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장악원 비록 (2)
‘대체 뭐지.’
재이는 눈앞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무언가를 의논 중인 박금만 선생과 최 감독, 그리고 염 피디를 바라보며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최 감독과 박금만의 대화가 예상보다 길어지자 상황을 확인하러 다가왔던 염 피디와 정 작가까지 그대로 발목이 잡혀 버린 듯 머리를 맞댄 네 사람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대체 뭐지?”
염 피디의 손짓에 그쪽을 주시하고 있던 조연출이 잽싸게 뛰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재이의 옆에 서 있던 이진홍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강당에 모인 인원들이 어수선하게 수군대는 사이에도 박금만 선생이 시작한 갑작스러운 제작진 회의는 잠시 더 이어졌다. 이진홍이 재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재이 너 박금만 선생님께 미운털 박힌 거 아니야?”
“설마. 나 선생님 직접 뵙는 건 오늘이 처음인데?”
이진홍의 말에 재이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대꾸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였다. 여러 장르와의 적극적인 협업으로 국악의 대중화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알려진 예술 문화계의 저명인사에게 자신이 미운털이 박힐 일이 뭐가 있겠는가.
자꾸 이쪽을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은 …그래, 그냥 기분 탓일 것이다.
“근데 왜 자꾸 네 쪽을 쳐다보시는 것 같지?”
형, 아니야. 그러지 마.
재이는 불길한 말을 입 밖으로 소리 내 하는 이진홍을 흘겨보며 말했다.
“형 제발. 불길한 소리는 입 밖으로 내면 안 되는 법이라는 것도 몰라?”
“어? 아니 난 그러려는 게 아니라. 어, 저거 봐, 또 이쪽 쳐다보시잖아.”
재이의 말에 당황한 이진홍이 말을 더듬다가 이쪽을 힐끔 쳐다보는 박금만 선생의 눈길을 캐치하고는 재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나직이 말했다.
“내가 아니라 형을 보시는 게 아닐까 혹시?”
“하하, 그런 불길한 소리 하는 거 아니다, 너.”
“와, 형 그렇게 안 봤는데 내로남불 너무하네.”
“그건 아니지. 여기 모인 사람 중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열 중의 열 모두 너라고 대답할걸.”
”아 몰라, 괜히 신경 갈리는 소리 하지 말고 시간 남으면 악보나 다시 확인해 두자고.”
아무래도 네가 마음에 드신 모양이라니, 아까 너무 튀긴 하더라니, 하며 중얼거리는 이진홍을 잠시 흘겨본 재이는 손에 들고 있던 악보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간 틈날 때마다 최 감독과 염 피디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파트에 대한 해석을 확인하고 그때마다 메모해 둔 탓에 재이의 악보는 요 며칠 사이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의 러닝메이트로 차출되어 요 며칠 울며 겨자 먹기로 한재이식 벼락치기에 동참해야 했던 이진홍이 질렸다는 듯 재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악보를 뭘 더 확인해? 누구 덕에 꿈에서도 보는구만, 요새.”
“그런 것 치고는 아까 음 이탈하던데?”
악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재이가 심드렁한 투로 대꾸하자 이진홍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그건 아깐 긴장해서. 아니 근데 그 와중에 그게 들렸다고? 와 너 진짜.”
“와 나 진짜 뭐?”
여전히 고개는 악보를 향한 채 잠시 눈만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재이의 눈길에 당황한 듯 이진홍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 아니. 그냥. 박 선배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라서.”
“현오 형? 현오 형이 뭐라고 했는데?”
“…넌 몰라도 돼.”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 재이에게 이진홍이 대충 얼버무렸다. 다시 악보를 내려다보며 허밍으로 음을 잡고 있는 재이를 쳐다보던 이진홍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휴, 저 독종.’
마침 그때, 겨우 이야기가 끝난 듯 제작진들이 하나둘 자리로 흩어지고 최 감독이 출연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박금만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게 있어서 검토를 좀 하느라.”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출연진들을 돌아보며 잠시 숨을 고른 최 감독이 이어 말했다.
“지금 나와 있는 넘버들에 두 곡을 더하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죠. 어느 시퀀스에 들어갈지, 가능할지 확인 좀 하느라 늦어졌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당장 내일부터 레코딩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쪽대본은 들어 봤어도 쪽넘버는 처음인데?”
“누군지 몰라도 죽었네. 죽었어.”
최 피디의 말에 사람들이 서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합동 연습이 끝나면 순차적으로 레코딩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촬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100% 사전제작인 만큼 제작 발표회와 프로모션이 편성되어 있는 기일까지 작품을 완성하려면 일정이 촉박했다. 그 와중에 새로 두 곡을 더 추가하겠다니.
“어떤 파트에 누구 곡이 들어가는 겁니까?”
출연진 중 하나가 궁금하다는 듯 손을 들고 최 감독에게 물었다. 최 감독이 염 피디와 박금만 선생을 힐끔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동이 솔로 넘버 하나랑 단체 곡 하나. 오동이 솔로는 2화
#48쯤으로 검토 중이고 단체 곡은 마지막 회 #78 정도로 검토 중입니다.”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지.
재이는 갑작스럽게 추가가 검토되고 있는 두 곡 중 하나가 자신의 솔로 곡이란 소리를 듣고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주연인 덕에 그러잖아도 남들보다 많은 넘버를 소화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기다 한 곡 더라니. 분산 투자가 트렌드인 시대에 어째서 여긴 몰빵 배팅이냐고.
“갑자기 추가하시기로 하신 이유를 여쭤도 됩니까? 곧 레코딩 시작하는 시점에서 단체 곡이 추가되면 다들 좀 곤란할 것 같은데.”
솔로도 솔로지만 단체 곡도 문제였다.
조금 전에는 운 좋게 분위기를 탄 덕에 그럭저럭 괜찮은 합이 나왔지만 실제로 레코딩까지는 끝없는 파트별 연습과 단체 연습의 반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해진 스케줄만으로도 빠듯한데 거기에 갑자기 하나를 더 얹겠다고 하니 어찌 됐건 출연진들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들 아까 첫 곡 시작하시는 거 보고, 제가 욕심이 나서 말입니다.”
최 감독의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박금만 선생이 입을 열었다. 일평생을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서 온 명인의 한마디에 어수선하던 실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출연진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본 박금만의 시선이 재이에게 와 멎었다.
‘역시 보통이 아니시네.’
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일구어 내는 데 성공한 사람의 눈빛은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잘 느껴지지 않는 독특한 힘이 있었다. 상대방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 듯 거침없는 그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재이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박금만이 입을 열었다.
“오동이는.”
박금만이 재이를 지명하는 소리에 옆에 서 있던 이진홍이 작게 숨을 들이켜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박금만과 재이에게로 집중되었다.
“들어 보니 소리를 배운 적은 없어 보이는데. 울림이 꽤 좋네요?”
“아…, 감사합니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장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칭찬에 재이가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런 재이를 잠시 바라보고 있던 박금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욕심 같아선 내가 붙잡고 제대로 좀 가르치고 싶은데.”
“선생님,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재이 씨 스케줄이 그렇게까지는 안 나올 거예요.”
박금만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염 피디가 재빨리 끼어들어 말했다. 조금 전 회의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왔던 듯했다. 박금만이 알았다는 듯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알았어. 아이고 참. 말도 못 하게 하니, 원.”
염 피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먹이를 놓친 맹수처럼 아쉽다는 듯 재이 쪽을 다시 한번 힐끔 쳐다본 박금만이 출연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촉박한 일정에 부담을 줘서 미안하지만, 아까 여러분이 부르는 첫 넘버를 들어 보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더군요. 번거롭다고만 여기지 말고 함께 열심히 한번 만들어 봅시다.”
‘매너 되게 좋으시네.’
재이는 자칫 제작진에게 불만이 쌓일 수도 있는 상황을 부드럽게 다독여 이끌어 가는 박금만의 대처를 바라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저 외골수 최 감독과 가볍기 그지없는 염 피디에 비하면 확실히 대인배스러운 면모가 엿보이는 듯했다.
“그럼 일단 준비해 온 것부터 들어 보고, 연습 파트 배분해 볼까요.”
박금만이 최 감독과 염 피디를 돌아보며 물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연습의 시작이었다.
* * *
“하하하, 그래서 지금 이렇게 얼굴이 핼쑥하신 거예요?”
그날 밤
라디오 방송국 스튜디오 안.
환심이의 드림캐처가 한창 온에어 중인 가운데 게스트로 출연한 재이가 새 작품 소식을 전하며 국악인 박금만 선생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풀고 있는 중이었다. 작은 부분이라도 타협하지 않고 원하는 퀄리티를 뽑아낼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시키는 박금만의 고집에 맞춰 가다 보니 어지간한 강행군으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재이로서도 드물게 피로가 쌓이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추가된 두 곡의 시연 및 파트 배분까지 그 자리에서 진행한 바람에 예정했던 시간을 훌쩍 넘겨 버린 탓에 재이는 식사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라디오국으로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방송국으로 오는 차 안에서 미리 넘겨받은 대본을 확인하고 본방송이 시작되기 직전에야 겨우 스튜디오에 도착해 피디에게 오늘 진행에 관한 디렉팅을 들을 수 있었던 재이는 목이 타는지 앞에 놓인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짐짓 불쌍한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진짜, 제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고요.”
요 며칠 캐릭터 빌드업에 들어간다고 이진홍과 케이엠 스튜디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연습에 매달린 탓에 은규와 이환과도 며칠 만에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참이었다. 어지간해서는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재이의 푸념 섞인 한숨에 이환과 은규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빼고 재이 쪽을 들여다보며 앞다투어 말했다.
“와, 재이 씨 얼굴에 이거, 이거. 분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이 찐 다크서클.”
“레어하네요. 레어해.”
“아니, 사람이 힘들었다고 하면 위로를 해 줘야지 왜 두 분 다 신나 보이는 거죠?”
힘들어 죽겠다는데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신나 보이는 두 사람의 반응이 못마땅한 듯 재이가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그런 재이의 반응에 신이 난 이환과 은규가 차례차례 말을 보탰다.
“왜 그러세요. 새삼 우리 사이에.”
“그러게. 재이 씨가 오늘 연습이 힘들긴 하셨나 봐요?”
“우리 그룹 모토가 뭔데요.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 아닙니까.”
“재이 씨가 드디어 임자를 만난 것 같군요.”
“박금만 선생님, 존경합니다.”
“역시 은관 문화 훈장에 빛나는 위엄. 언젠가 만나 뵙게 된다면 여쭙고 싶습니다. 한재이 짜는 법.”
“와, 그거 완전 재밌겠는데요! 청취율 올라가는 소리가 막 들리네요!”
신나서 떠들어대는 이환과 은규의 수다를 듣고 있던 재이가 투덜댔다.
“이럴 줄 알았다고요. 와, 올라오는 메시지들 좀 봐. 분명 같은 그룹 멤버가 진행하는 라디오인데 이 어웨이감 뭐죠? 여러분 진짜 환심이한테 너무 물드셨다, 정말.”
재이는 스크린에 올라오는 문자 메시지들을 눈으로 훑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하하, 저희 청취자분들이 어때서요? 2623님, ‘인생 각자도생이죠! 재이 씨, 파이팅입니다.’ 라고 보내 주셨는데요? 그렇죠, 인생 각자도생입니다. 하하하.”
“3879님, ‘재이 씨도 이제 환디와 규디의 마음을 이해할 때가 되었군요,’ 라고 보내 주셨네요.”
“그쵸, 재이 씨, 이제 재이 씨랑 같이 연습할 때마다 우리가 느끼던 심정이 어땠는지 좀 알겠죠? 그쵸?”
“크, 우리 재이 씨에게 역지사지의 정신을 알려 주신 박금만 선생님 진심으로 리스펙입니다!”
“역시 언제 한번 모셔야겠어요. 오, 규디 지금 보셨어요? 피디님이 지금 오케이 사인 보내시는데요?”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이환과 은규를 흘겨본 재이가 이때다 싶어 스크린에 올라온 메시지 하나를 읽었다.
“9986님, ‘그럼 수고한 재이 씨를 위해 환디와 규디가 즉흥 위로 곡 하나 해 주세요,’ 라고 보내 주셨는데요?”
“어어? 그건 아니죠. 게스트 역할인데, 그건.”
재이의 말에 은규가 불길하다는 듯 눈썹을 내려뜨리며 대답했다. 그런 은규 쪽을 보고 빙긋 웃은 재이가 이어 말했다.
“저는 괜찮은데요? 뭣하면 제가 환디랑 규디 대신 진행 볼게요.”
“어허이 그건 아니죠. 어디서 은근슬쩍 사람 밥그릇을 빼앗으려고.”
“2836님, ‘환디 규디가 노래하고 재이 씨가 기타 치면 딱이네요.’ 라고. 오, 1187님, ‘환디 규디 노래 오랜만에 듣네요. 꿀보이스 기대해요. 재이 씨, 땡큐!’ 라고 보내 주셨는데요?”
뒤늦게 수습에 나선 이환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갑자기 벌어진 난전에 신난 시청자들이 올리기 시작한 메시지 중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잽싸게 골라 소개하는 재이를 보며 은규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 이상하네 우리 집인데 왜 우리가 몰리는 기분이죠?”
“피디님이 빨리 진행하라시네요. 반주 넣습니다?”
“아 잠깐만요 잠깐만, 광고,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황급히 광고를 넣어 한숨 돌린 이환이 온에어 불이 잠시 꺼진 것을 확인하고는 재이에게 말했다.
“와, 넋 놓고 있다가 또 털렸잖아.”
“내 말이. 한재이 진짜 처음부터 이러려고 온 거냐고, 오늘.”
이환에 이어 은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리는 말에 재이가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왜 잠자코 있는 사람을 자꾸 건드려.”
제 일 아니라는 듯 느긋한 재이의 말투에 이환이 발끈해서 외쳤다.
“걱정해 준 거지! 걱정.”
“언제는 각자도생이라며.”
“아 32초! 으악, 이환아, 어떡해! 어떡해!”
재이와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이환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은규가 초조한 듯 외쳤다.
“진정해 심은규. 작가님, 우리 이거 진짜 대본 없이 가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스 밖에서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피디와 작가 쪽을 쳐다본 이환은 양팔을 들어 올려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는 작가의 모습에 절망스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아 망했다. 망했어.”
남은 시간 16초.
이게 좋겠다. 저게 낫겠다 하며 뒤늦게 야단법석을 피우는 두 녀석을 구경하며 재이는 느긋하게 남은 생수를 들이마셨다.
드디어 광고가 끝나고 온에어 표시등이 켜짐과 동시에 긴장한 표정의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본 재이가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들어 볼까요. 환디, 규디가 부릅니다. [재재님,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