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200화 (200/224)

#200

붉은 머리 용사 이야기

뜨겁게 불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붉은 머리의 용사가 신의 가호를 바라는 주문을 영창하자 용사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빛이 화염을 갈랐다. 그리고는 그대로 브레스를 뿜고 있는 레드 드래곤의 눈 아래쪽을 길게 그어 내렸다. 애니메이션만이 구현할 수 있는 화려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에 세밀한 묘사가 더해져 극적 긴장감을 최고치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 어떤 날카로운 검으로도 상처 입힐 수 없을 것 같았던 드래곤의 두꺼운 비늘이 깊게 갈라지며 안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고통에 찬 드래곤이 뒤로 물러나며 포효했다.

크어어어어어!!!!!!!!!

거대한 드래곤에 비하면 먼지처럼 보잘것없이 작아 보이는 용사는 그러나 지축을 뒤흔드는 드래곤의 포효에도 물러섬 없이 오히려 앞으로 도약하며 기도문을 영창했다. 용사의 검에서 하얀 스파크가 튀기 시작하더니 금세 주변이 번쩍이는 섬광에 휩싸였다.

용사의 검이 공간을 가르고 뻗어 나가자 그와 함께 급속도로 팽창한 섬광이 흉포하게 날뛰는 레드 드래곤의 심장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화염과 섬광. 그리고 드래곤의 포효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뒤이어 고요한 적막이 검게 타버린 대지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늘까지 태워 버릴 듯 붉게 이글거리며 타오르던 화염이 사라진 자리에는 붉은 머리의 용사 한 사람만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지친 어깨 위로 툭,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멀리서 승리의 나팔 소리와 살아남은 자들의 환호가 들려왔다. 그들의 기쁨 속에 드리운 상실과 피로의 그림자가 빗방울과 함께 거친 벌판 곳곳에 스며들었다.

투 툭. 툭.

쏴아아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용사의 푸른 눈 만큼이나 파랗게 투명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져 내리다 마침내 온전한 비가 되어 불타 버린 대지를 적시기 시작했다.

멀리서 커다란 몸집의 흰 늑대와 용사의 동료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흰 늑대가 입에 물고 있는 것이 사악한 대마도사의 지팡이임을 알아본 용사가 씩 웃었다.

주인이 걸어온 여정을 상징하듯 군데군데 검게 그을리고 볼품없이 해진 망토가 빗줄기에 지친 몸을 늘어뜨렸다. 전투의 상흔이 깊게 팬 황량한 벌판에 새로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기라도 하듯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용사는 그 자리에 조용히 홀로 서 있었다.

어느새 그가 서 있는 곳까지 뛰어와 소란스럽게 떠드는 사람들과 칭찬해 달라는 듯 용사의 손에 제 머리를 들이미는 흰 늑대에게 둘러싸인 용사가 그제야 어두웠던 얼굴을 펴고 빙긋 웃었다.

검게 타 버렸던 대지에 하나둘 다시 파란 새싹이 돋아나고 인적없이 황폐하던 도시에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바쁘게 지나가는 화면 속에 어느샌가 흥겨운 박수 소리와 함께 평화를 노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웃음소리와 어우러져 울려 퍼졌다.

그 평화의 노래를 음미하듯 높은 산 끝자락에 선 채 자신의 발아래 펼쳐진 세상을 홀로 내려다보는 용사의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웃음이 서서히 페이드아웃하며 엔딩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

.

.

‘…이런 어처구니없는 날조라니.’

라일라 클락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스크린을 노려보며 앉아있다가 마침 엔딩 크레딧에 올라오고 있는 원작자의 이름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초반부를 흥미롭게 관람하던 여유로움 따위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클라이맥스의 전투 장면이 시작되자마자 끓어오르기 시작한 화는 이미 주체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미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고도 남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쪽 동네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 예쁘게 다듬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것뿐이었다.

“*드래곤이 저기서 저렇게 한 방에 죽어 버리는 게 대체 말이나 되느냐고. 드래곤은 신 다음으로 전능한 존재란 말이다! 인간 따위가 어떻게 감히?”

도저히 못 참고 나직이 속사포처럼 혼잣말을 내뱉자 주변에 앉아있던 관계자 중 몇몇이 이쪽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는 움찔 몸을 떠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분이 풀리지 않은 라일라가 재차 중얼거렸다.

“*드래곤의 심장을 단칼에 꿰뚫어서 해치웠다는 설정 자체가 허풍이 너무 심하다고. 게다가 용사한테는 능력이고 외모고 다 몰아줘 놓고 어째서 드래곤은 그냥 무식하게 덩치만 크고 머리 나빠 보이는 도마뱀 취급이냔 말이야.”

아무리 픽션이고 애들 상대의 전 연령가 애니메이션이라지만 저렇게 눈에 뻔히 보이는 선악 구도라니, 스토리가 너무 뻔하잖······.

이미 너무 물어뜯어 아프기 시작한 손끝의 통증을 무시한 채 중얼거리던 라일라는 갑자기 터져 나온 박수 소리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객석 여기저기에서 시작된 박수가 순식간에 장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엔딩롤이 끝나고 화면이 완전히 블랙아웃 했다가 객석의 불이 켜질 때까지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는 힘찬 박수 소리에 라일라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런 터무니없는 내용에 이런 열렬한 반응이라니.’

라일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 시사회는 기자와 비평가들 그리고 각계의 관계자 중 일부만을 초대해 비공개 형식으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이런 류의 행사가 으레 그러하듯 모인 사람들의 특성상 객석의 반응은 일반 관객들의 반응보다는 건조할 터였다. 그런데 이 박수 소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

라일라는 상연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자신에게 친한 척 알랑방귀를 뀌어 대던 배급사 사람이 감동에 벅차오른 표정으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치는 것을 바라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알아보는 사람 없다고 이렇게까지 날로 먹어도 되는 거야? 그 와중에 내용은 완전 제 입맛대로 싹 뜯어고쳤잖아! 멜라노르 평원에서 나는 저렇게 날뛰지도 않았다고! 죽지도 않았고!’

더 난리 쳤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눈치껏 레어로 튀었지.

어디선가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라일라가 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애초에 저 인간한테 저렇게 대놓고 엉겨 붙을 만큼 간 큰 녀석들도 없었다니까! 으아아!!’

저쪽 동네에서는 반신의 지위를 마음껏 누리며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다 하고 살던 레드 드래곤은 불을 뿜는 심정으로 짜증스럽게 발을 굴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이라곤 자신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충격과 공포로 넋이 나간 인간들의 경외 섞인 시선 대신 매너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인간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험악한 눈초리뿐.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쪽 동네의 야속함에 새삼 빈정이 상한 라일라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등을 더욱더 객석 등받이 깊숙하게 묻었다.

다들 기립 박수 치며 축하하는 분위기 속에서 홀로 고집스럽게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있는 클락 컴퍼니 아시아 퍼시픽 대표의 모습에 다른 투자사에서 나온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라일라는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팍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공동의 적인 용사 놈을 치워 버릴 묘책이 있으니 힘을 빌려 달라는 샤리프의 제안을 덥석 문 것이 화근이었다. 자신의 마나로는 부족하니 마나만 좀 빌려 달라며 꼬드기는 늙은 마법사의 속이 시커먼 것이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한 번 열받으면 앞뒤 분간 못하는 이 성질머리가 문제였다.

눈엣가시인 용사 놈을 차원의 틈 사이로 날려 버리고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느라 그 틈이 제대로 닫힌 것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야.’

그러나 모르긴 해도 아마 샤리프 본인도 지금쯤 땅을 치고 있을 터. 차원의 경계를 흩트리는 것은 영겁의 세월을 사는 자신조차도 선뜻 내키지 않을 만큼 무거운 업보를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자신도 이럴진대 그래 봐야 한낱 인간에 불과한 늙은 마법사가 신의 섭리를 두 번이나 거스르고도 무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쯤 죽지도 못한 채 그 무게에 짓눌려 허덕이고 있겠지.’

하나도 아니고 둘이었다.

신의 가호를 받았다는 기사와 신의 권능을 받았다는 드래곤을 차례차례 차원 밖으로 날려 보내고도 멀쩡할 수 있을 리가. 당장 돌아가서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제가 쌓은 업보의 수렁에서 허덕이는 것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문제는 그게 지금 자신에게 남은 힘만으로는 어림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든 꼬셔야 하는데.’

라일라는 마침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객석에서 무대 위로 오르고 있는 용사 놈, 아니 한재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게 씹었다.

차원의 틈은 거대한 드래곤의 영혼이 통과하기에는 터무니없이 가늘고 좁았다. 빌어먹을 영감탱이의 마법진에 떠밀려 그 좁은 틈을 억지로 지나오는 사이 고귀한 권능의 대부분이 깎이고 썰려 나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떨어진 세계는 하필 마나의 불모지였다. 권능의 회복은커녕 차원의 틈을 다시 지나기 위해서는 그나마 남은 힘까지 다 쏟아부어야 할 판이었다.

샤리프가 업보의 무게에 허덕이고 있을 거라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이쪽의 추측일 뿐.

있는 능력 없는 능력 바닥까지 박박 긁어다 썼다가 기껏 돌아가자마자 샤리프에게 목이 뎅겅 날아가는 사태만은 피하고 싶었다. 용사 놈이 함께 돌아가 준다면 그만큼 든든한 전력도 없을 터.

샤리프라는 공동의 적이 있는 이상 그와 자신은 이미 적이 아닌 아군이었다.

‘돌아가면 우선 영감탱이부터 자연의 품으로 되돌려 보낸 다음에…….’

혼자서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고 있던 라일라는 다시 한번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무대 쪽을 바라보았다. 용사 놈, 아니 한재이가 객석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눈부시게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와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셔터 소리에 라일라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나타나는 곳마다 핏발 선 눈을 치켜뜨고는 칼 들고 쫓아다니던 미치광이 같던 놈이 저렇게 나긋나긋한 표정으로 방긋방긋 새침하게 웃으며 사람들에게 노래나 부르고 춤이나 팔고 있다니.

‘…저것도 융합의 부작용인가?’

각성했을 때 이미 원래의 영혼이 죽어 가던 상태라 그대로 손쉽게 흡수해 버린 자신과 달리 용사 놈은 흡수 대신 원래의 영혼과 융합하는 것을 택한 모양이었다. 그 때문인지 날카롭게 벼린 칼처럼 매섭게 느껴지던 용사 놈 특유의 기운이 눈에 띄게 무뎌져 있었다.

아쉬운 일이었다. 자신과 샤리프의 연합을 상대로도 일기당천 홀로 맞서던 그 사납고 호전적인 영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복수를 미끼로 꼬드기기 조금 더 쉬웠을지도 모르는데.

‘인간들과 하하 호호하고 있는 용사 놈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고.’

무대 위에서 나란히 선 다른 멤버들과 웃으며 사이좋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재이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라일라가 중얼거렸다.

라일라가 기억하는 용사 놈은 언제나 고집스러울 정도로 혼자였다. 멜라노르 평원에서 자신과 붙었을 때도 그를 돕겠다고 따라온 병력을 뒤로 물리고 홀로 맞섰을 정도였다.

‘뭐, 그런 것들이야 있으나 마나긴 하지만.’

용사 놈으로서도 걸리적거리기만 했을 게 분명했다. 그 자존심 센 하이울프가 쫓아다니는데도 곁을 내주는 법 없이 세상 혼자 사는 듯하던 놈이 저렇게 평범한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하하 호호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니. 짧지 않은 용생에서 드물게 느껴보는 놀라움이었다.

“*…어쨌거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상념에서 벗어난 라일라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자 회견이 시작되고 제작 과정을 보여 주기 위한 자료 화면으로 스크린 한가득 등장한 용사 놈이 한 손에 쥔 용사 인형으로 다른 손에 쥔 드래곤 인형을 두들겨 패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 탓인지 드래곤 인형이 얻어맞고 있는 곳과 같은 쪽 뒤통수가 얼얼한 듯한 느낌에 라일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수모를 어떻게 갚아 줄까.”

돌아갈 때 가더라도 일단 갚을 건 먼저 갚아 줘야지.

라일라가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 * *

‘저건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는 눈인데.’

재이는 객석에서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는 케니건, 아니 라일라 클락의 황금빛 눈동자를 힐끔 쳐다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드래곤치고는 심각하게 머리가 모자라는 듯 번번이 자신에게 당하면서도 또다시 기어 나와 난장을 치던 레드 드래곤이 결국 샤리프 그 영악한 영감탱이의 손에 놀아나고 쫓겨난 모양이었다. 어떻게 찾은 것인지 자신을 찾아와 돌아가고 싶다는 둥, 같이 가자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이쪽의 거절에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듯한 눈치였다.

‘하필이면 이렇게 엮일 건 또 뭐냐고.’

도마뱀 녀석이 돌아가건 말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한산이 걱정되는 것도 아니긴 했다.

한산이 저 녀석의 정체를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피는 섞이지 않아도 기질만은 닮은 구석이 있는 자신의 형은 어떤 이유에서건 이용만 당하고 있을 인간은 아니었다.

라일라의 정체를 이미 눈치채고 그녀의 뇌를 꺼내 볼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지도 모를 인간이었다. 그쪽을 걱정하는 건 남궁찬의 끼니를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라일라가 클락 컴퍼니의 핵심 멤버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당장 지금도 심기 불편해 보이는 붉은 머리의 큰손 투자사의 기척에 주변인들이 어찌할 줄 몰라고 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혹시 라일라가 작정하고 태클을 걸기 시작한다면 피곤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그렇다면 오늘 와 주신 여러분들에게서 질문을 좀 받아 보도록 하지요.

해외 프레스와 관계자 대응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동시 통역사가 사회자의 멘트를 옮기기가 무섭게 객석에 앉아 있던 붉은 머리의 그녀가 손을 번쩍 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클락 컴퍼니의 라일라 클락이라고 합니다. 원작자 한재이 씨에게 질문이 있는데요.”

차원을 넘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만난 두 존재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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