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출 1호 아이돌 연습생이 되었다-222화 (222/224)

#222

심은규, 너 그거 플래….

“*진짜 날 두고 갈 거야, 라일라?”

늦은 밤.

전야제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한산이 라일라에게 물었다.

편한 차림으로 드레스룸에서 나오던 라일라가 푹신한 가죽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한산의 눈을 슬쩍 피하며 말을 흐렸다.

“*글쎄.”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습관처럼 자신의 무릎을 베고 드러눕는 라일라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한산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라일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한산을 올려다보았다.

“*거기가 어디라고. 자기는 하루도 못 버틸걸.”

“*그렇게 험해?”

“*그럼. 인간의 목숨 따위 길 가다 발에 채이는 돌멩이만도 못하다고.”

“*그래도 괜찮은데.”

“*죽을지도 모르는데도?”

라일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한산은 그게 뭐 대수냐는 듯 평온한 어조로 라일라의 붉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구불구불 감아올리며 대답했다.

“*라일라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거기선 라일라가 제일 세다며.”

“*그치……. 자기 동생만 빼면.”

“*그러니까 걔를 안 데리고 가면 당신이 제일 세겠네.”

어, 그건……. 그렇지.

라일라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늙어 빠진 마법사도 있어.”

“*그분은 곧 죽을 것 같다며.”

“*그건 그래.”

곰곰이 생각에 빠진 라일라를 잠시 쳐다보던 한산이 가볍게 툭 내뱉듯이 말했다.

“*아예 안 가는 것도 방법이야.”

“*그건.”

고집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으려는 라일라의 말을 막으며 한산이 한 박자 먼저 말했다.

“*[붉은 용 이야기]는 라일라가 없으면 백퍼 엎어질걸.”

“*그건…….”

라일라의 얼굴이 흐려졌다.

[붉은 용 이야기]는 라일라에게 자식과도 같은 프로젝트였다.

카히타마하키에서라면 남아 있는 권능을 쏟아붓지 않아도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는 ‘주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만 않았더라도 작품이 완성되어 세상 모든 인간들에게 레드 드래곤의 위대함을 확실하게 알려 준 다음 돌아갔을 것이다.

라일라의 얼굴에서 망설임을 읽은 한산이 이어 말했다.

“*게다가 곧 있으면 게가 제철인데. 꽃게탕에 소주 한 잔을 두고 갈 수 있겠어?”

“*으음…….”

“*내가 따라가면야 음식이야 해 줄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나는 것들이 거기에도 모두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아니 애초에, 거기선 인간들이 먹는 음식을 먹어도 맛 같은 것도 안 느껴졌었다며.”

“*으으음.”

라일라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 빌어먹을 샤리프에게 복수하겠다는 결심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권능 없이 사는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이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인간의 오감이 주는 자극은 레드 드래곤으로서의 본능적인 전투욕을 잊게 할 만큼 강렬한 유혹이었다.

이 모든 자극을 버리고 다시 그 영원의 시간축에 올라선 관조자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라일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주기’는 돌아올 거잖아. 그때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때?”

“*이번에 놓치면 30년 후라고.”

“*영겁도 사셨다는 분이 30년쯤 뭐가 어때서. 게 축제 30번만 가면 금방인데?”

“*그건…….”

한산의 말에 라일라가 반박하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한산은 그런 라일라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거의 넘어온 듯한데.’

이 성질만 급하지 단순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약혼녀는 깊게 생각하는 데 서툴렀다. 그만큼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기도 했다.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이리 튀고 저리 박는 탓에 적도 많고 허물도 많은 사람이었다.

‘아니, 드래곤인가.’

한산은 피식 웃었다.

결혼식 날, 예배당에서 서약을 나누기 전 차원의 문을 넘을 것이라는 라일라의 계획을 들었을 때 당장 뜯어말리고 싶었던 것을 참아 가며 지금껏 이 이야기를 미뤄 두고 있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같은 말이라도 어떤 타이밍에 어떤 식으로 꺼내느냐에 따라 효과는 천차만별인 법.

가뜩이나 성질 급하고 쉽게 질리는 라일라에게는 같은 말로 반복해서 설득하는 방법은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다. 되도록 많이 경험하고 되도록 많이 느끼게 해 둔 뒤, 말은 마지막에 덧붙이는 정도로 충분했다.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동경과 미련으로 가득한 라일라를 흔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바로 오늘이었다.

화려한 연회에서 지금껏 라일라가 누려 본 적 없는 축복과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실컷 웃고 떠든 뒤가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는 한산의 예상은 적중했다. 중간에 로이스 자식이 훼방을 놓긴 했지만 재이 녀석 덕분에 라일라도 오히려 속이 다 시원했을 터.

‘돌아가면 밥 한 끼 사야겠네.’

돌아가면 말이지.

경계를 늦추지 않은 눈초리로 자신과 라일라를 바라보던 재이의 얼굴을 떠올린 한산은 그새 자신의 무릎을 벤 채 잠들어 버린 라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 * *

다음 날.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

그와 맞닿은 파릇한 잔디 정원 끝에 서 있는 새하얀 예배당.

예배당을 장식한 정교한 대리석 조각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뜨거운 태양 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리조트와 연결되어 있는 연회장에서부터 잔디 정원을 가로질러 예배당에 맞닿도록 설치된 새하얀 버진로드는 화려한 꽃들로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그 길의 양옆은 세계 각지에서 이 ‘세기의 결혼식’을 보러 먼 길을 마다않고 날아온 하객들로 북적였다.

“오오, 저기 들어온다.”

한쪽에 마련된 연주자석에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자 하객석의 맨 앞줄에 앉아 이제나저제나 신랑 신부의 입장을 기다리며 버진로드가 시작되는 쪽을 기웃거리고 있던 남궁찬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객석에 앉아 삼삼오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하객들에게서 환호와 함께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한산과 그의 팔짱을 낀 라일라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와, 꼭 무슨 영화 촬영하는 것 같네.”

“그러게. 진짜 촬영 현장이라고 해도 믿겠다.”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꽃가루 세례를 받으며 천천히 버진로드를 따라 입장하는 한산과 라일라를 바라보던 이환이 중얼거리자 옆에 서서 박수를 보내고 있던 은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으와, 저거 폴랜스카 감독님이지? 브라이언 부부도 왔네? 와, 우리 형수님 인맥 진짜 짱짱하구나.”

하객석을 채운 유명 인사들의 면면을 살피던 엠케이가 새삼 감탄스럽다는 듯 중얼거리자 다른 녀석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 대표님이 만사 제쳐 두고 여기까지 따라오실 만도 해. 여기 모인 사람들하고 대충 안면만 터 놓아도 몇 년간 장사 걱정 없겠는걸.”

“결혼도 사업이라더니. 이 정도면 거의 엑스포 수준인데.”

“진짜 TV에서나 보던 얼굴들을 내가 지금 실제로 보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야.”

남궁찬과 은규, 그리고 이환이 차례차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있던 재이가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도 우리 보고 똑같은 생각들 하고 있을걸? 와, 내가 파티를 실물로 보고 있다니! 대박! 저 바쁘다는 애들을 어떻게 단체로 불렀지? 멤버 한둘도 아니고 여섯을 다 부르다니, 수완 좋네, 하고.”

끝도 없이 술술 늘어놓는 재이의 자화자찬에 잠시 말문이 막힌 듯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남궁찬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어, 그게, 뭔가 따지고 보면 다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이렇게 수치스러운 거지?”

“음, 그건 우리가 겸손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 우리는 누구랑 달라서 수치도 겸손도 아는 인간들이니까.”

엠케이와 이환이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한산과 라일라가 멤버들의 근처까지 걸어왔다.

“축하해요, 형님!”

“*축하해요 라일라!”

앞다투어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멤버들 사이에서 두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낀 재이가 입을 열었다.

“…축하해.”

짧게 던진 어색하기 그지없는 인사에 한산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라일라를 돌아보니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해 보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하네.”

“왜, 이제 와서 산이 형님이 결혼하는 게 믿기지가 않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한산 그 인간이 문제가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는 저 인간의 탈을 쓴 도마뱀 녀석이 인간놀음에 어디까지 진심인지 아직도 알 수가 없어서.’

자신을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묻는 엠케이의 말에 재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야, 야, 저기 다이 형님 우시는 거 아니냐?”

“한재이, 너 역시 다이 형님 옆에 앉았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럼 다이 형 우는 거 미디어마다 죄다 찍혔을 텐데 아쉽네.”

“와, 그건 형님한테 너무 가혹하다.”

“그래, 그냥 우리랑 앉길 잘했다, 한재이.”

가족석에 앉아 있는 재이의 큰형 한다이의 모습을 발견한 멤버들이 수군대는 말에 재이는 시선을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길막리 식구들 중 재이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결혼식에 초대받은 다이는 그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코끝이 빨개진 채 예배당으로 들어가고 있는 한산과 라일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근데 그러고 보니까 안 왔네, 그 사람?”

가족석에 앉은 면면을 살피던 은규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 사람?”

“어. 어제 깽판 친.”

“아, 로이스 클락?”

멤버들이 그러고 보니,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 밤 있었던 결혼식 전야제에서 재이에게 시비를 걸다가 인종 차별주의자의 오명만 뒤집어 쓴 채 다급히 연회장을 빠져나간 로이스 클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 안 보이네?”

“설마 그러고 그 길로 돌아갔나?”

“와, 성격 불같네.”

“역시 그 성격은 집안 내력인가 봐.”

이환이 남궁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가족석 쪽을 살피던 은규가 지금의 클락가를 있게 한 장본인 조지 클락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자식들이 그런 것치고는 아버지 쪽은 온화해 보이시는데?”

“사람 속을 겉만 보고 어떻게 아냐?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 티는 못 내도 속으로는 이놈의 새끼 내 손에 잡히기만 해 봐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엠케이의 말에 은규가 그것도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그것도 그래. 인터넷 쪽은 이미 난리 났던데? 어제 있었던 일.”

“한재이가 그렇게 대놓고 난리를 쳐 놨는데 아무일도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더 퍼져라, 아주 자세하게 널리널리.”

“그리고 형수님이 그 로이스인지 나발인지 대신 가업 물려받으시면 되겠네.”

“그거 훌륭한 시나리오다. 그대로 가자.”

“찬성, 찬성.”

결혼 서약을 위해 예배당으로 들어서는 한산과 라일라에게 박수를 보내며 멤버들이 주거니받거니 하고 있는 말을 듣고 있던 재이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하잖아.’

거저먹는 것도 정도가 있지.

왠지 치솟는 억울함에 재이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

.

.

왁자지껄 시끌벅적했던 바깥과 달리 예배당 안은 지나치리만큼 고요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햇살이 화려하게 수놓은 대리석 바닥을 한산과 라일라가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사전에 입장이 허락된 소수의 인원만이 예배당 안의 객석을 채웠다.

제단 위에서 두 사람의 결혼 서약을 주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신부님을 발견한 재이가 내심 헛웃음을 삼켰다.

‘라일라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할 작정이구나. 이 욕심 많은 도마뱀 같으니. 가톨릭 신부님 앞에서 하나님께 결혼을 맹세하는 전직 드래곤이라니 개그네, 개그야. 신께서 아시면 남은 권능도 다 거두어 가실 듯.’

결혼의 맹약을 지키겠냐는 신부의 물음에 잠시 망설인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산이 활짝 웃으며 그런 라일라에게 준비해 온 반지를 끼워 주는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재이의 옆에서 나란히 앉아있던 은규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휴, 다행이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재이와 마찬가지로 은규의 혼잣말을 들은 엠케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소곤거렸다. 둘 사이에 끼어서 두 사람의 의문 가득한 시선을 받은 은규가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어? 어 그게. 이런 좋은 날 말하긴 좀 뭣하지만.”

“뭣하지만?”

곤란한듯 팔자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말을 흐리는 은규를 엠케이가 재촉했다.

“여기 오기 전부터 이상하게 계속 꿈자리가 뒤숭숭했거든.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닌가 했는데 별일 없이 끝날 것 같아 다행이야.”

진심으로 안도했다는듯 한숨과 함께 대답하는 은규의 말에 재이와 엠케이가 서로를 마주봤다.

“심은규 너 그거.”

“그거 플래…….”

재이와 엠케이가 동시에 입을 연 순간.

와르르르

쿠콰콰콰캉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예배당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