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피리 부는 사나이
“그럼, 이제 시험을 시작해 볼까?”
느긋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씩 웃어 보이는 재이의 눈동자와 마주한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뭐, 뭔데 뭘 시키려고.’
맨 뒷줄에 선 선겸은 두근대는 마음으로 목을 길게 빼고 앞쪽을 쳐다보았다.
탁. 탁. 탁.
규칙적인 소리가 어느새 조용해진 스튜디오 안에 울려 퍼졌다. 한 손에 피리를 쥔 재이가 다른 쪽 손바닥을 가볍게 내리치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하나씩 천천히 살피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저 한 번 쓱 훑어보고 지나갈 뿐인데 재이의 시선을 받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긴장으로 등을 바짝 곧추세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거 뭔가 익숙한데.’
어느샌가 숨 막힐 듯 차오른 긴장감에 목덜미가 뻐근해짐을 느끼며 선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익숙한 느낌.
이건 마치…….
‘연습생 때 월말 평가 받는 기분이잖아.’
벌써 몇 년 전인지 까마득하지만, 몸이 먼저 기억하고 반응하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때의 기억.
그 익숙한 감각에 선겸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귀찮은데 한 번에 갈까 하는데 어때?”
정말 귀찮다는 듯 길게 늘어선 줄을 한 번 휘 둘러본 재이가 중얼거린 말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외쳤다.
“몇 명 뽑을 건데! …요?”
“기준이 뭐죠?”
“1렙은 경력 인정 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경로 우대는 없나요!”
“이거 선착순 아니었어요!?”
“재재님, 사랑해요, 팬이에요!”
조금 전까지 긴장한 표정으로 굳어 있던 사람들이 아까와 같은 녀석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앞다투어 손을 들고 외쳐 대기 시작했다. 단독 샷이 어려우면 음성만이라도 들어가야겠다는 듯 앞다투어 아무 말이나 외쳐 대는 지원자들을 힐끗 바라본 재이가 말했다.
“방법은 간단해. 지금부터 제시하는 곡에 맞춰서 자신을 어필해 봐. 마음에 들면 뽑고 아니면 말고.”
우와 이게 바로 한재이식 독재…….
선겸은 인혁에게 말로만 들었던 한재이식 독재 정치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며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탄압이 취미고 횡포가 특기라더니. 진짜였잖아.
선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흥미진진하다는 듯, 딱하다는 듯 제각각의 표정으로 자신들을 구경하고 있는 파티 멤버들 사이의 인혁을 힐끗 돌아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시작한다?”
선겸이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지원자들의 앞에 서 있던 재이가 짧게 내뱉음과 동시에 들고 있던 피리를 입에 가져갔다.
“어? 뭐야?”
“MR이 아니라?”
“헐?”
당연히 소품이라고 생각했던 피리를 입에 가져다 대는 재이의 모습에 당황한 사람들이 웅성대는 사이 재이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어? 이건…….’
낯선 피리 소리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박자에 선겸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듯 잠시 당황했던 녀석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재이의 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오-!!”
“하하하.”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린 선겸은 한쪽에서 구경 중이던 파티 멤버들이 자기들끼리 웃으면서 재이의 피리 소리에 맞춰 작게 리듬을 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분명 어디서 들어본 곡인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억의 끝자락을 잡아채기 위해 선겸이 잠시 멈칫한 사이, 누군가가 피리를 불고 있는 재이의 앞에 나서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앗, 황재민!”
“아앗!”
“알았다! 이거 파티 신곡이잖아!”
“뭐였지?”
“아 그거 뭔가, 불어였는데, 아닌가 영언가?”
“생각났다, 세라비!”
RS6의 황재민이 재이의 피리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나머지 대기자들이 앞다투어 몰려나가 그를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활동 시기가 맞물려 있는 만큼 듣기 싫어도 듣게 되고 보기 싫어도 보게 되는 탓에 하이라이트 구간은 처음 춰 보는 동작임에도 자신들의 곡만큼이나 익숙한 느낌이었다.
놀러 온 듯 느슨해 보여도 아이돌 시장이라는 무한 경쟁의 레드오션에서 지금껏 살아남아 이 자리까지 올라온 프로들답게 지원자들은 금세 능숙한 동작으로 몸을 흔들며 재이의 피리 소리에 따라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인생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지
자, 이제 툭툭 털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C'est la vie
C'est la vie
C'est la vie
피리 소리에 맞춰 후렴구를 따라 부르며 C'est la vie를 외치며 각자 포즈를 잡는 모습을 VJ들이 열심히 화면에 담고 있었다. 처음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머뭇대던 몇몇도 C'est la vie 구절이 반복될수록 흥이 오르는 듯 혼자 혹은 여럿이 함께 색다른 포즈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며 어느새 스튜디오는 C'est la vie를 외치는 목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와,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야.’
피리 소리가 멎은 뒤로도 좀처럼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후렴구를 되풀이하며 흥에 젖어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선겸이 중얼거렸다. 한바탕 웃으며 춤을 추고 나니 그때까지 은연중에 서로에게 갖고 있던 어색함이 싹 다 날아가 버린 듯 가슴 속이 후련했다.
‘영리하네, 한재이.’
붉은 피리를 한 손에 든 채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재이를 쳐다보며 선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장 오늘도 음원과 음방 성적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 중인 타 그룹 멤버들에게 대놓고 자신들의 신곡을 따라 부르고 춤까지 추게 만들다니.
거부감이 들 만도 한데 얼결에 다 같이 어울려서 춤추고 놀다 보니 신기하게도 그냥 별생각 없이 재미있었다. 그 노골적임에도 밉지 않은 텃세에 선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지금 저 모습은.
“영락없이 피리 부는 사나이잖아…….”
붉은 피리를 한 손에 든 채 자신을 비롯해 대기 줄에 줄지어 서 있는 지원자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재이를 바라보며 선겸이 중얼거렸다.
“진짜, 저거 무슨 요술 피리 아님?”
“색깔도 빨간 게 딱 봐도 범상찮음.”
“나 얘네 노래 나올 때마다 넘겼는데.”
“아까 보니까 제일 신나서 추시던데요.”
“그러니까. 하, 인생.”
“C'est la vie!”
선겸의 혼잣말을 들은 다른 지원자들이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그리고 그런 지원자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피던 재이가 들고 있던 피리로 탁, 하고 손뼉을 쳤다. 시끌시끌하던 주변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재민 씨랑 선겸 선배.”
합격이니 불합격이니 하는 군더더기 없이 재이가 짧게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처음부터 한재이 바라기이던 재민이 신난다는 듯 포즈를 취해 보였다.
“예쓰!”
“와, 우리 리더 신난 거 봐라.”
“지금 우릴 두고 혼자 간택 받았다고 저렇게 신난 거야?”
“와, 이 몰아치는 배신감.”
탈락한 지원자 중 RS6의 멤버들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자, 혹시 법사파티에 관심 있는 분 없어요?”
“힐러파티! 다른 건 몰라도 목숨만은 보장합니다!”
“단독 샷 받고 싶으신 분? 주사위 흔들 기회를 노리신다면 격투가 파티로 오세요!”
김 샜다는 듯 흩어지는 사람들 틈에서 이때다 싶어 아직 멤버를 충원하지 못한 다른 파티 멤버들이 자기들의 파티를 홍보하며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난 뒤 셋만 남은 자리에서 재이가 선겸과 황재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소문 들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미리 말해 두자면.”
어… 시작부터 어째 불안한데.
첫마디부터 분위기를 잡고 들어가는 재이의 말에 선겸과 황재민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슬쩍 눈을 찌푸렸다. 그런 그들을 잠시 살핀 재이가 이어 말했다.
“여긴 음유 역할이 좀 달라.”
“…아, 왠지 알 것 같지만 알고 싶지 않은 이 기분.”
“어떻게 다른데… 요?”
재이의 말에 뭔가 알 것 같다는 듯 옆에서 머리를 쥐어 싸매는 황재민을 힐끗 쳐다본 선겸이 물었다. 선겸이 묻는 말에 그의 얼굴을 잠깐 들여다본 재이가 이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그로 전문이거든.”
…저기요. 파티에서 음유시인이란 원래 힐링과 지원을 담당하며 쉬어 가는 포지션 아니었나요.
당당한 표정으로 씩 웃으며 대답하는 재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선겸이 어이없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PART.Y의 액션형 TRPG: 어느 날 차에서 내렸더니]
EP3: 아이돌이 세 팀이면 세계를 구한다.
미션: 제한된 시간 내에 보스몹을 찾아 처치하고 차원을 소멸에서 구하라.
- 여러분은 지금 멸망이 초읽기에 들어간 세계에 들어와 버렸습니다. 차원의 소멸이 시작되기 전에 보스몹을 찾아 해치우고 그가 가진 차원의 시계를 리셋하여 이 세계를 멸망에서 구해 주세요.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 판정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10면체 주사위 두 개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00-90의 두 자릿수, 하나는 0-9의 한 자릿수로 만들어진 주사위 두 개를 굴려 1-100의 숫자를 산출하는 방식입니다. 앞뒤 모두 0이 뜨면 100으로 환산하는 방식이죠. 주사위의 숫자가 자신의 능력치보다 낮으면 성공, 높으면 실패를 의미합니다. 성공 시에는 각자가 가진 스킬을 쓸 수 있지만 실패했을 경우 페널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서포터 RS6 여러분은 플레이어의 장비 강화를 도울 수 있습니다. 6면체 주사위 하나를 던져 나오는 숫자가 클수록 강화 효과가 커집니다. 물론 실패 시 페널티가 붙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세요.
- 길잡이 더블헥사곤 여러분은 각 파티의 길 안내를 맡습니다. 색이 다른 6면체 주사위 세 개를 던져서 좌, 우, 정면의 방향을 정하게 됩니다. 세 주사위가 모두 같은 숫자가 나올 경우 트랩에 빠진 것으로 간주하니 주의하세요.
GM을 맡은 윤효민 실장의 설명이 이어지자 더블헥사곤의 몇몇이 머리를 쥐어 싸매며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세 줄 요약이 절실하다.”
그러자 RS6의 막내 최열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냥 대충 눈치껏 따라 하면 돼요.”
“와, 최열 지난번엔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머리 쥐어 싸매고 울더니? 같은 사람 맞아?”
최열의 말에 그 말을 듣고 있던 이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외쳤다.
“누가 그래 울었다고! 나 안 울었거든?!”
“아 시끄러워, 그래, 알았다. 뚝.”
“어휴, 파티 진짜 하나같이 밉상…….”
“너보다 형이거든? 야 남궁찬, 뭐 하냐, 너희 파티원 좀 데려가.”
이환의 말에 남궁찬이 최열을 끌고 가 구석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리 와, 최열. 너는 여기 와서 이거나 끼고 있어.”
“헉. 나, 나는 이런 거 필요 없어!”
“어째서지, 너의 그 시원한 기럭지랑 아주 잘 어울리는데, 왜. 이거 봐라, 응?”
남궁찬이 최열에게 건넨 것은 첫 레이드에서 획득했던 레어템 냥 장갑이었다. 다른 멤버들보다 훌쩍 큰 키의 소유자들이 하나는 허리께에 범꼬리를 늘어뜨리고 하나는 앙증맞은 고양이 장갑을 끼고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본 다른 멤버들이 와르르 웃으며 외쳤다.
“아하하, 야, 너희 둘 그러고 서 있으니까 진짜 잘 어울리긴 한다. 귀여움 폭발하는 장신즈, 참신하네.”
“격투가들 뭔데, 일단 시각적으로 후려치고 시작하는 거냐고. 리얼 직업의식 투철한 이 시대의 탱이로다!”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사람들 틈에서 이환이 자신의 파티원들에게 무언가를 분주하게 나눠주며 말했다.
“다들 잘 들어요. 누가 뭐래도 파티의 꽃은 법사라고. 그리고 법사 하면 역시 마법사 망토지. 오늘을 위해 내가 우리 담당 의상팀 팀장님하고 딜해서 비밀리에 제작해 둔 거라고.”
“아니 이환 저런 건 대체 언제 준비한 거래?”
“와, 역시 배신의 아이콘 이환. 혼자 튀려고 작정했네, 아주.”
자신의 파티원들에게 형형색색의 보자기 망토를 나눠 주는 이환에게 엠케이와 은규가 야유를 보냈다. 그런 그들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법사파티는 저런 것도 주나 보네.”
“헐, 실화냐. 법사파티 복지 무엇?”
“아니 근데 딱히 별로 입고 싶은 생각은 안 드는데.”
“입고 싶고 아니고보다, 저 정성이 중요한 거 아님?”
“하긴, 그건 그래.”
“이봐 대장, 우린 뭐 없어?”
더블헥사곤 멤버 중 하나가 앞에 서서 이환의 마법사 파티를 구경하고 있던 엠케이를 향해 외쳤다.
‘와, 이환 이 배신자 두고 보자. 덕분에 괜히 성의 없는 놈 취급받게 생겼잖아.’
눈으로 속에 있는 온갖 험한 말을 쏟아부으며 이환 쪽을 쳐다보던 엠케이가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싱긋 웃어 보이고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괜찮아, 필요하면 뺏어 오면 되니까.”
잊었어? 여기 도둑파티잖아.
엠케이의 뒤에 선 멤버들이 오오오, 하고 환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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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깐, 잠깐만.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건 나뿐이야? 어째서 탱들 다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제일 먼저 뛰쳐나가? 어글 튀어서 죽을 일 있냐고.”
주사위를 던져 진행 방향을 잡으라는 GM의 말에 얼결에 주사위를 받아 들고 흔들던 선겸이 퍼뜩 놀라 주변을 들러보고는 다급하게 외쳤다. 탱커 포지션의 남궁찬과 인혁, 그리고 엠케이가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탱커가 셋이나 되는데 음유가 선봉을 잡는다고?
이거 나만 이상해?
선겸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재이 쪽을 쳐다보았다. 선겸의 시선이 자신에게 가 멎은 것을 느낀 재이가 특유의 그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내가 제일 잘하거든.”
하여간에 저 입.
뒤에서 파티의 탱커 셋이 동시에 한숨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