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장악원 비록 (5)
‘여전히 강적이네.’
재이는 눈앞의 라일라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재이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일라의 폭주가 이어졌다.
“*말이 돼? 저런 데서 촬영을 시킨다고? 삼촌 모가지 치고 왕위 찬탈하는 역할이라며? 저런 거지꼴로 그게 가능하니? 쿠데타 일으키기 전에 길바닥에서 얼어 죽을 판인데?”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야말로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메인 투자자를 힐끔대며 삼삼오오 모여 이쪽을 힐끔대던 제작진들이 속삭였다.
- [붉머용] 때도 굉장했다던데 실제로 보니까 장난 아니네.
- 그러게. 와 입에서 불 뿜는 줄.
재이와 함께 야간 야외 씬을 준비 중이던 배우 중 누군가가 말했다.
- 염 피디 완전 사색이네.
- 자기도 설마 고증 잘한 거로 욕먹을 줄은 몰랐겠지.
- 그러게. 그러니까 내가 안 보이는데 난로나 좀 갖다 놓자니까.
- 입김 나와야 리얼리티 산다고 안 된댔잖아.
- 리얼리티 챙기려면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를 찍어야지.
- 코 빨개지면 메이크업 수정하라고 난리 칠 거면서.
- 아니, 코는 안되고 입김은 되냐고.
- 아무튼, 안 그래도 촬영하다가 입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잘됐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배우들이 수군대고 있는 가운데 성질을 참지 못하겠는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씩씩대고 있는 라일라에게 염 피디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미스 클락, 이건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그러자 그쪽을 돌아본 라일라가 눈썹 한쪽을 치켜세우며 마침 잘됐다는 듯한 표정으로 염 피디에게 물었다.
“*아, 피디? 내가 지금 한재이 취급 저따위로 하라고 투자한 줄 알아요?”
“*네? 아, 아니 그게.”
“*한재이 이름 대대적으로 내세워서 프로모션 들어갈 건데 이런 식으로 찍었다가 망하면 누가 책임질 거냐고?”
‘이쯤에서 슬슬 진정시켜야겠는데.’
직접적인 라일라의 한마디에 주변이 술렁였다. 라일라의 성질이 조금 가라앉도록 잠시 지켜보고 있던 재이가 눈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라일라.”
“*아 왜!”
“*우리 곧 다음 씬 들어가야 하는데 라일라가 방해 중이라고요.”
재이의 한마디에 라일라가 안 그래도 찌푸리고 있던 미간에 와락 힘을 주며 말했다.
“*뭐야? 넌 상황이 이런데도 아무렇지 않은 거야?”
대체 얼마나 물러 터진 거야.
라일라의 날 선 반응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녀의 기세에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런 라일라와 주변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본 재이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극을 어떻게 만드는가는 전적으로 피디와 작가님, 그리고 제작진들의 영역이라고요. 아무리 라일라가 투자자라고 해도 이렇게 마음대로 끼어드는 건 엄청 실례라고.”
“*아니 그럼 저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있어야 해?”
이 상황에서도 정론을 펼치는 재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라일라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따지듯 물었다. 왜 같이 들이받지 않느냐는 듯 못마땅하게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라일라의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 보며 재이가 짧게 대답했다.
“*믿어야죠.”
“*뭐?”
뜻밖의 대답이라는 듯 얼빠진 표정으로 되묻는 라일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재이가 이어 말했다.
“*지금은 라일라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까지 포함해서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 주실 거라고 믿어야 하는 타이밍이라고요. 그게 안목 있는 투자자로서의 재능인 거죠.”
그게 안 되면 그냥 능력 없이 돈만 믿고 날뛰는 멍청이인 거고.
재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길길이 날뛰는 라일라를 상상한 부하 직원들이 눈을 질끈 감은 것과 다르게 얼굴을 한껏 찌푸린 라일라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방진 놈 같으니.”
이 위대한 드래곤을 멍청이 취급하다니.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여간 손톱의 때만큼도 없지.
지금이라도 확 잡아채서 억지로 끌고 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재이를 노려보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라일라는 마침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고개를 돌렸다.
*[자기] 오늘 저녁 먹고 온댔나? 감자탕 해놨는데.
메시지 창을 확인한 라일라가 짧은 문자와 함께 도착한 사진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먹음직스러운 감자탕과 밑반찬들이 정갈하게 세팅된 식탁 너머 유리창에 사진을 찍은 한산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쳐 있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흉흉하던 라일라의 기세가 잠시 흐트러졌다. 얼굴을 굳힌 채 라일라를 경계 섞인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던 재이가 그녀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채고 입을 열었다.
“*바쁘면 가셔도 되는데?”
재이의 말에 잠시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라일라가 고개를 들었다. 어쩐 일인지 조금 전 당장이라도 폭발해 그야말로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것 같던 기세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그래. 나 바쁘니까 빨리하자.”
“*네?”
“*얼른 찍어 봐.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온 거니까 확인은 해야 할 거 아니야. 얼른 슛 들어가 보라고. 나 바빠.”
아까는 세트장을 다 뜯어고치기 전까진 한 발자국도 안 물러설 것 같은 기세더니. 이젠 얼른 찍으라고 성화라니.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건지.
재이가 투덜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것이 사인이라도 된 듯, 라일라와 재이의 공방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던 주변이 후다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하 직원이 모니터가 잘 보이는 위치에 마련해 둔 의자로 재빨리 라일라를 유도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염 피디 옆에 다리를 꼬고 앉은 라일라에게 스태프가 눈치껏 휴대용 난로와 담요를 가져다주었다.
*[위대하신 몸] 소주는?
*[자기] 준비해뒀지. 밥 안 먹고 올 거야?
*[위대하신 몸] 어. 기다려.
*[자기] 오케.
라일라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차분해 보이는 표정이 아까까지 당장이라도 다 뒤집어엎을 듯 펄펄 날뛰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라일라의 눈치를 살피던 염 피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체면이 말이 아니구만.’
평소에 작품은 피디의 영역이라고 그렇게 떠벌리고 다녔는데 막상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길길이 날뛰는 투자자를 눈앞에 두니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염 피디는 오늘 합을 맞추기로 되어 있는 배우들과 장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재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복덩어리인지 화근덩어리인지.’
조금 전 불같이 화를 내며 펄펄 뛰는 라일라 클락을 상대로도 쫄기는커녕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저 하고 싶은 말은 다 내뱉는 재이의 모습엔 당장 뛰어들어서 말려야 하나 속으로 사실 수백 번도 더 갈등했다.
그런데 당장 상대방 뺨이라도 올려치면 어쩌나 싶어서 조마조마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재이가 내뱉은 정론에 가까운 말에 라일라는 화를 내는 대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무슨 말을 해도 불붙은 곳에 기름 퍼붓는 격이었던 것과 대조적인 반응이었다.
‘제 식구라 이건가.’
재이의 형 한산의 수면 클리닉은 이 바닥에서도 유명했다. 화려한 이력과 매너 있는 입담 덕에 미디어와도 꽤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그가 세계적인 부호 클락 컴퍼니의 패밀리 멤버 라일라 클락과 교제 중이라는 것은 이미 공공연히 밝혀진 사실이기도 했다.
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아니 찌르면 찌른 사람 목을 잘라 버릴 것같이 무서워 보이는 라일라 클락을 말 몇 마디로 진정시킬 수 있다니.
재이가 대단한 것인지 그의 형 한산이 대단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염 피디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쨌거나 이걸로 일단 영문 모를 피폭은 면한 모양이었으니 다행이었다.
‘대체 천막의 뭐가 불만인 거야.’
너무 곱게만 자란 분이라 저런 데서 사람이 생활했었다는 것 자체가 컬쳐쇼크였나.
세트장 한쪽에서 밤바람에 펄럭이는 낡은 천막을 쳐다본 염 피디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모니터 너머로 스탠바이 한 채 자신의 사인을 기다리는 배우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 *
‘너무 추운데.’
낡은 천막 안에서 군불을 뒤적이던 팽사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꼼꼼히 여며 봐야 얼기설기 얽은 천만으로는 허름한 틈새를 파고드는 겨울바람을 막아 내기 어려웠다. 오동, 아니 악공 오동으로 신분을 감추고 있는 율의 반대를 무릅쓰고 천막 안에 놓은 작은 난로 덕에 그나마 찬 바닥에서 동사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궁여지책일 뿐이었다.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팽사헌이 입을 열었다.
“날이 정말 찬데 그냥 정길 선생 댁에서…….”
“안 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려온 상전의 느긋한 대답에 팽사헌이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말했다.
“진짜 춥습니다. 춥다고요.”
“그래서 불 때잖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고는 손에 들고 있는 대금을 빙빙 돌려 보이는 율의 태연한 모습에 팽사헌이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이걸로 되겠습니까. 이러다 고뿔이라도 걸리시면.”
“네가?”
“아니 저하, 흠 아니 형님이.”
일순 팽사헌을 노려보던 율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전에도 고뿔 걸렸던 건 나 아니고 너였던 걸로 기억한다만?”
“그때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가 언제 고뿔 걸리는 거 봤느냐. 별 핑계를 다 대는구나.”
“아니 그래도 진짜 이 길바닥에서 겨울을 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봐야 내달까지 아니더냐.”
“아무리 그래도.”
“이보다 더한 곳에서도 먹고 자고 했는데 인제 와서 새삼 뭐가 걱정이라고.”
“그건.”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팽사헌을 힐끔 바라본 율이 몸을 일으켜 앉아 팽사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잊지 마라. 우리의 근원은 따뜻하고 아늑한 대궐 안 구들장이 아니라 짐승의 날카로운 이빨도 뚫지 못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은 시체로 가득한 벌판이라는 것을.”
조금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태평하게만 보이던 율의 기세가 순식간에 변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뿜어내는 맹렬한 기백에 팽사헌이 조용히 대답했다.
“…예.”
마침 천막이 걷히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거사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점조직 중 사대부 쪽과의 연락을 맡은 조걸이었다.
“호담에게서 기별이 왔습니다. 내달 말일에 나례회를 거하라는 어명이 있었다며.”
“허, 한 달이 멀다 하고 나례라니. 누가 보면 궁에 귀신이라도 붙은 줄 알겠군.”
“풍문에 의하면 의심증이 극에 달한 듯하다고 하더이다. 어제는 강녕전으로 찾아간 민 정승에게 술병을 집어 던지셨다고.”
조걸의 말에 율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숙부께서는 어주를 신박하게 내리시는 모양이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리는 눈빛은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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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눈빛을 이런 데 써먹고 있다니, 망할 놈.’
라일라는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염 피디의 어깨너머로 들여다본 모니터에서는 죽었다던 세자 ‘이율’이 자신의 숙부를 향해 전의를 불태우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염 피디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조금 전까지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녀석이 바짝 조였던 긴장의 끈을 풀어내듯 카메라를 쳐다본 채 싱긋 웃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증스러워라.’
라일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팽팽하게 달아올랐던 긴장감이 풀어진 촬영장에 어수선함이 돌아오고 바쁘게 오가는 스태프들 너머로 재이를 둘러싼 배우들이 그와 격의 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다들 저게 얼마나 무자비한 인간인지 몰라서 저렇게 들러붙는 거지. 저쪽 동네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을.’
대륙의 황제라는 인간도 저 인간 옆에서는 얌전한 개새끼처럼 빌빌댔는데.
라일라는 언제나 홀로 오연히 서 있던 붉은 머리의 용사를 떠올리고는 진저리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보위를 가로챈 숙부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며 돌아온 왕세자 역할이라길래 드디어 저 녀석이 두 눈 회까닥 뒤집고 미친놈처럼 칼질하는 모습을 보겠구나 싶어서 달려왔더니.
왕세자가 무슨 거지도 아니고 길거리 전전하면서 노래나 부르고 춤이나 추고 있질 않나. 대체 지금 뭐 하자는 거냐고. 저래서 언제 왕 목 뎅겅 할 건데?
라일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콱 찌푸렸다.
‘아까도 그래.’
신성력 없이 단순한 기백만으로도 새까맣게 몰려든 몬스터들이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게 할 만큼 살벌하던 그 눈빛을 기껏 카메라 노려보는 데나 쓰고 있다니.
‘저놈에게는 피리가 아니라 칼을 들려야 한다니까.’
날붙이라도 들고 있었으면 조금 더 그럴 듯했을 텐데.
피디가 문제야 작가가 문제야, 대체.
왜 떠먹여 줘도 제대로 써먹을 줄을 모르냐고.
라일라는 애꿎은 피디를 힐끔 노려보고는 다시 눈앞의 재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 선 키 큰 배우에게 찌르기 동작이라도 시범을 보이는 듯 들고 있던 대금을 휘둘러 보이던 재이가 자신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배우의 동작에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재이의 웃는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라일라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리되는 대로 끌고 가야지.’
여기 더 있다간 진짜 물러 터져서 못 쓰게 될지도 모르겠잖아.
라일라의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