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 * *
부득이한 일로 유모를 해고한 게 알려지고 난 뒤.
“릴리에 아가씨, 저를 기억하시지요?”
“네.”
릴리엔은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워스 부인, 기억하고 있어요. 그간 평안하셨나요?”
"어머나, 예의바르기도 하셔라.
어쩜, 가주님 어렸을 적이 생각 나네요.”
세드릭을 아들처럼 기른 부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낯선 칭찬에 릴리엔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헤이 워스 부인이 그런 릴리엔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아가씨, 오늘 제가 왜 아가씨를 찾아뵈었는지 아시나요?”
"음, 저를 돌봐 줄 사람을 소개시켜 주시려고 오신 거지요?”
릴리에이 어색해하면서도 또박또박 대답하자 헤이워스 부인이 빙그레 웃었다.
“네, 아가씨. 듣던 대로 참으로 영민하시네요.”
아이나 받을 법한 칭찬이 쑥스러웠다. 애초 칭찬에 익숙지 않기도 했다. 릴리에의 시선이 얌전히 내리깔렸다. 헤이워스 부인 이 모른 척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오늘부터 제가 미력하나마 아가씨의 대소사를 맡아볼 거랍니다.”
“네?”
릴리에이 눈을 깜빡이다가 “하지만” 하고 반문했다.
“부인은 이 성의 시녀장이잖아요.”
시녀장은 튜린 성의 여성 고용 인을 총괄하고 총책을 맡는다.
릴리엔의 시중에 발목 잡혀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릴리엔은 예의를 갖춰 사양했다.
“원래도 할 일이 많으실 텐데 제 일로 고충을 더할 순 없어요.
제겐 너무 과분하세요.”
“어머나, 마음 착하기도 하셔라…….”
중년 부인은 연신 부드럽게 감탄하면서 무릎을 꿇어 소파에 앉은 릴리엔과 다정하게 눈을 맞추었다.
“죄송합니다만 아가씨, 이 튜린에서 아가씨께 과분한 건 없답니다. 가주님의 하나뿐인 동생이 시잖아요.”
“그리고 저는 기특하고 착한 아이를 너무 좋아한답니다. 아가씨와 소일거리를 함께 하느라 얼마 간 제 직무에 소홀할 수 있다면 아주 기쁠 거예요."
“하지만……."
“정 마음에 걸리신다면 아가씨를 위해 믿을 만한 사람을 인선할 때까지만, 네?”
태어날 때부터 무관심했던 어머니 탓에 릴리엔은 성인 여성의 다정한 관심이 몹시 낯설었다.
'낯설지만…….'
결코 싫지는 않았다. 릴리엔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워스 부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실 시녀장인 그녀가 직접 릴리엔을 돌보기로 한 것은 세드릭의 각별한 부탁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그러나 싶더니만.'
부인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만나 본 릴리엔은 딱히 부탁받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아이였다.
“좋아요. 그럼 우리 아가씨께서 무슨 간식을 좋아하시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간식이요?”
"네, 이제 곧 아가씨를 진찰하러 의사 선생님이 오실 거랍니다. 진찰을 잘 받고 약을 드시면 좋아하는 간식을 드릴게요."
“......"
난 또, 릴리엔은 보스스 웃었다.
“간식은 괜찮아요. 그냥 진찰받을게요.”
“네?”
헤이워스 부인은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릴리에이 워낙 차분하게 괜찮다고 하는 통에 얼결에 주치 의를 들였다.
“쇼 윈스턴입니다.”
흐린 갈색 머리에 안경을 삐딱하게 걸친 남자였다. 얼굴에 '불친절'이라고 써 붙인 것 같았다.
게다가 의사보다는 기사가 더 어울린다 싶게 기골이 장대하기까지 했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은 우선 진찰만 하도록 할 테니까요.”
“네, 선생님.”
가방을 펼쳐 놓던 의사의 한쪽 눈썹이 휙 올라갔다.
“저를 그렇게까지 높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가씨.”
의사가 무뚝뚝하게 거절하자 릴리엔은 빙그레 웃었다.
“선생님께는 제 목숨을 맡겼는 걸요. 그러니 이왕이면 공손히 구는 쪽이 좋지 않을까요.”
“예.”
의사의 별나다는 시선이 릴리엔에게 머물렀다.
“안 그러셨잖습니까.”
“많이 아팠잖아요, 의사 선생님께 공손해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느긋하게 웃는 릴리에 뒤에서 헤이워스 부인이 점잖게 헛기침소리를 냈다.
“윈스턴 씨.”
"뭐, 그렇게 말씀하셔도 약은 못 빼 드립니다.”
“진찰만 하신다면서요.”
“진찰해서 필요하면 드릴 수도 있는 거고,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좀 봅시다.”
진찰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지시에도 릴리엔은 얌전히 따랐다.
'뭐지?'
쇼는 위협적으로 느껴질 법한 진료용 기구 앞에서도 순하게 입을 벌리는 릴리엔을 미심쩍게 진찰했다.
"…목이 좀 부으셨습니다. 열감도 좀 있으시고.”
"어머나, 심하신가요?”
“심하신 건 아닙니다만 예방 차원에서 약을 좀 드셔 두는 게 좋겠는데…….”
헤이워스 부인과 윈스턴이 동시에 릴리엔의 눈치를 살폈다.
“?”
릴리엔은 의아하다는 듯 조그마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쇼가 즉석에서 약을 제조해 내밀었을 때도 릴리엔은 얌전히 받아 들었다.
꼴깍, 꼴깍.
릴리엔은 쉬지 않고 약 한 병을 다 비웠다.
“어머나, 이걸 다.”
"음."
창백하던 릴리엔의 얼굴이 배시시 웃는다 싶더니 이내 금방 일그러졌다.
"이런, 아가씨!”
“써요…….”
열두 살이라서 그런 걸까.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약이 입에 쓰게 느껴졌다.
“아이고, 그러니까 제가 단것을 미리 준비한다고 했잖아요.”
헤이워스 부인이 릴리에의 등허리를 쓸어 주며 하녀에게 얼른 사탕 같은 것을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의사 선생도 참, 쓰면 쓴 약이라고 한마디 말을 해 주셨어야 죠.”
“잘 드실 줄 알았죠, 뭐.”
그렇게 주고받는 두 사람 다 어쩐지 조금 안심한 기색이었다.
법석을 떠는 헤이워스 부인과 쓴맛을 못 이기고 콜록대기까지하는 릴리엔을 보며 쇼는 생각했다.
‘애는 애지..'
“그럼 저는 이만.”
*
약간의 여유. 너무도 사소하여 삶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
최근 세드릭은 그토록 쉽게 간과해 온 여유의 효과를 제대로 체험하는 중이었다.
여동생과 차를 마시기 시작한 지 어언 2주. 세드릭은 그를 사로잡았던 실체 없는 공포와 강박적인 공황 상태로부터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명징하게 가다듬어진 정신.
이전보다 조금 나은 대우를 받아 정상에 가까운 컨디션을 회복한 육체.
모든 면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지금 그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알렌.”
"예, 가주님.”
“그대가 보기에는 우리 릴리엔이…….”
아니, 아니다. 망설이며 말을 꺼냈다가 세드릭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미간을 좁힌 알렌은 도망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가씨가 어떻다는 말씀이십니까?”
알렌의 반응이 제법 날카로웠다. 세드릭은 불쑥 한쪽 눈썹을 곤두세웠다.
“그러고 보니 요즘 네 하는 양이 하 수상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렌은 뻔뻔하게 시치미를 뗐지만 거기 속아 넘어가기엔 유형제로 지낸 세월이 녹록하지 않았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릴리에을 곱게 봤다고.”
“과거의 일일 뿐입니다.”
세드릭의 차가운 시선에도 알렌은 꿋꿋했다.
“그리고 전 아가씨를 싫어한 게 아닙니다. 새 후작 부인을 싫어한 겁니다.”
“그게 다른 말인가?”
말장난이나 다름없는 변명이었다.
자식이 부모 얼굴에 먹칠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역도 성립한다. 부모가 곱지 않으면 자식도 곱지 않은 법이다.
알렌의 주군은 세드릭이었다.
충성심이 유별난 전형적인 튜린 사내는 주군의 가장 큰 정적인 새 후작 부인을 싫어했다. 사실 혐오했다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하여간 릴리엔까지 그 부속물로 생각하던 게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새 후작 부인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더 이상 아가씨를 싫어할 이유도 없는 셈입니다.”
“싫어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갑자기 이렇게 싹싹하게 구는 사람이었던가, 네가?”
“그다지 싹싹하지는 않았습니다.
만."
“싹싹했다니까, 과도하게.”
가주의 최측근인 알렌은 누군가에게 일을 지시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놈이 말단 하인처럼 릴리엔 뒤에서 과자 쟁반을 들고 따라 들어와?'
웬 주책이냔 말이다. 세드릭은 곱지 않게 알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였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주군의 눈길이 곱거나 말거나.
알렌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겪어본바 아가씨는 싫어할 만한 구석이 없는 분이십니다. 게다가…….”
“게다가?”
세드릭은 답지 않게 말 한마디 마다 시비를 걸었다. 명백히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는 친우이자 보좌로서의 알렌을 신임했다. 하지만 신뢰와 별개로 음흉한 놈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놈이 아이에게 대번 살갑게 구는 꼴이라니…….’
절찬리에 과보호 길을 걷기 시작한 오라버니는 그만 기분이 몹시 상해 버리고 말았다.
함께한 세월이 길어 알렌도 그런 세드릭의 속내를 쉬이 짐작했다. 하지만 오랜 친구답게 모른 척 어깨를 으쓱했다.
“아가씨께서는 그 여자를 내쫓아 주시지 않았습니까.”