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혼돈과 파괴와 결혼식 전야제
“으아, 이 자본의 향기.”
“여길 통째로 빌려 버리다니 , 이것이 바로 찐 셀럽의 클래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리조트 로비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던 남궁찬과 이환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옆에서 걷고 있던 엠케이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발 좀. 호텔 처음 와 보는 사람들처럼 왜 이래 진짜.”
그 말을 들은 이환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대답했다.
“어쩌겠어. 본투비 서민인 것을 .”
“그니까. 난 이런 데 오면 좀 부담스럽더라고.”
“그건 언어의 문제 아니고?”
“아, 그거였나?”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이환과 남궁찬 뒤를 따라 걸으며 탁 트인 시야 한가득 들어오는 바닷가의 풍경을 바라보던 엠케이가 감탄을 터뜨렸다.
“경치 죽인다. 괜히 마지막 낙원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네.”
그러자 옆에서 해쓱한 얼굴로 은규가 중얼거렸다.
“경치고 뭐고, 난 졸려 죽겠다. 일단 자고 일어나면 안될까.”
“안 돼 , 지금 자면 이따 밤에 못 잔다고. 일어나 심은규, 일어나.”
“그래, 좀 힘들더라도 지금 버티고 좀 이따 어두워지면 그때 자.”
이미 눈꺼풀이 반쯤 내려오고 있는 심은규의 팔을 잡아 흔들어 깨우며 인혁이 말했다. 그 옆에서 한마디 거들던 재이는 새삼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동 시간만 꼬박 이틀이 걸려 도착한 곳은 이번 결혼식을 위해 통째로 빌렸다는 7성급 호텔 리조트였다. 까다로운 보안 절차 를 통과해 들어온 리조트 안쪽은 세기의 결혼식을 취재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밀려든 미디어로 복작대는 바깥쪽과 달리 여유롭고 조용한 느낌이었다. 객실까지 이어지는 동선 또한 최대한 다른 참석자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저녁 식사 입식 파티 라 제대로 못 먹을지도 모르니까 방으로 먼저 음식 좀 보내 달라고 했어. 그거 먹고 일단 좀 쉬고 있어. 스태프들 준비되는 대로 같이 올라갈 테니까 .”
2인 1실로 배정된 호텔 방의 카드키를 하나씩 나눠 주며 간단하게 오늘 일정에 대해 설명하는 석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궁찬이 새삼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결혼식 전야제라니, 제대로 돈 쓰네.”
“오는 사람들을 봐라. 그냥 모아만 둬도 돈을 찍어 낼 사람들인데 그냥 두기 아깝지.”
“거기 우리도 포함되는 건가 ?”
남궁찬의 말에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자 이환이 냉큼 끼어들었다.
“그거 왠지 어깨에 힘 들어가는 기분인데.”
멤버들의 수다를 듣고 있던 은규가 작게 중얼거렸다.
“뿌듯해서? 아님 긴장해서?”
“둘 다.”
빙글빙글 웃으며 묻는 재이의 말에 은규가 대답하는 것을 보고 있던 석관이 말을 이었다.
“축가는 내일 밤이니까 오전에 리허설 하고 저녁때 예식 참가할 때까지 틈틈이 짬 좀 날 거야. 그렇다고 너무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는 말고. 미디어 입장은 내일 오후부터라긴 하지만 미디어 아니더라도 너희한테 관심 있는 사람들은 많을 테니까 말이야.”
석관의 말에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화려한 샹들리에와 싱그러운 꽃으로 풍성하게 장식된 연회장.
내일 있을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와 준 하객들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마련된 결혼식 전야제가 시작되었다.
바깥쪽과 이어진 개방형 아치 너머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과 아름다운 밤바다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피아노 4중주의 연주가 흐르는 실내 한쪽에는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길게 차려져 있었고 앞서 도착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한 손에 글래스를 든 채 실내 여기저기 놓인 테이블을 둘러싸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가 한껏 차려입은 모습이 영화 속 화려한 파티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파티의 멤버들은 석관과 홍정수, 그리고 문선일 대표와 함께 연회장에 도착했다.
“와, 어색해.”
실내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관계자들에게 둘러싸여 버린 매니저들과 대표와는 달리 자신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소곤대기만 할 뿐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틈에 어색하게 서 있던 은규가 못 견디겠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이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 영화에서는 엄청 멋있어 보이더니, 빛 좋은 개살구였구만.”
“내 말이. 아니 왜 음식을 앞에 두고 다들 얘기만 하고 있냐고.”
남궁찬이 동감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런 남궁찬을 어이없다는 듯 힐끔 쳐다본 재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먹어 봐야 간에 기별도 안 가게 생겼으니까 그냥 포기해.”
“그래, 저거 들고 돌아다녀 봐야 모양만 빠져.”
“아니 그래도.”
재이에 이어 이환까지 한마디 씩 하자, 남궁찬이 발끈해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엠케이가 말했다.
“아서라, 이거 협찬받은 거라 곱게 입고 돌려줘야 된다고 아까 최 실장님이 신신당부 하신 거 못 들었어?”
“아까 먹고 오길 잘했네. 석관이 형 역시 믿음의 김 팀장님.”
엠케이의 말에 은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는데 마침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한 남궁찬이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어? 저기 산이 형님이다.”
“어디? 와, 형수님도 계시네.”
“와 대박. 연예인 같아.”
“라고 현역 아이돌이 이야기합니다.”
멤버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사이 사람들을 헤치고 이쪽으로 다가온 두 사람이 인사를 건넸다.
“바쁜데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 다들.”
“*잘 왔어.”
머리색과 같은 붉은 색의 이브닝드레스 에 한눈 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크기를 자랑하는 반짝이는 보석들로 화려하게 치장한 라일라가 멤버들을 쓱 훑어본 뒤 재이를 빤히 쳐다보며 짧게 말했다.
“축하해요, 형님. *축하해요, 미스 클락.”
“*라일라라고 불러.”
“*넵, 라일라.”
멤버들이 반가우면서도 어색한 듯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한산과 라일라의 시선이 재이에게 머물러 있는 것을 눈치챈 인혁이 입을 열었다.
“저는 목이 좀 말라서 음료수 좀 가지고 오겠습니다, 형님. 재이랑 이야기 나누세요.”
“어… 저기, 저희도 저기 음식 좀 먹고 올게요! 오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배가 고프네, 아하하.”
“응? 엠케이 아까 방에서 티본스테이크 하나 작살냈잖… 어? 야아, 밀지 마. 밀지 마.”
인혁의 눈짓을 캐치한 엠케이가 재빠르게 뒤이어 외치고는 자신의 말에 눈치 없이 토를 다는 이환과 상황 파악 안 된 남궁찬, 그리고 그런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은규의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아 왜, 나 두 분이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 아, 아아, 야, 엠케이, 잡아당기지 마, 이거 협찬이라고 옷에 주름 가아아 .”
“시끄러워, 남궁찬. 제발 눈치 좀 챙겨라 좀.”
“와 저기 초코렛 퐁듀다! 초코렛 퐁듀!”
“어디? 어디? 오오오오 대박, 진짜네!”
“야, 너희 그런 거 먹다가 옷에 흘리면 어쩌려고! 어휴, 대체 애들도 아니고 우르르 몰려다니냐고, 왜.”
음료수 바 카운터 로 걸음을 옮기려던 인혁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멤버들을 따라나서고 한산과 라일라, 재이만이 남자 두 사람을 한 번 훑어본 재이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축하해요. 천년만년 ‘둘이 함께’ 행복하게 사시길 바라요.”
강조점을 팍팍 주며 건넨 재이의 인사말 에 한산이 빙긋 웃었다. 반면 예비 신랑의 팔에 팔짱을 낀 채 예비 시동생의 축하 인사를 듣던 라일라는 조금 전 재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즐길 수 있을 때 많이 즐겨 둬.”
그 의미심장한 말에 이번엔 재이가 눈을 찌푸렸다.
‘뭐야, 한산, 교섭 중이라더니 . 결렬인 거야 ?’
힐끔, 형 쪽을 쳐다보자 한산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살짝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짧게 흘겨본 재이가 라일라를 향해 말했다.
“*라일라야말로. 저 인간이 음식을 잘하긴 해도 본토에서 먹느니만 못할 텐데 . 김치전에 소주 한잔 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였댔었나?”
“*감자탕. 감자탕에 소주.”
뜬금없이 왜, 라고 툴툴대면서도 또 묻는 말에는 순순히 대답하는 라일라를 쳐다보며 재이가 이어 말했다.
“*어쨌거나. 잘 생각해 봐 . 여기 말 중에 정 붙이면 거기가 고향이라는 소리가 있거든. 여기나 되니까 그나마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미디어도 있고 하지, 어디 가면 카메라 말고 다른 걸 들고 쫓아다닐 텐데 말이지.”
“*시끄럽거든.”
재이의 마지막 말에 라일라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툭 내뱉었다. 그런 라일라를 유심히 바라보던 재이가 말을 이었다.
“*뭐, 일단 축하는 해 줄게. 세상에 내가 살다 살다 이런 꼴도 다 본다 싶어 아직도 어이가 없긴 하지만.”
“*왜, 잘 어울리지 않아?”
못 볼 꼴을 다 본다는 듯 표정으로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리는 재이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보란 듯이 한산에게 조금 더 몸을 기대서서 묻는 라일라에게 재이가 짧게 대답했다.
“*아까 한 말 취소. 그냥 가라. 둘이.”
“*이게 근데…… .”
재이의 말에 기분이 상한 라일라가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 입을 연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와 이렇게 보니까 또 색다르네? 옷이 날개라는 말이 맞나 봐 ?”
“*…로이스.”
라일라가 얼굴을 팍 찌푸리며 뒤돌아보았다. 재이는 고개를 빼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짧은 갈색 머리에 회색 눈동자.
노을이 타오르듯 붉은 머리칼의 라일라와 닮은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물이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저분 이 바로 라일라를 아시아 지사로 날려 버린 그분인가 본데 .’
감정을 숨기는 법에 서툰 라일라가 불편한 심기를 한껏 드러내고 있는 상대는 후계 경쟁에서 자신을 밀어내고 승승장구 중인 클락가 의 차기 실세 로이스 클락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로이스가 라일라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도 참. 이런 거한테 뭘 이렇게까지 돈을 들이시는 건지 .”
옆에 선 한산이나 그 옆에 서 있는 재이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라일라만을 바라보며 내뱉은 로이스의 말에 라일라가 발끈해서 입을 열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온 거야 대체.”
“*나도 이런 벽지까지 오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겠냐. 아버지가 가자고 하시는데.”
라일라의 날선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태연하게 제 할 말만 하는 로이스의 심드렁한 말투에 재이가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건 라일라가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겠네. 딱 보기에도 천 년 묵은 구렁이상 인데.’
“*이 요란을 떨고 하는 결혼이니 문제 만들지 말고 잘 살도록 해. 가문에 먹칠하는 건 이제 졸업할 때도 됐잖냐?”
로이스의 말에 한산의 팔을 잡은 라일라의 손끝이 하얗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한산이 그런 라일라의 손을 제 손으로 덮어 감싸 주는 것을 본 로이스가 코웃음을 치는 것을 구경하며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와, 나 지금 완전 팝콘 필요한데. 팝콘 왜 없지.’
재이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로이스와 라일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남의 집안싸움 구경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라이브로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세계적인 셀럽이라는 클락가 의 싸움이라니. 라일라보고 가문에 먹칠한다지만 자기도 생판 남 앞에서 거리낌 없이 저러는 거 보면 저쪽 도 만만치 않게 망나니인 것 같은데.
아닌가, 라일라 옆에 있는 아시아인 두 명은 인간 취급도 안 하는 건가 혹시? 어느 쪽이건 이대로라면 클락가 의 미래가 너무 암울한데?
오지랖 넓게 남의 가문 미래까지 걱정하며 구경 중인 재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일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로이스가 이어 말했다.
“*아버지의 축가 제의도 거절했다며? 헤인뷔르텐 합창단을 차고 섭외한 게 고작 K팝 아이돌이라니. 수준 하고는. 쯧.”
‘어, 근데 잘 나가다가 왜 들이박지?’
재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힐끔 시선을 돌리니 마침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한산과 눈이 맞았다.
참아? 말아?
재이의 눈빛을 읽은 한산이 살짝 웃는 것이 보였다. 그 틈에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헤인뷔르건 나발이건 너 쟤네가 요새 얼마나 잘나가는지 모르는구나? 하긴, 허구헌 날 사무실에 처박혀서 숫자만 보고 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알 리가 있나. 얘네 내후년 스케줄까지 꽉 차 있다는 걸 특별히 데려온 거라고 . 리조트 입구에 몰린 미디어 중 절반은 얘네 보려고 모인 인간들일걸? 애초에 우리 한산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다고.”
기승전 한산 자랑으로 말을 끝내고는 보란 듯이 턱을 한껏 치켜들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라일라를 힐끔 돌아본 재이는 내심 혀를 찼다.
‘라일라, 넌 진짜 불 뿜는 거 빼곤 잘하는 게 없구나.’
왜 부끄러움은 다 내 몫이냐고.
재이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민망한 듯 헛웃음을 들이켜는데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로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일라, 라일라. 부르려면 좀 제대로 된 가수를 불렀어야지. 아무리 번갯불에 콩 볶듯 하는 결혼이라고 해도 축하연에 아이돌 재롱 잔치 는 좀 너무하잖아?”
조금 풀리는 듯했던 라일라의 기세가 일순 다시 험악해졌다. 자신의 한마디 에 치를 떠는 라일라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은 로이스가 재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 거기 잘나가는 아이돌 씨. 어디, 영어는 할 줄 아나?”
자신을 내려다보며 묻는 로이스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며 재이가 대답했다.
“뭐래, 늙다 만 구렁이같이 생긴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