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기
“진심이야?”
“진심이야.”
한산의 집.
식탁에 앉은 재이 앞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꼬리곰탕을 내려놓으며 한산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붉은 용 이야기] 프로젝트 때문에 요새 바쁘다는 라일라를 위해 만들었다는 곰탕은 얼마나 오래 끓였는지 한눈에 보기에도 야들야들하게 익은 고기 살이 두툼이 붙어 있는 꼬리뼈와 뽀얀 국물이 먹음직스럽게 우러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런 소리를 들으면 미친 거 아닌가 일단 의심부터 해야 맞지 않나?”
재이는 꼬리뼈 하나를 집어 들고 뜯으며 한산에게 물었다. 조금 전까지 스튜디오에서 한우를 집어 먹었지만, 카메라 신경 쓰랴 멤버들 신경 쓰랴 하느라 제대로 맛도 못 느끼고 먹은 기분에 억울하던 차였는데 앉자마자 고기라니. 둘째 형이 인간성은 좀 의심스러워도 손님 대접은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여자친구가 어느 날 자신이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드래곤이고 당신의 동생과는 저쪽 동네에서 철천지원수 사이였다는 소리를 하면 대부분 그 말을 한 여자친구의 정신 상태부터 의심해 보지 않냐고.
“그걸 그냥 믿는다는 게 말이 돼?”
재이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말에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가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한산이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이야.”
한산의 말에 순식간에 깨끗하게 발라 먹은 뼈를 접시에 내려놓던 재이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잠깐. 거기서 이 몸은 천재라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고 어쩌고 시작하기만 해 봐, 아주.”
자신을 노려보며 중얼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새로운 꼬리뼈를 들고 실하게 붙어 있던 살코기를 베어 무는 재이를 바라보고 있던 한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것도 맞긴 맞는데.”
“츤는에 븐흐뜬 스르드 빼.”
첫눈에 반했다는 소리도 빼라는 말을 덧붙이며 시선만 들어 저를 노려보는 재이의 말에 한산이 재차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그것도 맞긴 하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재이의 동그란 이마를 잠시 바라보던 한산이 입을 열었다.
“애초에 설명이 안 됐거든.”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한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한산이 라일라를 발견한 것은 카히타마하키에서였다. 리조트에서 열린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체류 중이던 한산은 연구비 후원 행사를 위한 사무국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중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는 날씨 속 해안가에서 처음 라일라를 만났다.
“차원의 문을 열고 있었다고?”
국물만 남은 뜨끈한 곰탕에 밥 한 공기를 전부 쏟아붓던 재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그런 재이에게 직접 담았다며 깍두기 그릇을 앞으로 밀어 주며 한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은 그렇게 이야기하더군.”
“그걸 믿었고?”
어이없다는 듯 툭 내뱉은 재이가 커다랗게 뜬 한 숟가락에 먹음직스럽게 익은 깍두기를 얹어 입에 넣고 우물대며 한산 쪽을 쳐다보았다.
“직접 건너온 네가 못 믿겠다는 거야?”
“문을 연 건 내가 아니라서 말이지.”
농담이라도 하듯 웃으며 툭 던진 한산의 말에 재이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땠길래?”
조금 가라앉은 재이의 눈빛을 마주 보던 한산이 기억을 떠올리는 듯 잠시 뜸을 들인 끝에 대답했다.
“…글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지금껏 알고 있던 상식이 모조리 산산이 조각나는 느낌?”
진짜, 내가 미쳐서 헛것을 보나 싶긴 했다.
그때는.
한산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그래서는 뭘. 그 수상한 여자가 멀쩡한 얼굴로 내 후원회 행사에 왔길래 내가 먼저 접근했지.”
어느새 한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바닥을 보인 그릇을 양손으로 붙들고 남은 국물을 후루룩 마신 재이가 물었다.
“그쪽에서 관심은 줬고?”
“내가 어때서.”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아시아 출신 비주류 연구자?”
“대신 머리 좋고 잘생겼잖아.”
“정정.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재수도 없네.”
그릇을 내려놓으며 투덜거린 재이가 한산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라일라가 무슨 꿍꿍이속인 줄도 알고 있는 거야?”
“돌아가려고 하는 중이겠지.”
아, 난 국물은 됐고 고기만 조금 더 줘. 아까 뭘 좀 먹고 왔거든.
자신의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나는 한산의 등 뒤에 대고 말한 재이가 제 앞에 다시 쌓인 고기 중 하나를 집어 들며 물었다.
“그래서 어쩔 건데?”
“존중해야지.”
“쿨하네?”
언제는 첫눈에 반했다더니.
고기를 뜯고 있던 재이가 눈을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의심스럽다는 재이의 눈빛을 마주한 한산이 태연한 얼굴로 재이의 빈 컵에 물을 따라 주며 대답했다.
“따라갈 거거든.”
“…미쳤구나?”
재이의 짧은 한마디에 한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까도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말.”
“데려는 간대?”
“음…교섭 중?”
재이가 먹고 있는 꼬리곰탕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한산이 빙긋 웃었다.
* * *
며칠 후.
“…진짜 미친놈은 따로 있었네.”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재이는 눈썹을 팍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인혁이 드물게 거친 말을 소리 내 중얼거린 재이를 놀라 돌아보며 말했다.
“한재이, 그런 말은 눈으로만 하라고 했지.”
“아, 쏘리.”
자신의 잔소리에도 표정 하나 변함없이 입으로만 중얼거린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재이에게 인혁이 물었다.
“뭔데 그래?”
“아. 한산.”
짤막한 재이의 대답에 인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산이 형님? 왜?”
“별거 아냐.”
재이가 눈을 찌푸리며 얼버무리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엠케이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산이 형님? 혹시 청첩장 보내셨냐? 날짜 언제로 잡으셨대?”
엠케이의 물음에 재이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고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귀신같은 놈. 어떻게 알았냐?”
“지난번에 클리닉 갔다가 뵈었을 때, 네 편으로 청첩장 보내겠다고 하셨었거든.”
그래서, 왔어? 어디서 하신대?
엠케이의 말에 차 안에 타고 있던 다른 멤버들까지 재이를 돌아보며 한마디씩 했다.
“와, 산이 형 드디어 결혼하셔?”
“대박. 진짜 하시는구나?”
“석관이 형, 들으셨어요? 산이 형님 드디어 결혼하신대요.”
“어? 그래? 나 아직 연락 못 받았는데. 재이한테만 먼저 하셨나 보네?”
일단 축하한다고 전해 드려.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차 안 분위기가 못마땅하다는 듯 살짝 눈을 찌푸리고 있던 재이가 운전석에서 룸미러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며 한마디 던지는 석관에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결혼식은 어디래? 어디서 하신대?”
엠케이가 신난다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 얼굴을 힐끗 쳐다본 재이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건 왜?”
“우리도 가야지!”
재이의 물음에 엠케이의 옆에 앉아 있던 남궁찬이 당연한 소릴 한다는 듯 대신 대답했다.
“너희가 거길 왜 가?”
“그럼 안 가?”
재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받아치자 뒤쪽에 앉아 있던 이환이 다급하게 몸을 당겨 앉으며 되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다섯 쌍의 눈동자를 쓱 훑어본 재이가 말했다.
“거길 너희가 왜 가.”
“산이 형님이 결혼하시는데 우리가 가야지, 당연히.”
“형님이 남이냐.”
남인데?
남이지.
남이야!
남이라고!!
자신의 타박에도 꿋꿋이 한마디씩 내뱉는 멤버들을 쳐다보며 재이가 속으로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런 재이를 쳐다보고 있던 인혁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도 가실걸?”
“대표님은 또 왜?”
재이가 놀란 눈으로 인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인혁이 재이가 들고 있는 핸드폰 화면에 뜬 한산과 라일라의 청첩장을 힐끗 확인하고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클락 컴퍼니 쪽도 그렇고 그쪽 큰손들 많이들 몰려올 거 아니야. 네 핑계 대고 비즈니스 좀 하고 오시겠지.”
“결혼식이 무슨 사업이냐고.”
“그 정도 되면 사업이지, 뭐. 대충 올 사람들만 떠올려 봐도 이미 뭐. 와, 미디어 장난 아니게 붙겠는데?”
재이의 중얼거림에 뒤에 앉아 있던 은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잠시 조용하던 엠케이가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외쳤다.
“어? 야, 기사 떴다, 기사.”
“무슨 기사?”
“형님 결혼식.”
“헐 대박. 영어…….”
“형수님이 셀럽 맞긴 맞네.”
엠케이가 내민 영미판 타블로이드지에는 어디서 입수한 것인지 재이가 받은 것과 같은 청첩장에 담겨 있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있었다.
신비의 섬 카히타마하티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세계적인 미디어 부호 클라크 가문의 패밀리 멤버와 아시아계 천재 뇌과학자가 자신들을 맺어 준 섬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는 소식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그럼 무려 그 세기의 결혼식에서 우리가 부르는 거야?”
이환이 문득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재이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불러?”
“축가.”
“그건 또 무슨 신박한 김칫국이냐.”
아니 대체 팔자가 얼마나 꼬이면 저쪽 동네에서 죽으라고 염불을 외던 상대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러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는 거냐고.
재이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내심 중얼거리자 남궁찬이 놀랍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아니 그럼 잘나가는 가수 동생을 뒀는데 축가 부르는 사람을 따로 쓴다고?”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거 아니냐.”
“아무리 너희 두 사람이 가출 브라더스라고 해도 그건 아니지.”
“한재이 너와는 달리 우리는 받은 은혜를 잊는 인간들이 아니라고.”
멤버들이 앞다투어 끼어들었다.
“그럼, 그럼. 산이 형님도 그렇지만 형수님이 너한테 얼마나 잘해 주셨냐고.”
“그럼, 그럼. 한재이 너 장비록 촬영장에서 모포랑 난방 도구 공수받아서 사람들한테 그렇게 뻐겨 놓고 은혜를 그런 식으로 갚으면 안 된다, 엉?”
“그치그치. 설마 경찰청 감사패를 네가 잘해서 받은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응?”
“내가 살다 살다 예비 시동생을 이렇게 살뜰하게 챙기는 형수님은 또 처음 본다고.”
“그러게, 저게 대체 뭐가 예쁘다고.”
헐, 누가 누굴 챙겨?
재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인혁이 그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라일라 클락이 한재이 예뻐하는 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
“진짜, 형수님 피의 쉴드는 옆에서 보는 내가 다 눈물 날 정도인데.”
인혁의 말에 앞쪽에서 엠케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남궁찬이 끼어들었다.
“자 한재이 잇츠 타임 투 보은! 알겠냐, 결혼식 축가라니 이 얼마나 돈도 안 들이고 평생 생색낼 방법이냐고.”
“남궁찬 너는 지금 돈이 문제냐. 어쨌거나 걱정하지 말라니까. 인성 갑인 우리가 같이 가 줄 테니까.”
“그렇지. 이야 우리 진짜 너무 천사인 듯.”
“레알, 한재이가 어디 가서 인간 취급 받는 거 다 우리 덕이라니까.”
남궁찬의 말에 가볍게 핀잔을 주면서도 축가 부르러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못을 박는 엠케이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멤버들을 둘러본 재이가 앞쪽에서 운전 중인 매니저 김석관에게 물었다.
“형, 우리 스케줄 빡빡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괜찮아, 일주일 정도면 어떻게든 뺄 수 있을 거야.”
석관이 내놓은 대답이 못마땅하다는 듯 재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흘겨보며 되물었다.
“언제는 내후년까지 스케줄 꽉 차 있다더니?”
“그건 대외용 멘트고. 이건 어떻게든 조정해야지.”
“우리 다 가려면 절차도 엄청 복잡할 텐데요?”
꼬치꼬치 캐묻는 재이의 앞뒤에서 남궁찬과 이환이 빽 소리 질렀다.
“아, 형이 괜찮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러게! 그런 건 우리 김 팀장님을 믿고 맡기라고!”
그 소리에 와락 얼굴을 구긴 재이는 축하 선물은 뭐가 좋겠냐, 축가는 뭐가 유행이냐, 아니 이참에 새로 한 곡 만들어 보는 건 어떻냐 등등 이미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여념이 없는 멤버들을 어이없다는 듯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아니 대체 왜 지들이 더 신났냐고.”
그런 재이를 룸미러 너머로 살핀 석관이 말했다.
“한 선생님이 남도 아니고. 원래 이런 경조사는 챙기는 게 우리 회사 분위기인 거 재이 너도 알잖아.”
“아니 그건 그렇지만. 굳이 이 바쁜 와중에 멤버들이 우르르 다 몰려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카히타마하티가 어디 옆집 이름도 아닌데.”
거기까지 언제 가느냐고.
재이가 투덜거리는 말에 김석관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꼭 가야지.”
절호의 비즈니스 찬스인데.
룸미러 너머 마주친 매니저의 눈빛이 노다지를 노리는 광부의 그것처럼 의욕으로 가득 차 빛나고 있는 것을 본 재이가 무거운 한숨을 흘리며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왠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청첩장 속 붉은 머리 신부의 환한 황금빛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재이는 눈썹을 콱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