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문단속 제대로 하라고.
와르르르
쿠콰콰콰캉
강한 충격을 받아 무너져 내린 육중한 대리석이 중력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순식간에 주저앉으며 흰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굉음이 가시기 무섭게 당황함을 애써 누른 인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 다들 괜찮아? 안 다쳤어?”
“어, 난 괜찮아.”
“괜찮아.”
“나도.”
”나도.”
다행히 멤버들 중 다친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인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다시 건물이 우르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얼른, 얼른 여기서 나가자.”
이미 무너진 쪽과 반대편에 위치한 예배당의 입구 쪽을 향해 탈출하기 시작한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며 인혁이 멤버들을 재촉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재이만은 다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사고가 난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한재이? 야! 미쳤어? 위험해!! 돌아와!!!”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인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의 재이에게는 인혁의 외침에 대답할 겨를도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이 느낌은 분명…….’
재이는 다급하게 흰 먼지가 자욱한 사고 현장 쪽으로 뛰어갔다.
바다 쪽과 맞닿아 있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대리석 조각의 벽면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사고 현장 너머에 어른거리기 시작한 그림자를 노려보며 재이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돌아갈 시간이다.”
‘……영감탱이.’
희뿌연 먼지 연기 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오며 느릿하게 내뱉는 말에 재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익숙한 기운은 분명 저쪽 동네의 늙다리 마법사, 샤리프 그 인간의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온 거지?’
재이가 생각을 가다듬고 있는 사이, 인혁의 말에 따라 도망치는 대신 어느샌가 재이의 뒤쪽으로 옹기종기 모여든 멤버들 중 남궁찬이 그 인물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어? 저거, 그 사람이잖아!”
“누구?”
“레이시스트.”
무너져 내린 대리석 잔해와 스테인드글라스의 파편으로 엉망인 바닥에도 아랑곳 않고 이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똑바로 걸어오고 있는 것은 분명 조금 전까지 식장 어디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라일라의 오빠, 로이스 클락이었다.
바다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라도 한 건지 흠뻑 젖은 고급 양복에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까지, 전야제에서 보았던 세련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너절하고 후줄근한 몰골인 로이스가 어딘지 멍한 얼굴로 이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멤버들이 웅성거렸다.
“맞네! 술 처마시고 여기 어디 구석에서 지금껏 자다가 기어 나온 거 아니야? 몰골이 완전 엉망인데?”
“휘청거리는 게 이상한데. 어디 다친 거 아니야, 혹시?”
“아닌데? 멀쩡해 보이는데?”
“머리라도 맞은 거 아니고?”
“그것보다 여기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데 얼른 나가자, 응?”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재이의 뒤편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로이스의 모습을 살피며 한마디씩 하던 멤버들 중 은규가 불안한 표정으로 다른 녀석들을 재촉했다.
쿠르르르
그런 은규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한쪽 벽이 무너져 내린 예배당 건물이 당장이라도 더 무너져 내릴 듯 불안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여전히 시선을 로이스 쪽에 고정한 채 재이가 나직이 말했다.
“얼른 나가.”
그 말에 엠케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재이의 한쪽 팔을 잡아끌었다.
“뭐라는 거야, 너도 가야지! 빨리…….”
“잔말 말고 어서 나가!”
엠케이의 손을 홱 뿌리치며 재이가 소리쳤다. 평소와는 달리 바짝 날이 선 날카로운 목소리가 예배당에 울려 퍼졌다.
평소 살갑다고 하기는 어려운 편이긴 해도 이제껏 멤버들에게 진심으로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낸 적은 없던 재이가 내지른 날카로운 고함에 엠케이는 물론 인혁까지 모두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서 재이를 쳐다보았다.
“…야. 한재…….”
콰콰카캉-
놀란 나머지 굳어 있는 엠케이 대신 인혁이 얼굴을 찌푸리며 뭐라 입을 연 순간, 커다란 소리와 함께 멀찍이서 입구 쪽이 와르르 부서지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노리기라도 한듯 유일한 탈출구였던 입구 쪽만이 정확하게 무너져 내린 탓에 안쪽에 남겨진 사람들의 상황을 살피려 목청을 높이고 있던 구조대의 고함 소리마저 건물이 부서지며 울리는 굉음에 섞여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얼마 후.
한바탕 지축을 흔들며 무너져 내린 예배당이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듯 또다시 무거운 적막에 휩싸였다.
혹시 모를 충격을 대비해 멤버들과 주변에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곳을 찾아 서둘러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은규가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입구 쪽을 살피고는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으아아, 입구, 입구가…….”
첫 충격으로 예배당의 벽이 무너지자마자 안에 있던 하객들은 모두 재빨리 바깥으로 몸을 피했다.
다시 한번 안을 둘러봐도 조금 전 입구가 무너져 내린 예배당 안쪽에는 어영부영하다가 탈출할 타이밍을 놓쳐 버린 자신들 여섯뿐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라일라와 한산은?
그리고, 로이스는?
뒤늦게 든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던 은규가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혼란스러운 틈을 타 순식간에 일행에게 다가온 로이스가 몸을 비틀어 도망가려는 재이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으, 윽…….”
“*돌아갈 시간이다.”
조금 전 엠케이의 손은 가볍게 뿌리쳤던 재이가 어째선지 로이스의 손길은 쉽게 뿌리치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뭐… 라는 거야, 미친놈이.”
“*돌아갈 시간이다.”
“저 사람 미쳤나 봐. 아까부터 계속 똑같은 말만 하잖아.”
은규가 중얼거렸다.
재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 구 마음대로. 안… 가. 안, 간다고.”
“한재이, 그냥 뿌리쳐. 아까처럼 그냥 뿌리치라고.”
은규가 초조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이보세요 이거 놓고 말…….”
“*끼어들지 마라.”
퍼억
재이와 로이스 사이를 가로막고 그가 잡은 재이의 손을 빼내려던 인혁이 로이스가 휘두른 손에 얻어맞고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심상치 않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팽팽한 긴장감으로 달아올랐다.
“야, 차인혁!”
“차인혁! 괜찮아?”
남궁찬과 이환이 파편으로 어수선한 바닥에 그대로 나뒹군 인혁을 다급히 살폈다. 재이는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자신의 고개를 겨우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듯 남궁찬의 부축에 옆구리를 쥐고 일어나 앉은 인혁이 이환이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이네.
“으윽…….”
잠시 인혁을 살피던 재이는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고개를 돌리니 로이스가 여전히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이의 눈에는 자신을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는 로이스의 회색 눈동자 너머로 늙은 마법사의 집념이 읽히는 듯했다.
‘업보가 쌓여 죽기 직전이라더니. 이제 와서 돌려놓아 보겠다는 거야? 그렇다고 신이 과연 이미 쌓인 과오를 용서하실까.’
아니 애초에 누구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려고.
어림없지.
재이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로이스를 조종하고 있는 것은 자신과 라일라를 이쪽 세계로 날려 버린 대마법사 샤리프가 분명했다.
차원의 경계를 두 번이나 농락한 업보 탓에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 예견했던 라일라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업보에 짓눌린 미친 늙은이가 스스로의 과오를 되잡겠다고 잘 살고 있던 자신을 다시 데려가려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사람이 무슨 동네 똥강아지인 줄 아나.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게.’
재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나마 이쪽이 마법이 먹히지 않는 동네라 다행이었다.
저쪽이었다면 팔목을 잡힌 순간 게임 끝이었겠지만 이쪽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저 라일라조차 모래알처럼 순식간에 흩어지는 권능이 아까워 이제껏 쓰지도 못하고 살았는데 기껏 마법사 따위가.
어떻게 만난 건진 몰라도 로이스를 이용해 자신을 원래 세계로 끌고 가 보려고 머리를 굴려 봤나 본데 그렇다면 이건 버티는 자가 이기는 싸움이었다. 이참에 이 줄다리기로 영감탱이가 마력을 탈탈 털어 쓰고 저쪽에서 죽어 주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두 차원을 동시에 구한 영웅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비죽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윽…….”
이쪽의 계산을 눈치챈 것인지 손목을 쥔 로이스가 꾹 힘을 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어찌저찌 버틸 만하던 고통이 순식간에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재이는 저도 모르게 풀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겨우 이쪽에 융합된 영혼이 억지로 뜯겨져 나가는 고통이 팔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휘저어 놓았다. 정신을 갈가리 찢어 놓는 듯한 고통에 한계에 가까워진 몸이 덜덜 떨리며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안 돼. 어떻게든 버텨야…….’
재이가 초조하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퍽
머리 위쪽에서 뭔가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로이스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던 고통이 확, 사그라들며 정신이 맑아졌다. 두 눈을 몇 번 깜박이자 흐릿했던 시야가 돌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눈앞에 들어온 광경에 재이는 일순 숨을 들이 삼켰다.
“싫다잖아, 미친놈아.”
“그래, 한재이 놔 줘! 이 스토커 자식.”
엠케이가 온몸을 던져 날린 보디태클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로이스가 중심을 잃고 비틀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가까이 다가와 재이의 손목을 쥐고 있는 로이스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 내려 애쓰며 은규가 소리 질렀다.
“잡아당겨, 남궁찬. 잡아당겨!”
어느새 로이스의 뒤로 뛰어간 남궁찬과 인혁이 로이스의 허리와 머리채를 각각 붙잡고 재이에게서 그를 떼 내려 힘껏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환과 엠케이는 은규와 함께 로이스의 손가락을 떼 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손 떼라고! 이 손 떼!! 한재이 손목 나가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말해 봐야 소용없어! 이 사람 눈 좀 봐. 진짜 돌았다고.”
“그냥 물어뜯어 버리자!”
자신들의 공격에도 여전히 재이의 손목을 부러트리기라도 할 듯 단단하게 틀어쥔 채 놓지 않는 로이스의 눈이 정상이 아님을 확인한 이환이 소리쳤다.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팔뚝을 물어뜯는 멤버들의 합공에 로이스가 짜증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네, 이놈. 들.”
“위험해!”
로이스의 입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오기 직전, 잠시 바닥에 늘어져 있던 재이가 일순 몸을 일으켜 로이스에게 잡혀 있던 팔을 지레 삼아 그의 품 안쪽으로 파고들고는 그대로 로이스의 턱을 단단한 정수리로 들이받아 버렸다.
“*컥…….”
그때까지 멤버들의 공세에도 별 타격이 없어 보이던 로이스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 틈에 잡혀 있던 손목을 빼내 겨우 그에게서 빠져나온 재이가 구르듯 뒤로 간격을 벌리며 물러섰다.
“*네… 네놈이…….”
로이스의 것인지 그 너머에 있는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분노가 넘실대기 시작했다. 그 심상치 않은 기세에 이미 기진맥진한 재이는 그대로 뻗어 버리고 싶은 정신을 추슬러 다시 일어나려 남은 힘을 그러모았다.
“……!”
당장이라도 찢어발길듯 자신을 노려보는 로이스의 시선을 마주 보고 있던 시야가 무엇인가로 턱, 가로막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재이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미친놈아, 저리 꺼지라고!”
“그, 그래! 박치기를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냐!”
“미리 말해 두지만 아까 그건 정당방위였어! 고소해도 소용없다고!”
“걱정 마! 증인만 여섯이야!”
“저리 꺼지라고! 더러운 인종 차별주의자에 스토커 자식아!”
자신과 로이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익숙한 다섯 개의 뒷모습이었다.
그 틈에 제 딴엔 무기라고 집어 든 유리 조각과 나무 파편들을 손에 쥐고 주춤주춤하면서도 로이스를 가로막고 서서 제각기 뭐라 뭐라 외치고 있는 다섯 명의 모습을 확인한 재이는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는 느낌에 황급히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친놈들아, 저게 뭔 줄 알고 가로막아.
겁도 없이.
입 밖으로 내면 왠지 고함 대신 다른 게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에 재이는 입을 꾹 다물고 애써 몸을 일으켰다.
“*…비켜라. 그렇지 않으면.”
‘이 영감탱이가, 드디어 미쳤구나!’
중얼거리는 로이스의 몸에서 음산한 기운이 확, 퍼져 나왔다. 촘촘하게 날선 무언가가 무방비에 가까운 녀석들을 향해 덮쳐 오는 느낌에 재이가 다급히 그들을 감싸려 몸을 날린 순간.
시간이 정지했다.
.
.
.
“……뭐야.”
재이가 중얼거렸다.
간헐적으로 건물이 흔들리며 내던 불길한 소음도, 희미하게 들려오던 바깥쪽 사람들의 고함과 사이렌 소리도 모두 지워진 공간 속에서 조금 전 마력을 폭발시키려던 로이스가 석상처럼 굳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와 재이 사이를 가로막은 채 버티고 선 겁대가리 없는 다섯 녀석들이 바짝 긴장한 눈빛 그대로 굳어 있었다.
마치 정지 화면처럼 모든 것이 멈춘 공간 속에서 홀로 중얼거린 재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일라?”
이 사달이 날 동안 어디에 있는지 모습을 찾을 수 없었던 라일라가 예배당 한쪽에서 재이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라일라가 뿜어내는 심상치 않은 기색에 얼굴을 굳힌 재이가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찢기고 뜯어져 너덜거리는 웨딩드레스 한쪽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붉은 피로 범벅이었다.
“라일라. 그건.”
- 한재이.
재이가 입을 열어 묻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신이 내린 마지막 권능으로 시간을 멈춰 세운 라일라가 재이의 영혼에 직접 말을 걸고 있었다.
- 마지막으로 묻겠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라일라의 황금빛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어 볼 듯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라일라 클락이 이 순간 느끼고 있는 분노와 슬픔, 후회와 연민 그리고 사랑으로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재이가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전직했다고.”
혼자 하는 용사 놀이는 이제 지겹다고.
난 영웅 소리 듣는 용사보다 춤추고 노래하고 떼 지어 돌아다니는 음유가 적성에 맞는다고.
재이는 멈춰 서 있는 다섯 녀석들을 하나하나 돌아보고는 중얼거렸다. 그런 재이를 빤히 쳐다보던 라일라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 저쪽은 엉망이겠군.
아쉬운 듯 안도한 듯 짧은 한숨과 함께 라일라가 말했다. 그녀가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려던 채로 굳어 있는 로이스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와중에도 로이스의 회색 눈동자가 일순 끼릭, 하고 이쪽을 향하는 것이 보였다.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가 영감탱이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모양인데. 어떻게 방법 없어?”
끈질기게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그냥 돌려보내긴 좀 그렇잖아?
재이의 말에 무섭게 굳어 있던 라일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뺨에 묻은 마른 피가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과 어우러져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형상이 되어 어딘지 섬뜩한 느낌이었다.
- 옛 인연을 위한 마지막 선물쯤이야.
라일라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로이스의 회색 눈동자가 희게 뒤집히더니 풀썩 쓰러진 그가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펄떡였다.
로이스의 움직임이 천천히 잦아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재이가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리는 라일라에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후회 안 하겠어?”
- 누구한테 하는 소리지?
라일라의 눈동자가 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잠시 그 눈동자를 마주 보던 재이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미안. 하던 거 마저 해.”
- 흥. 건방진 놈.
“내 매력이지.”
- 닥쳐.
라일라의 손에 붉은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재이가 중얼거렸다.
“이제 그것과도 안녕인가?”
- 상관없어. 권능보다 소중한 것을 찾았으니.
신이 그녀에게만 허락한 축복을 담아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 라일라의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재이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이번엔 문단속 제대로 하라고, 라일라.”
라일라의 황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