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단숨에 뻗은 팔이 무릎을 안았다. 승낙만을 기다렸다는 듯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앗.”
그 상태로 일어서자 릴리엔은 세드릭의 한 팔에 걸터앉은 모양새가 됐다.
“무겁지 않으세요?”
팔위로 사뿐하게 얹힌 무게감만큼이나 깃털 같은 속삭임이었다.
세드릭은 웃었다.
“네가 영 안 먹는 줄은 알겠다.”
"아닌데…….”
아이의 조그만 등은 세드릭의 한 손으로 성큼 다 덮였다.
우습게도 릴리에이 아직 그만큼 작다 싶은 걸 몸으로 확인하니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이었다.
아직 그렇게 늦진 않았다.
아이는 다 자라지 않았고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세드릭은 릴리엔을 안고 창가로 다가갔다.
“봐라, 릴리엔. 파시사 숲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요새나다름없는 산세 아래로 펼쳐진 숲.
겨우내 헐벗었던 가지에 돋아나는 연한 녹색 파도가 선했다. 그 한가운데 금빛 비늘로 덮인 것 같은 호수가 있었다.
“예뻐요…….”
“증조부님 대에 완성된 작품이다. 원래는 아주 헐벗은 땅이었다고들 해.”
“호수에 가 보고 싶어요.”
릴리엔의 눈은 홀린 듯이 바람 결에 춤추는 숲과 부서지는 금빛 편린이 아름다운 호수에 붙박여 있었다.
“조만간에 데려가 주마."
"!”
그제야 흠칫 놀란 아이의 눈이동그랗게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바쁘시잖아요.”
'역시나.’ 데려가 달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알면 알수록 기대하는 게 없는 아이였다, 그의 여동생은.
가슴이 스산하고 뻐근했다. 온갖 귀한 걸 받는 게 당연하고 예상하던 걸 받지 못할 때 당황스러워하고 화내는 아이로 만들어주고 싶어져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기특하고 동시에 기특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여동생.
“그런 편이기는 하지.”
세드릭은 여동생의 조그만 머리통 위에 뺨을 묻었다. 한 번도 이래 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하는 게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이는 놀랐는지 입을 조개처럼 딱 다물고 푸른 눈동자로 그렁그렁하게 그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렇지만 한 번 시간을 내 보자.”
그 약속은 아직까지 지켜지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치장과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오후 두 시가 되어 있었다.
세드릭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릴리엔은 채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찻주전자를 비롯한 다구는 하녀가 날라 주었지만 릴리엔은 굳이 간식 쟁반 하나만큼은 제 손으로 나르겠다고 자처했다.
고용인들을 배려한 착한 마음같은 건 아니었다.
‘사람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기는 민망한걸.’
당분간은 뒤에 있는 하녀 한 사람 정도면 족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릴리엔이 야무지게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헤이워스 경?”
적갈색 머리카락에 비슷한 빛의 눈동자. 세드릭의 보좌관이며 호위이자 튜린 성의 총관인 알렌이었다.
“저를 경이라 부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총관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음…… 네. 그렇군요.”
최근 세드릭의 집무실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자주 얼굴을 본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릴리엔은 아직 이 남자가 어려웠다.
알렌의 어머니인 헤이워스 부인은 현재 튜린 성의 여성 고용인을 총 책임지는 시녀장이었다.
시녀장이 되기 전 부인은 세드릭의 유모였다.
즉, 알렌은 세드릭의 젖형제였고…….
'계모인 우리 어머니가 저지른 만행과 학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하거나 같이 당한 사람.'
즉, 그는 릴리엔을 좋게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아예 그녀를 몹시 싫어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실제로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는 잔뜩 차가운 눈길로 릴리엔을 노려보는 알렌의 눈동자와 마주칠 때가 잦았다.
'최근 들어는 태도가 좀 달라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어려운 사람이다.
“가주님께 가십니까?"
릴리엔은 난감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알렌의 눈빛이 물끄러미 쟁반에 머물렀다.
갑자기 쟁반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제 불찰입니다.”
툭, 알렌이 뜬금없이 포문을 열었다.
“이건 그러니까…… 네?”
“튜린 성에 고용인이 미처 부족한 줄 몰랐습니다. 총관으로서 실책입니다. 사죄드립니다.”
말은 사죄드린다고 했지만 진짜 사죄하는 건 아니었다. 릴리엔은 알렌의 말이 은은한 질책이라고 생각했다.
릴리엔의 뒤를 따르는 하녀에게 너는 대체 무엇을 했기에 아가씨께서 쟁반을 드는 꼴을 방조했냐고 묻는 말이거나…….
혹은 그녀에게 튜린의 딸이면서 왜 고용인처럼 굴고 있냐고 묻는 말이거나.
'둘 다일지도 모르지.'
그때 알렌이 다시 한번 릴리엔의 상념을 끊었다.
"아무래도 부족한 제 과실이니 이 손으로 책임져야겠군요."
“아니, 헤이워스 경……."
“부디 알렌이라고 불러 주시겠습니까?”
호칭 두 번 잘못 불렀다고 총관에서 알렌이 되었다. 다음에는 뭐가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말문이 막힌 릴리엔에게 알렌이 예의 뻔뻔한 무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이제 그만 그 쟁반을 제가 들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릴리엔은 그제야 아랫사람의 일을 빼앗는 게 유달리 충성스럽고 자부심 강한 튜린의 가솔들에게는 불편한 일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모욕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야겠군요.”
실수를 인정하고 얌전히 쟁반을 내주면서도 섣불리 사과하지는 않는다.
릴리에이 건방져서는 아니었다.
원래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은 쉽게 사과해서는 안 된다.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 경솔히 사과를 했다가 큰 책임으로 비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정과 충동을 절제하는 더없이 신중한 태도.
알렌의 입가가 옅게 호선을 그렸다. 정답이었다.
* * *
“오라버니, 저예요."
“음.”
잠시 서류에서 눈만 떼고 알은 척을 하려던 세드릭은 의외의 광경에 손까지 멈추고 말았다.
'알렌 헤이워스?'
전형적인 튜린 사람답게 자존심높은 그가 얌전히 릴리엔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파격인데 손에는 간식 쟁반까지 들고 있었다.
완전히 릴리엔을 윗사람으로 인정하고 섬기고 있는 모양새가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알렌이 쟁반을 내려놓고 물러서는 게 빨랐다. 어색해하는 릴리에의 표정을 보니 지금은 아무래도 친우를 타박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세드릭은 릴리엔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앉거라.”
“네.”
건조한 말투에 데면데면한 행동이었지만 릴리엔은 세드릭의 성격과 일정을 고려할 때 당장 축객령을 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환영을 받은 셈이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세드릭은 수 분 내에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주방에서 레몬 파이를 준비해 주었어요.”
"음.”
다과는 티타임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게다가 단순당을 섭취하는 건 소진한 에너지를 채우는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다행히 세드릭은 릴리엔이 준비해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잘먹었다. 입맛만큼은 그다지 까다로운 편이 아닌 것 같다고 릴리 엔은 추측했다.
추측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세드릭은 미식가는 아니었지만 결벽성 덕에 늘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죽은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약점을 고쳐 놓는 데 철저하게 공을 들였다.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가지다, 세드릭.”
"네 그 편협한 성격을 고치던가, 정 죽을 만큼 안 되거들랑 고친 척이라도 해라."
아무도, 아비인 나조차도 모를 정도로 완벽하게.
아버지의 준엄한 명령에 세드릭은 순종했다.
덕분에 어지간한 일에는 단련이 되거나 혹은 그런 척은 할 수 있거나, 둘 중 하나는 하게 됐다.
딱 하나 고쳐지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이 바로 음식에 대한 고집이었다.
늘 먹던 것만 먹으려 들고 새로운 것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습관!
거기까지는 전대 가주도 무리해서 고치려 들지 않았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스트레스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지.”
노련한 가주는 귀한 후계자를 숨 쉴 틈도 없을 때까지 조이지는 않았다.
식성에 관해서만큼은 평생을 존중받아 온 세드릭이었다. 그런 그가 생전 입에도 안 대던 차를 마시거나 하던 일을 접고 기상천외한 단것들을 군소리 없이 먹어주는 것, 그건 다 상대가 릴리엔이기 때문에 허용되는 예외였다.
시큼털털한 레몬 파이 한 조각과 별로 나아진 바 없이 여전히 맛없는 차 한 잔.
그것들이 적당히 사라지고 나서야 세드릭은 망설이던 운을 겨우 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