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201화 (201/224)

#201

붉머용 히어로 쇼

‘저쪽 동네였다면 이미 브레스 몇 번 뿜었을 텐데, 고생하네.’

재이는 객석에서 애써 침착한 척 이쪽을 향해 질문 공세를 퍼붓고 있는 라일라 클락을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영 시간 내내 나쁜 짓만 골라 하다 결국 용사의 손에 죗값을 치르는 결말을 맞는 레드 드래곤에 대한 묘사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질의응답이 시작되자마자 손을 번쩍 든 이 메인 투자사의 핵심 간부는 진행 요원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제 질문만을 쏟아 내고 있었다. 덕분에 질의응답 시간은 어느새 작품의 세계관에 대해 원작자와 투자자 간의 맞장 토론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일반 관객으로 채워진 시사회라면 이미 커트하고도 남았을 진상 짓이었지만 상대는 프로모션에 들어갈 돈줄을 쥐고 있는 투자사의 대표. 객석을 채우고 있는 관계자들을 비롯해 이곳에 모인 사람 중 그의 심기를 대놓고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사회자는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라일라와 재이의 설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단상 위에 올라온 파티 멤버들과 제작진, 그리고 객석에서 구경 중인 다른 관계자들 또한 구경꾼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프레스석을 차지한 기자들만이 혹시라도 터질지 모르는 기삿거리에 대비해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설전을 조용히 관전했다.

집요하리만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일라의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 본 재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하긴, 멀쩡히 살아 있는 인간, 아니 드래곤을 죽여 놨으니 저 성격에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나 같아도 열받긴 할 듯.’

그러니까 누가 여기까지 쫓겨 오랬냐고.

재이는 태연한 얼굴로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까지 머금은 채 라일라 클락을 쳐다보았다. 그런 재이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꿈틀한 라일라가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럼 재이 씨도 인정하는 거네요? 대륙에서 가장 센 존재는 드래곤이라는 것을요.”

대답을 꼭 들어야겠다는 듯 재촉하는 투로 묻는 라일라의 질문에 재이가 말했다.

“기본적인 설정은 그렇죠. 그런데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레드 드래곤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죠?”

“용사의 세계에 사는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원래 오래 사는 만큼 머리도 좋고 상황 파악도 잘하는 이지적인 녀석들인데 이 레드 드래곤은 유별나게 성질이 불같아서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괴짜거든요.”

재이가 라일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어 말했다.

“레드 드래곤은 그 성격처럼 앞뒤 안 재고 제멋대로 날뛰느라 방심하고 있다가 용사한테 잡힌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용사가 드래곤을 물리쳤으니 이 세계관 최강자는 용사인 거죠.”

대답과 함께 턱을 살짝 추어올리며 씩 웃는 재이를 바라보고 있던 라일라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아이들도 이해하기 쉬운 설정을 위해서라고 해도 너무 무리수인 거 아닌가요.”

“어느 부분이요?”

이제 아주 대놓고 어그로를 끌고 있는 라일라를 떼쓰는 어린아이 보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던 재이가 물었다. 마이크를 부서져라 꽉 움켜쥔 라일라가 말했다.

“*어떻게 인간이 혼자 드래곤을 잡아요.”

“용사를 보통 인간 취급하시면 되나요. 신의 가호를 받은 대륙의 영웅인데.”

재이가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재이의 대답에 일순 말문이 막힌 라일라가 한마디 더 하려고 다시 입을 여는 순간, 두 사람이 벌이는 긴 대화의 랠리를 구경 중이던 사회자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와, 작품 설정에 대한 두 분의 심도 있는 대화, 영화를 보고 순식간에 [붉머용]의 팬이 된 저로서는 매우 흥미롭게 잘 들었습니다. 본편을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는 원작의 세계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시간 관계상 다음 순서로 넘어가야 할 것 같네요.”

사회자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는 제스처와 함께 진행을 이어 가려는데 마이크를 아직 손에 들고 있던 라일라가 손을 번쩍 들고는 불쑥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그렇게 물어봐 놓고 아직도 궁금한 게 더 남았냐는 듯 질렸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일라가 물었다.

“*혹시 속편 제작에 관한 이야기는 나온 게 있습니까?”

라일라의 질문에 주변이 술렁였다.

아직 본격적으로 상영을 시작하기도 전인 작품의 속편을 거론하다니.

- 와, 엄청 마음에 들었나 봐. 제대로 수익 까보기도 전에 속편 제작에 눈독 들이는 거야?

- 될 성싶으니까 침 먼저 발라 놓겠다는 건가 본데.

- 아까까지 세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 왕창 찌푸리고 있던 거랑 같은 사람 맞아?

- 근데 아까 이것저것 묻는 거 보니까 완전 찐 팬인 것 같긴 하더라.

- 클락 컴퍼니에서 제대로 푸쉬 들어갈 작정인가 본데?

주변의 술렁거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잠시 라일라를 빤히 바라보던 재이가 입을 열었다.

“아직 거론된 바는 없습니다.”

재이의 대답을 옮기는 통역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일라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저희도 제작에 직접 참여하고 싶군요.”

갑작스러운 발표에 좌중이 놀라움에 숨을 들이켜는 가운데 의미심장한 라일라의 미소를 바라본 재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 건 한발 늦어서 어쩔 수 없었다 쳐도 다음에 또 할 거면 그땐 확실히 제 입맛대로 휘둘러 주겠다는 말인가 본데.’

권능 없는 세상에서 인간계의 쓴맛을 제대로 한 번 겪어 볼 때가 됐나 보네, 우리 도마뱀 씨가.

속으로 중얼거린 재이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따로 말씀 나누고 싶네요.”

시사회장에서 성사된 속편의 구두 계약이라는 대형 떡밥에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기자들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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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걸려들었어.’

라일라는 자신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던 용사 놈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빙긋 웃었다.

감히 이 몸을 멍청하다고 비웃었겠다.

전능하신 드래곤의 위대함을 똑똑히 보여 주지.

라일라는 내심 중얼거리며 객석 등받이에 깊게 몸을 묻었다. 무대에서는 재이를 비롯한 파티의 멤버들이 이번 영화의 주제곡으로 삽입된 파티의 신곡 [on the road]를 선보이고 있었다.

‘물렁해져서는.’

라일라는 짧게 혀를 찼다.

멜라노르 평원에서 자신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용사의 기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눈빛 하나만으로 본능에 움직이는 몬스터들이 뒷걸음치게 할 정도로 살벌하던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말랑말랑하고 살랑살랑하고 사분사분한 것이 심장 근처를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 왠지 매우 기분이 나빴다.

“*와, 한재이 목소리 좋네.”

옆자리에서 홀린 듯한 눈으로 무대 위의 퍼포먼스를 보고 있던 부하 직원이 눈치 없이 중얼거린 말에 라일라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말랑말랑하고 살랑살랑하고 사분사분하는데?”

“*그쵸그쵸. 매력 있는 보이스인데요? 여섯 명 밸런스도 좋고. 멜로디 라인 잘 뺐네요. 조이 키넌이 손댔다더니, 확실히 트렌디한 느낌이랄까. 영어 버전은 직접 안 부르나?”

“*…이런 게 좋다고?”

대체 인간의 감각이란 알 수가 없다니까.

제 할 말만 하고는 다시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집중하고 있는 부하 직원의 옆얼굴을 힐끔 살핀 라일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내심 투덜거렸다.

* * *

[데일리 엔터] 드디어 베일을 벗은 [붉은 머리 용사 이야기] 프리미엄 시사회 기립 박수

[노컷 엔터] 500만 관객 달성 시엔 코스튬 입고 히어로 쇼 …… [붉머용] 홍보대사 PART.Y의 이색공약

[스타 뉴스] PART.Y의 [붉머용] 주제곡 [on the road] 차트올킬

[엔터 나우] [붉머용] 개봉과 동시에 후속편 입질 …… 케이엠 주가 수직상승

[쇼 비즈 저널] [붉머용] 계속되는 매진행렬,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모두가 빠져드는 판타지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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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가 돌아가면서 남궁찬을 한 대씩 치면 되는 건가?”

공약 이벤트를 위해 회사에서 부랴부랴 대관한 이벤트 홀 대기실 안.

허리에 손을 올린 엠케이가 남궁찬을 노려보며 말했다. 남궁찬이 억울하다는 듯 입을 벙긋거렸으나 자신을 바라보는 멤버들의 시선을 훑고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내려뜨렸다.

프리미엄 시사회에서 ‘공약 이벤트로는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나’하는 기자의 질문에 다들 무난하게 밥차나 봉사 활동을 입에 담고 있는 가운데 남궁찬이 해맑은 표정으로 히어로 쇼를 입에 담은 것이 화근이었다.

통역이 필요 없는 그 한마디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붉머용]의 총감독 미라 클레인이 재미있는 아이디어라며 반색했다. 그 옆에서 쓸데없이 장인 정신에 불타는 제작진들이 앞다투어 코스튬과 시나리오는 맡겨 달라며 맞장구를 치는 바람에 공약은 멤버들이 말릴 새도 없이 일파만파 커져 버렸고, 화제성 떡밥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의 손에 순식간에 기사화되며 제멋대로 화제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재재님과 PART.Y의 압도적인 팬덤, 그리고 픽처스 마니아층의 지지에 힘입어 순조로운 출발을 끊은 [붉은 머리 용사 이야기]는 아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권선징악이 분명한 스토리라인과 판타지 세계를 섬세하게 구현한 연출이 입소문을 타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500만 관객 공약을 건 것이 무색하게 개봉 2주가 채 지나기 전에 목표를 달성해 버린 영화의 무서운 상승세에 픽처스와 케이엠 측은 부랴부랴 이벤트 준비에 착수했다.

그리고 남궁찬의 한마디에 졸지에 팔자에도 없던 히어로 쇼에서 각자의 코스튬을 입고 레드 드래곤과 사악한 마법사를 무찔러야 하는 신세가 된 멤버들은 대기실에 도착해서도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찬 몰이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한 대 가지고 되겠냐. 누구 덕에 졸지에 스턴트까지 뛰게 생겼는데.”

이환이 마이크를 확인하는 스태프에게 몸을 맡긴 채 말했다.

“아 진짜 나는 딱 한마디 한 죄밖에 없다고. 이게 이렇게 며칠 동안 두들겨 맞을 일이냐고.”

“그래, 이제 그만들 좀 해라. 어차피 하기로 한 거 기분 좋게 하면 좋잖아. 게다가.”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남궁찬이 딱해 보였는지 드물게 남궁찬의 편을 들며 입을 연 인혁이 멤버들을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나름 잘 어울리잖아.”

인혁의 말에 멤버들이 새삼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번 이벤트가 작품의 실사화를 위한 베타 테스트라도 되는 것처럼 장인 혼을 불태운 픽처스 제작진들의 노고 덕에 질 좋은 옷감에 섬세한 문양까지 완벽하게 재현된 멤버들의 복장은 이벤트성 무대의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퀄리티를 자랑하고 있었다.

화려한 제복 차림의 황태자 복장을 한 엠케이 옆에서 그룹 내 포지션과 비슷하게 궁정 마법사와 약제사의 분장을 한 이환과 은규가 어색한 듯 자신들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하루만 입고 끝내기엔 의상 퀄리티가 너무 좋긴 한 듯.”

그 짧은 시간에 만들어 낸 것치고는 금빛으로 수 놓인 제국의 문양이 놀랍도록 섬세한 것을 훑어보며 엠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우리 티알할 때 빌려 달라고 해 볼까?”

“이환, 솔직히 말해 봐. 너 사실 지금 완전 신난 거 아니냐.”

이환이 소품으로 받은 마법서와 완드를 손에 들고 자꾸 올라가려는 입 끝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남궁찬이 묻자 엠케이가 그를 돌아보고는 맞장구쳤다.

“그래, 저 입꼬리 올라가는 거 봐라. 아마 좀 있다가 무대에 올라가면 제일 신나할 걸.”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사실 저거 며칠 전부터 의상 시안 나온 거 보고 망토 색에 맞춰서 머리 염색 다시 하면 안 되냐고 스타일리스트 누나들마다 붙잡고 물어보고 다니더라고.”

“야 심은규, 내가 언제!”

“미안하지만 내가 다 봤다고.”

은규의 말에 발끈한 이환이 질 수 없다는 듯 받아쳤다.

“옆에서 너도 파마 다시 하면 안 되냐고 했잖아! 영화에 나오는 약제사처럼 구불구불하게 하면 더 실감 나지 않겠냐고 한 게 누군데!”

“난 머리색 체인지도 원래부터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건 줄 알았지.”

“원래는 한재이랑 차인혁 빼고는 딱히 지정 없었다잖아. 이게 말이 되냐?”

“근데 어차피 너희는 모자 쓰면 다 가리잖아.”

“시끄러워 남궁찬, 죄인은 말이 없는 법이야.”

순식간에 왁자지껄 떠들어 대기 시작하는 녀석들을 쳐다보던 인혁이 정신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재이 쪽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우리 용사님께서는 준비 끝났어?”

“어, 생각보다 가볍네, 이게.”

재이는 익숙한 동작으로 몇 번 제자리 뛰기를 해 보였다. 특수 제작된 갑옷을 몸에 걸친 재이가 가볍게 뛸 때마다 견장에 고정되어 뒤쪽으로 길게 늘어진 붉은 망토가 함께 펄럭였다.

“쟤는 어떻게 저런 분장을 해 놔도 위화감이 없냐.”

가볍게 몸을 풀며 소품으로 받은 장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는 재이를 보고 있던 남궁찬이 중얼거렸다.

“붉은 머리는 예전에도 했었으니까?”

“그때는 그래도 대놓고 갑옷은 안 입었잖아.”

“그렇게 따지면 차인혁이 갑이지.”

이환과 남궁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엠케이가 끼어들었다. 이벤트를 위해 머리를 하얗게 탈색한 인혁이 인이어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었다.

“저건 여러모로 규격 외고.”

“아니 늑대면 늑대답게 털가죽에 늑대 탈이라도 써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 되냐. 쟤한테서 얼굴 빼면 뭐가 남는다고.”

멤버들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진행 요원이 대기실 문 너머에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 파티 여러분, 스탠바이 부탁합니다.

투닥대던 멤버들이 일제히 장난기를 거두고 하나둘 대기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남궁찬의 한마디에서 시작된 파티의 이색공약, [붉머용 히어로 쇼]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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