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튜린의 릴리엔-3화 (3/155)

3화.

세드릭이 듣기에 릴리에의 말은 흠잡을 데 없는 정론이었다. 너무 듣기 좋아서 오히려 의심이 가시지 않을 정도였다.

“갑자기?”

“그냥…… 아프니까 여러 가지가 후회되고 죄송했거든요.”

“음.”

세드릭은 릴리엔이 열병으로 사경을 헤맸었다는 걸 다시 한번 떠올리며 납득했다.

“이슬라르에 속한 사람들과 튜린 땅에 기거하는 모든 사람 제가 누리는 특권은 그 사람들을 수호하겠다는 맹세에서 비롯된 거잖아요.”

여동생은 전에 없이 곧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연청색 눈동자는 그에게도 익숙했다.

같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눈빛이었다.

“특권을 누렸으니 책임도 지겠어요.”

수사 없이, 간결하게, 진심으로, 거품 없이 깨끗하게 내용만 전달하는 건 세드릭이 선호하는 말하기 방식이었다. 그들의 아버지.

도 늘 이런 식으로 말씀하곤 하셨다.

세드릭이 헛웃음을 토했다.

"핏줄이라 이건가.”

“네?”

“아니, 신경 쓰지 마라.”

이성적인 세드릭은 릴리엔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아이가 아닌가.'

오늘은 그가 미처 몰랐던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긴 했지만 다시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참으로…'

믿고 싶은 이야기이지 않은가?

돌아가신 아버지와 세드릭은 군인이었다. 릴리엔의 말은 그들처럼 목숨을 걸고 전장으로 나가 조국을 수호하는 군인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그런 말이었다.

물론 제후이자 일가의 가주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다.

'그게 진심인지는 앞으로 본인이 행동을 통해 증명할 일이지.'

세드릭은 한순간에 풀어지려는 마음을 그렇게 다잡았다.

“제가 오라버니께 드릴 말씀은 이게 다예요.”

“음.”

“혹시 뭔가 하고 싶으신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얌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릴리엔에게 세드릭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릴리엔은 안심해서 보스스미소를 지었다.

'후우.’

릴리엔은 이걸로 세드릭이 자신에 대한 인식을 조금이라도 고쳐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느라 그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시작이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그렇게 생각한 릴리엔은 야무지게 일어섰다. 바쁜 사람을 오래 붙잡아서도 안 될 노릇이다.

“그럼 바쁘실 테니 전 이만 일어나 볼게요.”

벌써?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한 세드릭은 흠칫 놀랐다. ‘벌써’라니. 설마 내가 지금 이 아이와의 대화가 마무리되는 걸 아쉬워한 건가?

“오라버니?”

세드릭은 고민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철들기 전에도 행여나 계모의 오해를 살까 일부러 멀리했던 여동생에게 이제 와서 대체무슨 말을?

고민 끝에 그가 내놓은 말은 이 랬다.

"…궁금한 것은 없느냐?”

릴리엔은 세드릭이 하는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가령 네 약혼자가 누구인지 하는 것들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시점에서 릴리 엔은 아직 약혼자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이런.’

세드릭이 이상하다는 듯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엄중한 시선 앞에서도 솟지 않았던 식은땀이 뒤늦게 솟았다.

릴리엔은 애써 침착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궁금해해도 되는 건지 몰랐어요.”

남매의 아버지인 선대 튜린 후작과 그 부인은 마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단순한 사고라고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았다.

의심스러운 사고로 부모를 잃자마자 결정된 약혼은 단순한 혼담이 아니었다.

가주 암살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대비해 동맹을 맺는 거였다. 극비리에.

그래서 굳이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기도 했거니와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것을 알려 주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비밀을 지키기엔 너무 어리잖아요.”

“허.”

아이러니하게도 방금 그 말이 이 방에서 릴리엔이 한 말 중 가장 아이답지 않은 말이었다.

세드릭은 기가 막혔고 한편으론 감탄했다.

'정황을 파악하고 기밀을 분간하고 그 앞에서 몸을 사릴 줄 아는 신중함까지 갖춰야 할 수 있는 말이다.'

만약 이 일이 새어나가더라도 절대 이 아이의 입을 통해서는 아닐 거라는 확신이 생길 정도였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는 편이 좋겠구나. 너도 당사자니까.”

이번에는 릴리엔이 놀랄 차례였다.

‘설마 나…… 인정받은 건가?'

“만약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 아니요!”

릴리엔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듣고 싶어요. 말씀해 주세요."

아는 걸 모르는 척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기회가 생겼을 때 이야기를 들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네 약혼자 되시는 분의 성함은……."

그 순간 릴리엔은 실감했다. 그녀의 약혼자는 튜린 후작씩이나 되는 사람의 존칭을 받는 사람이다.

“임페라토르 레옌그라드, 쇄금의 기사 다미언 발미에라 에른스트루펜바인.”

그런 영예를 받아 마땅한 것은 이 제국에…….

“선황과 현 황제 폐하의 동복동생이자 이 제국의 유일한 대공전하이시지.”

황족뿐이었다.

“놀랐느냐.”

"조금요.”

놀랐다기보다는 실감했다.

제후들이 각자의 영토에서는 왕처럼 군림한다지만 황족은 황족.

루펜바인은 난세를 평정하고 제각기 왕 노릇을 하던 토호들을 신하로 복속시켜 황제를 자칭한 가문이다.

그중에서도 릴리에의 약혼자인다미언 루펜바인은 현 세대의 황족들 중 가장 전쟁에 능란한, 태조에 가장 가까운 후손으로 평가 받고 있었다.

'새삼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내 남편은…….’

어쨌든 미래가 제멋대로 바뀌지 않고 예정대로 흘러가고 있어서다행이었다.

그렇게 감정의 동요를 다스리는 릴리엔의 모습은 세드릭에게 아주 기특하게 보였다.

“혹시 네게 무언가 필요한 게 있다면 내게 말해도…….”

"네? 아뇨, 괜찮아요."

거의 단칼에 나온 대답이었다.

세드릭은 조금 당황하면서도 납득했다. 이전에도 그다지 욕심이 있는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이상한 건 필요한 게 없다는 말에 은근히 서운해지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괜찮다면 할 수 없지만."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흘러나온 말은 평소 냉철한 세드릭답지 않게 연약하게까지 들렸다.

'왜 저러지?'

릴리엔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그녀는 찬찬히 오빠를 살펴보았다.

과거 창졸간에 부모를 잃은 열두 살 릴리에에게 아홉 살이나 많은 오빠 세드릭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훌쩍 나이를 먹은 지금의 릴리에에게는 보였다.

피곤에 찌들어 거뭇거뭇한 눈밑, 까칠한 짜증이 깃든 표정. 어딘지 불편하게 보이는 가주의 자리.

'아.’

릴리에만 부모를 잃은 게 아니었다. 세드릭 역시 아버지를 잃었다. 뿐만 아니라 충격을 극복하기도 전에 서둘러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만 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전에 장례식에 소요되는 비용을 계산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뜻이다.

고작해야 스물한 살. 아직은 청년보다 소년에 가까운 나이였다.

엄청난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감당하기에는 어린 나이이기도 했다.

얼마나 막막했을지 짐작이 갔다.

'연약한 모습을 아무도 모르게 숨기느라고 더 괴롭지 않았을까?'

그래서 서먹하던 여동생이 조금 기특한 소릴 했을 뿐인데도 스스로 놀랄 정도로 마음이 열려 버린 모양이었다.

가엾고 측은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내색하면 괜히 기분만 상하게 할 수도 있었다. 릴리엔은 조심스럽게 이렇게만 물었다.

“…… 오라버니, 얼마나 안 주무신 거예요?”

세드릭은 고민했다. 평소 그의 성격이라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라고 딱 잘라 버려야 했다.

하지만 왜? 지금 그는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릴리엔은 약점을 감춰야만 하는 타인이 아니었다.

그의 여동생이었다.

같은 아버지를 둔.

세드릭의 입술이 무심결에 열렸다.

“……신경 쓰지 마라. 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까.”

릴리엔은 이 말에 담긴 함의를 곧바로 짐작해 냈다.

“안 주무셨군요.”

“눈은 붙였다.”

“얼마나요, 세 시간?”

“설마 두 시간은 아니죠?"

실은 한 시간이었다.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침묵과 외면 속에서 어렵지 않게 답을 읽어낸 릴리엔은 기가 막혀서 한숨을 쉬었다.

“이러시면 안 돼요. 건강을 생각하셔야죠.”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니까.”

재차 말하면서도 세드릭은 스스로가 우스웠다.

걱정을 안 시키려면 아예 말을 말았어야지. 다 짐작하게끔 단서를 흘려 놓다니, 걱정을 해 달라고 대놓고 조른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네가 신경 쓸 일이"

"어떻게 신경을 안 쓰나요? 오라버니께서 계속 이러시면 제가 천애 고아가 될 판인데.”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숨소리마저 뚝 멈춘 꼴을 보아하니 세드릭은 그런 관점에서는 전혀 생각도 못해 본 게 분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