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북의 달인
“도장 깨기?”
“뭘 깨?”
남궁찬이 던진 말에 이환과 엠케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남궁찬이 자꾸 재이 쪽을 힐끔거리는 것을 눈치챈 인혁이 눈썹을 찌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남궁찬 자꾸 한재이 힐끔거리는 게 뭔가 불길한데.”
그 말을 들은 엠케이가 얼굴을 팍 찡그리며 남궁찬에게 말했다.
“아서라, 한재이한테 뭘 시키려는지 몰라도 그냥 놔둬. 저거 나가서 돌아다니면 일만 주워 오는 거 모르냐.”
그러자 남궁찬이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화들짝 놀라 외쳤다.
“그건 안 될 말이지. 여기까지 왔는데 일만 하다가 갈 수는 없다고!”
녀석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환이 다급하게 재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 되겠다, 한재이, 너는 어디 나갈 생각 하지 말고 여기 누워서 잠이나 자라.”
“남궁찬 저리 비켜 봐. 재이야, 여기 누워, 어서 누워.”
남궁찬이 드러누워 있는 쪽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은규가 재빨리 일어나 그를 밀쳐 내고는 소파에 앉아 있던 재이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당겼다.
“아 왜들 이래, 내가 뭘 어쨌다고.”
자신의 소매를 잡아끄는 은규의 성화에 못 이겨 얼결에 침대 위에 걸터앉은 재이의 다리를 들어 억지로 침대에 눕히며 이환이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안 했지. 아직은 말이야.”
“그래, 지금 잘하고 있어. 이 페이스대로 우리 한국 갈 때까지 쭉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제발.”
이환과 은규가 재이의 어깨를 밀어 기어코 침대에 눕히는 것을 본 엠케이가 냉큼 옆 침대에서 이불까지 끌어와 꼭꼭 덮어 주며 주문이라도 외우듯 중얼거렸다.
“아니 근데 진짜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려고 했더니 아주 끝을 모르네.”
“으악.”
“엄마야.”
“아이고.”
이대로 있다간 자장가라도 부를 기세인 녀석들을 밀쳐 내며 벌떡 일어나 앉는 재이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이환과 은규, 그리고 엠케이가 화들짝 놀라 뒤로 나가떨어졌다.
“야, 한재이!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어떡해! 그러다가 누구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너희들 장단 맞춰 주다가 내가 질식사하게 생겼잖아.”
뒤로 나가떨어져 엉덩방아를 찧고는 분한 듯 버럭하던 이환이 자신을 돌아보며 싸늘하게 내뱉는 재이의 말에 움찔 목을 움츠렸다. 재이에게 덤볐다가 본전도 못 뽑고 있는 세 녀석을 재밌다는 듯 구경하고 있던 남궁찬에게 인혁이 물었다.
“그래서, 저 성질 더러운 녀석하고 뭘 깨러 가고 싶은 건데?”
성질 더러운, 이라니…….
나직이 중얼거리며 이번엔 저걸 들이받을까 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재이의 시선을 애써 모르는 척 외면한 인혁이 어서 대답하라는 듯 남궁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인혁에 이어 다섯 명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남궁찬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사실 별거 아니긴 한데…….”
* * *
도쿄 도내 모 게임센터.
“네, 여러분은 지금 남궁찬 씨의 게임센터 도장 깨기의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인혁이 한껏 흥이 올라 들썩이는 남궁찬의 등짝을 카메라에 담으며 말했다.
게임센터 도장 깨기를 하고 싶다는 남궁찬의 말에 석관은 잠시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이라면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지만, 일본이라면 아직 대낮에 잠깐 길거리를 걷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였다.
앞으로 해외 진출이 본격화된다면 이마저도 못 누릴 사치임을 잘 알고 있는 석관은 딴 데로 새지 말고 딱 거기만 다녀오라는 당부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매니저 홍정수의 동행을 조건으로 멤버들의 외출을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미리 장소도 다 파악해 뒀다며 의기양양하게 웃은 남궁찬을 따라 멤버들이 도착한 곳은 게임 마니아들의 성지 아키하바라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대형 게임센터였다.
평일 낮 시간이어서인지 중심부에서 살짝 빗겨 나간 위치 탓인지 게임센터 안은 예상외로 한산했다. 널찍한 실내에는 게임을 하러 온 사람보다 빽빽하게 들어선 게임기의 수가 더 많아 보였다. 남궁찬의 입이 귓가에 걸렸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남궁찬만큼은 아니더라도 모두 그럭저럭 게임을 즐기는 편인 파티의 멤버들은 순식간에 놀이동산에 온 아이들처럼 잔뜩 신이 나 게임센터 안으로 제각각 흩어졌다.
여섯 중 게임에 대한 애정도가 가장 낮은 인혁은 실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이제 만족했다는 듯 매니저 홍정수와 몇 마디 주고받은 후 아직 게임에 한창인 멤버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뭐야, 설마 지금 찍고 있는 거야?”
“차CTV.”
마침 대전게임에서 남궁찬과 맞붙었던 엠케이가 게임 오버라는 화면 속 메시지에 짧게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인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한국에 있는 팬들이 자신들의 소식에 목말라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인혁은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이 일본에서 지낸 시간을 팬들과 나누고 싶었다.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인혁의 반응에 엠케이가 재빨리 좀 전까지 찌푸리고 있던 표정을 풀며 카메라를 향해 외쳤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와, 리더가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대서 깜짝 놀랐네요.”
조금 전 게임에서 남궁찬에게 그야말로 뼈도 못 추리고 연전연패를 한 뒤 의기소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던 녀석과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기발랄한 목소리였다.
엠케이가 말을 이었다.
“리더가 어디까지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지금 도쿄 모처의 게임센터에 와 있습니다. 이 녀석이 오자고 해서 왔는데.”
엠케이가 자신의 옆에 앉아 게임에 집중하느라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 신들린 듯한 손놀림으로 조이스틱과 키패드를 움직이고 있는 남궁찬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진짜 도장 깨기 할 생각인가 봐요. 저기 입구 보이시죠? 지금 저 입구에서부터 여기까지 게임기 하나하나씩 다 클리어하면서 오고 있는 중이라고요.”
독하죠? 안무 연습을 이렇게 좀 했으면…….
엠케이가 여전히 초집중 모드인 남궁찬의 옆얼굴을 쳐다보며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앗싸, 이겼다!! 보너스 게임!”
남궁찬의 환호와 함께 슬슬 끝나 가는 듯하던 게임이 보너스 스테이지로 돌입하는 것을 본 엠케이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인혁에게 물었다.
“다른 애들은?”
“글쎄. 찾으러 가 볼까.”
“그래, 이분은 혼자서도 잘 노시는 것 같으니 다른 애들 뭐 하고 있는지 구경 가자.”
엠케이와 인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머지 녀석들을 찾으러 게임센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오오오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엠케이와 인혁은 마침 들려온 탄성에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다. 어느 게임센터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북을 이용한 리듬 게임기 ‘북의 달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인혁과 엠케이는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와, 저게 되네?
-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데?
- *아니 분명히 외국인 같아 보였는데?
- *그럴 리가. 처음 해 보는 녀석이라기엔 리듬감이…….
- *사실은 드러머라던가 뭐 그런 거 아님??
- *직원이 따라다니는 거 보니까 VIP인가 본데?
- *게임센터에서 컨시어지 서비스를 한단 소리는 들어 본 적 없는데.
- *대체 정체가 뭐래?
뒤에 모인 구경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 너머로 낯익은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건.”
“쟤 저기서 뭐 하냐.”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의 끝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재이였다. 자신을 쳐다보며 수군대는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게임기 앞에 서서 다음 스테이지에서 플레이할 곡을 고르고 있던 재이가 인혁과 엠케이를 발견하고 짧게 내뱉었다.
“왔어?”
평소와 다름없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양손에 북채를 쥔 채 다음 곡을 고르는 데 여념이 없어 보이는 재이에게 인혁이 물었다.
“뭐 하냐.”
“리듬 게임.”
“혼자서?”
“그러게.”
언제나처럼 간결한 재이와 인혁의 대화를 보고 있던 엠케이가 끼어들었다.
“한재이가 신이 내린 발컨이지만 몸 쓰는 게임이면 또 말이 다르죠! 그래서 이번엔 리듬 게임을 때려 부수… 아니 리듬 게임 도장 깨기를 하고 있었나요!”
‘쟤 왜 저래?’라는 표정으로 엠케이를 돌아본 재이가 인혁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보고 알겠다는 듯 ‘아하’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 재이를 화면에 담으며 인혁이 물었다.
“그래서, 잘되어 가고 있어?”
“사실 온통 일본어라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서 헤매고 있었는데 여기 우리나라 직원분이 하나하나 설명해 주신 덕에 살았지.”
재이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게임센터 직원인 듯 보이는 사람 하나가 어설픈 영업용 스마일을 지으며 서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와, 한국분이세요? 여기서 일하시는 거예요?”
“아 네. 아르바이트…….”
“와 그렇구나. 얘가 뭐 문제 일으키고 그러진 않았죠?”
“아, 아뇨. 딱히 그런 건. 그냥 곡 고르고 그러는 거 좀 도와드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엠케이의 직접적인 질문에 당황한 아르바이트생이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대꾸했다.
“아, 곡 시작한다. 잠깐만.”
뭐라 더 대화를 나눌 새도 없이 다음 곡이 시작되자 재이가 고개를 돌려 게임기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두둥- 둥
두구두구두구두구 짝짝짝짝
- *오오오
- *이야, 이건 간만에 구경할 맛 나는데?
빠르게 쏟아지는 비트에도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여유롭게 북을 두드리는 재이의 손놀림에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미 극하드 모드의 최고난도로 진입한 화면에는 리듬을 표기하는 기호들이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냥 눈으로 좇기에만도 벅찬 기호들이 재이가 휘두르는 북채가 북을 울릴 때마다 하나도 빠짐없이 깨끗하게 터져 나가는 것에 구경꾼들이 홀린 듯 탄성을 흘렸다.
두구둥 탁 두구둥 탁 두구둥 탁
- *오오! 오오! 오오! 오오!
처음엔 혹시라도 재이의 플레이에 방해가 될까 소리를 죽이고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어느샌가 박자에 맞춰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그 소리에 별 관심 없이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까지 몰려든 탓에 한산한 게임센터 안에서도 이곳에만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하여간에 한재이 사람 끌어모으는 데는 귀신같지, 아주.”
“아무래도 피리 부는 사나이의 진화형이 북 치는 사나이인가보다.”
몰려든 구경꾼들 틈에 서서 재이의 현란한 퍼포먼스를 보고 있던 엠케이와 인혁이 차례차례 중얼거렸다.
* * *
“*저 사람 괜찮아 보이지 않아?”
칸토TV 심야 프로그램 [밤이나 새볼까]의 막내 피디 야마노 죠이치는 무거운 핸디캠을 추어올리며 옆에 선 로케파트너이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프로그램의 수드라급 막내 작가 사이토 노노카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프로그램에 들어갈 [거리에서 만난 특이한 사람]이라는 주제에 맞는 길거리 인터뷰 대상을 찾아 세 시간 째 아키하바라 주변을 배회하는 중이었다.
외국인 오타쿠나 메이드, 코스프레족 같은, 이미 대중화된 타입의 오타쿠 인터뷰 정도로는 까다로워진 대중의 입맛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어지간한 소재를 가져갔다간 깐깐한 총괄 피디에게 잔소리 폭격만 얻어맞고 끝날 뿐임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섣불리 섭외 대상을 찾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별 기대 없이 들어온 게임센터에서 야마노의 눈길을 끈 것은 신들린 듯한 몸놀림으로 ‘북의 달인’이라는 리듬 게임을 격파 중인 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야마노와 함께 그 모습을 구경 중이던 사이토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그건 아닌데. 왠지 눈에 익지 않아, 저 사람?”
사이토의 물음에 야마노가 청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결국, 극하드 모드의 마지막 스테이지까지 클리어하는 데 성공한 듯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북채를 내려놓고 일행인 듯 보이는 사람들과 몇 마디 나누는 북의 달인을 한참 바라본 야마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일반인은 아닌 것 같지 않아? 일행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일반인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북의 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린 야마노가 사이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북의 달인도, 그 일행들도 일반인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J사 애들인가, 혹시?”
“*그렇다기엔 비율들이 너무 좋은데. …아!”
사이토가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쳤다. 그리고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야마노에게 외쳤다.
“*생각났어! 쟤네 그거잖아! 괴식보이즈!”
“*괴… 뭐?”
야마노가 고개를 갸웃하자 답답하다는 듯 사이토가 한숨과 함께 재빨리 대답했다.
“*괴식보이즈! 야마짱 TV도 안 봐? 세상 소식에 그렇게 둔해선 이 바닥에서 도태되기 쉽다고.”
“*같은 천민계급끼리 찍어 내리지 말자고. 그래서 쟤네가 누구라고?”
“*아 왜 있잖아. 코크라이스. 우리 프로그램에서도 한 번 나왔던.”
“*헐, 걔네 분명 한국 아이돌들이라고 하지 않았었어? 아이돌이 여기서 대체 뭐 하는 거래?”
구경꾼들이 하나둘 흩어지고,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다른 일행들을 찾는 듯 게임기 사이사이를 기웃거리고 있는 북의 달인을 쳐다보며 야마노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에 사이토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몰라 무슨 콘서트 때문에 왔다던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야마짱, 쟤네 잡아 와. 절대 섭외에 성공해야 해. 보아하니 지금 딱 오프인 것 같은데 어떻게든 인터뷰 따내라고. 안되면 그 앞에서 벗고 춤을 춰서라도 잡아 오라고.”
“*아니, 잠깐, 잠깐만.”
“*어서 빨리! 다른 데로 가 버리기 전에 잡아야 된다고! 이거 잡으면 당신이나 나나 수드라 탈출 확정이라니까!”
더 못 기다리겠다는 듯 다짜고짜 등을 떠미는 사이토의 성화에 못이긴 야마노가 주춤주춤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기…….”
머뭇대는 목소리를 들은 북의 달인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일반인하고는 다른 프로포션이 눈에 띄었다.
‘아이돌이라더니. 확실히 포스 있네.’
북의 달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야마노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호, 혹시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기분 탓인지 목이 바싹 말라 오는 느낌에 마른침을 삼키며 야마노가 최대한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