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유모를 해고했다고 들었다.”
언제고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주제였다. 릴리엔은 세드릭의 반쯤 빈 잔을 다시금 가득 채웠다.
아닌 척했지만 그 끔찍한 차를 반이나 마시느라 애를 썼던 세드릭의 미간이 조금 꿈틀거렸지만 릴리엔은 다행히 눈치채지 못했다.
“들으셨네요.”
그래, 마침내.”
세드릭은 변모한 여동생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는 이렇게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세드릭에게는 그게 마치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심정을 부드럽게 안심시켜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구나.”
계모의 수족이었던 릴리에의 유모는 세드릭을 괴롭히는 일에 늘 앞장서곤 했다. 세드릭은 그 여자가 악질이란 걸 경험적으로 알았고 그런 여자를 어린 여동생 옆에 오래 남겨 둘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하지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역시 릴리엔 때문이었다.
그의 여동생은 아직 열두 살, 게다가 바로 얼마 전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된 건지 몹시 어른스러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그런 릴리에에게 어릴 적부터 봐 왔다던 유모의 존재가 절대적일까 봐 세드릭은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여동생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세드릭은 일단 때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심복인 젊은 총관을 불러 유모의 근황을 살펴 두라고만 명령했다.
그러나 잠시 후 총관은 뜻밖의 보고를 올렸다.
"그 여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가주님.”
"무슨 말이지, 알렌?”
"얼마 전 아가씨께서 직접 그 여자를 해고하셨다고 합니다.”
환영해야 할 소식이었지만 세드릭은 기쁘다기보다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나도 되는가 싶었고…….
"혹시…… 나 때문에 그런 거냐?”
행여 아이가 그의 눈치를 보며 무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걱정도 됐다.
릴리엔은 갑자기 세드릭이 왜 머뭇거리는지 이유를 몰라 의아했지만 일단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라고는 안 할게요."
세드릭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릴리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라버니?”
“네가…….”
세드릭은 릴리엔이 어서 마시라며 밀어 주는 차를 더 이상 외면 하지 못하고 한 모금 마셨다.
언제 마셔도 맛없는, 쓰고 떫고 단맛에 혀가 얼얼해졌다. 세드릭은 간신히 뒷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런.’ 릴리엔은 그제야 아차 했다. 아무래도 세드릭은 그녀가 자신의 눈치를 심하게 보고 있다고 오해한 모양인 듯했다.
추측은 정확히 사실이었다. 세드릭은 지금 의지할 데라고는 모자라고 부족한 이복 오빠뿐인 가여운 여동생을, 본의는 아니었다고 하나 비열하게 쥐락펴락한 자신에게 맹렬한 질타를 퍼붓는 중이었다.
후우. 릴리엔은 조금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이 오해를 풀어야 하나?'
일단 차갑게 얼어붙은 오빠의 손가락 사이로 따뜻한 찻잔을 직접 쥐여 주었다.
그리고 차분한 말씨로 설명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꼭 오라버니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다지 자기 직분에 충실한 여자도 아니었거든요.”
“……그랬느냐?”
세드릭은 그 말을 온전히 믿기 힘들다고 생각하다가 '잠깐'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라버니?”
릴리에이 의아해하며 그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 대신 맹렬하게 생각했다. 눈앞의 여동생은 얼마 전까지 위중한 병을 앓았었다.
사경을 헤맬 정도로 중한 열병.
그런데 회복하자마자 유모를 해고한 이유가 '자기 직분에 충실하지 않아서'라고?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말았다.
'대체 아픈 아이에게 얼마나 불성실했길래!’
그의 여동생, 릴리엔은 다정한 아이였다. 자신을 없는 사람처럼 경원시한 오빠에게마저 이토록 다정하니 다른 사람에게는 얼마나 더 마음을 줄지 안 봐도 뻔했다.
'한데 대체 얼마나 소홀했으면 저 아이가 간신히 죽음을 털고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유모를 내치는 일이었단 말인가?'
화가 치솟았지만 만약 내색하면 릴리엔에게 겁을 주게 될까 봐필사적으로 참았다.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고 세드릭은 이렇게만 말했다.
"그렇게 갑자기 사람을 자르면 뒤탈이 있을 수도 있으니 다음부터는 네가 직접 나서지 말고 내게 말을 해라.”
굳이 네 여물지 못한 손으로 어설프게 사람을 내치는 것보다 자비를 모르는 내가 나서야겠다는 말은 삼갔다.
“네, 알겠어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여동생의 모습에 세드릭의 가슴은 후회로 지끈거렸다.
애초에 처음부터 그가 이 아이게 신경을 썼더라면 이 여리고 정 많은 아이가 직접 모진 일을 하겠다고 굳은 마음을 먹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다 내 실수다.'
공작새처럼 재력을 뽐내며 어린 여동생의 호감을 사려고 뒤늦게 노력했던 것마저 부끄러웠다.
‘그런 일보다는 먼저 이 아이가 그동안 어떻게 지내 왔는지 알아보아야 했는데.’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뼈가 아플지경이었다.
물론 릴리엔은 세드릭이 그렇게까지 후회하는 줄은 몰랐다. 그냥 경험이 적은 그녀로서는 생각지 못한 점을 오빠가 짚어 주었다고만 생각했다.
“하기야, 제 나름대로는 퇴직금을 후하게 주긴 했지만 뒤탈이 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어요.”
숫제 남의 일을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후환을 가정하면서도 지나치게 태연했다.
도무지 열두 살 아이답지 않은 강단과 침착함이었다. 세드릭은 괜찮아도 너무 괜찮아 보이는 여동생이 걱정스러웠다.
'내색하지 않는 걸까?'
무조건 참는 법부터 가르치고 싶진 않았다.
애써 의젓해지기보다 자신을 의지해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슬그머니 들었다.
“무섭지는 않고?”
하급 귀족인 유모가 세드릭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칠 가능성은 낮았다. 다만 걸리는 것은 그녀가 릴리에 친모의 측근이었단 점이었다.
죽은 사람의 명예를 훼손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단 뜻이다.
계모의 명예는 릴리엔의 명예와도 직결된다. 일단 한번 명예를 훼손당한 다음에는 그 어떤 대처도 소용없다는 걸 세드릭은 잘 알았다.
어른스러운 아이인 릴리엔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릴리엔은 시종 태평했다.
"음……. 네.”
“전혀?”
“그래야 하나요?"
오히려 릴리엔은 되물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냐하면…….
“제 오라버니께서 제국에 단 일곱 뿐인 선제후로서 이 튜린 땅과 이슬라르 가문을 치리하고 계신데, 그 하나뿐인 동생인 제가 고작 해고당한 유모의 겁박 따월걱정해야 하나요?"
세드릭은 잠시 멍했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얼른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일부러 의젓하게 굴고 있는 건 아니었구나.'
오히려 누구보다 그를 의지하기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거라고 릴리엔은 말했다.
'이 미덥지 못한 오라비를 의지하고 있다고, 그리 말했나.'
기쁘다. 그리고 과분했다.
벅찬 마음이 가득 담긴 물처럼 쏟아질 것 같아 세드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릴리엔은 그런 줄도 모르고 배시시 웃으면서 덧붙일 뿐이었다.
“무익한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기는 싫어요.”
걱정이 무익하다.
세드릭이 있기에 걱정 따윈 무익하다고 말했다.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진심이었다. 게다가 릴리엔은 그 말이 세드릭에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릴리엔을 보며 세드릭은 천천히 회상했다.
릴리에 이슬라르는 든든한 아버지의 보호 하에서도 늘 눈물 바람, 심약하기만 한 여린 아이였다.
오죽했으면 세드릭이 행여 동생을 울려 계모의 오해를 사게 되지 않도록 주의해서 피해 다녔을까?
한데 그런 아이가 자신의 보호를 의지하며 저토록 걱정 없이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 비해 한없이 모자라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가주로서 그다지 부족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가슴이 뻐근해졌다.
비록 아버지를 만족시켜 드릴 수준이 아니더라도 혀를 차실 만큼 엉망은 아니었던 걸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세드릭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지……. 돌아가신 분의 의중이야 영원히 모르겠지.'
그랬다. 세드릭은 실은 알고 있었다. 꿈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던 아버지는 그의 죄책감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약간의 휴식을 취한 그는 더 이상 과대망상적인 자책에 속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내가 아버지보다 나은 것이 한 가지는 있는 셈이구나.'
눈앞의 릴리엔의 존재가 그렇게 증거하고 있었다.
잘하고 있다고.
잘할 수 있다고.
세드릭은 릴리엔이 쥐여 준 찻잔 속의 차를 마셨다. 짙고 붉은 차가 얼어붙었던 몸속으로 따뜻하게 퍼졌다.
마음 깊숙한 곳까지 퍼지는 그 따뜻함을 세드릭은 거부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