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소문의 밸런스 브레이커
* * *
말은 없고 일만 많았던 미국행을 끝내고 돌아온 재이를 포함해 간만에 멤버 여섯이 모두 숙소 거실에 모였다. 각자 편한 자세로 드러눕거나 소파 혹은 안마 의자에 기대앉아 그간 있었던 일들을 맥락 없이 떠들던 중 재이의 픽처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엠케이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근데 한재이 이번에 미국 다녀온 거 진짜 약간 그런 느낌 아니냐.”
“어떤?”
엠케이의 말에 도도님을 배 위에 얹고 거실 바닥에 누워 있던 남궁찬이 시선만 위쪽으로 돌려 안마 의자에 앉아 있는 엠케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거 있잖아. 하기 전에 생각했던 건 이건데 실제로 한 건 그거랑 전혀 다른 거.”
“아하, 그거.”
남궁찬이 금세 알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자 엠케이가 운을 띄웠다.
“우리가 생각했던 한재이의 미국 휴가는?”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기.”
“근데 실제로 한재이가 하고 온 건?”
“시급 20달러에 하루 종일 바깥에서 춤추면서 호객 행위 해야 하는 극한 알바.”
엠케이와 남궁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멤버들이 하나둘씩 가세하기 시작했다.
“유명 팝가수 겸 제작자랑 술래잡기.”
“그분 뮤비 콜라보레이션.”
이환의 말에 인혁이 덧붙이자 은규가 가세했다.
“우리 라디오 전화 인터뷰.”
“즉흥곡 하랬더니 마인드 컨트롤에 관한 노하우 대방출?”
은규의 말을 이환이 받고 인혁이 또 하나 덧붙였다.
“붉머용 애니메이션 진척 상황 확인.”
“하는 김에 픽처스 집행팀 접수.”
그리고 엠케이가 신난듯 끼어드는 것을 보고 있던 남궁찬이 하나 더 생각났다는 듯 말을 보탰다.
“거기에 파티 엘릭서 품질 관리까지.”
남궁찬이 덧붙인 말에 재이와 엠케이를 제외한 멤버들 사이에서 와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 한재이 열일했네. 열일했어.”
“끝도 없이 나오네 아주. 듣는 것만으로도 기 빨리는 기분이야.”
“왠지 마지막이 제일 중요했던 것 같기도 해.”
이환과 은규, 그리고 남궁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씩 하자 엠케이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쉬러 간 게 아니라 결국 일하러 간 거였잖아.”
“우리랑 별다른 바 없는 하드 스케줄 뛰고 온 것처럼 보이는 건 내 기분 탓이냐고.”
엠케이의 말에 인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리자 남궁찬과 이환이 다시 이죽이며 말했다.
“그 와중에 픽처스 접수하고 온 거 너무 한재이스럽고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라고 안 새겠냐.”
그러자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은규가 재이를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저런, 한재이 너는 이참에 차인혁한테 수도꼭지 잠그는 법 좀 배워 둬라.”
그 말에 멤버들이 와르르 웃음을 쏟아 냈다. 남궁찬의 배 위에 자리 잡고 누워 있던 도도님이 들썩이는 깔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작게 갸르릉거리고는 재이의 무릎 위로 자리를 옮겼다. 재이가 그런 도도님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멤버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이 몸이 그렇게 이역만리 타국에서 원기옥을 끌어모으고 있는 동안 우리 파티원들께서는 뭘 하고 계셨다고?”
나보다 일 안 한 놈은 내일부터 배달 도시락인 거 알지?
재이의 서늘한 말에 왁자지껄 시끄럽던 실내에 일순 침묵이 돌았다.
“어, 그게. 뭐 일단 곡 작업은 끝났으니까. 라이브 연습 죽도록 하는 중이지.”
“안무도 새로 다 다듬었고. 계속 연습 빡세게 해서 몸이 기억하게 때려 넣는 것만 남았지.”
“프로모션 스케줄도 확정됐으니까 나중에 보여 줄게. 아마 석관이 형이 다시 얘기해 주긴 할 것 같지만.”
은규와 엠케이, 인혁이 차례차례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던 재이가 말했다.
“그럼 나만 따라잡으면 문제 없는 거네?”
그 말투에서 ‘나보다 먼저 연습 시작한 너희들이 실수하는 꼴은 용납 못 한다’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한 기분에 목덜미가 서늘해진 남궁찬이 다급히 말했다.
“워워, 한재이 진정해. 미국에서 ‘쉬고’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애초에 이 모든 일이 네 컨디션 조절하자고 시작됐다는 걸 잊지 말라고.”
“그치, 그래서 컨디션은 이제 좀 어떤데? 아직도 악몽 꾸고 그래?”
엠케이의 말에 맞장구친 인혁이 자신을 돌아보며 묻는 말에 재이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것저것 일이 많았다고는 해도 그동안 숨 막히게 몰아쳤던 한국에서의 스케줄과 달리 조금 여유로웠던 덕분인지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재이의 수면 트러블은 조금 나아진 듯한 느낌이었다. 여러 가지 기억이 뒤죽박죽 뒤섞이며 녹아내리는 듯한 꿈을 꾸는 횟수도 줄었다. 꿈을 꾸고 난 뒤 온몸이 축축 늘어지는 감각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버틸 만했다.
‘횟수가 줄어들었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서로에게 섞여 들었다는 뜻인가.’
“뭐야, 아직도 안 좋은 거야 혹시?”
재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멤버들 중 엠케이가 더 못 참겠다는 듯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나머지 멤버들이 걱정스럽다는 듯 수군대기 시작했다.
“거봐, 그러게 미국까지 가서 그렇게 일만 하고 올 일이냐고.”
“역시 누가 따라갔어야 했어. 한재이 저거 옆에서 말리는 사람이 없어서 더 폭주하고 온 거라니까, 분명.”
“저게 저렇게 심각한 일중독일 줄 누가 알았겠냐고.”
“안 되겠다, 아무래도 석관이 형하고 다시 얘기 좀 해 봐야겠다.”
인혁이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찾아 꺼내 드는 것을 본 재이가 그제야 놀라 다급히 말했다.
“아니야. 나 괜찮아. 전보다 훨씬 컨디션 좋다고.”
“…한재이 폼 많이 죽었네. 약 파는 솜씨가 예전만 못 해.”
“그러게. 그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냐고.”
못 믿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멤버들을 둘러본 재이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진짜라니까. 아 근데 이건 나라고 뭐 어떻게 증명할 방법이 없잖냐.”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살피려는 듯 재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엠케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래.”
“산이 형님 아직도 연락 없냐? 그래도 형님이 봐 주실 땐 좀 괜찮은 것 같더만.”
“그 인간 한 번 전화 온 것 같았는데 못 받음.”
“어휴, 한재이 진짜.”
은규가 생각났다는 듯 묻는 말에 재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하는 것을 듣고 있던 인혁이 미간에 깊게 주름을 잡은 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뭐. 그럼 일단 당분간은 상황 봐 가면서 움직일 수밖에 없지 싶은데.”
그 말에 재이의 얼굴이 조금 풀리는 것을 보고 엠케이가 툭 내뱉었다.
“그래 우리가 그만큼 한재이 배려해 주면 되지 뭐.”
“배려라니 그게 무슨…….”
쓸데없는 말이야, 라고 하려던 재이는 남궁찬이 덧붙인 말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안무도 빼앗고.”
“…….”
재이의 표정을 힐끔 살핀 이환과 은규가 차례차례 덧붙였다.
“파트도 빼앗고.”
“섭외도 빼앗고.”
“완벽하네.”
마지막으로 엠케이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희가 이러는 거 보니까 내가 진짜 현실로 돌아왔구나 싶긴 하다.”
“웰컴투더파티.”
“예아.”
재이가 중얼거린 말에 멤버들이 한마디씩 거들며 숙소는 다시 왁자지껄 시끄러운 분위기로 돌아갔다.
* * *
“시차 적응하자마자 넣은 스케줄이 이거라니, 푹 쉬게 하겠다던 말은 역시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달리는 차 안.
뉴욕의 노란 택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승차감을 자랑하는 엘릭서 표 고급 밴의 가죽 시트에 몸을 묻은 채 재이가 중얼거린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은규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쉬라고 큰맘 먹고 떼 놓았을 때 좀 쉬고 오지 그랬냐고.”
“아니 그러니까 그건 불가항력이었다니까.”
재이가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투덜대자 다른 쪽에 앉아 있던 이환이 끼어들었다.
“누굴 탓하겠냐, 일 욕심을 못 버린 본인 스스로를 탓해야지.”
세 사람은 지금 인혁이 기다리고 있는 촬영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재이가 쉬는 동안 인혁은 새로운 예능에 준 레귤러로 출연 중이었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엠티플래너].
한때 엠티촌으로 유명했던 곳의 민박집 하나를 개조해 전직 운동선수, 셰프, 가수, 배우, 퇴역 군인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엠티 플래너’들이 의뢰인들에게 숙식과 함께 그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엠티 스케줄과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취지의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재이와 이환, 은규, 일명 파티의 보컬 라인은 코앞으로 다가온 컴백의 사전 홍보를 위해 [엠티플래너]의 출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셋이서만 예능 나가는 건 거의 처음 아닌가?”
“하긴. 엉클박 선생님 요리 프로 나갔을 때는 다른 멤버들도 다 같이 있었고, 뉴욕에서 재이가 우리 라디오에 나왔던 건 엄밀히 말하면 같이 나온 게 아니라 전화 연결이었으니까.”
재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은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난 그룹 활동 말고 한재이랑 스케줄 뛰는 거 처음임.”
이환이 끼어들며 이어 말했다.
“그러니 이번엔 내 차례다, 한재이 버프.”
“그게 무슨 소리야?”
이환이 중얼거린 말에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은규가 대신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랑 스케줄 뛰면 버프 받는다는 게 학계의 정설인데. 몰랐단 말이야? 그것 때문에 이환 쟤가 이거 보컬 라인으로 스케줄 잡혔다는 소리 들었을 때부터 얼마나 학수고대를 했는데.”
“그런 걸 믿는다고? 농담이겠지.”
은규의 설명에 재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고 이환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흐흐흐, 한재이 너는 이제 그냥 순순히 나에게 기만 빨려 주면 되는 거야.”
“뭐라는 거야, 대체.”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리는 재이에게 이환이 발끈해서 외쳤다.
“아 왜 뭐. 두고 봐라 내가 떠서 한재이 포지션에서 밀어내고 승승장구할 테니까.”
“제발 그날이 빨리 좀 왔으면 좋겠다.”
“으아아! 타도하자, 한재이! 쟁취하자, 센터좌!”
“얼씨구.”
건성으로 대꾸하는 재이의 태도에 이환이 새삼 더 발끈하고 그런 이환을 보며 또 재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답하면서 불에 기름을 붓고 있는 사이, 세 사람을 태운 차는 도심부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엠티촌으로 진입했다.
* * *
“진짜 들이받아도 돼요?”
출연진들이 기다리고 있는 산 중턱의 엠티하우스로 올라가기 전, 아래쪽 주차장까지 마중 나와 있던 담당 피디와 작가에게 오늘 촬영에 들어가기 전 비밀 지령에 대해 듣고 있던 재이가 재차 확인해야겠다는 듯 제작진을 둘러보며 물었다.
“어, 지금껏 예능에서 보여 준 재이 씨 이미지가 강단 있고 영리한 느낌이니까 엠티하우스 운영진들하고 대립각을 세워 주는 게 보는 재미가 살 것 같거든.”
담당 피디의 설명에 재이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편집 거치면 저만 밉상캐로 찍히기 딱 좋은 거 아닌가요.”
“어휴 지금 재이 씨 상대로 악편하는 건 제 무덤 파는 짓이나 똑같은걸. 프로그램 말아먹고 싶지 않고서야 내가 그럴 리가 있나. 인혁 씨 봐서라도 편집 잘해 줄 테니까 오늘 맛깔나게만 살려 달라고.”
담당 피디의 의중을 떠보듯 잠시 그를 쳐다본 재이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출연진분들도 알고 계세요?”
“인혁 씨한테는 사전에 귀띔해 놓은 상태고. 나머지 셋은.”
몰라야 재밌지 않겠어?
담당 피디가 짓궂게 웃으며 눈을 빛내는 것을 바라보며 재이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왜 예능 피디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다들 능구렁이 같은 인상들인 걸까.’
그 능구렁이들을 휘어잡고 있는 장본인인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피디님이랑 작가님만 믿고 갑니다. 저 밉상캐 되지 않게 해 주셔야 돼요?”
혹시라도 삐끗하면 편집에 당한 거라고 우겨야지.
내심 중얼거리며 자신의 대답에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피디와 작가를 쳐다보고 있는 재이에게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반쯤 구경 중이던 이환이 슬쩍 귓가에 대고 물었다.
“야, 근데 굳이 연기할 거 있어?”
“뭐?”
“그냥 너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거잖아.”
“하아, 이환 너.”
눈치 없이 남의 영업 비밀을 다 까발리면 어떻게 해.
자신과 은규에게만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리는 재이의 말에 이환과 은규가 뒤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어? 저기, 저기 오는 거 아니야?”
엠티하우스 로비에서 다른 출연자들과 함께 오늘 올 게스트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인혁은 누군가가 외친 소리에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각자 자신의 짐을 챙겨 들고 산길을 오르느라 낑낑대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서 안 도와줘도 돼?”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서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묻는 셰프 한진섭의 말에 인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창밖 너머 엠티하우스 입구에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서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윤섭이 형이랑 리키 형이 자기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저는 절대 나서지 말라던데요.”
박윤섭은 전직 용병 출신이라는 이색 경력을 지닌 예능인, 리키는 인기몰이 중인 코미디언이었다. 두 사람은 이번 게스트가 차인혁이 속한 그룹의 멤버들이라는 소리에 초특급 게스트를 위한 플랜으로 모시겠다며 의욕에 가득 차 있는 중이었다.
“스케줄 완전 빡세 보이던데, 괜찮겠어?”
“저야 뭐.”
“아니, 너희 그룹 분들 말이야.”
“아, 쟤네요.”
인혁이 창밖으로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재이와 은규, 이환의 모습을 힐끔 쳐다보고는 심드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히려 두 분이 걱정인데요.”
저 중에 잘못 건드리면 터지는 게 하나 있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인혁의 말에 한진섭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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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의 보컬 라인 여러분, 엠티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재이와 은규, 그리고 이환은 박윤섭의 환영사에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했다.
“저희 엠티 하우스에서는 손님들께 딱 들어맞는 맞춤형 스케줄을 제공하고 그 진행을 도와드림으로써 여러분이 알차고 뜻깊은 엠티를 즐기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저희 전문가 집단이 작성한 스케줄은 다음과 같습니다.”
박윤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키가 스케줄이 적힌 종이를 재이와 은규, 이환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다.
“어, 질문해도 되나요?”
스케줄이 적힌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던 재이가 손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네, 한재이 씨, 질문하세요.”
“혹시 이거 엠티 프로그램이 아니라 군대 체험 프로그램인건가요?”
이 정도면 훈련소 뺑뺑이 수준 같은데.
이어진 재이의 혼잣말에 군대도 안 갔다 온 게 어디서 아는 척이냐는 표정이 된 박윤섭이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눈썹을 팍 찌푸린 박윤섭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재이가 짧게 말했다.
“저희 보컬 라인 단합대회 하러 온 거지 전지훈련 온 거 아닌데요.”
“야, 한재이.”
은규가 재이의 소매를 붙잡고 흔들며 작게 속삭였다. 카메라 앞에서 게스트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대놓고 들이받을 줄 몰랐던 박윤섭의 얼굴이 순간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 여러분께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무언가를 저희가 보고…….”
“아침 구보, 암벽 등반, 산악 러닝, 전투 체조, 이런 게요?”
“어… 그건 여러분 이제 곧 컴백이라시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게 체력 단련이라는 판단에…….”
보다 못한 리키가 끼어들어서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재이가 딱 잘라 말했다.
“체력은 평소에 쌓아야지 하루 이틀 한다고 단련이 되나요.”
힘만 빠지지.
재이의 말에 박윤섭과 리키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후… 이런 걸 기대하고 온 게 아닌데 말이죠.”
처음 봤을 때의 당당한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재이를 비롯한 게스트 세 사람 앞에 두 손을 맞잡고 서 있는 박윤섭과 리키를 바라보던 재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재이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떠는 것을 카메라 너머 모니터로 들여다보고 있던 담당 피디가 감탄과 함께 내심 중얼거렸다.
‘와, 촬영 시작한 지 10분 만에 끝내 버리네, 아주.’
이 정도면 밸런스 계산부터 다시 해야겠는데.
담당 피디가 옆에 서 있던 작가와 눈빛을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