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수상한 낌새 (삽화 추가)
“그래, 정수야, 나 오늘 본부장님 회의라고 했… 뭐?”
석관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로 쏠렸다.
“애들은? …알았어, 일단 내가 내려갈 테니까 너는 애들 먼저 숙소로 돌려보내고. 혹시 모르니까 거기 같이 있어. 상황 확인되는 대로 연락할 테니까.”
무슨 일이길래.
심상치 않은 대화 내용에 여유롭던 회의실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응?”
“어?”
석관의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다른 직원들의 핸드폰이 뒤늦게 하나둘씩 진동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불길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내용을 살피는 사이,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석관이 상석에 앉아 있던 지원본부 맹주찬 이사와 기획본부 장태우 이사를 향해 말했다.
“로비에 걸어 뒀던 그림에 누가 해코지를 한 모양입니다.”
“그림?”
“뉴욕에서 가져온 그거 말인가?”
두 이사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재이가 뉴욕에서 그렸던 그림 세 점은 결국 여우 소년의 광팬인 조이 키넌과 그의 발굴자인 사라 웨일스, 그리고 케이엠에서 한 점씩 나눠 갖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림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뉴욕의 수집광들이 눈독 들일 만한 스토리에 유명인 프리미엄까지 붙은 덕에 그 화폐적 가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점이었다.
조이 키넌이 개인 소장용으로 꽁꽁 숨겨 버린 [Myself] 한 점을 제외하고 사라의 아틀리에에 걸려 있는 [Don’t mind]와 케이엠 본사에 걸려 있는 [Abyss]는 ‘여우 소년의 발자취’라는 낯간지러운 수식어와 함께 해외 미디어에 소개되며 한바탕 유명세를 치뤘다.
“밖에서는 거기까지 못 들어올 텐데?”
맹 이사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에 그때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기획팀의 심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안 팀장 말 들어 봐야 알 것 같지만 내부인 소행 같다는군요.”
부하직원이 보내온 사진을 맹 이사와 장 이사에게 보여주며 심진우가 말을 이었다.
“애초에 보시다시피 건물 유리 너머로 비스듬히 밖을 볼 수 없도록 걸어 둔지라 안쪽까지 들어오지 않고서야 손을 대려야 댈 수가 없는 구조거든요.”
그림은 길가 쪽에 접해 있는 쇼윈도가 아닌 건물 안쪽 로비에 걸려 있었다. 기왕 거는 거 팬들을 비롯한 일반인들도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위치에 거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지금의 자리를 고집한 것이었다.
그랬는데.
.
.
.
“우연한 사고로 보기는 힘들겠는데.”
석관이 건물 안쪽 보안실로 옮겨진 그림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폭 1200mm 정도의 중형 캔버스 아래쪽이 날카로운 무언가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누가 발견한 거예요?”
석관의 옆에서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던 심진우가 물었다.
“하필 애들이 들어오다 발견했다네요. 오늘 굿즈 컨펌한다고 신나서 회사 들어오던 중에.”
“아.”
석관의 말에 심진우가 눈썹을 찌푸렸다.
“경찰은 뭐래요?”
석관의 물음에 옆에 서서 함께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던 보안 담당자가 대답했다.
“일단 사건 접수는 해 줬는데, 이 정도 가지고는 제대로 된 수사 인원을 할당받기는 힘들 거라고 하군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백번 양보해서 애들 신변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건 아직 심증밖에 없다고 쳐도, 단순히 따져 봐도 이게 얼마짜리 그림인데 그래도 인원 배당이 어렵다고 했다고요?”
“아시면서. 우리끼리 범인 찾는 게 더 빠를 겁니다.”
자신의 말에 못마땅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는 석관에게 보안 담당자가 이어 말했다.
“일단 시큐리티 업체 쪽에서 다시 한번 주변 감시 카메라 포함해서 확인하기로 했으니 연락 오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다만…….”
“다만 뭐죠?”
석관의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있던 심진우가 보안 담당자의 말을 재촉하듯 물었다.
“애초에 보안 카드 찍고 들어와야 하는 구역에서 일어난 일이라서. 아까 시큐리티 쪽 직원이 와서 둘러보고 하는 얘기가 로비 쪽 카메라는 처음부터 외부 침입에 대비해서 입구 쪽을 보게 설계되어 있으니까 내부자가 일부러 노리고 안에서부터 나와서 해코지를 한 거면 감시카메라엔 아마 안 잡혔을 거라고.”
“…허참.”
석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범인이 일을 냈을 때쯤의 시간대에 복도 쪽 카메라에 잡힌 사람들을 하나씩 다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렇죠. 시간 좀 걸리더라도 그게 제일 정확하긴 하죠.”
심진우의 말에 보안 담당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고는 이어 말했다.
“우선은 주변에 뭐 불만 있어 보이는 사람이나 원한 가질 만한 사람들 없었나 확인해 보세요.”
“원한 가질 만한 사람이라고요…….”
보안 담당자의 말에 김석관과 심진우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중얼거렸다.
* * *
“원한 살 만한 사람이요?”
“없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혹시나 해서.”
숙소 거실.
상황이 일단락된 것을 확인하고 굿즈 샘플들을 들고 숙소로 돌아온 석관이 묻는 말에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녀석들이 그 틈에 하나둘씩 끼어들며 말했다.
“한재이가 원한 살 만한 사람이 한둘이어야죠, 형.”
“그나마 우리 다섯은 같이 있었으니 우리 빼고 시작하는 게 어디야.”
“용의자 너무 많아서 다섯 빠진 거로는 티도 안 날듯.”
남궁찬이 물꼬를 트자 이환과 엠케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씩 보탰다.
“아무리 그래도 회사 로비에 걸려 있는 그림에 해코지할 정도면 보통 담이 아닌데.”
“원한이 그만큼 깊었다는 거 아님?”
“와 이거면 무서운데.”
멤버들이 이러쿵저러쿵 자기들끼리 쑥덕대는 가운데 은규가 문득 중얼거렸다.
“근데 그 그림이 한재이가 그린 거라는 걸 진짜 알고 그랬을까? 그냥 회사에 불만 있는 사람 짓일지도 모르잖아.”
그 말을 듣고 있던 남궁찬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 왜, 그거 조이 키넌하고 인터뷰한 거 터지고 나서 새삼 화제 몰이해서 그거 보겠다고 사람들 막 몰리고 그랬었잖아. 다른 덴 몰라도 우리 회사 직원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싶은데.”
“아, 그런가.”
은규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인혁이 입을 열었다.
“근데 한재이가 저래 봬도 의외로 어디 가서 사람 막 대하고 그러는 놈은 아닌데.”
인혁의 말에 잠시 조용해진 녀석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건 그래. 우리한테나 그러지 밖에서는 칼같은 깍듯한 놈인데.”
“너무 깍듯해서 가끔 막 가증스럽잖아.”
“맞아, 맞아.”
고개를 마구 끄덕이던 이환이 문득 중얼거렸다.
“원한으로 따지면 우리가 제일 많이 쌓였을 텐데 말이지.”
“그러게, 생각해 보니 억울하네. 우리도 참고 있는데 감히?”
“내 말이. 사람이 참을성이 그렇게 없어서야.”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대화를 이제 말리기도 귀찮다는 듯 무릎 위에 앉은 도도 님을 쓰다듬으며 녀석들이 떠드는 것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구경 중이던 재이에게 인혁이 말했다.
“이걸로 하나는 분명해졌네.”
“뭐가?”
인혁은 재이를 비롯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머지 멤버들을 둘러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범인은 진짜 한재이의 모습을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겁도 없이 그림을 찢었지.”
무슨 한이 어떻게 쌓였는지는 몰라도 아주 지옥행 특급 열차 아니냐고.
인혁이 혼잣말처럼 덧붙인 말에 멤버들이 하나둘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건 그래, 경찰은 포기해도 한재이는 지구 끝까지 찾아내 범인을 찾아낼 것 같은 그런 느낌인 거지.”
“그렇지, 그렇지. 내가 진짜 다른 녀석이 이런 일을 당했으면 걱정부터 됐을 텐데 왜 한재이는 걱정이 안 될까.”
“충고해 주고 싶다 막. 세상엔 건드려도 되는 사람과 건드려선 안 되는 사람이 있는 법인데 당신 지금 아주 크게 실수한 거라고.”
“잡히면 큰일나니까 얼른 자수해서 감방으로 도망치시라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멤버들의 수다에 재이가 질렸다는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석관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잡을 수는 있을 것 같대요?”
재이의 물음에 산만했던 멤버들의 이목이 석관에게 집중되었다. 석관이 얼굴을 찌푸리며 보안팀장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경찰의 수사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시 카메라의 시야각 바깥에서 벌어진 일이라 용의자를 추려 내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하더라는 석관의 말에 조금 전까지 여유롭게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던 멤버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니 뭐가 이렇게 허술해? 우리 회사 시큐리티가 이것밖에 안 됐어요, 원래?”
이환이 눈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림 쪽으로 감시카메라를 붙여 놓지 않았던 이상 시야각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긴 하지. 그보다, 그럼 누가 그런 것인지 이대로 영영 모르고 지나가 버릴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건 찜찜한데.
이환을 다독이면서 인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석관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것을 눈치챈 재이가 평소와 다름없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뭐, 저한테 직접 칼을 들이댄 것도 아닌데요, 뭐.”
“무슨 그런 섬뜩한 소리를.”
인혁이 질색을 하면서 재이를 흘겨보았다. 건물 내에서 일어났던 일인 만큼 쉽게 잡을 수 있겠거니, 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던 멤버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재이가 재차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걱정해 봐야 해결될 일도 아니고. 일단은 눈앞의 일부터 하자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느긋한 모습으로 한마디 한 재이는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여 석관이 가지고 온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재이를 바라보던 인혁이 말했다.
“네가 강심장이라 다행이긴 한데,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겠다.”
“그래, 범인 잡힐 때까지는 한재이 혼자 두지 말자고.”
“그러게. 혼자 뒀다가 범인 때려눕히기라도 하면 큰일 남.”
“그래. 우리가 꼭 붙어 있자.”
어느샌가 자신의 주변으로 몰려든 멤버들이 한마디씩 거드는 것에 재이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희들 아까부터 자꾸 묘하게 멕이는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이냐고.”
눈썹을 치켜뜨며 멤버들의 얼굴을 쓱 훑어보는 재이의 눈빛에 남궁찬이 눈치 좋게 상자를 뒤집어엎어 굿즈 샘플을 와르르 테이블 위로 쏟아 버리며 신경을 그쪽으로 돌렸다.
“와, 샘플들 봐. 완전 다양하다.”
“오, 여기 내가 만든 것도 있네? 와, 대박!”
남궁찬이 사탕 봉지를 들어 보이자 엠케이가 잡아채 안에 들어있던 사탕 하나를 꺼내서 가까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완성된 걸로 보니까 남궁찬, 네가 그렸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데?”
“그러게. 이건 그냥 사탕 가게 사장님이 금손이신 거 아님?”
멤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사탕을 하나씩 집어 들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작은 알갱이의 사탕에는 여섯 명의 캐릭터가 알록달록한 색깔로 특색있게 구현되어 있었다.
일본에 갔을 때 길거리에서 본 사탕 가게에서 고객이 주문한 그림대로 사탕을 조형해 오리지널 사탕을 만들어 주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남궁찬이 시험 삼아 그려 본 캐릭터로 주문했던 사탕이 굿즈 샘플로 나와 있었던 것이다.
“아냐 그래도 심은규 거 보면 남궁찬이 애들 특색을 꽤 잘 살리긴 했어. 이 팔자 눈썹 좀 보라고.”
은규의 얼굴 옆으로 은규 캐릭터가 그려진 사탕을 가져다 대며 엠케이가 말했다.
“차인혁 눈 부리부리한 거 봐라. 어떻게 얜 이런 사탕에 이차원으로 박아 둬도 얼굴이 빛나냐.”
인혁의 사탕을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이환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것에 인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가지지 못할 것은 부러워하지도 말…….”
와그작.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재이가 사탕을 콱 씹어 먹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이가 태연한 얼굴로 사탕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고 있는 것을 본 은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만 섬뜩했어, 지금?”
“말 그대로 씹어 먹어 버리는 한재이 클래스.”
“리더고 뭐고 헛소리하면 가차 없다는 거지.”
“어떤 의미에서는 공평해, 한재이.”
은규에 이어 멤버들이 수군대며 사탕을 하나씩 집어 먹었다.
“일단 상황 파악 될 때까지는 지원팀 인원 몇 명 더 늘려서 움직일 테니 그렇게들 알아. 이번 일 범인이 누군지 밝혀질 때까지는 혹시 모르니까 너희들도 될 수 있으면 어디서건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석관이 샘플 구경에 정신없는 멤버들을 돌아보며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재차 당부했다.
“걱정 마세요. 형. 한재이가 허튼짓 못 하게 저희가 단단히 지킬게요.”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대답하는 남궁찬의 뒤통수에 재이가 던진 쿠션이 날아들었다.
* * *
며칠 후.
멤버들은 간만에 야외에서 진행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간이로 마련된 대기실 천막에서 스탠바이 중이었다. 멤버들의 헤어와 메이크 상태를 확인하고 방송 장비의 상태를 점검하느라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협찬받은 거라며 의상팀 스탭이 멤버들에게 무대에 신고 오를 운동화를 나눠 주었다.
“…음?”
준비를 마치자마자 부르러 온 스태프의 유도에 따라 멤버들과 함께 무대 아래로 걸음을 옮기던 재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왼쪽 발이 묘하게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모래가 들어갔나.’
뭐가 들어간건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굽히려는데 마침 진행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파티, 올라가세요.
위쪽에서 들리는 관객들의 함성에 재이는 몸을 돌려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 PART.Y 두 번째 앨범 [Lv.2 Abyss Laid]에 들어 있는 한재이 개인컷을 공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