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여우를 찾습니다
“*거기, 여우 소년. 혹시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 없어?”
“아…….”
자신을 돌아본 재이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 말을 걸어온 중년 남자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과 함께 ‘난 무해한 사람이야’라고 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말했다.
“*어어,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나 수상한 사람 아니라고. 아, 내 첫마디가 너무 수상해 보였다고? 하하하, 미안 미안. 그렇지만 이건 이곳 맨해튼의 스카우터에게는 암호와도 같은 관용구라고. 오히려 이런 말로 시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은 사기꾼이거나 이 바닥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풋내기거나 룰도 모르는 얼치기거나, 요 셋 중의 하나이니까 그런 사람을 만나면 대답하는 대신 우선 주변을 둘러보고 눈에 띄는 경찰에게 신고부터 하라구, 꼬맹이.”
마침 가까이서 순찰 중이던 제복 경찰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남자가 말했다.
‘…음, 사기꾼, 풋내기, 얼치기밖에 못 알아듣겠는데.’
재이가 대답 대신 눈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남자가 손을 휘휘 저어 보이며 이어 말했다.
“*아아, 혹시 내가 꼬맹이라고 한 게 마음에 안 들었어? 미안 미안. 아무리 네가 신비스러운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이미 반세기 이상을 산 나보다는 어릴 거라고 확신한다고. 이건 내 수년간의 경험으로 다져진 스카우터로서의 감이 보증하지. 아주 만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네가 나보다 나이가 많다면, 어이쿠 이거 실례.
그렇지만 역시 그렇다고 해도 너에 대한 나의 첫 질문은 변하지 않을 거야. 우린 아주 대단한 비즈니스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백만장자가 되어 보고 싶지 않아? 나랑 함께라면 저 어퍼이스트사이드에 늘어선 초고급 맨션의 최상층 펜트하우스도 꿈은 아닐걸.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 내 손을 거쳐 간 거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네가 들으면 깜짝 놀랄걸. 너무 놀라 기절했다가 내일 아침쯤에야 겨우 깨어날 만한 거물들이 수두룩하단 말이지.”
입에 모터라도 단 듯 속사포로 쏟아 내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재이가 짧게 툭 내뱉었다.
“*나, 못해. 영어.”
간결한 그 한마디에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아까 사람들이랑 웃고 떠드는 거 다 봤는데 이게 어디서 약을 치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를 똑바로 마주 보며 재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다고요. 유명해지고 싶다는 애들 꾀어서 나쁜 짓 하고 그러시는 분 아니죠. 설마? 사기꾼 중에 가장 위험한 부류가 겉으로 보기에 선량해 보이는 사람들이라던데 아저씨가 딱 그 타입인 거 같아서요. 아 근데, 정말 전문 사기꾼이시다면 진지하게 컨셉을 바꿔 보시는 걸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조금 전 수작은 너무 뻔해서 경계심 많은 사람은 애초에 아저씨랑 말을 섞기 싫어할 거고 호기심이 경계심을 이기는 사람들도 아저씨 말이 너무 길어서 결국 도망갈 것 같다고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재이의 우리말에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재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와우.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그거 애석하네요.”
재이가 쿨하게 고개를 돌리며 남은 생수를 들이켰다. 그런 재이를 잠시 쳐다보고 서 있던 남자가 아까와는 조금 다른 태도로 말했다.
“*이봐, 내가 초면에 실례가 많았지? 미안-. ‘미앙함미다.’”
“응? 한국어 할 줄 아세요?”
“초큼. 조큼.”
“*내가 한국인인 줄은 어떻게 아시고.”
“*초면에 한국인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화는 안내. 근데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물으면 사람들 얼굴이 이렇게 될 때가 있지.”
남자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도끼눈을 떠 보였다. 그래, 뭐. 나름의 영업 비법이라 이건가 보네.
“*저는 아저씨 제안, 관심 없는데요.”
“*왜지? 너한테서는 스타가 될 아우라가 보여. 스카우터로서의 내 감이 막 꿈틀대고 있다고. 내 감이 말하건대, 너는 분명 크게 될 거야. 아까 네가 부스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봤어. 그 우스꽝스러운 여우 가면을 쓰고도 그런 흡인력이라니,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드러내 놓고 췄다면 이 센트럴파크가 온통 네 솔로 콘서트장이 되었을걸.”
이 아저씨는 말하면서 점점 자기 말에 자기가 취하는 성격인가 봐.
황홀하다는 듯이 먼 곳을 응시하며 이야기하는 남자의 모습을 쳐다보던 재이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저씨, 표현이 조금 낡았다는 소리 듣지 않나요?”
“*그러나 클래스는 영원한 법이지, 브로.”
뭔가 핀트가 좀 어긋난 것 같은데.
더 이상 눈앞의 남자와 노닥거리는 데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아진 재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라와 약속했던 휴식 시간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부스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재이의 모습에 남자가 당황한 듯 허둥대며 말했다.
“*어어? 진짜 관심 없는 거야? 자 일단, 여기 내 명함. 이거 진짜라고.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명함이 아니라니까.”
제발 받아 둬, 받아 둬. 버리면 안 돼! 알았지?
억지로 쥐여 주는 것에 손안을 쳐다보자 삼류 같은 남자의 품행과는 정반대로 심플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의 명함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Astronaut Records
‘처음 보는데?’
재이는 별 감흥 없다는 듯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여우 가면을 고쳐 썼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애가 탄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아이고, 나 참. 이봐, 이봐, 여우. 그럼 내가 너희 부스를 찍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재이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얼굴도 가렸겠다 그 정도는 별로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보스가 오케이 하면.”
남자가 ‘yes!’라고 외치는 게 눈에 들어왔지만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이래 봬도 현역 가수인데 길거리 캐스팅이라니. 대체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거야, 슬퍼해야 하는 거야.’
재이는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행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오늘 정말 수고 많았어. 여기 일당.”
“*고마워, 보스.”
사라가 건네주는 일당을 받아 그 자리에서 세어 보며 재이가 꾸벅했다. 캔버스 완판 보너스로 30달러 더 넣었다고 하는 말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미소를 짓는 재이를 쳐다보던 사라가 입을 열었다.
“*근데 너 진짜 그냥 여행객 맞아? 사무국 직원들이 너보고 아이돌 누구 닮았다고 하던데.”
“*그래? 그거 영광인데.”
시간마다 각 부스의 현황을 확인하고 돌아다니던 사무국 직원들이 자신을 힐끔거리고 쳐다보던 것을 떠올린 재이가 뜨끔한 속내와 달리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재이의 얼굴을 빤히 살피던 사라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어 말했다.
“*하긴, 잘나가는 아이돌이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이 땡볕에서 여우 가면 쓰고 시급 20달러에 목매고 있진 않겠지.”
“*하하 잘나가는 아이돌 아니어도 그 소리는 좀 상처인데.”
재이가 일당이 담긴 소중한 돈 봉투를 잘 집어넣고 오늘 완성한 작품들이 놓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둘 다 보내 줘?”
사라가 묻는 말에 재이는 오늘 직접 그린 두 개의 그림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이것만. 나머지는 사라가 처리해 줘.”
“*왜, 난 이것도 마음에 드는데.”
사라가 두 점의 그림 중 재이가 고르지 않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Abyss: 심연]을 들으며 그린 그림은 소용돌이치는 검은 페인팅에 가려진 붉은 색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그건 두고 보기엔 좀 섬뜩하잖아. 이게 좋아.”
“*하긴, 집에 걸 거라면 그게 낫긴 하지.”
사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는 것에 재이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끝까지 잘 그렸다는 칭찬은 안 해 주네.”
“*하루 붓 잡아 본 정도로 프로 아티스트를 넘볼 거면 다시 태어나는 정도의 수고는 하고 와야 하지 않겠어?”
“*하하, 가차 없네.”
그럴 줄 알았다며 웃는 재이를 바라보던 사라가 짧게 내뱉었다.
“*뭐, 그래도 아주 볼품없진 않아.”
“*그것참 고마워?”
캔버스의 후처리가 완성되는 대로 그림을 보내 주기로 한 사라에게 자신이 머무는 숙소의 주소를 알려주자 ‘어렴풋이 예상은 했었지만, 완전 부잣집 도련님이잖아’라며 그녀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해명해 봐야 말만 길어질 것 같은 느낌에, 착각을 바로잡아 주는 대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재이에게 사라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도 인연인데. 사진이나 한 장 같이 찍을까?”
“*음. 원랜 NG지만, 보스라서 특별히 봐 주는 거야.”
“*되게 비싸게 구네. 누가 보면 진짜 아이돌인 줄 알겠어.”
오늘 하루 대활약한 여우 가면을 가운데 들고 익살맞은 포즈로 사라와 사진을 찍은 재이가 그녀의 핀잔에 웃으며 대꾸했다.
“*원한다면 그림에 사인도 해 줄게.”
“*하하하, 그래그래. 그러던가.”
매직펜을 건네는 사라에게 캔버스 뒤에 사인한 재이는 경쾌한 걸음으로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 * *
- 미쳐, 한재이. 그래서 거기까지 가서 굳이 알바를 했다고?
핸드폰 화면 너머 익숙한 연습실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얼굴을 들이민 다섯 명 중 엠케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에 배 깔고 누워 포도를 따 먹던 재이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알바만 했게? 길거리 캐스팅도 당했다고. 알겠냐, 이 몸이 바로 해외에서도 먹히는 얼굴이다. 이 말씀이야.”
재이의 말에 멤버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 가면 쓰고 있었다며.
-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데뷔까지 한 가수로서 거기선 자존심 상해야 하는 포인트 아니냐.
- 한재이 향상심 어디로 갔어?
인혁과 엠케이, 남궁찬이 차례차례 내뱉는 말에 재이가 턱을 추켜세우며 코웃음을 치자 그 모습을 본 이환이 투덜거렸다.
- 휴가 보내 놨더니 아주 팔자 늘어졌네. 누군 이 시간까지 땀 뻘뻘 흘리면서 안무 연습 하느라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인데.
“자, 이환아, 이 악물고 따라 해 봐. ‘부러우면 지는 거다.’”
- 부러… 어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꾸준히 얄밉지?
자신의 말에도 타격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태연하게 받아치는 재이의 모습에 이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 컨디션은 어때? 괜찮아?
“어, 문제없어.”
인혁이 묻는 말에 대답하는 재이를 유심히 보고 있던 남궁찬이 끼어들었다.
- 문제없으면 그만 놀고 얼른 와. 요새 이 바닥, 잠깐 안 보이면 바로 묻히는 거 알지?
“누가 그러던데,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 와 한재이 데뷔 2년도 채 안 된 주제에 자기가 자기보고 클래스라고 하는 거야 지금?
재이의 말에 남궁찬이 기가 찬다는 듯 엠케이와 은규를 돌아보며 말했다.
- 이게 인터넷 타면 바로 인성 까이는 건데. 안타깝다. 누가 녹화 안 했냐, 지금 거.
- 한재이가 그룹 탈퇴하고 화가로 전향하고 싶다고 하면 방금 그걸로 협박하자.
- 아냐 그쪽 바닥은 괴짜 천재 이런 게 더 먹히는 동네라 오히려 역효과일 수도 있어.
진지한 얼굴로 의논을 시작한 세 사람의 옆에서 듣고 있던 이환이 코웃음을 치며 한마디 툭 내뱉었다.
- 괜찮아, 아까 보니까 그쪽으로는 가도 별 가망 없어 보이더라.
그러자 재이가 굳이 사진까지 찍어 보낸 자작 그림을 떠올린 세 사람의 얼굴에 급 화색이 돌았다.
- 그러네. 한 화백 작풍이 너무 난해해.
- 맞아, 그 알바 보스도 그랬다잖아. 죽었다 깨어나는 게 빠를 거라고.
-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한재이, 그래도 그나마 아이돌 한재이는 좀 봐 줄 만하니 딴생각 말고 그냥 너 잘하는 거나 해라.
“어휴 시끄러워. 나 이제 저녁 먹기 전까지 다시 잘 거야. 수고들 해라.”
재이가 느긋하게 손을 흔들자 멤버들이 뭐라 뭐라 아우성치는 것이 보였다. 이환이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화면 너머 이쪽을 향해 던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통화가 끝났다. 핸드폰을 사이드 테이블에 던져 놓고 기지개를 켜던 재이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하루 종일 숙소에서 뒹굴어서인지 한 것도 없는데 또 졸음이 쏟아졌다.
“으음. 저녁에 스테이크 사 주신댔는데…….”
오늘은 엠케이의 아버지와 저녁 식사를 하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때 맞춰 드리려고 멤버들과 머리를 맞대고 엄선한 ‘엠케이 무보정 오프샷 세트’도 챙겨서 꺼내놓은 상태였다. 재이는 힐끗 시계를 확인했다.
‘두 시간 정도는 더 자도 되겠네.’
계산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수마가 덮쳐 왔다.
.
.
.
- 잘하고 있어.
‘……뭐?’
- 조금만 더 버텨 봐.
‘넌 어쩌고.’
- 말했잖아. 난 이미 만족한다고.
‘네 인생이잖아.’
- 네 인생이기도 해.
‘넌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거야?’
- 아직도 모르겠어?
‘뭘?’
캄캄하게 텅 비어 있던 어둠 속이 온갖 색으로 뒤죽박죽 엉켜 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 속으로 빨려들기라도 하듯 목소리가 차츰 멀어져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곧 너고
“……네가 곧 나야.”
헉.
재이는 문득 들려온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천장의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잠꼬대하다가 깬 모양이었다. 분명 푹신한 침대에서 편하게 자고 일어났음에도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축축 늘어졌다.
또다.
종방연 날 잠에서 깼을 때 느꼈던 그 느낌.
땀으로 푹 젖은 티셔츠가 기분 나쁘게 몸에 들러붙는 느낌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던 재이는 침대 옆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을 깨닫고 흠칫했다.
“깼어? 잘 자는 것 같아서 그냥 뒀더니 꿈자리가 좋지 않았나, 혹시?”
침대 옆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앉아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엠케이의 아버지 김명우였다. 재이가 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언제 오셨어요?”
“조금 아까. 아무리 벨 누르고 전화해 봐도 안 나오길래 스페어키로 열고 들어와 봤더니 별 탈 없이 자는 것 같길래 그냥 뒀다.”
그렇게 꿈자리가 안 좋은 줄 알았으면 깨워 줄 걸 그랬나 보네.
김명우가 미안한 듯 덧붙인 말에 왠지 모르게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느낌에 왠지 어색해진 재이가 화제를 돌렸다.
“저녁 식사는…….”
“오늘은 늦어서 안 될 것 같고. 내일 가던가 하자.”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쉬러 왔으니 푹 쉬는 게 우선이지.”
“그래도.”
“그렇게 죄송할 것 같으면.”
웃어른과의 약속을 자느라 펑크냈다는 생각에 자괴감에 빠져 인상을 찌푸리는 재이에게 괜찮다고 다독이던 김명우가 문득 하던 말을 멈추고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이거나 좀 더 내놔 보던가.”
김명우가 흔들어 보이는 것의 정체를 확인한 재이가 그제야 잔뜩 찌푸렸던 인상을 풀며 픽 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며 재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김명우의 손에 들린 것은 그에게 선물하기 위해 파티가 엄선한 ‘엠케이 무보정 오프샷 세트’였기 때문이었다.
* * *
며칠 후.
인터넷 대형 포털사이트들에 일제히 광고 하나가 게재되었다.
>>>Finding the Fox<<< (여우를 찾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팝 아티스트들이 대거 소속되어 있는 유니버설 뮤직 산하 신생 레이블 Astronaut Records에서 내건 묘한 구인 광고에 네티즌을 비롯한 일반 대중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링크를 타고 들어가자 하나의 영상 클립이 자동 재생 되었다.
여우 가면을 쓴 동양인 소년이 공원에 울려 퍼지는 음악에 맞춰 신난 듯 몸을 흔들며 캔버스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제 그림을 그리다가도 어느샌가 구경 중이던 꼬맹이에게 붓을 쥐여 주고는 다른 손을 잡고 보폭을 맞춰 스텝을 밟으며 비어 있는 캔버스로 유도하기도 하고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썩이고 있던 젊은 관객에게 손짓해 그와 즉흥 댄스 배틀을 벌이기도 했다.
푸르름이 피어나는 싱그러운 숲속에서 자신의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여우 소년의 모습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듯 신비로운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Finding the Fox<<< (여우를 찾습니다)
>>>자신이 이 영상 속 여우 소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부디 저희에게 연락 바랍니다.
>>>메일: [email protected]
홈페이지에는 간결한 글귀와 연락처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다른 레이블들에 비해 역사가 짧을 뿐 이미 몇몇 팝 아티스트들의 데뷔 앨범을 성공적으로 런칭시키면서 인지도를 빠르게 쌓아 올리고 있는 곳이었다. 모체인 유니버설 뮤직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레이블인 만큼 그 존재감은 여타 대형 레이블에 밀릴 바가 아니었다. 그 아스트로넛에서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려고 한다는 소식은 국내외의 여론을 서서히 달구기 시작했다.
- 누구든 저 여우 가면 사 들고 찾아가서 그게 바로 나라고 우기면 되는 거 아니냐
- 나 해 볼까? 찾아보니까 저 가면 아마존에서 3달러면 사던데
- 영상 속 여우 소년만큼 출 수 있다면 인정
- 당장 비보잉 하는 놈들 중에 저것보다 잘 추는 놈들 널리고 깔렸는데 춤이 문제는 아니지
- 영상 보니까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던데
- 그것만으로 신인 영입을 한다고? 아스트로넛 너무 무모한 거 아님?
- 영입이라고 누가 그래? 그냥 연락 바란다고만 적혀 있잖아
- 아 그럼 그냥 만나 보기만 하려고 수백 달러 들여서 저 광고를 때린 거라고? 제정신이냐?
- 아무튼, 현대판 신데렐라 찾기인 건 분명한 듯
그리고 그 신데렐라는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재이야, 설마 너……. …아니지?”
픽처스와의 회의에 동행하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온 기획 5팀 심진우 팀장이 팔짱을 낀 채 재이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