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2. 일단은 오빠부터 공략.
릴리에 이슬라르.
원작 남자 주인공의 어머니인 그녀에 대해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말했다.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여자였지.”
“극단적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 늘 자기만 아프고 자기가 제일 가엾고.”
릴리엔은 자신이 정략결혼의 희생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짜 유모의 이간질 덕분이었다.
주된 원망의 대상은 결혼해서 자주 볼 수 없게 된 오빠보다 남편이었다.
자기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릴리엔은 여러 가지 형태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다.
같은 무게의 황금을 달아 줘도 팔지 않는다는 이국의 비단, 사연과 세월이 깃든 크고 오래된 보석들…….
부족함 없이 자라서 욕심도 없고, 사치품을 자랑할 만한 또래동무도 없는 릴리엔은 그런 것들이 딱히 좋은 줄도 몰랐다.
하지만…….
“존중받는 귀부인일수록 많은 보석을 가져야 하는 법이에요."
그런가?
긴가민가하는 어리숙한 릴리엔을 유모가 솜씨 좋게 부추겼다.
“망설이지 마세요. 당연히 받으셔야 하는 대접이에요!”
값비싸고 영롱한 것들은 대부분 릴리엔의 손을 한 번 스치기만 하고 유모의 치마폭으로 흘러 들어갔다.
남편은 릴리에이 아내이자 안주인으로서 의무는 조금도 행하지 않으면서 안하무인으로 굴어도 그저 내버려 두었다.
애초에 일말의 기대조차 없었던 것 같았다.
경우에 따라서 관대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처사였지만 내심 남편의 관심을 끌고 싶었던 릴리 엔은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하고 몹시 속상해했다.
화가 난 릴리에에게 유모는 아이를 가지라고 충고했다.
“건강한 아이,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기만 하시면 됩니다."
릴리엔은 그녀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부단히 노력한 끝에 결실을 맺었다.
임신 이후에도 남편의 데면데면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주변인들은 확실히 평소보다 좀 더 신경을 써 주었다.
내막이야 어떻든 릴리엔은 대단한 남편과 오라비를 두었으므로 축하 인사나 선물 따위를 넘치게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릴리엔은 남편의 관심 없이도 썩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흘러 진통이 시작되었다.
……난산이었다.
꼬박 이틀이 지나서야 아이는 태어났다. 릴리에도 목숨은 건졌다.
기적은 딱 거기까지였다.
원체도 건강하지 못했던 릴리에은 다시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몸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아이를 가져 달콤한 관심을 누릴 생각뿐이었던 릴리엔은 절망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보모와 까르륵놀고 있는 아이가 미워졌다.
‘보모가 엄마인 줄 아는 모양이지?'
심기가 크게 뒤틀렸다.
저를 낳느라고 이 꼴이 된 건 나인데. 한데 제 어머니조차 몰라봐?
'아무리 아기라지만!’
아들은 보모 따위가 아니라 어머니인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야 했다.
왜냐면 내가 저 아이를 낳느라고 이런 꼴이 되었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학대는 아이가 성장하는 내내 꾸준하게 이어졌다.
릴리엔은 아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기준을 벗어나거나 자신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면 못견뎌하며 발작을 일으키기까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아이가 아프면 사람들이 자신을 위로해 주고 신경을 써 준다는 걸 깨달은 뒤로, 릴리엔은 아이를 일부러 다치게 만들거나 심하게는 미량의 독약을 먹이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뒤늦게 이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 모두가 릴리엔의미친 짓에 경악했지만 단 한 사람, 그녀의 남편은 화조차 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놀랍지도 않다는 듯 약간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릴리엔은 그날 밤 아들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감히 자기를 경멸한 어쨌든 릴리에이 보기에는 그랬다.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작가는 이런 릴리에의 자기 파괴적인 행적을 낱낱이 서술하면서 원작 여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보듬어주게끔 했다.
여주인공의 지지에 힘입은 남자 주인공은 릴리에이 죽은 이후 모종의 이유로 미쳐서 괴물이 된 아버지를 제 손으로 끝장낸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대 서사시.
사랑과 정의가 승리하는 결말.
그 과정에서 한 남자는 제국 절 반을 불태우는 악마가 되어야 했고, 한 남자는 그런 아버지를 죽여야 했다.
아들과 남편의 인생을 불행의 나락에 처박는 것. 바로 그게 릴리엔이 이 이야기에 존재하는 이유였다.
“갑자기 뵙자고 해서 죄송해요. 바쁘셨나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면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별로 그렇지는.”
까마귀 깃털처럼 검푸른 머리카락, 가히 빙기옥골이라 할 만큼 흰 피부.
선이 가늘어 곱상한 얼굴에 업무 중에만 쓰는 은테 안경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청년이었다.
세드릭 이슬라르,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어 후작이 된 그녀의 오빠였다.
“무슨 일로 갑자기 나를 보자고 했지?”
“제 약혼 문제로 오라버니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세드릭 이슬라르가 꾹 찌푸렸던 눈을 떴다.
시리게 푸른 연청색 눈동자였다.
“물론 오라버니께서도 같은 주제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겠지만…….”
"......."
“그 전에 제 말을 먼저 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괜찮을까요?”
세드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여동생을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새어머니의 그악스러운 점을 닮지 않아 심약하던 아이 였는데.’
약혼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유모라는 여자가 달래기는커녕 도리어 더 겁을 주었다고 했던가.'
직후 여동생은 크게 앓아누웠고, 세드릭은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난장판이었고 대소동이었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플 정도였다.
그 상황을 반복하게 되는 일만은 피하고 싶은 게 세드릭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릴리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릴리엔은 침착하게 그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허락하마.”
일단 세드릭은 릴리엔에게 발언권을 양보해 보기로 했다.
“먼저 일전에 말씀하신 혼담에 대해 경솔한 반응으로 실망을 드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
뭐?
꾸벅, 자그마한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여동생의 모습은 세드릭이 보기에도 앙증맞아 보였다.
너무 앙증맞은 나머지 발언의 신뢰성이 떨어질 정도였다.
세드릭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혹시 약혼은 하기 싫다고 떼를 쓰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기특한 척부터 하고 보려는 건가?
‘그렇게까지 약게 머리를 굴리는 아이는 아니었을 텐…….’
"그리고 이제 제 생각이 바뀌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잠깐.
“생각이 바뀌었다고?”
“네.”
이어진 릴리엔의 말은 그의 지레짐작에 완전히 반하는 내용이었다.
“약혼하겠어요, 오라버니께서 정하신 분과.”
잠시 말을 잃은 세드릭의 아름다운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그건 그가 최대한으로 표현한 놀람이었다.
은근히 긴장했던 릴리엔은 그 모습에 조금 긴장을 풀었다. 다행히 그녀가 준비한 수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놀라셨네요.”
“진심이냐?”
“그럼요.”
시원시원한 확답에도 불구하고 세드릭은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릴리엔은 그럴 만도 하다고 태평하게 생각했다.
“왜 생각이 바뀌었지?”
“반성을 좀 했거든요.”
“.......”
지나치게 심플한 대답에 세드릭은 또 한 번 말을 잃어야 했다.
그 모습에 릴리엔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후후 웃고 말았다.
세드릭은 기가 막혔다.
“우스운 모양이구나.”
날카롭게 뱉자마자 아차 했다.
그의 여동생은 심약했다. 겁을 먹어 눈물이라도 보이면 골치가 아팠다.
그러나…….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천연덕스럽게 사과하는 얼굴에서는 두려움이라곤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혹여나 아이를 울릴까 긴장했던 세드릭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안도했지만 동시에 어처구니도 없었다.
어쨌든 선선히 사과하니 더 뭐라 할 말은 없었다.
"…네가 정말 경솔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보다는 좀 더 성의 있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다.”
음. 릴리에이 생각하기에도 지당한 지적이었다.
“전 튜린의 딸이잖아요.”
튜린의 레이디, 릴리에 이슬라 르.
“운 좋게 태어나 온갖 좋은 것들을 누렸고, 아버지께서 목숨을 걸고 이 땅을 수호해 주신 덕에 더없이 안전하게 지냈어요.”
아름답고 편안한 날들이었다.
숨 쉬듯 당연해서 소중한 줄 몰랐을 뿐.
“……이제는 알아요.”
이제는 안다.
“제게는 이 모든 것들이 그저 당연하게 있었지만 그건 제가 노력해서 손에 넣은 게 아닌 걸요.
그걸 잠시 잊었던 걸 반성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