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어차피 언젠가는 넘을 산
“*…어쩐지, 너무 빛나더라고.”
“*언제는 갈고닦으면 빛날 거라더니.”
데이브가 중얼거리는 말에 한쪽에서 팔짱을 낀 채 듣고 있던 사라가 이죽였다. 데이브가 그런 사라를 힐끔 째려보고는 맞은편에 앉은 여우 소년, 아니 한국의 현역 가수 한재이와 그의 담당 매니지먼트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미스터 심, 심진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라의 아틀리에 한쪽에 있는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다시 인사를 나눈 여우 소년이 자신을 한국의 아이돌이라 밝힌 것에 다급히 인터넷을 확인해 보니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올해 초 음악 전문 잡지 팝 매거진에 게재되어 케이팝 아티스트들의 유치에 관심 있는 레이블들 사이에서 꽤 회자하였던 ‘케이팝의 세대교체’라는 기획 기사 에서 심도 있게 다뤄졌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아니 그 악마 같은 어비스랑 저 재기발랄한 여우 녀석이 같은 인물인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냐고.’
팝 매거진에 실렸던 것은 [Abyss: 심연] 중 재비스로 메이크업한 재이의 사진이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인상에 사람을 홀리는 마력을 뿜는 듯한 안광의 붉은 눈이 인상적이었던 사진 속 주인공이 지금 제 앞에서 회사 직원의 눈치를 보면서도 버터크림과 바나나 토핑이 가득 얹힌 초콜릿 컵케이크를 꿋꿋하게 모두 다 먹어 치우고 있는 저 소년과 동일 인물 이라니.
“재이야, 너 휴가라고 너무 먹는 거 아니냐.”
“남궁찬하고 약속했거든요. 뉴욕 가면 대신 먹부림 부려 주기로 . 아 맞다, 먹기 전에 인증샷 찍어야 하는데 깜박했네.”
그 약속 혹시 네가 일방적으로 한 건 아니고?
자세히는 몰라도 남궁찬이 먼저 제안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 약속을 들먹이며 보기만 해도 달아 보이는 아기 머리통만 한 크기의 컵케이크를 야무지게 먹어 치우는 재이를 보며 심진우가 중얼거렸다.
“*근데 내가 누군지는 언제 알아챈 거야? 분명 헤어질 때까지는 모르는 눈치였는데.”
테이블 위에 사라가 손님 접대용으로 꺼내놓은 컵케이크 중 다른 맛을 하나 더 집어 올리며 재이가 사라에게 물었다.
“*광고 올라온 날 아침에 사무국에서 전화 받고 알았지. 그때 너 아이돌 같다고 했던 우리 직원이 저치네 회사에서 올린 광고 속 영상 보고 심증을 굳혔던 모양이야.”
“*알고 나서도 줄곧 모르는 척해 주기 힘들었을 텐데, 의리 지켜 줘서 고마워.”
재이가 사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감사의 말을 했다. 그 직접적이고 솔직한 인사에 사라가 멋쩍은 듯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말해 주면 좀 찔리는데. 솔직히 이쪽은 이쪽대로 여러 가지 계산 끝에 한 행동이라.”
“*아무 생각 없이 의리만 지킨 것보다는 오히려 믿을 만한걸 .”
사라의 말에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재이가 대답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본 재이가 이어 말했다.
“*감사의 뜻으로 내가 그린 나머지 두 점도 모두 사라에게 넘길게. 알아서 처리해 줘.”
아마추어가 그린 거라 값어치가 얼마나 할지는 모르겠지만.
재이가 말과 함께 웃으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재이를 만나게 되면 자신에게 그림을 양도해 줄 수 없냐고 물으려던 참이던 사라는 자신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먼저 말을 꺼낸 재이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스트로넛 레코드가 내건 Finding the Fox의 영상 속 여우 소년이 주는 신비로운 이미지 덕분인지, 사라의 아틀리에에는 이미 그가 그린 그림을 구입하고 싶다는 문의가 여럿 도착해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유튜버나 미디어의 취재 협조 요청에 적당히 응하면서 그가 그린 그림에 대한 가치를 부풀려 온 사라 자신의 노력도 일조했다고 볼 수 있었다. 여우 소년이 유명세를 타면 탈수록 그가 그린 그림의 가치 또한 순조롭게 상승 중이었다.
‘예술성은 몰라도 화제성 하나는 확실하니까.’
프로인 자신이 보기에는 물론 군데군데 엉성하고 어설픈 그림들이었지만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그린 이의 독특한 개성이 느껴지는 그림들이었다. 필드가 다르다고는 해도 벌써 제 나라에서 한 끗발 날리는 아티스트라서 그런지, 재이의 그림들은 이미 그 자신만의 느낌을 내고 있었다.
게다가 이 그림들에는 센트럴 파크의 봄날 인간들의 축제를 즐기러 온 여우 소년이 그렸다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스토리’가 존재했다. 서사는 사물을 특별하게 한다. 아틀리에를 찾는 손님들도, 인터뷰를 요청한 유튜버들도 이 ‘특별한’ 그림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했다.
거리 쪽으로 난 창가에 걸어 두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광고가 될 것이었다. 혹은 문의해 온 사람 중 누군가에게 비싼 값을 매겨 팔 수도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라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 재이가 그린 그림들이 갖고 싶었다.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사라에게 그가 먼저 건넨 말은 그야말로 목마른 자에게 물을 건넨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라가 재이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본 심진우가 능청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웨일스 씨께서 소장하고 계신 작품 중에 우리 회사에서 관심 있는 것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대략 세 점 정도.
심진우가 말과 함께 세 손가락을 펴 보이며 웃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사라가 헛웃음과 함께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재이 쪽을 바라보았다.
“*이거 내가 여우에 단단히 홀린 기분인데.”
“*이런 거로 퉁치려고 한다고 화라도 내면 어쩌나 했더니.”
웃으며 대꾸하는 재이에게 사라가 뭐라고 덧붙이려 입을 여는 찰나, 데이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세 점 모두 여우네 회사에 팔려는 건 아니겠지?”
“*왜, 관심 있어?”
사라의 물음에 데이브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없다면 거짓말이지. 비딩을 할 거라면 우리도 끼워 달라고 .”
“*적극적이네.”
“*소극적으로 나섰다가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지금.”
혼잣말처럼 투덜거리는 데이브를 돌아본 재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게 제가 처음부터 그랬잖아요. 관심 없다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스카우터는 세상에 없을걸.”
재이와 데이브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심진우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
“*아, 잠깐, 잠깐만!!”
“…… ?”
심진우를 황급히 가로막는 데이브의 말에 심진우뿐 아니라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품들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던 사라까지 모두가 그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깨달은 데이브가 윙크와 함께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봐 , 여기도 곧 최종 보스가 도착할 예정이니까.”
“*… 그 말은.”
똑또독 똑똑.
데이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리기라도 한 듯 사라의 아틀리에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Speak of the devil.”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데이브가 씩 웃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지금 문을 두드린 사람이 누구인지 눈치챈 사라가 달려가 문을 열었다.
“*와우, 진짜 조이 키넌이잖아!”
안으로 들어서는 인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사라가 흥분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조이가 들어오자마자 누가 따라 들어올세라 사라가 재빨리 다시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는 실내에 들어선 조이와 그를 맞이하는 데이브, 그리고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는 재이와 심진우를 차례차례 둘러보았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사라가 중얼거린 말에 데이브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우주여행사가 그토록 찾던 여우와 조우하는 장면이지.”
“*이거 유튜브로 생중계하면 짭짤하게 벌리겠는데.”
“*뭐?”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사라에게 데이브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하하, 놀라기는. 그냥 해 본 말이야. 난 이미 보수도 두둑이 챙겼는걸,”
그런 데이브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사라가 웃으며 턱짓으로 벽에 세워 둔 캔버스들을 가리키며 웃어 보이고는 실내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주요 인물 들은 모두 등장한 모양이니 서로 얘기들 나눠. 난 하던 작업이나 계속할 테니까.”
사라가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자 새삼 재이를 위아래로 훑어본 키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가워, 여우. 아니, 재이.”
“*저도 반갑습니다.”
“*케이엠의 심진우라고 합니다.”
신기하다는 듯 재미있다는 듯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재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키넌의 태도에 재이가 짧게 인사하자 심진우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아, 케이엠. 내 여우를 먼저 발견하신 분이구나.”
키넌의 말에 재이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거, 소유격을 이상한 데다 붙이시는 분이네.’
재이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심진우가 사무적인 얼굴로 대꾸했다.
“*재이를 찾는다고 해서 같이 왔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저희도 좀 파악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심진우의 말에 키넌이 빙글 웃으며 말했다.
“*원랜 여우를 만나면 설득할 자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얘기가 좀 길어지겠는데요?”
“*괜찮습니다. 저희 쪽은 이미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난 상태라.”
“*오, 이미 케이엠 내부에서 사전 조율 을 해 주신 건가요. 이거 감사한데요.”
키넌이 고맙다는 제스처 를 하자 심진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글쎄 감사의 인사를 받기는 조금 이를 것 같은데.”
기대하시는 그런 게 아닐 것 같아서.
심진우가 딱하다는 듯 키넌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 * *
“*아직도 회의 중이야?”
아틀리에 한쪽에 딸린 작업 공간에서 한참 작업 중이던 사라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휴게실 쪽에서 나오는 데이브의 피곤한 얼굴을 바라보고는 물었다.
“*어 배고파 죽겠어. 이 주변에 뭐 도넛 가게라도 없나?”
“*혹시라도 저 문 열고 나갈 생각 하지 마. 원래 붙어 있던 유튜버들에 조이가 달고 온 파파라치들까지 밖에 지금 온통 난리인 것 같으니까.”
주린 배를 쓸어 보이며 출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데이브에게 화들짝 놀라 그를 만류하는 사라의 말에 데이브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그럼 집에 갈 땐 어떡하라고.”
“*뒤쪽에 옆 건물하고 연결되어 있는 비상구 있으니 그쪽으로 빠져나가면 돼.”
“*대체 아틀리에에 왜 그런 게 있는 거야?”
“*그게 사실, 이 건물 주인이 자기 부인 몰래 두 집 살림 하려고 만들어 둔 건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데이브의 질문에 신이 난 얼굴로 자신의 아틀리에에 비밀 통로 가 생긴 경위를 설명하려던 사라는 퍼뜩 정신을 가다듬고는 데이브에게 되물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길어지고 있는 건데? 여우 만나면 당장 올가미에 걸어서 계약하려고 온 거 아니었어?”
사라의 노골적인 표현이 불편했던 듯 데이브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게 얘기하니까 우리가 꼭 무슨 악역 같잖아.”
“*자유롭게 놀고 사라지려던 녀석을 광고 때려부어서 결국 제 발로 나타날 때까지 압박한 거 보면 악역 맞지 뭐.”
메인스트림에 대한 아티스트 특유의 반항심 가득한 눈빛으로 데이브를 쳐다보며 코웃음 치는 사라에게 데이브가 말했다.
“*너무 그렇게까지 몰아세우지 말라고. 나나 조이나 여우의 매력과 가능성에 순수하게 감탄한 건 사실이니까.”
애초에 그러지 않았다면 돈 쏟아부어 가며 이렇게까지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거고.
데이브의 말에서 느껴지는 일말의 진심에 조금 누그러진 사라가 팔짱을 끼고 있던 어깨에 힘을 풀며 물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어…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
.
.
.
“*안 해요.”
재이의 짧은 한마디에 키넌의 눈썹이 꿈틀했다.
여우의 정체가 이미 데뷔까지 한 아이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깔끔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던 키넌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봐, 여우. 그러지 말고 다시 잘 생각…….”
“*다시 생각해 봐도 대답은 마찬가지예요. 그 조건이면 안 한다고요.”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냉정하게 잘라 말하는 재이의 대답에 답답해진 키넌은 슬쩍 재이의 옆에 앉은 심진우를 쳐다보았다. 실질적인 협의는 자신과 심진우가 하게 되리라 생각했던 자신의 예상과 달리 협상 테이블의 전면에 앉은 것은 여우 녀석 본인이었다.
심진우는 그런 여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작게 한국어로 뭐라 속삭이는 것 외에는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자신과 여우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을 뿐이었다.
‘애를 아주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모양이네. 아니면 아예 통제가 불가능한 건가. 어느 쪽이건 매니지먼트가 길게 보지를 못하는 모양인데.’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따로없군.
키넌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한번 재이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길게 보라구. 알고 있겠지만 이 세계는 냉정한 거야. 사적인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
“*조이야말로 뭘 모르네요.”
“*뭐?”
“*저를 위한 조건이라면서 정작 제가 원하는 조건은 무시하고 있잖아요.”
“*그건.”
재이의 지적에 말문이 막힌 키넌이 머뭇거렸다.
“*진심으로 저를 조이가 말한 대로 ‘동등한 파트너’로 대우해 줄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까지 밀어붙이지도 않았겠죠.”
“*그건……. 그치만 이 기회를 놓치면 너한테도 좋지 않을 텐데.”
“*저보다 조이가 더 아쉬울 거라는 점만은 분명하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이 당당했다. 어린 녀석이 정에 이끌려 오기를 부린다고 생각했는데. 이쪽을 꿰뚫어 보는 듯 빤히 쳐다보는 저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왠지 마음 한쪽이 불편했다.
애초에, 녀석의 말대로 베풀어 주겠다는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본국에서 이미 아이돌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니, 개인 계약으로 3장의 앨범을 내고 프로모션을 돌 동안 그 수익의 일부를 케이엠과 나누고, 본국에서의 그룹 활동에 제약을 걸지 않겠다는 나름 파격적인 조건을 건 것도 그런 생각의 발로였다. 물론 결과가 좋아 프로모션을 빵빵하게 돌게 될 경우 본국에서 그룹으로 활동할 시간이 남아 있을지는 의문이었으나 그것까지야 이쪽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많이 봐준 건데 말이지.
“*이 정도면 많이 봐준 거라고 생각하고 있죠, 지금?”
키넌이 흠칫 놀라 상념에서 벗어나 눈앞의 녀석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여전히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빛으로 이쪽을 주시한 채 재이가 입을 열었다.
“*조이의 입장은 이해해요. 저에 대한 투자를 결정한 것만으로도 이미 위험을 감수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말이죠.”
차분한 어조로 재이가 말을 이었다. 투박한 영어였지만 알아듣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외국에서 살다 온 적도 없다면서 저렇게까지 괜찮은 영어라니.
‘저 정도라면 가사를 소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프로모션에도 문제가 없겠어.’
키넌은 역시 욕심나는 녀석이라는 생각에 내심 입맛을 다셨다.
“*근데 말이죠. 조이가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뭔데?”
키넌이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재이에게 물었다.
“*이 타이밍이 아니어도 저는 상관없다는 점이요.”
“*… 뭐?”
얼빠진 얼굴로 되묻는 키넌에게 재이가 씩 웃었다. 가면으로도 감출 수 없었던, 키넌 그 자신이 매료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가면 속 정체를 찾아 뛰게 했던 그 매력적인 아우라가 눈앞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재이의 모습에 키넌이 잠시 넋이 나간 듯 그를 쳐다보는 사이 재이가 이어 말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넘을 산이거든요. 굳이 조이가 내밀어 준 손을 잡지 않아도.”
‘우리’의 힘으로.
재이가 덧붙인 말에 키넌이 할 말을 잃은 채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