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 *
그날부터 릴리엔은 비슷한 시간에 세드릭을 찾아가 차 한 잔을 내려 주는 일을 일과에 추가했다.
최근 릴리에의 하루는 다음과 같았다.
“어머,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응…….”
사경을 헤매고 난 뒤로 바닥난 체력 덕분에, 릴리엔은 평균적인 아가씨들의 기상 시간, 정오에 맞춰 일어나는 것도 겨우 해 내는 판국이었다.
'좀 더 주무셔도 좋으련만.'
하녀는 그런 속내를 드러내는 대신 비몽사몽 중인 릴리에의 세수를 도왔다. 그리고 몹시 호사스럽고 몸에 보기 좋게 꼭 맞는 옷을 입혀 주었다.
오늘 하녀가 릴리엔에게 입혀 준 옷은 하늘하늘한 천으로 섬세한 핀턱 주름을 잡은 연한 살구색 원피스였다. 소매 끝이며 가슴팍에 벚꽃 꽃잎처럼 섬세한 톱날 무늬가 있는 프릴 장식이 잔뜩 있었고 허리를 잡지 않고 통으로 늘어뜨린 옷이었다.
이 사랑스러운 옷을 입으면 혈색 없이 하얗기만 한 릴리에도 조금쯤은 발그레하게 보였다.
마지막으로 검푸른 색 머리카락을 반만 모아서 남색 벨벳 리본으로 묶어 주고 나면 치장은 대강 끝났다.
“어떠신가요?”
"음, 좋아.”
좋다고 대답하면서도 릴리엔은 소맷부리에 놓인 섬세한 진주색 자수를 어색하게 매만졌다.
최근 세드릭은 마치 늦둥이 여동생의 버릇을 제대로 망쳐 놓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이래도 되나 몰라.'
릴리엔은 한숨을 쉬었다. 현재 튜린 내성에서는 외진 곳에 있는 릴리엔의 방을 옮기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게다가 듣기로는 날이 갈수록 점점 대규모가 되어 가고 있다는 후문이었다.
'단열 공사를 위해 벽체를 모조리 뜯어내고 가구를 다 새로 주문했다고 하던가.’
오죽했으면 항간의 상인들이 까다로운 튜린 선제후의 주머니를 터는 유일한 방법은 여자아이가 좋아할 법한 물건을 조달하는 것 뿐이라고 쑥덕거릴 정도일까.
사실 릴리엔이 이 사태를 가만히 방관만 한 건 아니었다.
계속되는 선물을 방에 쌓아 두는 것도 한계에 이른 날, 릴리에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세드릭을 찾아갔었다.
“오라버니.”
“음?”
그때 세드릭은 릴리에에게 양해를 구하고 처리가 시급한 서류에 서명을 남기는 중이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한 릴리엔은 서둘러 말했다.
계속 이렇게 귀한 선물을 주실 필요는 없다고.
“튜린의 딸로 의무를 다할 뿐이니 보상해 주시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굳이 제게 신경 써서 잘해 주시지 않아도 약혼하겠다.
는 결정을 바꾸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어느새 물 흐르듯 유려하게 서 명을 남기던 손길이 뚝 멎어 있었다.
'왜 저러시지?' 하는 작은 의문은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는 세드릭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사라졌다.
빙하처럼 푸르고 차갑던 눈빛이 당황스럽고 억울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 순간 릴리엔은 뒤늦게 눈치 채고 말았다.
보상이 아니었다. 너무 규모가 크고 남달라서 착각하고 말았지만 그건 엄연히 순수한 의미의 선물이었다.
세드릭 이슬라르는 극단적으로 시간은 없고 돈만 많은 남자였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 본 적이 없어 한없이 서투르기도 할 터.
감당 못할 선물을 거하게 떠넘기는 건 이 미숙한 남자가 표현하는 ‘친해지고 싶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그리고 방금 나는 그 서투르게 내민 손을 필요 없다고 거절한 거지……?’
이런.
릴리엔은 뒤늦게 아차 했다. 세드릭이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는, 보상이 아니라 네가 내 누이동생이고……그런 너를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시피 했으니까…….”
감정을 억누르려 해도 말하는 내용이 횡설수설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세드릭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는 릴리엔을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나는 그냥…… 네게 잘해 주고 싶었다. 너는 내 하나뿐인 동생이고 내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니까 말이다.”
귀한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제대로 설명을 하는 게 아니라 대뜸 약혼을 해야겠다.'고 명령을 하달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변명하자면 세드릭은 그때 ‘튜린을 지키는 것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먼저 차분하게 설명을 했더라면 너는 분명 납득해 주었겠지.’
미안했다. 뒤늦게라도 잘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실수였던 모양이다.
“마음이 앞서 너를 불편하게 하고 말았구나.”
“아니, 저…….”
"내가 잘못했다. 릴리에, 네가 싫다면 그만두마. 그럴 테니 세드릭은 입술을 달싹였다. 차마 미워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하기에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릴리에이 다가와서 세드릭의 손에 자그만 손을 얹었다.
“불편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보상이 아니라 오라버니가 주는 선물이라면 그녀도 환영이었다.
그렇게 설명하자 세드릭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정말이냐? 나는…….”
“그럼요. 음, 하지만 이대로 가면 선물 상자에 제 방을 빼앗길수도 있으니……. 앞으로는 하루에 하나 정도면 어떨까 싶은데, 요.”
“오라버니?”
세드릭이 조용히 릴리에의 시선을 피했다.
왜 이러시지? 릴리에이 고개를 갸웃했다. 옆에서 알렌이 무표정하게 설명했다.
“가주님께서는 사실 내일쯤 보내 드릴 선물을 미리 사 두셨답니다, 릴리에 아가씨.”
“...…알렌."
아하……. 릴리엔은 난감하게 웃었다. 그녀는 쓸데없는 소릴 했다며 충신을 노려보는 오라버니를 잘 달랬다.
“괜찮아요, 이다음부터 하나씩만 보내 주시면 되죠.”
"네가 싫다면 억지로 받아 주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라니까요. 싫지 않아요.”
릴리엔이 보기 드물게 입을 꾹다문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드릭은 한심한 줄 알면서도 이렇게 묻고 말았다.
정말?”
"네, 정말요.”
“그런데 말입니다, 릴리에 아가씨.”
뒤에서 한심한 주군 겸 친구를 바라보고 있던 알렌이 다시 한번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계속 서 계시는데 다리가 아프진 않으십니까?”
“네?”
알렌이 지그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떠 먹여 드리는데도 못 받아 드실 겁니까?'
눈빛을 받은 세드릭은 아차 했다.
“미, 미안하구나, 릴리에. 내 자리를 내줄 테니…….”
이런. 알렌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한심한 주군의 다리를 걷어찼다.
"!”
불시에 들어온 공격에 몸을 일으키려던 세드릭이 다시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알렌, 너…….”
“가주님도 참. 어떻게 릴리엔 아가씨께서 가주님만 앉으실 수 있는 이 자리에 앉습니까?”
세드릭이 가주로서 공식적으로 가신을 접견하는 팔라릭 홀의 상좌도 아니고, 집무실의 의자쯤이야 여동생인 릴리에이 못 앉을 것도 없지만 알렌은 일부러 말을 그렇게 했다.
“가주님께서 무릎에라도 앉혀주신다면 모를까.”
"!”
세드릭은 그제야 말뜻을 알아먹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릴리엔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그러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안 그래도 일하는 중이신데……
“아십니까, 아가씨? 가주님의 집무실 창문은 성이 점령당해도 최후까지 습격이 불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답니다.”
“그, 그런가요.”
“예, 이 성의 어느 첨탑, 어느 창문에서도 가주님의 집무실 창문은 보이지 않습니다. 즉…….”
알렌이 창문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정면의 이 창문이 이 튜린 성에서 아무 방해물 없이 최고의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창문이란 뜻입니다.”
“그럼 제가 직접…….”
“죄송합니다만 아가씨 키로는 어려우실 것 같은데요.”
사실이었다. 릴리엔은 열두 살 치고는 성장이 더디고 왜소한 편이었다. 그녀의 키로는 높은 창턱에 겨우 눈이나 내밀 수 있을 터였다.
알렌이 다시 한번 주인에게 눈치를 주었다. 저가 여기까지 했으면 이제 그만 좀 받아 드시라는 뜻으로, 과연 머저리는 아닌 세드릭이 릴리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런. 릴리엔은 당황했다. 순순히 오빠 품에 안겨서 창밖을 내다보기엔 완전히 열두 살이 아닌 그녀의 상황이 좀 미묘했다.
'미, 민망해.’
그렇다고 해서 바깥 풍경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고…… 안아준다는 게 싫은 것도 아니고 망설이고 있는 릴리에의 기색을 눈치챈 알렌이 다시 한번 주인을 재촉하려던 순간.
“!”
세드릭이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팔을 벌렸다.
특유의 냉랭하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세드릭은 고작 이 한 번에 인생 최대의 용기를 내고 있었다.
릴리에도 눈치챘다. 왜냐면 내 민 손끝이…….
‘떨리고 있어..'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보다 거하게 상처를 받을 게 분명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안 돼. 오라버니랑 잘 지내고 싶은걸.’
릴리에이 비틀거리듯이 한 발짝앞으로 내딛은 걸 세드릭은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