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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린의 릴리엔-6화 (6/155)

6화.

의외의 제안이었다. 세드릭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네가 직접?”

“안 되나요?”

릴리엔이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세드릭의 눈길이 절로 얇은 붕대가 감긴 작은 손에 머물고 말았다.

“……다쳤느냐?”

“차 우리는 법을 배우다가 조금……. 많이 아프진 않아요.”

일부러 거짓으로 상처를 꾸민건 아니었다. 가녀린 아이의 몸으로 무거운 주전자를 옮기다가 생긴 작은 화상이었다.

물집조차 잡히지 않아 피부만 붉게 달아오른 것을 죽다 살아난 아가씨 일에 벌벌 떠는 아랫사람들이 처치를 요란하게 해 놓았다.

릴리엔은 굳이 붕대를 풀어 버릴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랫사람들을 안심시켜 주고 싶기도 했거니와…….

“……안 될 건 없지.”

세드릭의 입에서 바로 이런 답이 나오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기회를 준 세드릭에게 잊지 않고 감사를 표한 뒤 릴리엔은 정말로 정직하게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방법은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을 다치기도 했거니와 원체 팔에 힘이 없는 통에 다구를 다루는 릴리엔의 솜씨는 한없이 서툴렀다.

……는 핑계로 일부러 느리게 하고 있는 것도 맞지만.

릴리엔은 살짝 눈치를 살폈다.

혹시 세드릭이 지적하면 또 다치기 싫어서 조심하는 거라고 변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드릭은다행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기를 늘어놓는 달그락 소리와 찻물 따르는 소리만이 고즈넉한 방에 울려 퍼졌다. 피곤했던 세드릭은 도중부터 저도 모르게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잠에 들지는 않았지만 심신이 잠깐 이완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드세요, 오라버니."

“음.”

마침내 맛본 차는 다소…… 썼다.

세드릭이 눈을 감은 걸 본 릴리 엔이 차를 조금 오래 우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쓴맛을 무마하려고 넣은 잼 때문에 몹시 달기까지 했다.

'윽.’

세드릭은 이것이 정녕 차라는 것의 맛이라면 솔직히 좋아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맛있냐고 물어보면 결코 그렇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하나, 이걸?'

맛있게 마시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릴리에이 자기가 만든 차를 맛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맛있지는 않네요."

'알긴 아는구나!' 식은땀을 흘리던 세드릭은 크게 안심했다. 그리고 슬쩍 이렇게 여동생을 위로하려고 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데.”

“평이 후하시네요.”

여느 소녀였다면 속상해할 평이었는데도 릴리엔은 눈도 깜짝 안했다.

“그저 정성이려니 생각하시고 드셔 주세요.”

도리어 과분하다는 투였다.

그게 재미있어서 세드릭은 조금 웃고 말았다.

어쨌든 차의 불만족스러운 맛과 달리 세드릭의 지친 육신은 카페인과 당분의 조합을 무조건적으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잠깐 눈을 감고 있었던 덕에 시야가 맑아진 것은 덤이었다.

휴식을 취했다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잠깐이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활력이 돌았다.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신경도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세드릭은 그게 릴리엔이 부산을 떨지 않고 침착하게 그를 배려해 준 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내일도 제가 오라버니께 차를 대접해도 될까요?"

뜻밖의 제안에 세드릭은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릴리엔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

“정말요?"

제가 먼저 말해 놓고도 허락이 떨어질 줄 몰랐던 릴리엔은 놀랐다. 곧 그녀는 안도하며 웃었다.

“감사해요, 오라버니.”

솔직히 문전박대까지 예상하던 차였기에 그녀의 미소는 솔직하고 순수한 안도감 그리고 기쁨으로 환하게 빛났다.

“꼭 연습해서 맛있는 차를 끓일수 있게 노력할게요."

세드릭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제 발로 찾아와서 차까지 우려 주고 내일 또 이 귀찮은 짓을 반복해도 되냐는 말에 허락을 해주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의 여동생은 진심으로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상했지만 그래도 결코 싫지는 않았다.

“그럼, 내일 또 올게요.”

미련 없이 다부지게 일어서는 릴리엔의 생각은 한결같았다.

'너무 미적대면 싫어할 거야.'

릴리엔은 깔끔하게 뒤돌아섰다.

뒤에 남겨진 세드릭이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였다.

* * *

그렇게 릴리에이 떠나고 난 뒤.

“가주님?”

“……가주님, 괜찮으신 겁니까?

혹시 차에 무슨 문제라도."

“아무 문제도 없었어. 차는 건들지 마라, 알렌.”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세드릭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절대로.”

"예, 알겠습니다만…… 그럼 대체 왜 그렇게 굳어 계십니까?”

“……다.”

“잘 안 들립니다.”

"릴리엔이 내게 감사하다고 했지…."

“저도 들었습니다만……가주님?”

“고작 그 정도로 감사하다고……. 참으로 욕심도 없다고 해야 하는지…….”

“가주님?”

세드릭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침통해하다가 불쑥 이렇게 물었다.

“토지를 양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나?”

“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땅을 증여해야겠다. 저 착하고 여린 아이가 앞으로 살아가려면 손에 쥔 것이라도 있어야지.”

알렌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농담이시죠, 가주님.”

“내가 농담 같나?”

“아닌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만.

일단 진정 좀 하십시오.”

부동산을 증여하는 건 절차도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특히나 이 경우에는.

“아가씨께서는 언젠가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가셔야 할 몸이시다.

보니 더 상황적으로…….”

세드릭의 미간이 대번 찌푸려졌다.

“시집이라니. 아직 그런 이야기는 너무 이르다. 섣불리 거론하지 말아라.”

정표만 오가지 않았다 뿐이지 이미 말을 다 맞춰 둔 약혼자도 있는 마당에 그런 이야기는 아직 너무 이르다니?

'별 해괴한…….’

알렌은 속으로만 혀를 내둘렀다. 아무래도 세드릭의 여동생을 아끼는 마음이 그의 예상보다 좀 더 중증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시간이 걸린다니 부동산 쪽은 천천히 처리해야겠군. 그렇다면 지금은 일단 보석류 정도인가…."

“이미 선물한 보석도 별로 하고 다니시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만.”

“대체 왜지? 설마 무언가 마음에 안 든 건가.”

“죄송합니다만…… 아가씨께서는 아직 열두 살이십니다. 보석을 보고 좋아하기에는 좀 이르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세드릭은 마뜩찮게 납득했다.

"하긴 아이에게는 아직 이를지도 모르겠군. 게다가 저 여린 마음씨에 보석이라도 쥐고 있다가는 죄 남을 줘 버리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남지.”

후우. 알렌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오늘 주인의 이상 증세는 여동생에게 뭐라도 선물하지 않으면 멈출 기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충신은 생각했다.

"정 그러시면 릴리에 아가씨의 방이라도 옮겨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방?”

별장이나 토지 혹은 주먹만 한다이아몬드를 생각하고 있던 세드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가주님.”

알렌은 설득을 시작했다. 사실 릴리엔의 방은 이제까지 그녀의 위치를 대변하듯 외지고 구석진 곳에 있었다.

크기나 내부 장식품 역시 이슬라르의 외딸이 기거한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단출한 편이었다.

친모는 필요 없는 딸에게 신경써서 좋은 대접을 할 이유조차 못 느꼈고, 아버지 역시 친어미가 내성의 살림을 담당하니 딸의 일이야 알아서 잘 하겠거니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방을 옮겨 주는 게 아니라 겨울을 대비해서 방한 공사부터 내부까지 싹 뜯어 고치는 겁니다.”

"흐음.”

유창한 설득에 세드릭의 미간이 조금 풀어졌다. 그 틈을 타 알렌이 마지막으로 박차를 가했다.

“침실과 응접실, 드레스 룸을 갖춘 새 방에 새 가구를 들여 놓으면 어떻겠습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군.”

릴리엔의 '감사하다'는 한마디 인사가 불러온 사태는 간신히 그렇게 봉합되었다. 충신이 필사적으로 노력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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