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괴작 심은 데 괴작 나나?
“*이럴 줄 알았으면 겁나 어렵고 X나 험한 거 시킬걸.”
“*뭐?”
라일라가 틀어 놓은 TV 소음을 배경음으로 논문을 읽고 있던 한산은 시선을 돌려 제 무릎을 베고 누운 붉은 머리칼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산이 되묻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앉은 라일라가 분통 터진다는 듯 내뱉었다.
“*자기 말 듣고 뭐라도 던져 준 건 좋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어려운 거로 부탁할 걸 그랬다고. 내 돈 쏟아부어서 결국 저 인간 좋은 일만 해 준 꼴이잖아.”
“*아하.”
씩씩대는 라일라의 얼굴과 TV 화면을 번갈아 바라본 한산이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라가 틀어 놓은 TV에서는 경찰 복장의 재이가 다른 경관들에게 둘러싸여 감사패와 꽃다발을 건네받으며 박수를 받고 있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이 키넌의 여우 소년 에피소드와 [붉은 머리 용사 이야기] 애니메이션의 성공으로 부쩍 해외에서의 관심도가 높아진 탓인지 재이가 출연한 [일하러 갑니다] ‘기동순찰대 24시’ 편은 금세 영어 자막과 함께 유튜브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거기에 친절한 K-pop 마니아들이 프로그램 방영 전후에 있었던 에피소드에 대한 중계까지 곁들여 준 덕에 라일라는 자신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지키기 위해 했던 일들이 어떤 나비 효과를 낳았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재이 녀석이 라일라를 갖고 논 거에 가깝지만.’
한산은 피식 웃었다.
자신의 여자친구는 자칭 이세계에서 만능의 존재로 불리는 드래곤이었다는 본인의 주장치고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카히타마하키에서 그 수상한 광경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지만 않았더라면 애초에 죽다 살아난 사람이 내뱉은 잠꼬대라고 생각하고 넘겼을 것이었다.
“*그래서 재이한테 뭘 해 달라고 했는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산이 라일라에게 물었다.
“*응? 어……. 몰라?”
“*…몰라?”
“*어, 그게 사실 그 녀석 만나러 가려고 막 자리에서 일어날 때 생각났단 말이야. 자기가 공짜로 해 주지 말고 뭐라도 시키라고 했던 게. 그래서 그때 그냥 책상 위에 눈에 띄는 거 아무거나 갖다 던졌지.“
“*…아, 그래.”
“*설마 그것도 안 하겠다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건 아니겠지?”
“*하하, 아닐걸. 아마 뭘 부탁했건 라일라가 해 달라고 한 건 해 줄 거야.”
싸게 먹혔다고 오히려 좋아하고 있을걸.
라일라에게 들리지 않도록 내심 중얼거리며 한산은 TV 화면 속에서 이쪽을 쳐다보며 활짝 웃고 있는 재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 *
“근데 왜 하필이면 그런걸.”
정면을 주시한 채 운전을 하고 있던 석관은 며칠 사이 부쩍 늘어난 한숨과 함께 몇 번째인지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재이가 그런 석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읽고 있던 대본에서 눈을 들어 석관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도 그 소리예요, 형?”
“어. 아직도 그 소리다. 지사장님은 왜 하필이면 그런 걸 갖다주신 걸까? 우리 편 아니었냐고.”
룸미러 너머로 재이를 바라본 석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재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라일라가 우리 편이라고 누가 그래요?”
“아니야?”
의외라는 듯 석관이 힐끔 재이 쪽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그래도, 이번 일도 그쪽에서 손써 주지 않았다면.”
“그건 자기 프로젝트에 영향 갈까 봐 그런 거고요.”
“헐, 설마. 그건 그냥 둬도 망… 흠. 아니, 아니 그건 그렇고 지사장님이 우리 편이 아니란 얘기는 뭐야. 처음부터 그 일 도와준 대가로 너보고 이거 나가 달라고 해서 물 먹이려고 함정을 판 거라는 거야 그럼?”
석관의 말에 이번엔 재이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답했다.
“음, 아마 그 정도로 똑똑하지는 않을걸요?”
“하하… 그럼 대체 뭐지?”
“자기 프로젝트에 똥물 튈까 봐 도와주긴 했는데 도와주고 보니 왠지 손해 보는 기분에 십중팔구 아무거나 던져 준 거일 거예요.”
재이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석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번 제안,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사정이 생겼다고 연락하면…….”
영 내키지 않는 듯 이야기하는 석관에 재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되물었다.
“뭐 어때서요?”
“한국형 뮤지컬 드라마라니. 시작도 안 한 프로젝트에 이런 말 하는 거 실례인 건 알지만, 그냥 평범한 괴작의 스멜이 뿜뿜 나잖아.”
석관이 ‘너랑 둘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만’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쌓아 두었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라일라가 재이에게 출연해 줄 수 없냐고 요청해 온 것은 랜플릭스에서 기획 중인 오리지널 6부작, 한국형 뮤지컬 드라마 [장악원 비록]의 주인공 ‘율’의 역할이었다.
해외에서 뮤지컬 드라마 시리즈로 재미를 본 랜플릭스가 야심 차게 준비한 기획이었으나 국내 여건이 여러모로 미흡한 탓에 지지부진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사극과 뮤지컬.
특색이 뚜렷한 만큼 진입 장벽도 높은 두 장르를 굳이 섞으려는 시도는 좋게 말하면 대담했고 나쁘게 말하면 무모했다. 요새 시청자들은 세계적인 트렌드에 민감함과 동시에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그동안 장르적 경계를 허물려는 시도가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처참하게 실패하고 소리 소문 없이 묻혀 버리곤 했다.
덕분에 그간 국내 콘텐츠 산업을 다방면으로 휘어잡던 랜플릭스의 질주에 드디어 제동이 걸리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한 프리프로덕션이 거의 끝나 가는 상황에 주연 배우가 두 번이나 바뀌는 등 배우 캐스팅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풍문이 돌고 있었다. 발을 디밀었던 사람도 내뺄 타이밍을 재고 있는 작품에 굳이 들어가려고 하다니.
석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데 재이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저도 필모에 괴작 하나쯤 심어 줄 때도 됐잖아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재이의 목소리에 석관이 한숨을 터뜨리며 말했다.
“너도 참. 어떻게 가꾼 필모인데 그런 소릴 하냐. 심 팀장님 들으시면 피눈물 흘리시겠다.”
“클락 컴퍼니의 라일라 클락이 직접 부탁한 안건인데 못 하겠다고 걷어차기도 그렇잖아요.”
재이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석관이 멈칫하다가 작게 투덜거렸다.
“함정이라며.”
“아니라니까요.”
“대표님도 참. 네가 우겨도 좀 말리셔야지, 왜 이런 걸 허락하시냐고.”
“믿음직스러우신가 보죠.”
“누가?”
“어… 제가요?”
“허이고.”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석관을 바라본 재이가 피식 웃었다. 사실 라일라의 제안은 재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했다.
‘이거 던져 주면서도 본인이 뭘 하고 있는지 몰랐다는 거지, 결국.’
신이 내린 권능을 휘두르며 평생을 모자람 없이 꽃밭에서 커 온 레드 드래곤은 인간 세상의 권모와 술수에 약했다. 제 프로젝트에 묻을 똥을 치우는 데만 급급해 그걸로 누가 이득을 보고 있는지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카운터를 넣은 것도 옆에서 한산이나 누군가가 너무 대가 없이 퍼 주기만 하는 라일라를 옆에서 보고 있기 딱한 마음에 조언해 준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당사자는 그런 줄도 모르고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의 조언대로 아무거나 갖다 던진 것뿐일 테지.
‘하여간에. 쫓겨 올 만하다니까.’
저쪽 동네에서 이쪽 동네로. 저쪽 나라에서 이쪽 나라로.
그나마 이제 한산이라도 옆에 있으니 더 이상 밀려나지 않고 있는 것이리라.
‘천생연분이네.’
한산과 라일라의 모습을 잠시 떠올린 재이가 피식 웃었다.
* * *
“진짜 올까요?”
랜플릭스 오리지널 6부작 [장악원 비록]의 조연출이 자신만큼이나 초조한 표정의 총괄 피디 염은성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자신 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염 피디는 조연출의 중얼거림에 대답하는 대신 옆에서 걷고 있던 캐스팅 담당을 돌아보며 물었다.
“차 대리, 진짜 오는 거 맞지? 그치?”
“그럼요. 오늘 미팅하고 문제없으면 그대로 계약서 교환할 거라고요.”
염 피디가 불안한 듯 묻는 말에 캐스팅 담당이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손으로 두드려 보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믿을 수가 있어야지.”
“라일라 클락하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잖아요. 클락 지사장이 케이엠으로 직접 찾아가서 부탁한 거라더라고요.”
차 대리가 비밀이라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수군대자 염 피디가 놀란 듯 되물었다.
“그 콧대 높은 라일라 클락이?”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인간미 있네.”
“그리고 인맥도 좋고요.”
“그냥 돈만 많은 낙하산인 줄 알았더니.”
랜플릭스의 실질적 소유주이자 대형 투자사인 클락 컴퍼니의 아태지역 지사장을 떠올린 사람들이 수군댔다.
“그나저나 한재이 씨가 대세는 대세인가 봐요. 주연 자리 한재이 씨로 확정 날 것 같다니까 그제야 아직 자리 있지 않냐면서 자기네 애들도 좀 넣어 달라고 전화 오더라니까요.”
캐스팅 담당이 감탄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캐스팅이 난항 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재이의 합류 소식이 퍼지자 아직 오픈되어 있던 배역을 차지하기 위해 순식간에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허. 언제는 스케줄 안 맞는다더니.”
“한재이 씨면 평타는 치겠다고 본 거죠.”
캐스팅 담당의 대꾸에 염 피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원래 이 바닥이 다 그렇고 그렇다지만 이런 거 볼 때마다 환멸 난다니까.”
“그래도 덕분에 살았잖아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최 감독님이 퇴짜 놓으시는 건 아니겠죠?”
염 피디와 캐스팅 담당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연출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의 말에 염 피디가 미간을 와락 구기며 대꾸했다.
“설마. 자기도 면목이 있으면 그렇게까지야 하겠어? 텃세 부리다가 프로그램이 공중분해 되게 생겼는데 양심이 있어야지. 게다가 애초에 캐스팅은 최 감독이 아니라 피디인 내 고유권한이라고. 정 작가도 오케이 한 마당에 자기가 왜 빠꾸를 먹여? 무슨 염치로.”
“그건 그렇죠…….”
조연출이 중얼거렸다.
최 감독은 뮤지컬계에서 잔뼈가 굵은 음악 감독이었다. 최 사단이라 불리는 뮤지컬 배우들이 존재할 정도로 배우들과 공연계 스태프들에게서 신뢰가 두터운 인물이었다. 문제는 이번 작품이 상연을 목적으로 하는 극이 아니라 방영을 목적으로 하는 드라마라는 점이었다.
주요 배역은 전문 배우나 가수와 같이 대중성이 검증된 연예인을 쓰자는 염 피디와 뮤지컬 드라마인 만큼 가창력이 검증된 뮤지컬 배우를 기용하는 것이 참신함과 함께 작품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최 감독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입버릇처럼 캐스팅은 피디의 고유 권한이라며 주연급 배역들을 배우로 고집했던 염 피디의 체면은 최 감독의 고집스러운 디렉팅을 견디다 못한 주연 배우 두 명이 사전 연습 단계에서 못 해 먹겠다며 차례로 계약 해지를 선언함에 따라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덕분에 제작진 분위기는 촬영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염 피디를 중심으로 하는 드라마 스태프들과 최 감독을 중심으로 하는 최 사단으로 나누어져 어수선했다. 주연급 캐스팅의 불발로 대본 리딩을 비롯한 모든 일정이 뒤로 미뤄지기 시작하자 이미 출연이 확정되어 있던 배우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작품의 실질적인 살림꾼인 조연출로서는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었다. 부디 이번에 얼결에 낚은 한재이라는 대어가 최 감독도 마음에도 들기를 기도하는 심정일 뿐이었다.
“연습실로 바로 온댔지?”
“네. 아마 곧 도착할 겁니다.”
시계를 확인한 캐스팅 담당이 염 피디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염 피디가 연습실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서다 말고 옆에 따라오던 조연출을 향해 말했다.
“이따가 혹시라도 최 감독이 또 강짜 놓으면 김 피디가 좀 말려 줘. 내가 말하면 그 양반 더 고집 피울 게 뻔하니.”
골치 아프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염 피디의 말에 조연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던 세 사람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 자리에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 어찌, 목숨은 살려 드리오리까.”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스튜디오 안.
무대의 한가운데에 선 흑발의 청년이 번쩍이는 장검을 비스듬히 내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티셔츠와 블랙진 위에 대충 걸친 연습용 장포가 청년의 움직임에 맞춰 펄럭였다.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딕션과 함께 묘하게 크게 울리는 음성에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상대 역을 맡고 있던 배우가 움찔 몸을 떨며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런 그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본 그가 피식 웃으며 철컥, 장검을 고쳐 쥐었다.
“그럼, 어디 한번 놀아 볼까.”
나직한 한마디와 함께 붉은 장포가 펄럭였다.
[장악원 비록]의 주인공 ‘율’이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