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Phase 1 Convergence (융합) (3)
조명이 한층 어두워지고 VCR이 흘러나왔다.
화면 속에 재이와 은규가 등장하자 객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 약간 이런 느낌이 먼저 들어가고 훅 치고 들어가는 건 나중으로 빼는 게 좋지 않아?
- 음, 근데 그러면 앞부분이 너무 밋밋해지잖아. 세션을 조금 바꿔볼까? …이건 어때?
- …오, 괜찮은데? 그럼 여기서는…….
은규의 작업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한참 곡 작업을 한 뒤 밖으로 나서는 재이를 화면에 담으며 제작진이 물었다.
[이번 재이 씨 솔로 무대는 은규 씨 오리지널 곡으로 가는 건가요?]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타자마자 핸드폰으로 조금 전 은규에게 받은 악보를 열어 보고 있던 재이가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아, 네. 커버 곡으로 갈까 하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마침 은규가 작업 중인 곡 중에 제가 생각해 왔던 이미지랑 어울리는 곡이 있어서.
[콘서트에 오리지널 곡을 그것도 솔로 무대에 올리기로 하다니, 보통 자신감이 아닌데요?]
제작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재이가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 은규 곡은 실패하는 법이 없죠. 저도 그렇고요. 안 그런가요, 여러분?
처음 듣는 곡이라고 낯가리지 마시고 함께 즐겨 주시기예요?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씩 웃는 재이의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자 객석에서 비명 섞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레코딩 부스에서 진지한 얼굴로 녹음에 한창인 재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 새벽 세 시 반.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후우……. 타협하는 법을 모르는 남자, 한재이…….
헤드폰을 낀 채 열창 중인 재이의 모습을 유리 벽 너머 컨트롤 데스크에서 바라보던 은규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옆에서 프로듀싱을 맡은 댄디노가 동감이라는 듯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엠케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습실에서 안무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 다리 한쪽을 걷어 올리고 스태프가 뿌려 주는 냉각 스프레이의 냉기에 살짝 눈을 찌푸리는 모습들이 지나갔다.
연습실에 모인 멤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땀에 흠뻑 젖은 채 솔로곡을 런스루 하고 있는 재이의 모습 위로 그의 목소리가 나레이션처럼 울려 퍼졌다.
- 기대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에요.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저 자신을 위해서라도 더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죠.
- 외롭지 않고.
-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해 주죠.
그리고 방송국 대기실 뒤편에서 소파에 앉은 채 잠들어 있는 재이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카메라를 향해 집게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보내는 엠케이와 재이의 얼굴 앞에 손을 가져다 대고 휘휘 흔들어 보이는 남궁찬, 그리고 그런 남궁찬의 손짓에도 깰 기색이 보이지 않는 재이를 신기하다는 듯 들여다보느라 정신없는 다른 멤버들 모습이 화면에 비치자 객석에서 또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저건 대체 언제 찍었대?”
무대 아래에서 스탠바이 중이던 재이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닭살 돋게 편집된 영상을 지켜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불쑥 내뱉었다. 솔로 곡에 들어가기 전 분위기를 잡아 두기 위해 끼워 넣은 VCR 타임이긴 했지만,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고 느끼한 편집에 당황하는 중이었다.
솔로 무대로 선택한 은규의 오리지널 곡은 서정적인 멜로디 라인을 강조한 로우 템포의 곡이었다. 한참 뜨거워져 있을 장내 분위기를 조금 잡고 들어가는 편이 무대를 이끌어 가기 편할 것 같아서 넣자고 한 것이었는데, 저게 저렇게 느끼하게 편집되었을 줄이야.
‘내 스타일 아니라고.’
재이는 손으로 팔뚝을 쓱쓱 문지르고는 스태프의 사인에 맞춰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조명이 꺼져 어두워진 스테이지 한가운데에 홀로 서서 정면을 바라보자 어둠 속을 빼곡히 수놓은 보라색 불빛이 시야 한가득 밀려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의 함성이 인이어를 뚫고 들어와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압도적이네.’
저쪽 동네에서도 이쪽 동네에서도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재이는 침착하게 정신을 가다듬으며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 * *
그래 이제 우리
네 꿈을 향해 날아올라
깨지고 부서져 흩어져도
사라지지 않아 여기 있어
느릿하게 흐르는 반주를 타고 재이 특유의 곧게 뻗는 시원한 보이스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분명 넓은 무대에 홀로 서 있건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공간이 재이 한 사람으로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이었다.
파티의 무대에서 자주 보여 주던 각 잡힌 메트로놈 댄스와 달리 지금의 재이는 박자를 아슬아슬하게 갖고 노는 듯한 여유롭고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그 움직임이 주는 묘한 긴장감이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 이제 우리
네가 꿈꾸던 그곳에서
이것 봐 여기 이렇게
숨 쉬고 있잖아
너와 함께
주먹을 쥔 재이가 자신의 심장을 툭툭 두드렸다.
그 손길에 반응이라도 하듯,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여기까지 올라온 자신에게, 함께한 멤버들에게, 응원해 준 팬들에게, 그리고 자신과 함께한 또 다른 스스로에게 보내는 노래였다.
‘야, 한재이. 잘 보고 있냐, 너와 내가 여기까지 온 거야.’
리온이 재이에게 말했다.
무대가 시작되고부터 지끈거리던 머리는 이제 하얗게 타오르는 것같이 뜨거워진 느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있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부유감에도 왠지 웃음만 흘러나왔다.
‘이게 끝이 아니라고. 우린 더 할 수 있을거야.’
둘이 함께 말이지.
그와 동시에 한재이가 품고 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이 가슴 속에 차올랐다.
외로움, 절망, 후회, 슬픔. 그가 겪었던 모든 기억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동안 필요할 때만 골라서 꺼내 쓰던 편리한 기억 상자가 아닌 인간 한재이의 모든 것이 리온의 그것과 얽혀 드는 느낌이었다.
‘둘이 함께, 라니.’
재이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왠지, 눈가가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야 이 씨 그렇다고 울어도 된단 소린 아니었다고.’
이제부터 체면 떨어지는 짓 하면 다 네 탓이라고 할 거야.
속으로 투덜거린 재이는 감았던 눈을 떴다.
여전히 자신을 보며 환호하는 팬들의 모습을 시야에 담으며 생각했다.
‘그래, 이제 그것 또한 나인 거지.’
재이가 환하게 웃었다.
* * *
“*이런.”
무대에 집중하고 있던 한산은 옆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일행을 돌아보았다.
“*응?”
눈앞에는 얼마 전 새로 사귄 여자친구, 라일라가 앞을 바라본 채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한산이 묻는 말에 그제야 이쪽을 돌아본 라일라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별일 아니야. 당신 동생, 진짜 굉장한데?”
라일라의 말에 한산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말했잖아. 잘나간다고. 아주 혼자 무대를 씹어 먹고 있네.”
대답에 희미하게 뿌듯함이 묻어 나오는 것을 눈치챈 라일라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누가 들으면 되게 끈끈한 사이인 줄 알겠어. 사실은 십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사이라며. 그 정도면 남이지.”
“*부정할 생각 없어. 사실 그렇게 따지면 저 녀석과 난 남이 맞다고.”
애초에 혈연관계가 아니니까.
자신의 말에 자조 섞인 말투로 중얼거리는 한산의 매끈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라일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뭐, 당신의 동생이 이 돼지 X끼인 것보다는 백배 낫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 형 동생 놀이하도록 해.
그 말과 함께 아까부터 계속 뒤쪽을 힐끔대고 있는 한준의 뒤통수를 한 대 더 갈겨 줄까 고민하는 듯 노려보고 있는 라일라를 쳐다본 한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재이의 솔로 무대는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소심하고 우울해 보이던 어린 날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저 넓은 무대가 꽉 차 보이도록 자신만만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재이의 모습은 자신이 보기에도 천상 스타였다.
한산은 앞 열에 앉아 있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이 형이야 재이와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다니 그렇다 쳐도 나머지 사람들의 모습은 볼만했다. 자신들이 기억하는 한재이와 지금 무대 위의 모습이 주는 괴리감에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모습들이었다. 뒷자리가 아니었다면 무대가 아니라 가족들의 얼굴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을 것이었다.
“*아버지가 와 계셨어야 하는 건데.”
삶의 무게가 당신을 무력하게 했다면 그 삶의 무게를 물려받은 아이가 어떻게 그것을 거스르고 홀로 피어나 당신과 다른 삶을 거머쥐는 데 성공했는가도 보셔야 했다. 그걸 보면서 느끼는 것이 후회일지, 부러움일지까지는 알 바 아니었다. 한산은 미동 없이 무대를 주시하고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이의 무대가 끝나고 다음 순서로 넘어가 멤버 셋이 올라와서 히든 트랙에 수록된 곡을 부르기 시작했을 무렵, 한산은 핸드폰이 울리는 느낌에 슬쩍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라일라에게 잠시 다녀오겠다고 눈짓한 뒤 자리를 빠져나왔다.
출입구 쪽에 서 있던 진행 요원이 아이돌 팬치고는 조금 수상해 보이는 생김새의 한산을 호기심 섞인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이 한산은 마침 멀찍이서 뛰어오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살짝 손을 들어 보였다.
“형님, 다행히 바로 나와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땀범벅이 된 얼굴로 뛰어온 것은 클리닉에 오가는 재이와 함께 몇 번 얼굴을 본 적 있는 매니저 홍정수였다.
“얼른 가시죠.”
자신들을 힐끔거리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더 이상의 말은 삼간 채 홍정수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으로 관계자 전용 통로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홍정수가 주위에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한산에게 말했다.
“문자 보셨겠지만, 솔로 무대 끝나고 내려온 재이 상태가 안 좋아서요. 본인은 구급차를 부를 것까진 없다고 하는데 걱정도 되고, 아직 콘서트 끝나려면 몇 곡 더 남은 상태라. 대기 중이던 의료진들도 판단이 안 선다고 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이대로 병원으로 데려갔다간 일이 크게 번질 것 같아서 일단 형님 먼저 모시고 오라고 김 팀장님이.”
홍정수의 말에 어느 정도 사태를 짐작하고 있던 한산이 물었다.
“의식은 있습니까? 무대에서 내려오는 건 제 발로 내려왔어요?”
“네, 내려오는 것까진 문제없었는데 내려오자마자 코피를 쏟더라고요.”
“…코피요.”
한산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조금 더 심각해진 목소리로 홍정수에게 바짝 다가가 걸으며 물었다.
“의식은 얼마나 또렷합니까? 병원에 안 가겠다고 한 건 본인이 직접 말한 겁니까?”
항상 여유로워 보이던 한산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급하게 묻는 말에 심장이 철렁한 홍정수가 이미 뛰어가듯 걷고 있던 발걸음에 속도를 가하며 대답했다.
“의식은 있었어요. 저희도 다 알아보는 듯했고요. 선생님, 지금이라도 구급차를 부를까요.”
홍정수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한산은 그가 한산의 몫으로 가져온 관계자 패스를 잡아채듯 뺏어 들고는 홍정수를 제치고 긴 복도 끝에 보이기 시작한 대기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