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시작.
사경을 헤맸다. 열병이었다.
지독한 병이었던 터라, 정신을 차리는 데만도 일주일이 걸렸다.
다들 죽을 거라고 했지만 릴리 엔은 살아났다.
그리고…….
'틀림없어, 분명 기억이 나…….'
아주 예전, 그녀가 릴리에이 되기 전 다른 세상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릴리에, 자신의 일생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머릿속 깊숙이 침투한 열이 잠들어 있던 기억을 깨우는 열쇠가 되어 준 걸까.
릴리엔은 일단 침착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름 진정해 보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았다.
왜냐면…….
“이렇게 어린 아가씨를 팔아 치우 약혼이라니! 그것도 끈 떨어진 연이나 다름없는 혼처에!”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 수선을 피우는 그녀의 유모 때문이었다.
“세드릭 님도 무심하시지! 아무리 이복동생이라지만 주인 나리와 마님께서 돌아가시자마자 어쩜 이렇게 기다렸단 듯이……!”
글쎄. 릴리엔은 난감하게 웃기만 했다.
그녀는 이복 오빠가 못된 계모의 딸을 당장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칭찬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릴리엔의 어머니는 전대 후작인 아버지의 후처였고 처음부터 아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서 세드릭을 대했다.
모함하거나 학대했다는 뜻이다.
“불쌍한 아가씨, 마님께서 살아만 계셨더라도!”
릴리엔은 이번에도 어깨만 으쓱했다.
유모와 달리 릴리엔은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을 본체만 체한 어머니가 많이 그립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여자도 그랬다.
이 여자는 원래 유모가 아니었다. 원래는 어머니의 시녀였는데 어머니가 죽고 끈 떨어진 연이 되자마자 약삭빠르게 릴리에의 유모를 자처하고 나섰다.
“아직 열두 살밖에 안 되셨는데!”
지금도 자신의 유일한 비빌 구석을 잃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수선을 피우고 있을 뿐.
정말로 릴리엔이 걱정돼서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열병을 앓기 전에 릴리엔은 이 여자를 철석같이 믿었다.
창졸간에 부모를 잃은 아이는 저를 불쌍하다 해 주는 여자를 정말 제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이 여자는 그저 릴리엔을 조종해서 가주인 이복 오빠에게서 원하는 걸 뜯어낼 계획일 뿐이었다.
곁에 두어서 좋을 게 없을 사람이란 확신이 들자 릴리엔은 베개밑에서 준비한 물건을 꺼냈다.
“유모.”
“세상에, 아가씨!”
씨알이 굵은 오벌 컷 에메랄드를 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둘러싼 목걸이였다.
릴리엔은 말없이 웃으며 그걸 유모에게 내밀었다.
“마님의 유품! 이게 왜 여기, 아니, 이 귀한 걸 제게……!"
여자는 유품 운운하면서도 예의상 사양도 않고 허겁지겁 목걸이를 챙겼다.
“우리 마음 착한 아가씨, 걱정마세요. 이 유모가 앞으로도 반드시 아가씨를 지켜 드릴 테니까요!”
“마음은 고맙지만 그럴 수 없을 거야.”
릴리에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 오늘부로 해고됐거든.”
“예?”
“그건 퇴직금이야.”
멍하니 눈을 부릅뜬 여자가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여자는 곧이어 거짓말 말라며 못된 장난을 치면 안 된다고 릴리엔을 다그쳤다.
그러나 릴리엔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마치 이 우스운 촌극의 결말을 미리 아는 사람처럼.
여자는 슬슬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대, 대체 왜 이러세요, 아가씨!”
“당신이 나랑 내 오빠 사이를 이간질해서 한몫 챙기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
설마 열두 살짜리 아이가 제 속을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까발릴 줄 몰랐던 여자가 입을 떡 벌렸다.
“참고로 조용히 나가지 않으면 난 그 목걸이를 도둑맞았다고 할 거야.”
“......."
“어떻게 할래?”
저녁 메뉴라도 묻듯 여상한 말투였다.
릴리엔의 유모는 반평생 이상을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후처의 수족으로 살아왔다.
덕분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지금의 릴리엔은 그녀가 쥐락펴락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문자 그대로 빈손으로 쫓겨나게 될 수도 있었다. 유모는 저도 모르게 에메랄드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대답은 그걸로 족했다. 릴리엔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