁜 스케줄을 쪼개 가며 재이의 보컬을 다듬어 준 인물이었다. 이후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보컬로 재이를 언급하며 꾸준히 재이의 어깨에 힘을 실어 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너무 안 봐서 얼굴 까먹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안녕하세요, 이우연이라고 합니다.”
“어휴 선배님,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어요. 저번 드라마 회식 때 뵈었잖아요.”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정색을 하고 타박부터 하는 이우연을 어르며 재이가 대답했다. 이우연은 [멸화조]의 주제곡을 부르며 OST 공동 프로듀서로서 드라마에 참여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대규모 회식 자리에서 서로 만났던 것을 상기시킨 재이의 대꾸에 이우연이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때 잠깐 인사한 것도 만난 거로 치는 거냐. 차상혁도 그렇고 케이엠 애들은 왜 다들 이렇게 매정해.”
“죄송해요, 선배님, 그래도 단톡방에서는 꾸준히 뵈었잖아요.”
“네, 아니요, 글쎄요. 요거 세 개만 돌려서 말하던 그 채팅봇이 너였어?”
“아하하.”
이우연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재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 재이는 시청률 공약에서 내건 개인 커버 곡의 작업을 위해 레코딩 스튜디오에 와 있었다.
“아, 선배님. 이쪽이 송백은 작가님이요. 작가님, 이쪽이.”
“송백은이라고 합니다. 이우연 씨, 제가 완전 팬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타박을 늘어놓는 이우연의 등쌀에 좀처럼 소개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던 재이가 이우연이 잠시 뜸한 틈을 타 자신과 함께 온 [멸화조]의 작가 송백은을 이우연에게 소개했다. 그러자 재이의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기다리다 목 빠질 뻔했다는 듯한 투로 송 작가가 대뜸 스스로 이우연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 모습을 본 재이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초스피드로 탈고하시자마자 하시는 첫 외출이 OST 작업 현장이라고 하시길래, 아무리 송 작가님이 일 중독이라고 하셔도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닌가 싶었더니 다 이유가 있으셨네요?”
“아니 그건 재이 씨가 부탁한 것도 보는 김에 겸사겸사.”
이우연에게 솔직하게 자신이 팬임을 밝힌 송백은을 바라보며 중얼거린 재이의 말에 송 작가가 멋쩍게 고개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연의 커버 곡은 이우연이 곡을 쓰고 재이가 가사를 입히기로 되어 있었다. 이우연과 전체적인 곡의 분위기를 의논한 재이는 가사의 초안이 잡히는 대로 송 작가에게 검수를 부탁했다. 재이의 해석이 원작과 충돌하지 않는가를 살펴 피드백을 준 송 작가는 겸사겸사 다른 인물들의 커버 곡도 들어 볼 겸, 재이와 함께 이우연의 스튜디오를 찾은 참이었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이우연의 말에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악보를 눈으로 훑으며 익숙하게 목을 풀기 시작했다. 낮은음부터 높은음까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얼굴 근육을 풀며 가볍게 스트레칭하는 재이의 모습을 송 작가가 신기한 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보니 재이 씨 진짜 가수구나…… .”
송 작가의 중얼거림에 그의 옆에서 스태프와 함께 컨트롤 데스크의 세팅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던 이우연이 웃으며 말했다.
“저 녀석, 드라마 판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본업 하나는 확실히 하는 녀석이니까요.”
재이의 본업은 가수라는 것에 쐐기를 박고 싶은 듯 일부러 ‘본업’이라는 말에 강조점을 두는 이우연의 말에 송 작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맨날 촬영하는 것만 보다가 이런 모습 보니까 신선한데요. 재이 씨 재주가 대단하네요.”
보통 사람들은 하나도 잘하기 힘든데 말이죠.
송 작가가 중얼거린 말에 이우연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레코딩 부스로 들어가는 재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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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 두둥. 둠…… .
잡음 하나 없이 고요한 레코딩 부스 안에 앉은 재이는 헤드셋을 타고 흘러나오는 전주의 베이스 리듬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연의 커버 곡 [하얀 달이 뜨면]은 일렉트릭 기타의 날카로운 선율이 인상적인 발라드였다. 기타의 주선율이 시작되면서 재이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졌다.
메마른 들판을 가로지르고
붉게 물든 강을 건너
한숨이 닿는 곳 눈물이 쌓일 때
바람이 날아 앉듯 네게 가리니
차갑게 시린 하얀 달이 뜨면
“…와.”
노래가 시작됨과 동시에 재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에 이우연의 옆에서 노래를 듣고 있던 송 작가가 나직이 감탄을 터뜨렸다. 유심히 곡의 진행을 살피던 이우연 또한 놀란 눈빛으로 레코딩 부스 안에서 열창 중인 재이를 바라보았다.
‘본업이나 열심히 하지 드라마 판은 왜 기웃대나 했더니, 이거였나.’
이우연은 내심 재이같이 가능성 있는 녀석에게 노래 말고 다른 걸 자꾸 시키는 케이엠이 못마땅하던 참이었다. 보컬만 갈고닦아도 앞날이 창창할 녀석이 배우니 뭐니 기웃대느라 시간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재계약 기간이 되면 어떻게든 꼬셔서 전업 가수 로 전향시켜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오래간만에 다시 들은 녀석의 노래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갈고닦을 시간 따위 없었을 거라 짐작했던 자신의 걱정이 무색하게 눈앞의 어린 녀석은 그사이에 또 훌쩍 혼자 성장해 있었다.
듣는 이를 확 끌어당기는 흡인력뿐 아니라 적절하게 감정을 싣는 법을 깨우친 듯 도입부에 낮게 깔리는 화자의 슬픔을 제대로 끌어내고 있었다.
‘저걸 깨우치려고 들어간 건가.’
노래에 감정을 싣는 것은 누가 가르쳐 준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훈련과 연습으로 쌓아 나갈 수는 있지만 본질에서는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영역이라고, 이우연은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지금 제 눈으로 확인한 재이의 놀라운 성장에는 역시 본업이 아닌 배우 업에서 체화한 것들이 밑바탕 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아니면 진짜 그냥 천재이거나.’
캐릭터의 서사를 배경으로 한 커버 곡의 경우 감정을 적절하게 담아내지 않으면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하고 화자의 자아도취에서 끝나 버릴 위험이 컸다. 특히 이번 곡의 경우 함축적인 가사 탓에 강약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노래 자체가 납작해지거나 반대로 감정 과잉이 되기 쉬웠다.
그런 이유로 내심 오늘 레코딩이 까다로우리라 생각하고 있던 이우연은 의외로 첫 시작부터 제대로 감정을 실어 내는 어린 녀석의 맹랑함에 자신의 예상이 크게 빗나갔음을 깨닫고 헛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좋아, 재이야. 지금 좋았는데 도입부 조금 더 박자 꽉 채워서 가 볼까 . 호흡 최대한 느리게 잡고 한번 가 보자 .
헤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이우연의 디렉팅에 레코딩 부스 속에 선 재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마른 들판을 가로지르고
붉게 물든 강을 건너
한숨이 닿는 곳 눈물이 쌓일 때
귓가에 차오르는 선율에 의식을 맡긴 채 눈을 감자 머릿속에 풍경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 …재이야? 한재이?
“하.”
재이는 그제야 숨통이 트인 듯 짧게 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벌컥.
“재이야, 괜찮아?”
레코딩 부스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이우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이는 그제야 자신이 레코딩을 하던 도중 갑자기 멈춰 서 있던 것을 깨달았다.
“…어, 네. 잠깐, 좀.”
재이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이우연이 재이의 팔을 잡아 끌어내며 말했다.
“좀 쉬었다 하자.”
“아니 이제 괜찮은데…… .”
“어른이 말하면 들어. 여기 앉아서 좀 쉬고 있어. 매니저님은 나 좀 봅시다.”
이우연이 단호한 말과 함께 재이를 소파에 억지로 앉히고는 가까이에 와 있던 매니저 홍정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화가 난 듯 보이는 게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다.
“아니 애를 어떻게 굴리길래 녹음하다가 애가 하얗게 질려서 넘어가요. 아무리 요새 아이돌이 한철 장사라는 소리 듣는다지만 케이엠도 설마 그런 양아치 마인드였던거요?”
녹음실 문 너머로 이우연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화나면 물불 안 가린다는 성격이 엉뚱한 데서 터진 모양이었다.
‘어, 말려야 되는데.’
재이가 엉거주춤 일어나려는데 누군가가 꾹, 어깨를 눌러 내렸다 . 올려다보니 송 작가가 눈썹을 찌푸린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앉아 있어요. 틀린 말 하시는 거 없는 것 같은데.”
아니 틀린데요 . 다 틀린데요 .
재이가 중얼거리는데 송 작가가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
“촬영 일정이 너무 빡빡한 거 아닌가. 이따 또 촬영장 넘어가죠? 나랑 같이 가요, 정 피디님이랑 얘기 좀 해 보게.”
“아니 작가님, 그러실 필요 없어요. 진짜로.”
“왜, 내가 입봉 작가라 그 정도 말도 못 해 줄 것 같아요? 정 피디님도 아셔야죠. 우리 한 배우 촬영하다가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게 더 큰일인데 .”
“어, 그러니까 아까도 쓰러지진 않았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일단 가만히 좀 앉아 있어요.”
눈썹을 찌푸리며 만류하는 송 작가의 태도에 일어나기를 포기한 재이가 그대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요새 잠을 좀 못 자서 그런가. 형한테 진료실 열쇠만이라도 받아 놓을걸 .’
한산 클리닉의 원장이자 재이의 둘째 형 한산은 뭔가 연구할 게 있다며 몇 주째 클리닉까지 닫아 둔 채 어디론가 사라져 감감무소식이었다. 덕분에 진료실의 안락한 가죽 소파에서 취하던 꿀 같은 낮잠 시간을 빼앗긴 재이는 뒤늦은 후회에 빠져 있었다.
“한재이, 정 안 좋으면 병원 가 볼래 ?”
가까이서 들려온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언제 돌아온 것인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이우연이 보였다. 그의 어깨너머로 한껏 풀이 죽은 표정으로 이쪽을 살피고 있는 매니저 홍정수를 바라본 재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요새 잠을 좀 못 자서 순간 졸았나 봐요. 죄송합니다.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잠을 못 잤다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아직 키 클 나이의 애를 잠도 안 재우고 돌렸다고…… .’라고 중얼거리는 이우연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한 채 재이가 웃어 보이며 말했다.
“오늘 레코딩 끝내기로 했잖아요. 다시 가죠.”
재이의 말에 이우연이 못마땅한 듯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오지 말고 좀 쉬고 있어. 정 피디님하고 얘기 좀 하고 올게.”
“형 저 진짜 괜찮은데요.”
“알았으니까. 일단 있어.”
레코딩이 재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혁과 함께 먼저 촬영장에 가 있던 석관이 홍정수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이우연의 긴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풀려난 석관은 재이를 태우고 오늘 나이트 촬영이 있을 현장에 도착했다.
석관 자신도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재이를 숙소로 데려가 쉬게 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주연 배우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촬영을 갑자기 펑크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하필 극 중에서도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는 클라이맥스 씬의 촬영이 있을 예정이었다. 석관은 무거운 마음으로 한창 바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정 피디의 모습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