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161화 (161/224)

#161

멸화조 (8) 결합

* * *

경성 제일 학교에 특별훈련 교관으로 부임한 사관생도가 교육 기관 내 비폭력 원칙을 어기고 조선인을 죽인 일명 ‘김오복 사건’.

뒤늦게 개입한 동료 교관이자 배분상 상급자에 해당하는 사관생도 미나모토 렌의 저지로 더 이상의 즉결 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나 비폭력 원칙을 깬 것도 모자라 정식 임관 전인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즉결권을 사용한 사토 쇼이치가 근신 5일이라는 가벼운 징계와 함께 훈방 처리된 사실이 알려지며 그때까지 참아왔던 조선인 차별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인 식자들을 중심으로 내선일체의 황국 신민화 정책 이면에 선명히 존재하는 차별에 대한 지적과 성토가 이어지자 총독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회에 퍼져있는 불온 세력이 신민을 선동하려 한다는 구실로 대대적인 지식인 탄압에 들어갔다.

김오복 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썼던 신문 기자를 비롯해 그 기사에 동조했다는 ‘제보’가 들어온 언론인들과 일선 교사들, 그리고 총독부가 규정한 반사회적 기조의 언론을 후원하고 있는 조선인 자본 회사의 사주들까지 줄줄이 경무국에 소환되는 사태에 이르자 이번 사건의 시발점이었던 경성 제일 학교는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겉으로는 사건에 연루된 자들에 대한 내부 징계와 경무국 수사 협조를 위한 임시적 조치라고 밝혔으나 이번 사건을 빌미로 재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을 모두 퇴학 조치하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당사자인 화조 소속의 조선인 학생들은 뒤숭숭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결국, 양화 조일홍 선생까지 잡아들였다더군.”

오춘삼이 어이없다는 듯한 투로 내뱉었다.

사람들의 눈이 뜸한 새벽, 리혁진과 허윤재 그리고 오춘삼은 산속 암자에 모여 시국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그러게.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 사건이 써먹기 좋은 빌미가 된 거지. 김오복이가 알면 저승에서 땅을 치겠군.”

리혁진과 허윤재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씩 보탰다. 양화 선생은 조선인 식자들 사이에서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불리는 언론인이었다. 학생들 간의 단순한 말다툼에서 번진 이번 사건이 어디까지 커질 작정인지. 상황을 곱씹을수록 서늘하게 등을 타고 올라오는 불안감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우리도 움직이자고.”

“어떻게?”

오춘삼이 중얼거린 말에 리혁진이 물었다.

“일단 보여 줘야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것을.”

오춘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세 사람이 재빨리 경계 태세를 갖추며 열리는 문에 시선을 집중한 가운데,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깜짝이야.”

“어째서?”

그의 얼굴을 확인한 오춘삼과 리혁진이 동시에 물었다. 그들의 놀란 얼굴을 쓱 훑어본 침입자, 이연이 입을 열었다.

“막무가내로 움직였다가는 개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신중하게 행동해라.”

“갑자기 나타나서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뭘 어쨌다고.”

“우리가 뭘 하던 당신이 무슨 상관이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해 있던 오춘삼과 리혁진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앞다투어 말했다. 허윤재가 그런 그들을 다독이며 이연에게 물었다.

“둘 다 그만해. 그보다, 우리가 여기서 모인다는 건 어찌 알고 오셨습니까.”

차분한 어조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허윤재의 눈을 잠시 마주 본 이연이 말했다.

“저 머리에 열만 오른 멍청이가 꼬리 붙은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달고 올 참이길래 떼어 내 주고 오는 길이다.”

이연이 턱짓으로 오춘삼을 가리키자 오춘삼이 당황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럴 리가. 분명히 잘 살피고 왔는데.”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너를 경무국에서 별다른 소리 없이 순순히 훈방 조치한 게 진짜 너한테 혐의점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 정도로밖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좀 곤란한데.

이연이 중얼거린 말에 오춘삼이 허를 찔린 듯 당황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김오복이 사토의 칼에 절명할 당시 가장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목도한 것이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경무국에서 별다른 말 없이 훈방 조치한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꺼림칙한 기분을 완전히 떨쳐 내지는 못했던 상황이었다. 설마 감시가 붙어 있었을 줄이야.

“왜 도와주는 겁니까? 당신으로서는 우리 같은 조선인이 하나둘 더 죽어 나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텐데.”

리혁진이 여전히 의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겠다는 투로 이연에게 물었다.

“변덕이라고 해 두지.”

“하.”

거짓말은 용납지 않겠다는 듯 노려보는 리혁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한 투로 짧게 대꾸한 이연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펼쳐 들었다.

“그건…….”

“…경무국, 경무국의 내부 도면이잖아?”

“이걸 당신이 어떻게…….”

이연이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종이에 그려져 있는 평면도가 어디의 것인지를 확인한 세 사람이 놀라움과 당황이 가득한 눈빛으로 이연을 돌아보았다. 이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집에 종류별로 있거든.”

왜놈들이.

피식 웃으며 하나는 사업가, 하나는 제국 경찰의 감투를 쓰고 있는 자신의 배다른 형들을 떠올린 이연이 말을 이었다.

“양화 선생은 내일 밤 서대문으로 이송될 예정이라는 소리가 있지만 그건 거짓 정보야. 구국회가 양화 선생을 구출하려 한다는 첩보를 받은 경무국에서 혹시라도 걸려들까 싶어 쳐 놓은 덫이지.”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면 구국회 사람들에게 어서 그 사실을 알려야…….”

이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춘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그런 그를 쳐다본 이연이 그나마 침착한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나머지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저거는 되도록 머리 쓰는 일은 시키지 마라. 언젠가 분명 크게 사고 칠 듯.”

이연의 말에 허윤재와 리혁진이 반박 대신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을 본 오춘삼이 발끈해서 외쳤다.

“뭐야, 너네. 왜 내 편 아니고 저 인간 편을 들어?”

“진정해, 오 형. 지금 건 교관님 말씀이 맞아. 교관님이 혹시라도 딴마음 품고 우리를 꼬여 내 경무국에 직접 잡아 처넣으려는 심산이면 어쩌려고 저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윤재 말이 맞아. 지금 건 오 형이 경솔했어.”

차분한 말투로 나무라듯 자신에게 설명하는 허윤재와 그에 동조하며 이연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리혁진의 모습을 돌아본 오춘삼은 그제야 뒤늦게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다시 이야기의 화살을 이연에게로 돌렸다.

“그래. 우리가 당신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냐고.”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하나 충고하건대,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자책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건 각오해야 할 거야.”

이연의 말에 세 사람이 침묵했다.

“…놈들이 작정하고 잡아들인 이상, 서대문으로 이송되고 나면 양화 선생이 거기서 무탈하실 가능성은 거의 없어.”

허윤재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 구국회도 움직이려는 거겠지.”

그의 말에 리혁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내뱉었다.

“경무국이 이번 일을 빌미로 구국회까지 치려는 거라면.”

리혁진의 말을 받은 허윤재가 이어 말하자 그를 비롯한 세 사람의 시선이 삐딱한 자세로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연에게로 쏠렸다.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 하겠지.”

이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오춘삼이 중얼거린 말에 리혁진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조장님, 쓰러졌었다며?!”

‘아니 진짜 그냥 잠깐 어찔했던 것뿐인데 어째서 이미 쓰러진 게 되어있는 거냐고.’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쯤엔 피 토하고 실려 갔다는 기사라도 날 기세네.

촬영장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발견한 박현오가 큰소리로 묻는 말에 재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쓰러지긴요. 그냥 잠깐 좀 어지러워서.”

“그게 그거지. 야 혁진아, 너희 회사 문제 있는 거 아니냐. 어떻게 쓰러진 사람을 그대로 현장에 내보내? 그것도 하필 나이트에 액션씬 빽빽한 촬영을.”

박현오의 말에 인혁이 굳은 얼굴로 재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석관이 형이 피디님 찾던데. 결국, 오늘 촬영 그대로 가는 거래?”

“아 진짜 별일 아니라니까. 우연 선배가 걱정이 많으셔서 좀 과장되게 말씀하신 것 같은데.”

도돌이표 같은 대화에 질린 재이가 살짝 언성을 높이며 항변하자 옆에 서 있던 황재민이 끼어들며 말했다.

“송 작가님도 그러시던데? 멀쩡하게 녹음하다가 갑자기 하얗게 질려서 넘어가더라고.”

…송 작가님 날아오셨나. 정수 형이 운전하는 차보다 더 일찍 도착하시다니.

속으로 중얼거린 재이가 이미 몇 번째인지 모를 말을 다시 한번 꾹꾹 힘주어 말했다.

“안 넘어갔고요. 그냥 잠깐 어지러워서 서 있었다고.”

그러자 재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박현오가 눈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런 적 있어서 아는데 그거 그냥 넘기면 안 된다. 제대로 푹 쉬지 않으면 몸 상하는 거 순식간이야. 가만있어 봐, 내가 다니는 한의원 알려 줄 테니까 회사에 보약이나 한 첩 지어 달라고 해서 먹어.”

“저 그런 거 안 먹는데요.”

“어허이, 이것저것 가리니까 그렇게 픽픽 쓰러지는 거야. 내가 전국에 용하다는 한의원은 다 한 번씩 가 본 사람인데 여기 약이 제일 좋아. 잔말 말고 형이 시키는 대로 해.”

‘픽픽이라니, 우리 애들이 들으면 기절할 소리를. 파티 공인 체력 갑이 바로 저인데. 차인혁 가만히만 있지 말고 뭐라 말 좀 해라. 네가 폼 잡고 그냥 가만히 서 있으니까 오해가 굳어지고 있잖아.’

기어코 핸드폰을 뒤적여 자신이 단골로 이용한다는 한의원 전화번호를 손에 쥐여 주는 박현오를 바라보며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재이 씨, 피디님이 찾으세요.”

마침 현장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던 스태프가 재이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외쳤다. 그를 따라 이동하다 보니 정 피디와 송 작가, 무술 감독 김용철을 비롯해 코어 스태프들이 모여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재이 씨 왔어? 몸은 좀 어때?”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듯 재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펴보며 정 피디가 묻자 재이가 머쓱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멀쩡해요.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닌데 다들 좀 과하게 반응하셔서…….”

재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하자 정 피디가 그제야 좀 안심한 듯 표정을 풀며 말했다. 옆에서 김 감독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끼어들며 말했다.

“젊다고 너무 자신하면 안 돼. 젊은 거 믿고 무리하다간 어느 순간 훅 간다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건강은 미리미리 챙겨라.”

“아…. 네…….”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단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거구나.

재이는 요 반나절 사이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들은 탓인지 마치 돌림 노래처럼 들리는 김 감독의 조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 감독님하고도 상의해 봤는데 재이 씨 오늘 나이트 촬영 전반부는 스킵해도 될 것 같아.”

“네? 왜요? 저 진짜 멀쩡한데요?”

자신의 말에 펄쩍 뛰며 고개를 가로젓는 재이를 바라본 정 피디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오늘 전반부 메인은 저기 삼인방이니 딱히 재이 씨가 꼭 붙어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시위씬에 들어가는 이연 컷은 따로 빼서 몰아 찍으면 되니까 굳이 무리할 필요 없다는 말이야.”

어린아이를 다독이듯 차분한 어투로 재이에게 설명하는 정 피디 옆에서 김 감독이 거들었다.

“액션 쪽은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급하게 조정하기가 힘들어서 말이지. 정 피디 말대로 전반부에 좀 쉬면서 체력 회복하고 나서 지난번처럼 진도 쭉쭉 뽑아 버리자고.”

김 감독의 말에 재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얘기 끝났으면 가서 좀 쉬고. 이따 보자고?”

이미 너희 김 팀장님하고도 얘기 끝났다면서 용건은 그것뿐이었다는 정 피디가 다시 모니터 앞에 고쳐 앉으며 손사래를 쳐 보이는 것에 재이는 더 이상 반발하지 못하고 터덜터덜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매니저 홍정수의 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피디님이 뭐라셔?”

“후반부 촬영 시작할 때까지는 쉬래요. 현장에 있을 필요도 없으니까 차에 가 있으라고.”

“다행이네. 눈 좀 붙이고 있어 봐, 촬영 시간 가까워지면 알려 줄 테니까.”

“네…….”

인혁을 챙기느라 현장에 남은 석관의 지시에 따라 차에서 재이를 기다리고 있던 홍정수가 말했다. 재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트에 등을 묻었다.

“다들 푹 자고 오라고 하시니, 뭐…….”

나야 땡큐지.

재이는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기분 탓인지 왠지 진짜 푹 잘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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