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릴리엔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세드릭은 아직 자기 잘못의 정도를 정확히 몰랐지만…….
'윽.’
릴리엔은 맑고 푸른 눈동자에 끝이 곱게 처진 눈매를 가졌다.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 같은데도 어쩐지 그렁그렁해 보이는, 순하고 고운 눈매였다.
어린 여동생의 그런 눈빛을 마주하니 세드릭은 그제야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자꾸 이 말이 맴돌았다.
'천애 고아.’
그랬다. 저 작은 아이가 이제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그의 피붙이였다.
"그래, 그렇구나.”
덕분에 서로가 천애 고아 신세를 면했다.
혼자가 아니었다.
세드릭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릴리엔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줄곧 등골을 서늘하게 했던 이유 모를 섬뜩함과 막막함이 갑작스럽게 가주가 된 부담감 때문만이 아님을 비로 소 알아차렸다.
그는 두려웠던 거였다.
이 넓고 아뜩한 세상에서 까마득하게 혼자가 된 것 같아서.
이슬라르는 대대로 손이 귀했다. 아슬아슬하게 대를 이어 온 걸로 유명한 이 가문에는 방계 혈족이랄 게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한데 대관절 이 핏줄이란 게 무엇이기에.
릴리에이 유일하게 남은 피붙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세드릭은 마치 망망대해에서 발붙일 땅 한 조각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토록 안심하고 마는 스스로에게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걱정하는 것 같지, 나를……'
저 아이도 지금 나와 같은 안도 감을 느끼고 있을까?
일순 가슴이 뭉클하게 저렸다.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릴리엔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오라버니?”
릴리엔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피하지는 않았다. 세드릭은 마음놓고 그 머리를 조금 더 어루만졌다.
생각보다 더 조그마하고 보송보송했다. 잘못 쥐거나 조금만 힘을 들여도 톡 하고 터지고 말 것 같아서 절로 손길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열병을 앓았다고 했던가.’
새삼 마음에 걸렸다. 하마터면이 작고 어린 것을 눈치채기도 전에 잃어버릴 뻔한 셈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큰일 날 뻔했구나.'
세드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릴리엔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뜬금없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한 그가 정말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말이 안 통할 것 같네.'
릴리엔이 한 번 더 포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그 말 취소할게요. 저 필요한 거 있어요.”
“무엇이?"
"오라버니의 낮잠이요."
세드릭의 손길이 뚝 멈췄다. 릴리엔은 또박또박 조건까지 걸었다.
“최소 세 시간 이상이요. 들어 주실 거죠?”
“설마 튜린 후작, 이슬라르의 가주께서 허언을 하지는 않으실거라 믿어요.”
그녀의 말은 조금 다른 쪽으로 효과가 있었다.
“……하, 하하!”
세드릭이 웃음을 터트리고 만 것이다.
릴리엔은 놀랐다.
'저렇게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세드릭은 여동생의 놀란 표정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차분한 표정이 사라지자 대번에 아이답게 보였다.
“그래, 그러자꾸나.”
조금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그는 확언해 두었다.
“그게 네 소원이라면야.”
다른 사람이 권했다면 들은 척도 안 했겠지만 릴리에의 말이라면 한번쯤은 들어주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이 지상에 유일하게 남은 그의 피붙이였으니까.
* * *
세드릭은 기본적으로 허언을 질색했다. 한번 뱉은 말을 기분에 따라 뒤집는 것도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벽주의적인 성향의 남자는 아이와의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릴리엔과의 약속대로 세 시간의 수면을 취했다는 뜻이다.
“얼굴이 좀 나아지셨군요.”
"알렌.”
선대 가주와 총관이 동시에 유명을 달리한 덕에 주인인 세드릭과 동시에 대를 이은 이 성의 젊은 총관, 알렌 헤이워스였다.
헤이워스는 자작 작위를 가진 어엿한 귀족 가문으로서 단순한 고용인이 아니라 대를 이어 튜린 후작가를 섬기는 가신이었다.
알렌은 총관으로서 가내 사무를 맡아볼 뿐 아니라 가주의 보좌를 겸하는 동시에 유사시의 호위이기도 했다.
가주의 최측근은 아무리 만류해도 도무지 휴식을 취할 줄 모르던 가주의 변덕에 대해 원인을 묻지 않았다.
“꼴딱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직전에 정신을 차리셔서 다행입니다."
젖형제의 폭언을 세드릭은 깔끔하게 못 들은 척했다.
“가내의 일로 네게 이를 말이 있어 불렀다.”
“하명하시죠.”
세드릭은 말없이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서류 몇 장을 내밀었다. 알렌은 의심 없이 서류를 받아 보았다.
'예산안인가.'
무심하게 훑어 내려가던 알렌의 눈이 살짝 커졌다.
'릴리엔 이슬라르 앞으로 지급되는 한 해 예산을 완전히 재편성한다고?'
사용처를 불문하고 고르게 액수가 증액되어 있었다. 언뜻 머릿속으로만 추산해 봐도 이전의 다섯 배 이상이었다.
“가주님.”
"나를 제외하고 딱 하나 남은 이슬라르다. 아버님께서는 워낙 공사다망하시고 아이가 어려 전적으로 서모님의 손에 맡겨 두셨겠지만.”
세드릭이 쯧 하고 혀를 찼다.
“황족이 될 이슬라르의 딸이다.
한 해 동안 쓰는 돈이 고작 그 정도여서야.”
“말이 안 되기는 하죠.”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그 다섯배를 늘려 주는 것도 말이 되는 짓은 아니었다.
알렌은 신중하게 눈치를 살폈다. 처리해야 할 다른 서류에 몰두한 혹은 그런 척하고 있는 세드릭은 이미 반론을 접수할 태세가 아니었다.
'뭔가 있군.'
뭔가 있지만 세드릭은 아직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본디 일가친척에 대한 가주의 처분은 아주 사적인 일이었다.
세드릭이 먼저 말할 생각이 없다면 충직한 알렌도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대로 집행하겠습니다.”
“한 가지 더.”
“예.”
세드릭은 여상한 손길로 펜촉을 잉크에 담갔다가 뺐다.
사각사각사각. 한동안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울렸다.
“그 아이를 지금 누가 돌보고 있지?”
“돌아가신 두 번째 마님의 시녀가 남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계모의 시녀라면……. 세드릭은 미간을 찌푸렸다.
“두 번째 마님의 수족이었던 그 여자가 맞습니다.”
릴리에의 유모는 계모의 최측근시녀로서 세드릭을 괴롭히는 일에 늘 앞장서곤 했다. 알렌과 세드릭은 그 여자가 악질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흠.”
세드릭이 인상을 찌푸렸다.
“당분간 주시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알렌은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무슨 변덕이신지 몰라도 휴식을 취하셨다니 좋군요.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어머니를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알렌의 어머니인 헤이워스 자작부인은 튜린 성의 여성 고용인들을 총 지휘하는 시녀장이었는데, 한때는 세드릭의 유모였다.
세드릭이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일 때마다 그녀는 가주님을 잘 보필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거냐며 죄 없는 아들을 닦달하곤 했다.
세드릭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측근들이 염려하는 바를 그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귀족 편제는 타국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일곱명의 선제후(選帝侯)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루펜바인이 아직 황제가 아니던 시절, 태조는 각자의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한 토호들을 여러 가지 특권으로 유혹해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그때 탄생한 게 바로 선제후다.
선제후는 제국 황제의 지배권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할 수 있다.
만일 선제후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반대표가 나오면 제국 황제는 그 즉시로 황제의 칭호와 권한을 박탈당하게 된다.
튜린 후작도 바로 그 중 하나였다.
'물론 회의에서 아직까지 만장일치로 반대표가 나온 적은 없지만.’
하지만 명목상에 가깝다고는 해도 황제를 끌어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건 대단한 영예이자 특권이었다.
나아가 이슬라르는 제국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가문이기도 했다. 그 이름 아래 오랜 세월 쌓아 온 부와 명예가 몽땅 이 젊은 청년의 책임하에 놓여 있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 릴리엔이 그저 약혼하기 싫다며 앓아누운 동안 세드릭은 새하얀 눈사태처럼 쏟아지는 살인적인 업무량을 빈틈없이 소화해 내야만 했다.
'적응' 같은 유약한 소리를 내뱉을 순 없었다. 잘한다는 칭찬을 해 줄 사람도 없었다.
차마 하루를 끝낼 수조차 없었다. 버티고 버티다 저도 모르게 기절하듯 잠이 들면 꿈속에서는 죽은 아버지가 피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못난 놈!
“헉.”
고작 두세 시간의 얕은 잠마저 악몽으로 망친 채 세드릭은 그렇게 꾸역꾸역 일에 파묻혔다.
아무리 노력해도 죽은 아버지의 자리를 채우지 못한다는 부담감과 죄책감에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아직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세드릭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만 말했다.
“네가 늘 수고가 많다.”
“앞으로도 종종 휴식을 취해 주신다면 저도 어머니도 크게 걱정을 덜겠습니다만."
세드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렌은 또다시 산더미처럼 쌓인 일에 몰두하기 시작한 주인을 마뜩찮게 바라보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피폐해져 가는 친우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옅게 한숨을 내쉬고 알렌이 물러섰다.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